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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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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봉로
    장소
    지봉로
    지봉로는 종로구 창신동에서 성북구 보문동을 잇는 도로이다. 도로명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의 집인 비우당이 도로가 지나는 창신동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호를 따서 제정되었다. 창신역부터 보문역까지는 원래 동망봉을 산 위로 넘어가는 구간이었으나, 2002년 12월부터 동망봉터널로 대체되었다. 1984년 첫 명명시에는 지봉길로 명명되었으나, 2010년 4월 다산로 청계7가부터 동묘앞역 구간을 편입하여 지봉로로 개칭되었다.
  • 회기로
    장소
    회기로
    6호선 고려대역에서 1호선 회기역까지 횡단으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이다. 도로는 종암동, 청량리동, 회기동을 관통하고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회기로라는 명칭은 이 길의 종점인 동대문구 회기동 동명에서 유래되었다. 도로는 성북구 성북구 종암동 30-114번지(종암동삼거리)에서 회기동을 거쳐 회기동 346-3번지(휘경동사거리)에 이르는 폭 20m, 길이 1,750m의 도로이다. 1984년 11월 7일 서울특별시공고 제673호에 의해 처음 이름 붙여졌다. 이 길은 천장산 남쪽 기슭에서 청량리제2동과 회기동을 동・서로 횡단하며, 종점에서 이문로와 교차한다. 회기로라는 명칭은 여전히 사용중이며, 성북구 관내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도로 중 하나이다.
  • 솔샘로
    장소
    솔샘로
    성북구 정릉IC를 기점으로 하여 강북구 삼양동 입구 사거리를 종점으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성북구와 강북구의 경계를 그린다. 과거에는 미아동을 분할하는 도로였으며, 도로명은 미아동의 옛 지명인 '솔샘'을 인용하여 명명되었다.
  • 아리랑로
    장소
    아리랑로
    동선동, 돈암동, 정릉동을 잇는 성북구의 도로이다. 아리랑로는 지도상 남으로는 보문로와 동소문로, 북으로는 정릉로와 북악산로 등의 도로들과 인접해있다. 넓은 도로의 폭은 30~35m이고, 좁은 곳의 폭은 5~10m정도이다.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정릉역을 잇는 가장 큰 도로로 아리랑고개를 지나고 있다.
  • 오패산로
    장소
    오패산로
    성북구와 강북구에 걸쳐있는 월곡동의 주요 도로이다. 도로의 이름은 강북구에 있는 오패산에서 이름을 따왔다. 성북구 구간은 오패산로와 화랑로가 만나는 성북트리즘빌딩교차로에서 시작하여 월계로와 만나는 방천시장입구교차로에서 끝이 난다. 인근의 주요 공공시설로는 생명의 전화 종합사회복지관, 월곡1동 주민센터 등이 있다. 월곡 두산위브아파트, 래미안월곡아파트 등의 대형 아파트 단지와 맞닿아 있으며, 서울숭인초등학교, 오동근린공원과도 인접해 있다. 오패산로를 지나는 마을버스로는 성북10-1, 성북10-2가 있고, 지선버스는 1017, 1113, 간선버스는 120이 있으며, 가까운 지하철역으로는 4호선 미아사거리역과, 6호선 월곡역(동덕여대)이 있다.
  • 장위로
    장소
    장위로
    성북구 장위동을 가로지르는 도로이다. 월계로와 장위로가 만나는 창문여고앞 삼거리 교차로에서 시작하여 장위로, 한천로, 광운로가 만나는 광운대입구 교차로에서 끝난다. 장위1동, 장위2동, 장위3동을 모두 거치며, 장위로와 인접한 주요 시설로는 장위1동 주민센터가 있다. 주변 거주시설로는 래미안 월곡아파트, 꿈의숲 프루지오 아파트가 있으며, 2023년 현재 장위3동에는 장위자이레디언트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며, 장위2동은 장위10구역 재개발이 진행중이다. 장위로를 지나는 마을버스로는 성북12, 성북13이 있고, 지선버스는 1017, 1137, 간선버스는 103, 172가 있다.
  • 장월로
    장소
    장월로
    장위동과 상월곡동을 잇는 도로이다. 상월곡동 35-1번지 화랑로에서 장위동 156-5번지 한천로에 이르는 폭 10~15m, 길이 1,780 m의 보조간선급 소로이다.
