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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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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범수
    인물
    한범수
    성북구 석관동에 거주했던 대금·해금·퉁애 연주자이다. 충청남도 서산 출신으로 10세 때 김원삼의 퉁소 소리에 반해 그에게서 퉁소와 단소를 배운 것을 시작으로 1926년에는 단소 명인 윤종선을 사사하였다. 1930년대 라디오에서 대금산조의 시조로 꼽히는 박종기(朴鍾基)의 대금산조를 듣고 감명받아 서울로 찾아와 대금을 잠깐 배웠으나 박종기가 여러 곳으로 다니는 관계로 유성기 음반을 들으며 대금산조를 자습한 뒤 1938년 박종기를 찾아갔다고 한다. 1947년 6월 여성국극협회에 입단하여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여러 단체에 참여해 대금 예술을 국내외에 소개하였다. 1964년부터 국립국악원 국악사양성소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강사로 있으며 후진을 양성하였고, 1975년 5월부터는 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대금을 가르쳤다. 1981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투병하다가 석관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 변영호
    인물, 유물
    변영호
    종암동에 거주했던 국가무형문화재이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마을에서 하는 사자놀이를 보고 혼자 연습하다가 17세에 퉁소를 불면서 직접 북청사자놀이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정월 대보름에 사자탈을 쓰고 놀던 민속놀이로, 사자에게는 사악한 것을 물리칠 힘이 있다고 믿어 잡귀를 쫓고 마을의 평안를 비는 행사로 널리 행해졌다. 놀음에는 사자, 양반, 꺾쇠, 꼽추, 사령, 무동, 사당, 중, 의원, 거사 등이 등장하며, 악기로는 퉁소, 북, 징, 장구 등이 쓰이는데, 퉁소가 많이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변영호는 1961년부터 1986년까지 총 21회에 걸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1972년에 공로상, 1974년에 장려상을 수상했다. 1970년 7월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 조영숙
    유물, 인물
    조영숙
    성북구에 거주하는 전통연희 공연가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예능보유자이다. 발탈은 인간 배우와 발과 손을 이용하여 조종하는 인형 배우가 함께 등장하여 재담을 중심으로 연행하는 전통예술이다. 조영숙은 함경도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인 조몽실의 딸로 태어났다. 1951년부터 임춘앵 여성국극단에서 배우 생활을 했으며, 임춘앵의 대역을 할 정도로 인정받은 여성국극인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동안[1906-1995] 발탈 보유자를 만나 2000년 10월 18일에 전수교육조교, 2012년 2월 2일에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전수조교 시절 성북구청 옆에 전수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 고령 나이지만 왕성한 활동을 하며 전통을 지키고 있다.
  • 임춘앵
    인물
    임춘앵
    여성국극인으로 판소리 명창이다. 1948년 서울에서 박녹주·김소희 등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여성 창극인만으로 「옥중화」라는 이름으로 「춘향전」을 창극으로 꾸며 공연하였으며, 1961년에는 여성국악동지사를 조직하여 창극 「공주의 비밀」을 공연하였다. 여성국극의 명인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의 쇠퇴로 은거하였다. 1970년대 장위동으로 이사하여 김진진과 함께 ‘임춘앵국악연구소’를 열어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기 위해 힘썼다.
  • 한갑주
    인물, 유물
    한갑주
    국악인이다. 1924년 광주에서 태어난 한갑주는 대표적인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이자 가야금 명인 한성태의 아들이다. 197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적벽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판소리는 한 사람의 창자(唱者)가 한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로 엮어 발림(몸짓)을 곁들이며 구연하는 창악적 구비록사시(口碑錄事詩)이다. 판소리 보유자의 경우 북으로 장단을 맞추는 고법과 판소리 다섯마당, 즉 적벽가, 수궁가,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의 6분야에 각각의 보유자가 복수로 지정되는데, 한갑주는 적벽가의 보유자였다. 성북구 정릉 2동에 거주하면서 공연과 전수 활동을 하였다.
