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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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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위리 존안
    유물
    장위리 존안
    조선시대 말 장위리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문서 자료이다. 1994년 5월, 서울시는 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토박이 선정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유물과 기록들을 수집하였는데 이때 수집, 공개된 문서 가운데 하나였다. 이 문서는 성북구 장위3동에서 5대째 살고 있던 최무영(崔茂榮) 씨(당시 63세)가 보관해 오던 것으로 조선시대인 1905년 한성부 장위리의 마을대표 선정 규칙을 담은 일종의 마을자치규범서이다. 총 10조로 되어있는 이 문서에는 마을의 대표를 선정하거나 환경보호에 관한 규범들이 실려 있으며 중죄를 저지른 사람은 주민회의를 열어 마을에서 축출하고 풍기를 문란하게 한 사람은 경고를 주며 덕행을 쌓은 자는 표창하는 등 미풍양속 규범도 제시하고 있다.
  • 정릉 굿당
    장소
    정릉 굿당
    무당이 굿을 하는 곳이다. 보통 신령과 소통이 잘되는 자리에 세웠으며, 정릉동은 북한산의 기가 세서 굿당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국민대학교와 북악터널 근방에 다섯 개의 굿당이 있으며, 오래된 암자를 개조하여 사용하는 곳도 있다. 정릉의 굿당들은 도시 재개발을 피해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서울의 민간 종교시설이다. 서울에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수십 개의 굿당이 있었지만, 미신으로 치부되어 대부분 사라졌다. 굿당에는 굿의 전후처리를 도와주는 사람과 음식 및 부엌일 하는 공양주가 고용되어 있으며 이들은 대개 굿당에서 함께 생활한다. 굿을 의뢰받은 무속인이 제가집으로부터 비용을 받으면 일부를 굿당의 방값으로 낸다. 굿당 주인은 당의 임대료만을 받고 공양주와 나머지 사람에게 나가는 돈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 보문사
    장소, 유물
    보문사
    성북구 보문사길 20(보문동 3가 168)에 위치한 사찰이다. 보문사는 고려 때 승려 담진(혜조국사)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옛 건물로는 영조 때 건축된 대웅전이 있다. 이 절은 원래 조계종 소속이었으나, 1972년 세계 유일의 비구니종단인 대한불교 보문종(普門宗)을 창시하여 그 본산이 되었다. 이 절의 대웅전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보문사 석가불도>, <보문사 대웅전 신중도>, <보문사 지장보살도> 등 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들이 있다. 한편 석굴암 앞 팔각 9층 석탑은 1978년에 오대산 월정사의 탑을 본떠 조성하고,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내부에 봉안했다. 보문사 스님의 범패(梵唄)는 잘 알려진 무형자산이다.
  • 미타사
    장소, 유물
    미타사
    성북구 보문사길 6-16(보문동 3가 3-51)에 위치한 사찰이다. 미타사는 여승을 지칭하는 비구니의 수양 도량인데, 고려 초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창건하고 미타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승된다. 이후 몇 차례의 중수 사실이 전해지지만 의미있는 것은 1457년(세조 3)에 단종비였던 정순왕후 송씨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미타사 서쪽, 숭인동의 정업원·동망봉·자지동천(紫芝洞泉·자줏빛 물이 흘러나오던 샘) 등에 정순왕후와 관련된 사실이 있음으로 보아 이 절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곳 보문동 일대는 ‘탑골’이라 불리고, 이 절은 ‘탑골승방’이라 불리는데, 미타사 대웅전 뒤 단하각(丹霞閣) 왼쪽 언덕 위에 있는 석탑으로 인해 그렇게 불리게 된 듯하다.
