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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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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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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욱
  • 이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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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극로
    국어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편찬 집행위원을 맡았다. 이후에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내며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으며 1948년에 월북하였다. 주요 저서로는「조선어 임자씨의 토」, 「조선어 단어성립의 분계선」, 「짓말에 대하여」 등이 있다. 1929년 결혼 후 약 10년 동안 숭례초등학교 부근인 종암동 40번지에서 거주하였다.
  • 김성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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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칠
    역사학자이다. 1913년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1928년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독서회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복역했다. 1932년 동아일보 농촌구제책 현상모집에 당선됐고 1934 규슈 토요쿠니[豊國]중학을 졸업했다. 1937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 후, 1941년까지 조선금융조합연합회에서 근무했다. 1942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강제 징용됐다. 1946년 경성대학을 졸업하고 1947년 서울대 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1951년 영천 고향집에서 괴한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저서로 『조선역사』(1946) 『국사통론』(1951) 『동양사 개설』(공저, 1950) 등과 역서로 펄 벅의 『대지』, 강용흘의 『초당(草堂)』, 박지원의 『열하일기』(전5권), 『용비어천가』(상 하) 등이 있다. 김성칠은 해방 이후 성북구에서 거주하였다. 1946년 3월 경성대학교(서울대학교) 사학과 조수(助手)로 임용된 직후인 4월 7일 돈암동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1947년 국립서울대학교 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하였고, 같은 해 봄 정릉리 아랫마을로 이사했다. 1948년에는 정릉리 윗마을 손가장(정릉리 362번지)에서 거주하였다. 그가 남긴 일기 자료(『역사 앞에서』)에는 정릉에서의 전쟁 경험이 드러난다.
  • 최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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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훈
    소설가이다. 최인훈은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는데,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목포상업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대를 중퇴하였다. 1959년 『자유문학』에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1960년 「가면고」, 「광장」 등을 발표하면서 작가적 명성을 굳혔다. 4.19혁명이 있고 7개월 뒤인 1960년 11월에 발표한 「광장」은 당대까지 금기시되었던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파헤친 대표작으로 발표 직후 문단 안팎에 파란을 일으켰다. 한편 「소설과 구보씨의 일일」과 「화두」(1994)에서 성북동을 주된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하였으며, 특히 「화두」는 이태준의 집을 대단히 상세하게 설명하여 실제로 이태준의 집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서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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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채
    문학평론가이자 교수이다. 2013년부터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1994-)으로 활동 중이다. 1994년 김소진의 자택에서 했던 김소진과의 대담을 『한국문학』 3·4월 합본호에 실었다. 대담에는 김소진에 대한 소개, 김소진의 문학과 문학관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표 저서로 『태풍』(1990), 『소설의 운명』(1995), 『아첨의 영웅주의』(2011), 『사랑의 문법』(2004) 등이 있다.
  • 오탁번
    인물
    오탁번
    시인이다. 고려대 영문과를 거쳐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철이와 아버지」가 당선되었다. 그 이음해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1969년엔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처형의 땅」이 당선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강설」(1969), 「하관」(1983) 등의 시와, 「가등사」(1970), 「혼례」(1971), 「귀로」(1972) 등의 소설이 있다. 그는 조지훈의 제자로 지훈상 10주년 기념 수필집에서 조지훈을 회상하는 글을 썼다.