  • 채동선
    인물
    채동선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이다. 1901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일본과 독일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하였다. 1929년 귀국하여 연주활동을 시작하였고, 1932년부터 작곡을 하였다.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고향」을 발표하여 널리 알려졌다. 피아니스트 이소란과 결혼하고 성북구 성북로8길 12-8(성북동 183-17)에 양옥집을 짓고 살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난갔다가 1953년 부산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홍난파, 현제명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1세대 서양 음악가였는데, 채동선은 1930년대부터 한국 음악계를 이끄는 역할을 하며 민족의 정서를 가곡에 담기 위해 노력하였다. 대표곡으로 「동백꽃」, 「그리워」, 「내 마음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이 있다.
  • 이생강
    인물, 유물
    이생강
    성북구에 거주하는 국악인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이다. 대금산조의 명인 한주환을 사사했고, 대금, 태평소, 단소 등 부는 악기의 명인들에게 남도, 서도, 경기지역 음악을 모두 전수받았다. 재즈나 팝송 등 다른 장르와 서양악기와 협연하고, 앨범을 내는 한편 대금과 단소 교본 발간, 제자 양성, 국내외 공연 등 국악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1997년 혜화문 건너편 삼선교에 4층 건물을 짓고, 종로구 와룡동에 있던 대금전수소를 집 근처에 마련하였다. 집을 다시 돈암동으로 옮기고, 전수소는 성북동으로 이사하였다. 1996년 12월 10일 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 이건자
    인물, 유물
    이건자
    성북구에 거주하는 국악인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전수교육조교이다. 국악인 신영희, 윤평하를 사사하고, 1986년부터 선소리산타령 기능보유자 황용주로부터 본격적으로 선소리산타령을 전수받았다. 2003년부터 성북구에 국악전수소를 개설하여 일반인들에게 우리 소리를 가르치고 알려왔으며, 2005년부터 성북문화원 문화강좌 ‘선소리산타령’반을 개설해 지도하고 있다. 선소리산타령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전래되어 내려온 우리나라 민간음악이다. 소고로 박자를 치며 남녀 10명 내외가 서서 소고를 들고 간단한 율동을 하면서 부르는 것으로, 각 지방의 명승지 가사가 다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12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전수교육조교로 선정되었다.
  • 윤이상
    인물
    윤이상
    음악가이다. 14살 때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였고, 1935년 일본 오사카음악대학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다. 해방 후 1952년까지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하다 서울로 올라 와 성북동128-13에 거주하였다. 이때 길 건너편에 살던 조지훈이 작사를 하고 윤이상이 곡을 붙여 노래를 짓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나온 곡 중 하나가 바로 현 고려대학교 교가다.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1971년 독일로 귀화하고 이듬해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에서 『심청』을 공연하였다. 그의 작품은 동양의 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색채의 선율로 현대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박봉술
    인물, 유물
    박봉술
    석관동에 거주했던 국가무형무화재 제5호 판소리 기능보유자이다. 전라남도 구례 출생으로 판소리 명창 만조의 아들이다.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 박만조와 박봉채에게서 동편제 판소리를 전수받았다. 1940년 명창 임방울이 이끌던 동일창극단에 입단하여 정광수, 박초월 등과 함께 전국 순회공연을 하였다. 판소리 사설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 순천 국악원에서 판소리를 가르쳤고, 1973년 11월 11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박봉술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다섯 바탕소리에 고르게 뛰어난 기량을 보유했으며, 이 가운데 네 바탕을 음반으로 남겨 후대에 전했다.
  • 김진진
    인물
    김진진
    여성국극을 대표하는 배우이다. 이모이자 여성국극의 창시자로 ‘여성국악동지사’의 대표를 맡던 임춘앵에게 국극을 배운다. 열아홉 살이 되던 1952년 「공주궁의 비밀」의 주연을 맡으며 이름을 알린다. 이때부터 본명 대신 주인공 진진옹주의 이름을 예명으로 삼았다. 1958년 ‘진경여성국극단’을 창립하고 국극의 성황을 이끈다. 그러나 영화가 보급되며 국극 인기가 줄어들고, 활동무대가 점차 좁아진다. 이후 1970년대 장위동으로 이사하여 임춘앵과 함께 ‘임춘앵국악연구소’를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춘앵이 세상을 떠나며 국악연구소를 이어받아 아이들을 가르치며,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기 위해 힘썼다.