  • 혜화로
    장소
    혜화로
    성북구 성북동을 지나는 도로이다.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혜화동 112-1번지)에서 성북구 성북초등학교 앞 사거리(성북동 120-1번지)에 이르는 폭 10~15m, 길이 900m의 2차선 도로로, 성북초등학교 앞 사거리에서 성북로와 교차한다. 조선시대 유학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살던 종로구 명륜동 1가 2-24번지 집터를 지나는 데서 명칭이 유래되어 1984년 11월 7일 서울특별시공고 제673호에 의해 '우암길'이라고 불렀으나 2010년 도로명 주소를 재정비할 때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삼청터널 개통 이후, 성북동·삼청동길과 연계되어 도심 내부순환도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창경궁로
    장소
    창경궁로
    퇴계로4가교차로에서 한성대입구역까지 이르는 도로이다. 1966년 11월 26일 서울특별시고시 제1093호로 혜화동로터리부터 창경궁, 주교동, 동국대 앞까지 이르는 구간이 창경로로 제정되었다가, 1984년 11월 7일 서울특별시공고 제673호로 종로4가를 기준으로 창경로가 창경궁로와 배오개길로 구분되었다. 이후 2012년에 2개 이상 자치구에 걸쳐 있는 광역도로 19개에 대한 도로명이 통일되면서 퇴계로에서 한성대입구까지의 도로 구간의 명칭이 창경궁로로 통일되었다.
  • 숭인로
    장소
    숭인로
    성북구 길음동 일대를 지나는 도로이다. 이 길을 지나는 일대의 옛 명칭이 숭인면인 데서 명칭이 유래하였다. 길음동 34-6번지에서 강북구 미아동 1261-358번지에 이르는 폭 12m, 길이 720m의 보조간선급 소로이며 도봉로에서 삼양로에 이른다. 이 도로는 길음2동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른 도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통량이 적고, 주변에는 다양한 업종의 상가가 위치한다.
  • 서경로
    장소
    서경로
    성북구 정릉동을 지나는 도로이다. 서경대학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정릉동 173번지 정릉길에서 정릉동 226-125번지 서경대학교 입구에 이르는 폭 10m, 길이 940m의 보조간선급 소로로 전구간이 성북구 관내 도로이다. 정릉역 부근에 위치한 숭덕초등학교에서 대일외국어고등학교를 거쳐 서경대학교로 이어지는 언덕길인 서경로 주변으로는 원룸텔과 다세대주택, 단독 주택, 소규모 상가 등이 자리하고 있다.
  • 도봉로
    장소
    도봉로
    도봉로는 미아사거리를 기점으로 도봉동 378번지에 이르는 도로이다. 폭 35~ 40m, 길이 10,000m로, 왕복 9차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명칭은 이 길의 종점인 도봉구 구명에서 유래되었다. 처음 도봉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1972년 11월 26일 서울특별시공고 제268호로 한양천도 578주년 기념일에 59개 가로명을 제정할 때였다. 도봉로는 서울과 의정부를 잇는 일반 국도 3호선과 연결되어 교통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 도봉로 인근에는 도봉산역, 도봉교, 도봉역, 방학역, 쌍문역 등이 위치하고 있다.
  • 길음로
    장소
    길음로
    길음로는 길음1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이다. 길음중학교에서 아파트단지를 통과하여 동소문로로 연결된다. 길음로 이전의 명칭은 인수로였다. 1970년대 이전까지 인수로는 개천인 인수천이었으며, 인수천가를 따라 노점이 형성되어 길음시장까지 이어졌다. 인수천 복개공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총 세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1990년대 후반까지 개천을 메우고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이 공사로 인수천은 복개되었으며 흙길이 아스팔트길로 바뀌게 되었다. 현재 길음로에는 길음1동 주민센터, 길음시장, 길음초등학교, 길음중학교, 계성고등학교, 서울·성북 미디어문화마루, 아름드리 작은도서관, 길음동성당,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길음뉴타운 등이 위치해있다.