  • 박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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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준
    국문학자이자 교육가이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한용운 연구』, 『고려가요의 연구』, 『현대시의 전통과 창조』 등의 저서를 발간하였다. 한양대 명예교수로 국어국문학회, 한국고전문학연구회 등에서 활동하고 한국시가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조지훈의 제자로 1978년 조지훈의 선비정신을 떠올리며 논객으로서의 조지훈에 대해 쓴 글인 「논객 조지훈의 면모」를 작성하였다
  • 홍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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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문
    안암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이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로 선임되었고, 1931년에는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또한 국어연구에도 전념하여 1927년에 「조선문전요령」을 『현대문학』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서울신문사 편집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정음발달사』, 『조선문법연구』을 간행하였다. 1948년 4월 남북정치협상 대표였던 부친 홍명희를 따라 입북하여 그대로 잔류하면서 국어연구와 정치활동, 문화활동을 병행하였다. 1981년에는 『조선왕조실록』 한글 번역의 공로로 노력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 오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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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태주
    조선후기 오위도총부도총관, 조지서제조, 귀후서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본관은 해주이며 자는 도장, 호는 취몽헌이다. 종친부전적 오사겸의 증손으로, 할바어지는 이조판서 오상이며, 아버지는 판서 오두인이다. 1679년 12세가 되던 해에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와 혼인하여 해창위에 봉해졌고, 명덕대부의 위계를 받았다. 22세에는 희빈장씨 소생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과 남인에 대하여 노론의 송시열 등이 반대 운동을 일으키자, 이에 찬동하여 책봉을 반대하는 의견을 상계했다가 관작이 삭탈되었으며, 얼마 뒤 왕명에 의하여 직첩이 환급되기도 하였다. 시문에 능하여 숙종의 많은 총애를 받았으며 금석문으로는 「오두인석비(吳斗寅石碑)」 등이 있다. 조선 후기 종암동은 해주오씨 별서로 불렸으며 고려대 뒷산의 종암 일대를 오태주가 별서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 최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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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순우
    미술사학자이다.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났고,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송도고보 재학시절 우연히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이었던 고유섭을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감화되어 문화유산과 한국미술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해방 후 서울의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였고 1974년부터 1984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다. 한국전쟁 때에는 목숨을 걸고 국립박물관의 소장 문화재들을 부산까지 안전하게 운반하기도 하였다. 1976년에 성북동 126-20(현 최순우 옛집)으로 이사하였는데, 1930년대에 지어진 낡은 한옥을 그의 안목으로 잘 가꾸었고 지금까지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유고를 모은 『최순우전집』(1~5권),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등이 있다.
  • 주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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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섭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이다. 1921년 매일신보에 단편 「깨어진 항아리」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1935년 『조광』 창간호에 발표한 「사랑손님과 어머니」로 대중의 인기를 받으며 작가로서 명성을 높였다.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창립동인으로 활동하였고, 『코리아 타임즈』 주필과 한국문학번역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영문학자로 한국문학의 번역에 힘썼다. 1943년에는 일본의 대륙 침략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추방되어 귀국하였다. 이때 돈암동 254-1번지에 자리를 잡았는데 195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길」에선 한국전쟁 전후의 돈암동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
  • 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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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
    시인이자 학자, 교육가이다. 1939년 『문장』에 시 「고풍의상」과 「승무」, 1940년에 「봉황수」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해방 후 성북동에 한옥을 마련하여 ‘방우산장’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근처에 살고 있던 김기창, 김환기, 윤이상 등과 교류했다. 그는 방우산장에서 박목월, 박두진과 모여 의견을 나누며 『청록집』을 간행하였는데 이 책의 장정은 김용준이 맡았다. 그의 작품은 민족정서와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활동 후기에는 혼란한 현실 정치를 비판하며 『지조론』(1962)과 같은 산문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 정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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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한숙
    소설가이자 교육가이다. 1947년 전광용, 정한모, 전영경 등과 ‘주막’동인을 만들고 활동했다. 1948년 『예술조선』에 「흉가」가 입선된 이래 많은 단편소설을 발표하였으며, 「전황당인보기」(1955), 「금당벽화」(1955), 「고가」(1956)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향을 떠나 온 뒤 안암동, 성북동, 삼선동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교수로서 자리를 잡을 무렵 성곽 앞쪽으로 집을 옮겼다. 그는 다양한 소재와 소설기법을 사용하여 새로운 시대 상황에서 살아 갈 한국적 인간상을 창조했다는 평을 받는다.