  • 경국사
    장소
    경국사
    성북구 보국문로 113-10(정릉3동 753)에 자리한 사찰이다. 고려 충숙왕 12년(1325) 율사 정자(淨慈)가 청암사(靑巖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공민왕 때에 지공(指空)선사가 머물면서 고승대덕의 수도처로 알려졌다. 17세기 초 조선 현종 때에 이름이 경국사로 바뀌고, 몇 차례의 보수와 증축을 거쳐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16세기 중반 문정왕후의 이름을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1921년 승려 보경(寶鏡)이 주지로 부임하였는데, 현재의 봉안된 탱화, 벽화 등의 대부분이 이 보경의 작품이다. 한편 경국사 주변은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휴식처로서 예로부터 사대부들이 많이 찾던 곳이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 방문했었고, 1953년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닉슨이 방문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 개운사
    장소, 유물
    개운사
    성북구 개운사길 73(안암동 5가 157)에 자리한 사찰이다. 1396년(태조 5)에 무학대사가 현재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에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고 이름 지었다. 그 후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묘인 인명원(仁明園)이 절 옆에 세워지자, 영도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절의 이름을 개운사(開運寺)로 바꾼 시기는 절을 옮긴 시점일 가능성이 크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절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1926년부터 근대 불교의 대표적인 석학이었던 승려 박한영이 이 곳에서 많은 제자를 키워냈고, 선사 탄허가 개운사의 암자인 대원암에서 불경 번역에 힘썼다. 현재 개운사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보물 1점과 서울특별시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 5점이 보관되어 있다.
  • 심우장 편액
    유물
    심우장 편액
    심우장(성북구 성북로29길 24)에 걸려있는 편액이다. 성북의 서예가 유치웅의 작품으로, 오세창이 만해 한용운의 집 ‘심우장’ 글씨를 써준 편액이 없어지자, 유치웅이 오세창과의 인연, 한용운을 기리는 마음을 함께 담아 글씨를 썼다.
  • 흥천사 감로도
    유물
    흥천사 감로도
    흥천사에가 보유하고 있는 불화이다. 이 감로도는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젊은 남녀가 데이트하는 모습, 전당포의 모습, 태평양전쟁의 모습 등 불화가 그려지던 1940년대의 상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 불화에서는 볼 수 없는 기법으로, 흥천사 감로도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안암동 오층석탑
    유물
    안암동 오층석탑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고려 중기(추정)에 건조된 높이 5.55m의 오층석탑으로, 본래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원당국민학교에 소재했으나, 1986년 10월 27일 고려대학교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기단부의 상대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있으며, 탑신부(塔身部)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이 얕고 옥신(屋身)이 높아 웅장한 감을 준다. 2층 옥신과 기단부 면석 3매와 상륜부(相輪部)는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 안암동 삼층석탑(예산 소재)
    유물
    안암동 삼층석탑(예산 소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고려 중기(추정)에 건조된 높이 3.31m의 삼층석탑으로, 본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모사리에 소재했으나 1962년 1월 5일에 고려대학교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기단부에서 탑신부까지의 옥개석과 옥신은 일정한 비례로 축소되어 안정감을 준다. 2, 3층 옥개석 추녀 모서리의 각각 세 부분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 안암동 삼층석탑(봉화 소재)
    유물
    안암동 삼층석탑(봉화 소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고려 중기(추정)에 건조된 높이 3.7m의 삼층석탑으로, 본래 경상북도 봉화군에 소재했으나 1987년 3월 13일에 고려대학교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기단부의 하대갑석은 1매의 큰 방형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은 두터우며 추녀 모서리는 반전이 얕아 전체적으로 단아한 감을 준다.