  • 숭신방
    장소
    숭신방
    조선시대 초기부터 성 밖에 있던 한성부 동부 12방 중의 하나로, 현재의 성북구 돈암·동선·삼선·성북·안암·정릉·종암동 일대가 이에 속하였다. 한성부의 영역은 도성과 성저십리(城底十里)로 이루어졌는데 그 범위가 매우 넓어 이에 해당하는 영역을 한성부가 단독으로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1396년 한성부를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었는데 방은 공식적으로 조선 전기 한성부의 가장 하위 행정 조직이었으며, 이때부터 5부 중 동부(東部)에 숭신방(崇信坊)이 확인된다. 이 명칭은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숭신방이 숭신면(崇信面)으로 변경될 때까지 사용되었으며 숭신면은 3년 뒤인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崇仁面)에 편입된다.
  • 동선2구역
    장소
    동선2구역
    성신여대 인근 성북구 동선동4가 304-2번지 일대의 재개발 구역이다. 2021년 현재 도시형 한옥과 1960년대에 준공된 건축물이 다수 남아있는 지역이며, 재개발 사업 진행으로 인해 2022년 상반기 주민 이주가 진행될 예정이다. 2011년 3월 재개발 정비 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12년 5월 12일 조합설립인가를 받아 본격적인 재개발 사업을 시작하였다. 2013년 사업시행인가를 받고, 2019년 관리처분 인가를 받으며 사업 지행을 가속화하고 있다. 2018년 최초 시공사를 제일건설로 선정하였지만 계약 해지를 거쳐 2019년 계룡건설을 최종 시공사로 확정하였다. 총 326세대 규모로 구역이 정비될 예정이며, 2024년 입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
  • 369마을
    장소
    369마을
    성북구 삼선교로2,4,6길 일대(삼선동1가 11-53번지 일대)의 한양도성 성곽마을이다.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2013년 이후 주택 재개발 정비 구역에서 해제되어 2014년에는 주거 환경 관리 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었다. 이후 해당 행정구역인 삼선6구에서 착안된 369마을이라는 이름이 주민 회의에서 탄생하였다. 또한 369마을은 '마을의 정체성과 문화를 바탕으로 주민이 주도하고 화합하는 세가지 가치를 지닌 언덕 마을(三育丘)'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마을 내 앵커시설로 마을 주민 회의나 문화 프로그램 등이 열리는 369사랑방, 카페 369마실, 전시 및 공연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 가능한 가변 공간인 369예술터, 지역 예술가와 청년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369예술공방 등이 마련되어 있다.
  • 한천마을
    장소
    한천마을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동네로 한천마을의 명칭은 중랑천의 옛 이름인 '한천'에서 유래되었다. 2012년 11월 주택재건축 정비예정구역 해제 이후 2017년 8월에 주거환경개선사업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7월에 주민공동체운영회로 승인을 받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폭넓은 연령층의 지역주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활성화시켜 다양한 세대가 어우러진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마을 소식지를 제작하고 벽화거리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그 밖에도 영양학사(한천로 550) 1층에 자리하고 있는 '한천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에서 여러 특강과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 장위마을
    장소
    장위마을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 232-17번지(318,415㎡)로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서울 동북부지역의 주택지 조성사업을 통하여 형성된 전형적인 주거지역이다. 2005년 장위 재정비촉진지구(장위 뉴타운) 지정 이후 2014년 11월 해체되기까지 약10년간 물리적, 사회적 쇠퇴가 진행되어 노후불량 밀집지역에 대한 새로운 도시재생 모델 제시가 필요했으며, 2015년 1월 서울형 도시재생 시범사업에 선정되어 다양한 사업 및 주민공동체 활성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성북동 익청로
    장소
    성북동 익청로
    성북동 우정의 공원에서 팔정사까지 이어지는 성북로31가길 일대 길이다.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길 중간 즈음에 '익청로(益淸路)'라는 표지석이 있어 길을 오가는 주민들은 그렇게 부른다. 이 표지석 글은 문인화계의 거목인 중봉 이가범이 쓴 것으로 보인다. 주변으로 숲이 우거져 있고 개울이 흐르는 이 길은 숙정문과 약수터로 이어진다.