  • 김명환
    인물, 유물
    김명환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이다. 고법은 가객이 부르는 판소리 소리에 맞추어 북으로 장단을 치는 반주법이다. 17세 때부터 장판개, 주봉현, 신찬문 여러 명고수로부터 판소리와 고법을 배웠다. 1960년대 서울로 진출하여 판소리 공연에서 고수로 활동하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판소리 이론에도 조예가 깊어 이론과 실기에서 따르는 제자가 많았다. 판소리, 가야금산조 등 공연과 음반에 참여하였다. 1971년부터 10여 년 동안 석관동에 거주하며 제자들이 모여 만든 ‘일산회’와 공연을 열어 국악을 알렸다.
  • 김대현
    인물
    김대현
    작곡가이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로 시작하는 동요 「자전거」와 가곡 「자장가」 등을 작곡하였다. 창작 오페라가 거의 없던 시절 부산극장에서 1952년 오페라 「콩쥐팥쥐」를 공연하여 주목을 받았다. 서라벌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1967년에 작곡가 금수현과 함께 ‘새음악연구원’을 만들어 국악을 현대화하고 알리는 데 힘썼다. 1970년대 북한산 자락 정릉동 803-2번지로 이사하였다. 작고할 때까지 동요 1백여 곡과 가곡 60여 곡, 성가곡 30여 곡을 남겼다.
  • 금수현
    인물
    금수현
    가곡 「그네, 「구름」, 「파랑새」, 「완화삼」, 「고향산천」, 「안골포」, 오페라 「장보고」의 작곡가이다.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였다. 부산에서 윤이상과 ‘노래하자회’를 만들어 매주 한곡씩 노래를 가르치는 ‘국민개창운동’을 벌었으며, 1970년 잡지 『월간 음악』을 만들어 음악에 대한 정보와 음악계 소식을 알렸다. 한글 교육에도 뜻을 두어 자신의 姓을 ‘김’에서 ‘금’으로 고쳐 읽고, 자녀의 이름을 한글로 지었다. 1960년대 정릉동에 땅을 마련하여 정릉천의 물과 모래로 벽돌을 만들고 직접 설계하여 집을 지었다. 둘째 아들인 지휘자 금난새는 지휘자이자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 전수린
    인물
    전수린
    작곡가이다. 어릴 때부터 서양음악과 작곡, 바이올린을 배웠다. 1920년대 후반에는 동반예술단에 입단하여 반주와 효과음악을 담당하였고, 홍난파가 주도하던 연악회(硏樂會)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 빅터레코드에서 출반한 레코드 「황성의 적」(황성옛터)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후 빅터레코드사의 전속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신민요부터 트로트, 서양풍의 음악까지 여러 분야의 노래를 창작하였다. 1970년 돈암동 미아리고개에 피아노 학원을 차려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4년 동선동 3가 133번지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 전봉초
    인물
    전봉초
    첼로연주가이자 교육자이다. 1919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평양에 있었던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음악공부를 하였다.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하여 실내악을 공부하고, 동경제국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해방 후 고려교향악단에서 활동하다 1952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제자를 길렀다. 첼로를 대중에게 알리고 실내악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5년에는 바로크합주단을 창단하였고, 1979년에는 동양 최초로 첼로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였다. 활발한 연주활동 외에도 음악계의 원로로서 더 좋은 음악환경을 만들고 음악계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힘썼으며 대한민국 예술원상, 대한민국 금관 문화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 이소란
    인물
    이소란
    바이올린 연주자이다. 결혼 직후 남편 채동선이 설계해 지은 대지 2백평 남짓, 건평 30평 정도인 서울 성북동 183의17 자택에서 50년 넘게 살았다. 남편이 6.25전쟁 때 피난을 가며 마당에 묻어 두었던 악보를 이소란이 찾아냈다. 그는 1964, 1980, 1983년에 남편의 유고로 세 권의 작곡집을 냈으며, 일찍 작고한 남편을 기념하기 위해 채동선음악상을 제정하였다. 이소란과 채동선이 살았던 성북동 자택은 2019년 10월 철거작업이 진행되어 학계 지인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 이관옥
    인물
    이관옥
    우리나라 1세대 성악가이다. 일본 무사시노 음악대학 본과 성악부 수석 졸업하였다. 귀국 후 연 독창회로 주목받았으며, 1950년 현제명이 제작한 우리나라 첫 창작 오페라 「춘향전」에서 이인범과 함께 주인공으로 호흡을 맞췄다. 남편 테너 한규동과 함께 한양도성 근처 삼선동에 살았는데, 첼리스트 전봉초와 소설가 정한숙 가족과 아래 윗집에 살면서 세 가족이 서로 오가며 가족처럼 지냈다고 한다. 서구 클래식의 흐름을 주시하여 1961년 메노티(Gian Carlo Menotti)가 작곡한 오페라 「전화」 전곡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한국 가곡의 발전을 이끌고 클래식 음악의 수준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한 선구자로 인정받아 1975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 이인범
