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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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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 27일 돈암리 부근 산 위 약 50명 규모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7일 돈암리 부근 산 위 약 50명 규모의 만세시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 산 위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27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돈암리 산 위 등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하여, 주모자가 체포되고 해산되었다. 돈암리 산 위에서 발생한 만세운동에는 약 50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지칭하는 돈암리 산은 현재 개운산으로 추정된다.
  • 3월 27일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일대 약 500명규모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7일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일대 약 500명규모의 만세시위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부근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안감천은 현재의 보문동 대광초등학교부터 성북구청, 돈암동성당 쪽까지 안암동을 지나가는 성북천의 일부 구간을 부르는 이름이다. 1919년 3월 27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돈암리 등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하였으며, 주모자는 체포되었다고 한다. 안감천 부근에서 발생한 만세운동에는 약 500명이 참여하였다.
  • 3월 26일 숭인면사무소 앞 만세시위
    사건
    3월 26일 숭인면사무소 앞 만세시위
    고양군 숭인면 면사무소 앞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26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면사무소 앞(현 성북구 안암로 99(안암동5가 85-7) 부근으로 추정)에서 만세시위에 대한 계획이 있어 군중이 모였다. 그러나 당일 면사무소에 문이 닫혀있었으므로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열라고 군중이 함성을 지르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숭인면 월곡리 24번지에 거주하였던 정만산, 숭인면 용두리 218번지에 거주하던 최정식, 숭인면 안감리 17번지에 거주하던 이재성이 유독 시끄럽게 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를 당했다. 이후 세 사람은 보안법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각각 태 90대를 맞는 형벌을 받았다.
  • 3월 26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안감리(안암리) 일대 약 200명 규모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6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안감리(안암리) 일대 약 200명 규모의 만세시위
    성북구 안암동 일대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26일 밤 안감리(현 안암동 일대)에서 약 200명의 군중이 만세를 외치며, 전차 유리창에 독을 던져 파괴하고, 전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에게 하차를 요구하는 등의 압박을 하는 등 폭행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 5명이 출동하였고, 시위는 곧 해산되었다고 한다.
  • 3월 24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일대 60-100명  규모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4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일대 60-100명 규모의 만세시위
    성북구 성북동 일대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24일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현 성북구 성북동)에서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시위를 하였는데 곧바로 해산시켰다고 한다. 시위의 규모는 기록물에 따라 60-100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 3월 23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안암동·안감천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3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안암동·안감천의 만세시위
    성북구 안암동 일대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성북천 안암동 구간) 부근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안암동에 거주하였던 독립운동가 피한봉은 밤 10시경 숭인면 안암동 안감천 부근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고, 이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대의 처분을 받았다.
  • 3월 23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 100-200명 규모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3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 100-200명 규모의 만세시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현 성북구 돈암동, 동선동, 삼선동 일대)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8시경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를 비롯한, 동묘리, 청량리, 왕십리 등 경성시외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는 모두 다음날 24일 오전 1시에는 진정되었다고 한다. 돈암리 시위의 규모는 기록물에 따라 100-200명이 참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위의 주체는 보통사람들이었으며,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한 군대는 없었고, 18명이 검거되었다고 한다.
  • 3.1 운동
    사건
    3.1 운동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독립만세 운동이다. 성북구에서도 안암천 주변과 돈암동 등지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3일 밤 10시경 안감천(성북천 안암동 구간)에서 피한봉 등 500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고, 3월 26일에는 안감천에서 2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3월 27일에는 안감천 부근에서 500명이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돈암리(돈암동)에서는 3월 23일 돈암리시장에서 100명이 시위를 전개했고, 3월 24일 성북리(성북동)에서 60명이 시위를 전개했다. 3월 27에는 돈암리의 산(개운산으로 추정) 위에서 50명이 횃불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밖에도 성북구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종로나 미아동 일대로 나가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 대한독립선언
    사건
    대한독립선언
    1919년 2월 1일에 만주 지린[吉林]에서 독립운동가 39인이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사건이다. 이 독립선언은 일본 도쿄에서 발표한 2.8독립선언이나 서울 종로에서 발표한 3.1독립선언에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이다. 성북구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인 조소앙이 선언서를 집필하였는데, 선언서에는 일본과의 병합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선언서에 함께 서명한 39인 중에는 조소앙을 포함해 김동삼 등 성북구와 관련된 독립운동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 6.10 만세운동
    사건
    6.10 만세운동
    1926년 6월 10일에 일어난 학생 중심의 항일 만세운동이다. 성북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들도 참여했다. 순종의 장례식에 맞추어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지만, 일제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어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산발적이지만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일제에 의해 약 5,000명의 시위대가 연행되었다. 이때 체포된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권유근은 돈암동에 거주하였는데, 1929년에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동조시위를 계획하다 다시 투옥되었다. 역시 이때 체포되었던 장익민도 돈암동에 거주하였었는데, 1928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았다.
  • 2.8 독립선언
    사건
    2.8 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유학생들이 주도한 독립선언 운동이다. 이때 일본 유학생들의 활동과 조직을 주도했던 사람 가운데 한명이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성북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조소앙이었다. 그는 1904년부터 1912년까지 도쿄에서 유학하면서 재일본 유학생들의 조직을 만드는데 앞장서는 한편, 일제의 침략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1919년 2월 1일 만주 지린[吉林]에서 독립운동가 39인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문이었는데, 이 선언서는 조소앙이 기초하였으며, 2.8독립선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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