  • 정릉동/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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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동/주거
    정릉동 주거 형태에 관한 내용이다. 정릉동은 북한산으로 가는 주요 길목 중 하나로 조선시대에는 한가로운 농촌 마을이었으며, 성 안 사대부의 유람처 또는 별서지였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서울 인구가 급증하면서 서울 외곽이었던 정릉리에도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정릉리가 경성부의 토막민을 수용하기 위한 장소로 선정되면서, 이주민들이 식수와 생활용수를 얻기 쉬운 정릉천에 토막을 지었다. 해방 후에는 그 자리를 무허가 판잣집이 대신했다. 6.25전쟁 휴전 이후, 급격히 늘어나는 서울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정릉동 등의 외곽 지역에 공영주택 건설이 추진되었다. 공영주택은 '문화주택'으로 불리며 1960~1970년대 크게 확산되었고 정릉동은 고급주택단지로 부상했다. 1979년에는 정릉천을 덮는 복개 공사가 시작되면서, 정릉천의 토막집과 판잣집은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는 재개발로 정릉동에 아파트 단지가 많이 들어섰지만, 일부 지역에 도시형 한옥과 공영주택이 여전히 남아있다.
  • 정릉동/생활
    장소
    정릉동/생활
    정릉동 생활상과 관련된 설명이다. 정릉동은 조선시대에 척박한 농토에 적은 인구가 모여 살았던 농촌지역이었다. 또한 도성 안에 궁궐이나 기와집을 지을 때 정릉 일대의 돌을 사용하여, 조선시대부터 정릉동에는 채석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이에 정릉동 일대에는 돌을 깨고 쌓거나 다듬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30년대부터 서울 인구가 급증하면서 서울 외곽인 정릉리에도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전기가 가설되고 신작로가 놓였다. 기술의 발달로 중장비가 공사를 대신하고 돌로 축대를 만드는 일이 줄어들면서 돌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6.25 전쟁 휴전 이후에는 급격히 늘어나는 서울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정릉동 등의 외곽지역에 공영주택 건설이 추진되었다. 정릉동은 고급주택단지로 부상하였으나, 일용직 노동자들의 무허가 판잣집 또한 늘어갔다. 1963년에는 성북구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인구가 거주할 정도로 인구가 폭증하였는데, 1970년대 강남이 개발되면서 인구 과밀 양상이 점차 완화되었다.
  • 삼선동/인구
    장소
    삼선동/인구
    성북구 삼선동 인구변화와 관련된 내용이다. 혜화문 밖 드넓은 들판을 일컫던 삼선평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서울에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동대문구에 속하였다가 1949년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돈암동에서 분동되었다. 삼선동이 처음 신설된 당시 1·2·3동이 있었으나 1980년 삼선2동과 삼선3동이 통합되었고, 2007년 삼선1동과 삼선2동이 통합되었다. 삼선1동의 인구는 1947년 13,144명, 1953년 4,992명, 1970년 10,011명, 1990년 15,082명이었고, 1980년 삼선2동의 인구는 12,092명, 삼선3동의 인구는 9,367명이었다. 2018년 기준으로 삼선동의 인구는 26,971명, 세대수는 12,672세대이다.
  • 보문동/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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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문동/인구
    성북구 보문동의 인구변화와 관련된 내용이다. 보문동은 1936년 4월 1일 일제가 경성부 구역을 확장할 때 경성부로 편입되어 신설정이 되었는데, 1943년에는 동대문구의 관할로 속하였다. 1946년 신설동으로 불리다가 일부 지역이 지금의 ‘보문동’이 되었다고 한다. 1991년 보문동의 인구수는 20,861명, 세대수는 6,640세대였고, 2019년 발간된 『제34회 성북통계연보』의 기록 기준으로 현재 인구수는 17,067명, 세대수는 7,941세대이다. 인구수는 줄어든 반면, 세대수는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 동선동/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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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선동/인구
    성북구 동선동 인구변화와 관련된 내용이다. 1949년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돈암동의 관할이 성북구로 넘어왔는데,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아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돈암동으로 분리되었다. 동선동의 이름은 동소문동(東小門洞)의 ‘동’자와 삼선동(三仙洞)의 ‘선’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1947년 말까지 동선남부동과 동선배부동은 6,140세대 36,019명의 인구가 거주하였다. 인구의 추이를 살펴보면 2000년대 1만 5천여 명이 거주하였고, 거주 인구가 점차 증가하여 2019년 현재 8,856세대, 16,386명이 거주하고 있다.