  • 정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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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한모
    시인이자 평론가이다. 정한모는 1923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0년대부터 어머니와 손녀까지 4대가 함께 30여 년을 성북동에 살았다.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멸입滅入」이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자연과 일상에서 얻는 시상(詩想)을 담은 시집 『카오스의 사족』, 『아가의 방』, 『새벽』 등을 발표하였다. 문학 연구의 대표 업적으로는 「문체로 본 동인과 효석」, 「김영랑론」, 『현대작가연구』 등이 있다. 1988년 문화공보부 장관을 할 때 납·월북 문인 작품에 대한 제한을 풀었다. 한국시인협회상(1971), 서울특별시문화상(1983), 대한민국예술원상(시부문, 1987)을 수상하였다.
  • 전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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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광용
    소설가이자 국문학자이다. 1918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1940년대부터 서울에 살았는데, 안암동과 성북동을 거쳐 1960년대에 동소문동 1가 140-69번지로 이사하여, 부산 피난 시절 외에는 성북구에서 생활하였다. 1939년 동화 「별나라 공주와 토끼」가 동아일보에, 1955년 「흑산도」가 조선일보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56년부터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소설 연구와 한국 근현대 문학 연구에 힘쓰면서 문단과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대표작 『꺼삐딴 리』(1962)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혼란스러운 시류에 편승한 주인공을 통해 시대상을 보여준 작품이다.
  • 안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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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재홍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사학자, 언론인이다. 그는 1910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11년 9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고, 10월 조선인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였다. 1914년 여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임시정부의 연통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귀국 후 『시대일보』 와 『조선일보』에서 약 10년 동안 언론인 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돈암동 산 11-152번지에서 거주하였다. 미군정기에 민정장관을 역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65년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손진태
    인물
    손진태
    사학자, 민속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3일 밤 안암동·안감천(성북천)의 만세시위에 참여할 당시 안암리 11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1932년 송석하·정인섭과 함께 조선민속학회를 창설하고 193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하였다. 1934년 안암동으로 이전한 보성전문학교의 사서로 고용되고, 이후 보성전문학교의 문명사 교수와 도서관 관장직을 맡았다. 1949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거쳐 문리대학장에 재직 중 6.25 전쟁으로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조선신가유편』 『조선민담집』 『조선민족설화의 연구』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조선민족사개론』, 『국사대요』 등이 있다.
  • 김경중
    인물
    김경중
    조선의 문인이자 학자이며,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작가, 교육인이다. 또한 호남의 재벌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성북정(현 성북동)에 거주하면서 20여 년에 걸쳐 『조선사』를 편찬하였다. 『조선사』는 1392년(태조 1)부터 1863년(철종 14)까지를 편년 순으로 정리한 책이었다. 1936년 2월 20일 발행되었으며, 총 17권 17책으로 구성되었다. 판권사항에 따르면 발행인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41번지에 사는 김경중이었으며, 발행소는 지산서실(芝山書室)이었다. 제2대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의 생부이자(김성수는 김기중의 양자로 들어갔다) 기업인 김연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양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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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동
    시인, 국문학자 겸 영문학자이다. 1919년 『문예공론』을 염상섭과 함께 발간하고, 시와 문학평론을 썼다. 해방 후에는 대학에 몸담으며 향가와 고려가요 연구에 매진하여 『조선고가연구』, 『국학연구논고』, 『여요전주』 등을 집필하였다. 가곡 「어머니 마음」은 양주동의 시에 이흥렬이 곡을 붙인 노래이다. 술을 즐겨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이은상 등과 어울리며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1960년대 초 돈암동에 살다가 동선동 3-4번지 자택에서 작고하였다
  • 임석재
    인물
    임석재
    심리학자이자 민속학자이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에 입학하였고, 1930년 동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심리학을 전공하였다. 1927년부터 아까마쯔[赤松智城]·아끼바[秋葉隆] 교수들의 민속자료 수집을 도우면서 민속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으며, 1931년 평북 선천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더욱 본격화되었다. 1946년부터 1967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심리학교수로 재직하고, 심리학회 회장도 역임하였으나 민속학에 지속적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료수집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특히 한국의 무속신앙을 병립신관(竝立神觀)이라는 용어로 설명한 『한국무속연구서설』(1970)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임석재는 1960년대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30여 년간 안암동 자택에서 살았다.