    인물
    이인범
    성악가이다.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음악부원으로 활동하였고, 졸업 후 일본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 1939년에 열린 전 일본 성악콩쿨대회에서 수석으로 당선되어 한국성악의 기염을 토하였다. 광복 후 한국 오페라계에 투신하여 「춘향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오페라의 주역으로 출연하였고, 한국오페라단 단장을 역임하였다. 1953년 얼굴과 손에 심한 화상을 입는 시련을 겪었으나 1956년 독창회를 가지면서 재기에 성공한다. 1950년대 기사를 찾아보면 당시 그가 성북동 자택에서 독창회를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등을 거쳐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학장까지 지내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으며, 1978년 5주기 추모앨범이 나오기도 하였다.
  • 반야월
    인물
    반야월
    가수, 작사가이다. 본명은 박창오이다. 1939년 가수로 데뷔해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고 해방 이후에는 작사가 활동이 두드러졌다. 「잘있거라 항구야」(1940), 「불효자는 웁니다」(1940) 등을 불렀고, 「울고 넘는 박달재」(1950)와 「단장의 미아리고개」(1956) 등을 작사하였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반야월이 6.25전쟁 당시 딸을 잃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중음악과 문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에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 박인수
    인물
    박인수
    성악가이다.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나 미아리로 이사하여 미아리와 정릉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당시 미아리는 온통 산과 논밭뿐이어서 국민학교(초등학교)는 돈암동까지 가야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성악을 권유받고, 아침마다 정릉 뒷산에 올라 소리를 지르거나 창경원의 사자우리 앞에서 사자보다 더 큰소리를 내기 위해 대결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악을 공부하게 되었다. 1968년 서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립대와 줄리아드 음대 등에서 공부하고, 1974∼1982년 미국 전역과 남미 등지에서 공연활동을 하였다. 1983년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1989년 이동원과 함께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 「향수」를 불러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11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 한규동
    인물
    한규동
    성악가이다. 외사촌 형이자 향토가극의 창시자 안기영에게 성악을 배우고, 1938년 ‘안기영문화생 제1회 음악발표회’를 통해 성악가로 데뷔한다. 이듬해 조선일보 주최 음악콩쿨 성악부에서 입상한 뒤, 1943년 일본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다. 1944년 부민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하였고, 해방 이후 배재중학교와 경동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1949년 우리나라 오페라의 발판을 마련한 공연 <파우스트> 의 대본을 직접 번역하고 주연을 맡았다. 1955년 오페라와 실내악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향성회’를 조직하고, ‘한국가곡’이란 용어를 처음 규정한 『한국가곡집』을 편찬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및 학장을 역임하였고, 1974년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규동·이관옥 부부는 1950년대부터 삼선동에 거주했는데 음악가 전봉초, 소설가 정한숙 가족과 서로 오가며 가족처럼 지냈다고 한다.
  • 이봉수
    인물
    이봉수
    바이올린 연주자이다. 평양사범학교에서 선교사들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일본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 만주 신경교향악단에서 활동하였고, 해방 후에는 귀국하여 국내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의 창립멤버로 참가하였다. 6.25전쟁기에는 서울교향악단을 모체로 만들어진 해군정훈음악대(현 서울시립교향악단) 단원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악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대에 한규동·이관옥의 집에 살던 전봉초가 이사하면서 집이 비자 이봉수에게 소개해 주었고, 거처를 삼선동으로 옮기게 된다. ‘바이올린 소나타의 밤’을 비롯하여 수차례 바이올린 독주회를 선보인 이봉수는 한국 교향악단 개척자이자 바이올린 연주자·교육자로서 한국근대음악의 발전에 공헌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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