  • 장위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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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위동/역사
    장위동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장위동의 이름은 고려의 명신(名臣)들이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높은 지위’의 뜻으로 장위(長位)라고도 하고, 마을 뒷산의 이름이 장위산(獐位山)이어서 이 때문에 장위라 했다고도 한다. 혹은 조선 말의 대신 윤용구(尹用求)가 여기에 살았는데 그의 호가 ‘장위산인’이었기 때문에 장위동이 되었다 설도 있다. 장위동은 조선 초 한성부에 속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동부 인창방 장위리계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 1911년 경성부 인창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 1949년 8월 성북구가 분리·신설될 때 장위동은 성북구 숭인출장소의 관할이 되었고, 1973년 숭인출장소가 폐지되면서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 길음교
    장소
    길음교
    동소문로의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과 길음동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1934년으로, 시멘트로 만들어진 교량이라는 의미로 ‘양회다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의정부나 포천 등지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연결로인 미아로를 따라 건립되어 서울입성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미아리에 공동묘지가 있던 시절에는 상여가 다니는 길목으로도 이용되었다. 이후 1976년 한 차례 보수되었고, 통행량이 많아짐에 따라 전면 확장공사를 벌여 폭 35m, 길이 45m로 1989년 준공되었다.
  • 옛 돈암동
    장소
    옛 돈암동
    현재의 성북구 돈암동, 동선동, 삼선동 일대를 말한다. 혜화문부터 미아리고개에 이르는 지역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문외계 돈암리'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숭신면 돈암리가 되었다가 고양군 숭인면에 속한 '돈암정'이 되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동대문구 '돈암동'이 되었다가, 1949년에 동대문구에서 분리하여 성북구를 신설하면서 성북구 돈암동으로 될 때 돈암동의 지역이 넓은 관계로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돈암동으로 분리하였다. 옛 돈암동 지역은 성북구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 미아리 산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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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 산동네
    미아리공동묘지가 철거되고 그 자리는 서울로 몰려든 상경민들이 세운 무허가 주택이 빠른 속도로 들어서게 되었다. 서경대학교, 길음초등학교가 있는 북한산 산자락에서부터 길음역 부근까지 이러한 주택들이 모여있어 달동네로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은 길음동 뉴타운으로 개발되어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미아사거리
    장소
    미아사거리
    남북으로 종암로, 도봉로, 동서로 동소문로, 월계로가 만나는 교차로로, 성북구 길음동과 강북구의 경계에 위치한다. 월계로가 나중에 생겨 원래는 삼거리였기 때문에 사거리가 된 이후에도 관습적으로 미아삼거리를 지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배나무골
    장소
    배나무골
    성북구 상월곡동에 있던 마을이름이다. 배나무가 많이 있던 데서 유래된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서울 북공고 주위에 배 밭이 형성되있었다고 한다. 배나무골이라는 명칭외에도 배골・배나뭇굴・이동(梨洞)으로도 불렸다.
  • 성북천 하늘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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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천 하늘다리
    성북천에 놓인 다리이다. 박완서 소설에는 양회다리가 자주 등장하는데 성북천이 복개되면서 사라졌다. 성북천 하늘다리는 성북천이 복원되면서 양회다리가 있던 비슷한 위치에 새로 만들어진 다리이다. 양회다리는 석회로 만든 다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박완서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집에서 성북경찰서까지는 골목을 나가서 신안탕 앞에서 꺾여서 천변을 끼고 2백 미터쯤 가다가 널찍한 양회다리만 건너면 곧이었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양회다리는 돈암동에 사는 주인공의 집 위치를 알려주는 지표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신안탕이 있던 자리인 마을버스차고지에서 하늘다리까지 실제 거리는 약 150m이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삼선동과 동선동의 경계에 위치한다.
  • 정든마을
    장소
    정든마을
    성북구 솔샘로6길 18-8(정릉동 685-157) 일대의 마을이다. 정든마을은 정릉시장과 정릉천, 북한산이 인접하고 있는데, 좁은 골목에 시멘트 벽돌로 지은 2층집들은 1957-1958년 사이에 산업부흥과 주택난 해소를 위해 이른바 ‘부흥주택’으로 지어진 것이다. 1960-1970년대에 지어진 한옥들 그리고 근래에 지어진 현대식 주택들도 함께 공존하고 있어 한국 현대 주거문화의 발달사를 볼 수 있는 주택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재개발의 열풍에 마을이 사라질 뻔했다가 2012년 부흥주택과 한옥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도시재생 지역으로 결정되었다. 2013년에는 서울시와 성북구청의 지원으로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진행되어 생활 편의성과 안전성을 높였고, 작은 공원과 도서관이 만들어지고 벽화도 그려져 눈길을 끈다.