  • 성저오리정계석표
    유물
    성저오리정계석표
    정릉동 내에 소재했던 조선 초 한성부 관할구역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경계석표 정면에 새겨진 날짜를 통해 1410년(태종 10)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는 도성 안과 성저10리 전역을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어서 행정을 집행하게 하고, 태조 5년(1396)에는 한성부에 명하여 방명표(坊名標)를 세우게 했다. 따라서 이 당시에 성저5리 정계비나 성저10리 정계비를 세워 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는 1970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경복궁 근정전 회랑(廻廊)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시멘트로 된 표석을 세워 놓았는데, 현재는 그 표석마저 없어져 성저5리 정계비가 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백의대사불도판
    유물
    백의대사불도판
    정릉동 내 사찰 내원사가 보유한 불교유물이다. 불교의 33관음 중 하나인 백의대사(白衣大士)을 새긴 판(板)이다. 백의대사는 온몸에 흰옷을 걸치고 있으며, 순산과 어린아이의 생명을 보살펴준다고 한다. 이 불도판은 철종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흥천사
    장소, 유물
    흥천사
    성북구 흥천사길29(돈암동595)에 있는 사찰이다. 1397년(태조 6) 신덕왕후 강씨의 능침사찰로서 중구 정동에 창건되었다. 1409년(태종 9) 정릉이 이전되고, 조선왕조의 억불정책과 몇 번의 화재 등을 겪으면서 폐사되었다. 1669년(현종 10) 함취정(含翠亭) 자리에 이건하여 중창하고 신흥사(新興寺)로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 현재 자리에 중창하였고,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다시 흥천사라고 불리면서 왕실원당의 기능을 담당했다. 흥천사는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첫 번째 왕후였던 신덕왕후의 원찰(願刹)에서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의 피난생활까지 조선왕실의 역사와 함께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 적조사
    장소, 유물
    적조사
    성북구 흥천사길 49-23번에 위치하는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의 사내 암자이다. 특히 근대 한국현대불교의 정신적 지주였던 경산스님의 수행처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후기 헌종 때에 지어진 흥천사의 부속암자로 혜암 성혜스님이 창건하였다. 초기에 독립된 사찰로 세워진 것이 아니어서 규모는 크지 않으며 전통적인 암자의 틀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는 관음전, 동국선원, 법당 등의 건물이 있으며, 한국 불교사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경산스님(조계종 총무원장, 동국대학교 재단 이사장 역임)의 마지막 수행 장소로서 사리탑과 비석이 세워져 있다. 2019년 2월 14일 적조사 신중도가 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인명원지
    장소
    인명원지
    성북구 고려대로22길 6-3(안암동5가 126-16) 고려대학교 공대 근처로, 조선시대 원빈 홍씨의 무덤이 있었던 자리이다. 원빈 홍씨는 정조의 후궁이었는데, 1778년(정조 2)에 빈으로 간택되어 가례를 올렸는데, 이듬해인 1779년 14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1781년 ‘인명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무덤을 현재 고려대학교 공대 근처에 조성하였는데, 후궁의 무덤에 ‘원’을 붙이는 것이 부당하다는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1786년 ‘원빈묘’로 강등되었다. 1950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의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 오봉리 지석묘
    장소
    오봉리 지석묘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 고려대학교 안에 있는 고인돌이다. 이 지석묘는 고려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팀이 주암댐 수몰지역 문화유적 발굴 조사 계획의 일환으로 전남 승주군 송광면 오봉리 신월 799번지에 해당되는 보성강 유역의 퇴적지에 16기가 남북으로 4열을 이루면서 군집되어 있던 것을 1986년 12월 1일~1987년 1월 6일에 발굴 조사할 때 발견된 것이다. 출토유물로는 홍도, 마제석검, 마제석촉, 삼각형석도, 대팻날, 무문토기편 등의 다양한 유물이 있으며 특이한 하부구조는 학술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고려대학교박물관에서는 발굴 조사된 지석묘들 중에서 4기와 그 하부구조를 1988년 12월 5일에 이전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했다.
  • 영성단
    장소
    영성단
    성북구 선잠로 9-6(성북동 75-12)에 있었던 제단이다. 영성단은 새해 농사가 잘되도록 곡식을 맡은 별과 농사를 맡은 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단으로 성단(星壇)이라고도 불렀으며, 기우제를 지낼 때는 용단(龍壇)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제사를 지내온 기록이 있다. 조선에서도 고려의 유제(遺制)에 따라 남교(현 한남동)에 설치하고 입추 후 진일(辰日)을 택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후 1865년(고종 2)에 혜화문 밖 선잠단의 북쪽에 다시 설치했는데, 이때에는 매년 정월 상인(上寅)에 제향을 지내는 것을 규례로 하였다. 1897년 각 분야의 별들에게 제사지내는 의리를 폐지하면서 영성단도 폐지되었다. 현재는 작은형제회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당에 영성단 표석이 세워져 있다.
  • 봉국사
    장소
    봉국사
    정릉로 202-27(정릉동637)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 원찰로, 고려말 공민왕 3년(1354) 나옹대사가 주도하여 창건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조선 태조 4년(1395)에 당시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주도하여 세운 사찰로, 창건 당시 법당에 약사여래를 봉안하여 약사사라고 불렀다. 조선 현종 10년(1669)에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을 단장하고 태묘에 제사를 드리게 되면서 이 절을 원찰로 삼고 나라를 받든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봉국사로 고쳤다. 임오군란(1882) 때 불에 탔으나 이듬해 한계·덕운 등이 중건하였고, 이후 몇 차례 더 중건되었다. 1979년 10월에는 절 입구에 일음루를 건립하고, 1994년에는 안심당을 지어 스님들의 수행정진과 신도들의 신행처로 사용하고 있다.