  • 인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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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병선
    박물관인이자 민속학자이다. 이화여자고등학교 3학년 재학 당시 돈암동에 살며 신동엽이 일하던 서점을 오가면서 신동엽과 교제를 시작했고, 1957년 혼인을 하게 된다. ‘경’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신동엽의 시는 모두 아내 인병선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었다. 결혼 후 남편의 고향으로 함께 내려갔으나 신동엽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인병선은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돈암동으로 돌아왔다. 1960년 신동엽이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에 집을 마련하고, 2년 후 동선동의 한옥으로 이사한다. 신동엽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1978년부터 짚풀문화를 조사·채록하였고, 민속지 『생활용구』를 창간하였다. 1993년에는 짚풀생활사박물관을 설립하고, 짚풀문화연구회 회장,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전문위원등을 역임하였다.
  • 이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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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상
    시조시인이자 사학자이다. 1920년대부터 『조선문단』 같은 잡지에서 시, 평론, 수필 등을 발표하였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전통문화와 시조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시조 연구와 시조 창작을 하였는데 이은상의 시조에 김동진, 홍난파, 윤이상 등이 곡을 붙인 「가고파」, 「봄처녀」, 「성불사의 밤」 등 가곡 1백여 곡이 전한다. 『조선사화집』, 『탐라기행한라산』, 『이충무공일대기』, 『노산시조집』, 『푸른 하늘의 뜻은』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1960~1970년대 안암동 104-43번지에서 거주하였다.
  • 백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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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상규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미국 브라운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1924년부터 보성전문학교에서 영어영문학·경제학·상학·논리학 등을 강의하였다. 1935년 6월 발간된 『삼천리』를 보면 백상규의 별장이 성북동에 있었는데 이 집은 양옥식 별장으로 시가로 치면 몇만 원이 넘었다고 한다. 광복 후 여운형 중심의 조선인민당에 가입하고, 이듬해 서울 천주교회에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여운형과 함께 최고정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경기도 장단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때 서린동 자택에서 맏아들 남진과 함께 납북되어 남북평화통일축진협의회의 발기인 겸 중앙위원을 지냈다. 1957년 12월 26일에 북한에서 병사하여 평양시 용성구역의 ‘재북인사들의 묘’에 안치되었다.
  • 이병도
    인물
    이병도
    역사학자이다. 중동학교를 거쳐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요시다 도고[吉田東伍]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등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1934년 한국의 언어·문학·역사·민속·미술을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국문으로 된 최초의 학술지인 『진단학보』를 간행했다. 창간호부터 3호까지 계동 98번지 이병도의 집에서 발간되었고, 1936년 4월 발간된 4호부터 1941년 14호까지 성북리 132번지에서 발간되었다.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는 실증사학을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한국근대사학의 성립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나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참여하는 등의 친일경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곽종원
    인물
    곽종원
    평론가이자 교육자이다. 1938년 『만선일보』에 수필 「이역에 젖은 애상」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으며, 1942년 『매일신보』에 「문학의 함축성」을 발표함으로써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 4월 ‘조선청년문학협회’를 결성하고, 김동리, 조연현 등과 함께 일체의 정치적·사회적 이념을 초월한 본격 문학에 매진함으로써 프로문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하지만 그의 대표적 평론 중 하나인 「결전 문학의 이념」을 비롯하여, 『동양지광』, 『매일신보』등에 기고한 6편의 저작물이 친일 평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3년 성북구 돈암동 산3-1에 세워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의 교수로 있었으며, 이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숙명여대 총장 직무대리와 건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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