  • 장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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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마을
    성북구 삼선교로4라길 23-28(삼선동1가 300) 일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장수마을은 한국전쟁 후 서울로 모여든 서민들이 움막, 천막집, 무허가 판잣집 등을 짓고 삶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마을 뒤쪽의 한양도성 성곽 아래 가파른 구릉길을 따라 작고 나지막한 가옥들이 옹기종기 서로 맞붙어 있다. 이 지역이 재개발지역으로 선정되자, 전면 철거와 획일적인 아파트 재개발이 아닌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2008년에 주민협의회를 만들고 마을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마을 내에 작은 카페도 열었고, 마을박물관을 만들어 전시회도 진행하고, 벽화거리도 조성하여 관광객의 발길도 늘고 있다. 2010년대부터 확산된 도시재생사업의 선구적 형태이며,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에 선정되었다.
  • 손가정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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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정 마을
    정릉3동 정릉시장 일대에 밀양 손씨들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마을이다. 밀양 손씨 32세손인 손만기(孫萬琦) 형제가 터를 잡은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현재는 시조 이래 45대부터 50대 정도의 후손들이 약 20가구 거주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7월 그믐에 손만기의 묘에서 시제를 지낸다. 손가정 마을 사람들은 조선 후기까지 주변의 땅을 일궈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잃은 후에는 손가정과 청수동 골짜기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하거나, 석재를 다듬는 석공일을 하기도 했다. 정릉천 곳곳의 바위에는 돌을 깼던 흔적과 반야교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남겨 두었다. 현재 정릉천 근처 두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옆에는 손가정 터에 대한 유래가 적힌 표지석이 있다.
  • 성북동포백훈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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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포백훈조계
    조선 후기 성북동 일대에 설치되었던 사회 조직이다. ‘포백’이란 ‘마전’이라고도 하며 생베나 무명을 삶거나 빨아 볕에 말려서 희게 하는 일이고, ‘훈조’란 콩을 삶아 메주를 쑤는 일을 말하며, ‘계’는 구성원들의 공동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조직이다. 조선시대 어영청은 도성의 수비와 왕의 시위를 위해 설치된 군부대인데, 그 재정 충당을 위해 ‘둔전’을 설치했다. 성북동 일대에도 둔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땅이 척박하고 농지도 부족하여 다른 재정 확보 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조 때 성북동에 일종의 수공업 협동단체인 포백훈조계를 설치하여 둔전민의 생계와 부대의 재정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포백은 도성 안의 무명, 베, 모시 점포의 물건을 맡도록 하였으며, 제조한 메주는 궁궐에 납품하도록 하였다.
  • 삼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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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덕마을
    성북구 솔샘로 15다길(정릉동 716) 일대의 마을 이름이다. 1960년대 말 민간개발회사(삼덕개발)가 토지를 분양하면서 삼덕단지가 형성되었는데, 단독주택지로서 주변 환경과 기반이 조성되어 낮은 단독주택으로 이루어진 정겨운 저층 주거단지이다. 당시 교수, 작가, 예술가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다수 입주하였고, 북한산과 가까워 안게 된 각종 제한으로 인해 개발열풍이 비껴간 오래된 단독주택지의 원형적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이채롭기도 하다. 삼덕마을에는 지붕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패널과 마을곳곳에 설치된 빗물저금통이 눈에 띄는데, 2012년 서울시 에너지자립마을 조성사업에 선정되어 정릉종합사회복지관과 함께 친환경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생산, 활용하고 있다.