  • 봉갑리 지석묘
    장소
    봉갑리 지석묘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 고려대학교 안에 있는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인 봉갑리 지석묘는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1987년 8월 주암(住岩) 댐 수몰 지역 문화 유적 발굴 조사 때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봉갑리, 보성강(寶城江) 유역의 돌출된 낮은 구릉의 말단 부분에 14기가 군집 분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출토 유물로는 마제석촉(磨製石鏃), 삼각형석도(三角形石刀) 등이 있는데 1989년 10월 30일 현재의 자리로 이동 전시했다.
  • 동활인서 터
    장소
    동활인서 터
    조선시대 동활인서가 있었던 현재 성북구 동소문로 3길 84(동소문동4가 103-3) 일대를 가리킨다. 조선에서는 빈민 환자와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동소문 밖에 동활인서, 서소문 밖에 서활인서를 두었다. 의료 활동 외에도 활인서에는 무당을 두어 환자들의 정서적 심리적 안정에 도움을 주도록 하였으며, 굶주린 백성들을 구호하기도 하였다. 조선 말에 신당동 쪽으로 옮겼다가 1882년(고종 19)에 결국 폐지되었고, 활인서의 사업은 혜민서의 업무와 통합되어 제중원·대한적십자병원으로 이어져 갔다. 활인서가 옮겨간 뒤 그 자리에는 일제강점기에 송성진의 가옥이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이 머무르면서 돈암장으로 불려졌다.
  • 동망봉 산신각
    장소, 유물
    동망봉 산신각
    성북구 보문동에 있는 산신각이다. 동망봉은 보문동과 숭인동에 걸쳐 있는데, 조선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단종이 유배가서 죽은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기 때문에 동망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산신각은 산신을 제사하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 언제, 누가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15세기경 호랑이가 출몰하여 인명과 가축의 피해가 심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산제(山祭)를 지내기 위해 건립했다고 전한다. 그 일대에 아파트를 신축하면서 숭인공원으로 이전·복원하였는데 소나무로 엮은 가로 2칸, 세로 1칸으로 구성되었으며, 안에는 동망봉 산신령과 정순왕후 송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지금도 매년 10월 산신제를 열고 이곳에서 마을의 재앙을 예방하기 위한 제사를 드리고 있다.
  • 돈암동 산신당
    장소
    돈암동 산신당
    성북구 돈암동 606-56에 있었던 산신당이었는데, 현재는 재개발로 사라졌다. 전통사회에서는 산을 끼고 있는 마을에 대부분 산신당과 같은 민속신앙의 장소들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유래는 오래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없어지기 전에 조사·보고된 기록들은 산신당 건물이 벽돌로 쌓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었다고 하니, 해방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생활의 편의를 위한 정비·개발, 그리고 그러한 흐름과 공존하지 못하고 사라져간 전통 문화의 한 모습이다.
  • 대원암
    장소, 유물
    대원암
    성북구 개운사길 60-46(안암동 5가 8)에 위치한 사찰이다. 대원암은 개운사에 딸린 암자인데, 1845년(헌종 11)에 우기(祐祈, 호는 지봉)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 불교계의 석학인 박한영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많은 석학을 배출하였다. 당시에는 출가 제자 뿐만 아니라 신석정, 서정주, 홍명희, 이광수, 최남선, 정인보 등 당대 대표적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다. 1970년대에는 탄허스님이 이곳에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의 역경사업에 힘썼다.
  • 내원사
    장소
    내원사
    성북구 보국문로 262-151(정릉4동 산 1-1)에 위치한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처음 창건된 연혁은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조선 후기 김정호의 한양 지도인 “수선전도”와 “백의대사불도(白衣大士佛圖)”라는 목판에는 같은 위치에 내원암(內院庵)이라는 표기가 있어 늦어도 19세기 중엽에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언제 폐사되었는지 등 상세한 내력은 알려지지 않았다.