  • 북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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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정마을
    성북구 성북로 23길 일대의 마을 이름이다. 북정마을은 심우장 뒤편 한양도성 성곽이 보이는 언덕에 있다. ‘북적마을’로도 불렸는데, 조선시대 포백훈조 계가 여기 있던 시절, 인부들이 ‘북적북적’ 거리는 소리 또는 메주 쑬 때 ‘북적북적’ 끓는 소리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아름다운 경관과 맑은 공기 덕분에 한용운 등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살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과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무너진 한양도성 성곽 아래 판자촌을 이루어 살면서 마을이 커졌다. 마을을 한 바퀴 빙 두르는 도로는 1983년에 완공한 소방도로인데 이 도로 안팎에 500여 가구가 모여 산다. 마을버스 정류장 앞 너른 길은 크고 작은 마을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정릉골
    장소
    정릉골
    성북구 솔샘로17가길(정릉동 757번지) 일대의 마을이다. 정릉천을 따라 북한산 방향으로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면 낡은 대문, 구불구불한 길, 다듬어지지 않은 계단이 이어지는 정릉골이 나온다. 정릉천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정릉골 팻말을 대신하는 ‘정릉골’ 문자와 소설가 박경리의 대표작 『토지』 그리고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토지』 『김약국의 딸들』 등의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박경리가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정릉골에서 살았고, 소설 『토지』 1~3권이 이곳에서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정릉골은 여전히 재개발이 화두가 되고 있고, 마을을 떠난 이들도 많고 빈집도 늘어났지만, 지역 주민들은 인근 학교의 학생들과 마을에 벽화도 그리고 다양한 축제도 여는 등 따뜻한 마을을 가꾸어가고 있다.
  • 앵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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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두마을
    성북구 성북동 1가 105번지 일대의 마을이다. 조선시대 성북동 일대에는 복숭아나무와 앵두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현재의 경신중학교에서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사이의 마을은 속칭 앵두마을이라 불렸다. 이 마을이 주목받게 된 것은 성북동 일대에 한옥이 남아있는 집들이 많아서 이를 보존하고 지원할 방안을 추진하면서부터이다. 2014년 성북구청이 신청하여 사대문 밖에서는 처음으로 선잠단지 일대와 앵두마을이 서울시의 한옥밀집지역을 지정되었다.
  • 아리랑고개
    장소
    아리랑고개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이름이다. ‘아리랑고개’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홍봉진이 1929년 ‘상춘원’이라는 요리집의 위치를 홍보하기 위해 ‘신흥사(흥천사) 옆 아리랑고개’라는 문구를 사용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설, 1930년대 일본인들이 정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용하여 고급 음식점을 꾸미고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길목에 붙여 널리 알렸다는 설, 1926년 나운규가 발표한 영화「아리랑」의 배경이 되어 널리 알려졌다는 설 등이 있다. 성북구에서는 1997년에 아리랑고개를 ‘영화의 거리’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기념가로수와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등 영화의 거리로 특화함으로써 전통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명소로 탈바꿈시켰다.
  • 소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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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마을
    성북구 길음동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 소리마을은 경제적 타당성 등의 여건으로 길음 뉴타운 사업에서 빠진 존치구역으로 남은 곳이다. 따라서 주변 사방은 온통 뉴타운 지대로서 아파트로 구성되어 있고, 소리마을은 일반 주택지로서, 마치 높은 산(아파트)에 둘러싸인 낮은 분지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따라서 도시슬럼화를 방지하고 아파트와는 다른 방식의 삶의 질 향상이 필요하였고,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을 통해 서울시 및 성북구청과 함께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단지 조성과는 다른 살기 좋은 저층주거지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성북동역사문화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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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역사문화지구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특화지역으로 선정된 성북동 일대에 대한 명칭이다. 성북동 역사문화지구는 2013년에 서울시의 고시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북악산과 한양도성에 둘러싸인 성곽도시 서울 중에서도 핵심공간인 성북동 전체 지역을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특화지역으로 조성하고 주거환경을 체계적으로 통합·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정하였다. 이 지구의 주요 문화유산은 한양도성, 선잠단지, 서울 성북동 별서, 이종석별장, 심우장, 이태준가옥, 최순우옛집 등이 있으며, 관련 인물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한용운, 소설가 이태준, 시인 김광섭, 작곡가 윤이상, 화백 김환기 등이 있다.
  • 삼태기마을
    장소
    삼태기마을
    성북구 화랑로 18길(상월곡동) 일대의 마을 이름이다. 성북구 상월곡동과 석관동에 걸쳐 있는 천장산에서 내려다본 마을의 모양이 삼태기를 닮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삼태기마을이라 불려 왔다. 2012년 서울시 건강친화마을만들기 시범사업지로 선정되어, 삼태기 마을주민협의체를 중심으로 보다 살기 좋고 건강한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역이다. 마을에 있는 서울국유림관리소 앞에는 삼태기 숲 입구가 있어 걷기 좋은 산책로를 갖추고 있다. 또한 ‘마실사랑방’이 있는데 각종 의료 측정기를 구비하여 주민 건강 관리와 소통과 화합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보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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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문로
    신설동역 교차로부터 성북구청입구 교차로까지의 도로이다. 보문로는 신설동 로터리를 기점으로, 보문동과 삼선동을 남북으로 종단하고 동소문로와 만나는 폭 25∼30m, 길이 2,100m의 도로이다. 이 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나 1930년 당시에도 돈암동 일대에 4,000여의 인구가 집적되어 있었고 신설동과 돈암동을 잇는 길임을 생각할 때 그 당시에도 도로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현재의 노폭으로 확장된 연대 역시 확실치 않으나 이 지역 일대의 인구 성장 추이를 감안할 때 1960년대 전반일 것으로 짐작된다.
  • 미아리고개/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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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고개/명칭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에 대한 여러 이름과 유래이다. 현재의 강북구 미아동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어서 미아리라는 이름이 생겼고, 이 고개가 미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미아리고개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함경도 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 도로였기 때문에 여진인들이 이 길로 왕래하였고, 그래서 오랑캐가 넘어오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되너미고개’,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 혹은 호유현(胡踰峴)이라고 불렸다.
  • 미아리고개/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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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고개/6.25전쟁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한국전쟁 당시의 미아리고개 상황에 대한 기록들을 모은 것이다. 6.25전쟁 당시의 미아리고개는 북한군의 서울 침투 경로이자 후퇴 경로였다. 서울 침투시에는 격전이 벌어졌고, 후퇴시에는 많은 사람들을 납치하여 끌고 갔다. 그러한 상황에 대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기록들인데, 동아일보는 주로 납북자들의 증언을 특집으로 다룬 것이고, 경향신문의 기사는 전쟁 당시 미아리고개의 상황을 다룬 특집 기사이다.
  • 미아리고개/4.19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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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고개/4.19혁명
    1960년 4.19혁명 시기 미아리고개와 관련한 신문 기록들의 모음이다. 동아일보의 기사들인데, 4.19 직후인 4월 20일자 「데모대원을 실은 트럭, 미아리고개를 넘어 창동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부터 시작하여, 미아리에서 있었던 총성과 군중의 집결 등을 다루었고, 5월 17일자 「4.19 당시 미아리의 총성/한양대학 공과대학 정현식의 수기」라는 제목의 4.19 당시 총격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한 기사까지 수록하고 있다.
  • 미아리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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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고개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이다.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이후 수도로 들어가는 중요한 진입로였기 때문에 시기별로 많은 역사상이 녹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함경도 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 도로였기 때문에 여진인들이 이 길로 왕래하였고, 그래서 오랑캐가 넘어오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되너미고개’,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이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미아리고개 너머 현 길음2동 일대에 총독부에 의해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북한군이 서울로 침투했던 길이자 후퇴했던 길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던 곳으로 이산의 아픔과 고통이 서린 곳이기도 하였다. 1970~80년대에는 역학촌이 성행하였는데, 도로의 확장과 주변 재개발로 옛 모습은 찾기 힘들다.
  • 미아리 역학촌/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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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 역학촌/인터뷰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의 점집 밀집 지역에서 오랫동안 역술업에 종사했던 역학사들의 인터뷰를 모은 것이다. 현대 역술업이 주로 맹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심남용(청산철학관)의 인터뷰를 비롯하여 8명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미아리 역학촌의 출발과 전성기, 쇠락의 시기와 사회분위기 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 미아리 역학촌/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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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 역학촌/기사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의 점집 밀집 지역에 관한 신문기사의 모음이다. 기사에서 다룬 내용들을 보면, 점성촌이 활황을 누린 1970년대 기사부터 수록되었는데, 특히 80년대엔 점집들에 손님이 넘쳤고 선거, 입시, 당선, 합격 등에 관한 다양한 관심과 기원이 소개되었다. 1998년 IMF 직후에는 개인적인 관심 외에도 위기에 놓인 나라의 운세까지 점 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인터넷으로 점을 치고, 점집의 형태나 운영도 다양해지는 등 새로운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점시장’이 조용히 늙어가고 있다는 기사까지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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