  • 석관동 도당
    장소
    석관동 도당
    성북구 화랑로32가길 17(석관동 340-17)에 있는 민속신앙의 종교시설이다. 도당이란 주로 서울과 경기 지방에서 마을을 수호하는 수호신 혹은 신을 모신 당집을 의미한다. 석관동 도당에서 모셔지는 신은 천장산의 산신인데,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봉화산신은 ‘도당할아버지’이고, 천장산신은 ‘도당할머니’로 인식되어 이 지역의 수호신으로서의 여신으로 모셔졌다. 그런데 의릉이 조성되면서 천장산에 있던 도당을 옮기게 되었고, 석관동 석관파출소 건너편에 자리잡고 동신(洞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도당 안에는 신주(神主) 대신 항아리에 벼를 가득 넣고 짚으로 땋은 주저리로 덮어 놓았다. 주신(主神)이 여신이었음과 이 마을의 주업이 농업으로서 풍농을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도당제를 지낸다.
  • 종암동 북바위 산제사
    사건
    종암동 북바위 산제사
    성북구 종암동 북바위에서 매년 음력 10월 초에 지내는 마을 제사이다. 종암동 극동아파트 뒤편의 개운산에는 북바위로 불리는 산제단이 있는데, 그곳에서 종암동 향사회(享祀會) 주관으로 산제사가 열리고 있다. 전통 산신제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마을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마을 축제로 자리 잡고 있다. 의식은 유교적 방식을 취하여 축문(祝文)을 고하고 헌작(獻爵)을 반복하고, 소지(燒紙)하는 등의 절차를 거친다.
  • 정릉4동 한산대동산신제
    사건
    정릉4동 한산대동산신제
    성북구 정릉동의 한산신 제단에서 매년 음력 10월초에 지내는 마을 제사이다. 한산 대동산신제는 북한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산신제단에서 열리는데, 1992년 10월 전승문화번영회에서 제단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주민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전통적인 마을 산신제를 계승하면서도 북한산의 상징성을 활용하여 “서울의 안녕과 성북구 주민을 위한” 행사로 범위를 확대하고, 정릉 4동 주민과 전승문화번영회, 성북구청과 성균관의 후원 등 민관이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로 발전시켰다. 의식은 유교적 방식을 취하여 축문(祝文)을 고하고 헌작(獻爵)을 반복하고, 소지(燒紙)하는 등의 절차를 거치는데, 다른 산신제와 달리 차를 올리는 ‘헌가례’가 있는 점이 독특하다.
  • 정릉2동 산신제
    사건
    정릉2동 산신제
    성북구의 정릉 안에 있는 산신제단에서 매년 음력 10월 초에 지내는 마을 제사이다.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 안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산신제단이 있는데, 그곳에서 정릉2동 공청회(공청경로회)에서 주관하는 산신제가 해마다 거행된다. 정릉2동 산신제는 전통적인 산신제를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데, 산신 제사에 앞서 ‘옥황상제’에게 먼저 제사를 올리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의식은 유교적 방식을 취하여 축문(祝文)을 고하고 헌작(獻爵)을 반복하고, 소지(燒紙)하는 등의 절차를 거친다.
  • 정릉 신덕왕후 기신제
    사건
    정릉 신덕왕후 기신제
    매년 9월 23일 성북구 정릉(아리랑로19길 116)에 모신 신덕왕후를 제향하는 의식이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인데, 신덕왕후의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태조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영역을 넓혀 조선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슬하에 2남(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1녀(정순공주)를 두었으며, 1396년에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를 사랑했던 태조는 경복궁에서 바로 보이는 황화방(현 중구 정동)에 정릉을 조영했는데, 태조가 죽자 태종이 현재 위치로 옮기고 방치하였다. 이후 현종 때에 가서야 종묘에 배향하고 새로 정비하였다. 현재 신덕왕후 제향은 매년 9월 23일 정오에 진행되며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주관한다. 제향에 관심 있다면 남녀노소 누구나 참관이 가능하다.
  • 석관동 도당제
    사건
    석관동 도당제
    성북구 석관동 도당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지내는 마을 제사이다. 석관동 도당에서 모셔지는 신은 천장산의 산신인데,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봉화산신은 ‘도당할아버지’이고, 천장산신은 ‘도당할머니’로 인식되어 이 지역의 수호신으로서의 여신으로 모셔졌다. 그런데 의릉이 조성되면서 석관동 석관파출소(성북구 화랑로32가길 20) 건너편 현재 위치로 옮겨지게 된 후 동신(洞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도당 안에는 신주(神主) 대신 항아리에 벼를 가득 넣고 짚으로 땋은 주저리로 덮어 놓았다. 주신(主神)이 여신이었음과 이 마을의 주업이 농업으로서 풍농을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 보문동 동망봉산신제
    사건
    보문동 동망봉산신제
    성북구 보문동의 동망봉 산신각에서 매년 음력 10월 거행하는 마을 제사이다. 동망봉은 조선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단종이 유배가서 죽은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던 곳이다. 산신에 제사하는 사당에 정순왕후의 이야기가 더해져 동망봉 산신각에는 산신과 정순왕후를 모시는 2개의 신위가 있다. 동망봉 제례보존위원회가 주관하는 동망봉 산신제는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의 절개와 충절을 기리는 제례의식으로 유래되었는데, 현재는 마을 전통문화를 계승시키는 고유 행사로 자리 잡아,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고 음식을 나눠먹음으로써 정과 친목을 나누는 행사로 뿌리내리고 있다. 또한 제를 올린 다음날에는 지역 노인들을 모시고 잔치를 열고 있다.
  • 동신제
    사건
    동신제
    성북구의 각 마을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치렀던 마을 제사이다. 지역에 따라 ‘산신제’, ‘도당제’라고도 불린다. 성북구는 전체 면적의 70%가 산과 구릉지로 이루어졌기에 서울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산과 연관된 동신신앙(洞神信仰)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 성북구의 동신제(洞神祭)는 매년 음력 10월 초 각 동마다 정해진 장소에서 치러졌는데, 2013년에는 11월 3일(음력 10월 1일) 정릉2·3동, 종암동, 석관동에서, 11월 7일(음력 10월 5일) 정릉4동과 보문동에서 마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 돈암동 산신제
    사건
    돈암동 산신제
    성북구 돈암동 606-56에 있던 산신당에서 매년 음력 10월 1일에 거행했던 의식이다. 산신제는 산을 끼고 있는 지역에서 동 단위로 거행했던 마을 제사인데, 마을 주민들의 무병장수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는 기도를 산신에게 올리는 것이다. 마을 사람 중에 선출된 제주(祭主)가 주관하는데 선정된 제관들은 부정한 것을 피하는 행동의 규제가 따르고, 제를 치르는 기간 동안에는 금기가 엄격하게 지켜진다. 의식은 유교적 방식을 취하여 축문(祝文)을 고하고 분향(焚香)과 헌작(獻爵)을 반복하고, 소지(燒紙)하는 등의 절차를 거친다. 현재 산신당은 재개발로 인해 사라졌으며 산신제도 지내지 않는다.
  • 손가정 산신제
    사건
    손가정 산신제
    성북구 정릉동 손가정 마을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지내는 마을 제사이다. 원래 산신제를 지냈던 곳은 마을에 집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산 속으로 옮겨졌고, 현재 산신제단은 국민대 후문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 있는 마을버스 종점에서 산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는 곳에 있는데, 부채모양의 바위 앞을 정리하여 제단을 마련해 두었다. 현재 산신제는 마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어르신들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오랜 시간 마을을 지켜온 전통으로 인식되고 있다. 의식은 유교적 방식을 취하여 축문(祝文)을 고하고 헌작(獻爵)을 반복하고, 소지(燒紙)하는 등의 절차를 거친다.
  • 북정마을 산신제
    사건
    북정마을 산신제
    성북구 성북동 북정마을에서 매년 음력 10월 초에 지내는 마을 제사이다. 산신에 제사했던 전통적인 산신제를 2013년부터 다시 지내기 시작하였는데, 원래 있던 산신당은 이미 사라져버려 산기슭 상단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현재는 마을 주민들의 무병장수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는 마을 축제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의식은 유교적 방식을 취하여 축문(祝文)을 고하고 헌작(獻爵)을 반복하고, 소지(燒紙)하는 등의 절차를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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