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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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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진오
    인물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문학가·법학자·정치인이다. 1920년대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 법과 강사로 활동하였고, 1937년에는 교수에 임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대학교육의 근간이 되는 법령 초안을 작성했으며, 대한민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의 헌법 초고는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다가 고려대학교의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문학·법학·교육·정치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930-1940년대 중일전쟁을 선전하거나 징병제와 지원병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고 좌담·대담·강연 등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을 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신익희
    인물
    신익희
    정릉동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早稲田]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여, 『학지광』의 발간을 주도했다. 만주와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았고, 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했다.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신익희는 1919년 3월 다시 상하이로 떠나 26년 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했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 등을 역임했다. 광복 이후 임시정부 요인의 한 명으로 귀국한 신익희는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초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으로 활약했고, 1956년에는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앞두고 사망하였다.
  • 이극로
    인물
    이극로
    국어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편찬 집행위원을 맡았다. 이후에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내며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으며 1948년에 월북하였다. 주요 저서로는「조선어 임자씨의 토」, 「조선어 단어성립의 분계선」, 「짓말에 대하여」 등이 있다. 1929년 결혼 후 약 10년 동안 숭례초등학교 부근인 종암동 40번지에서 거주하였다.
  • 장기영
    인물
    장기영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영월 출신으로 1924년 상해임시정부에서 안창호, 김구의 권유로 미국에 건너가 인디애나대학을 졸업했다. 1932년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워싱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집하고,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43년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자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충칭[重慶]에 있던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강원도 영월에서 무소속으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체신부장관, 서울특별시장, 신민당 운영위원, 국민당 사무총장, 민중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주소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246-396'이었다.
  • 이승만
    인물
    이승만
    동소문동(당시 돈암동)에서 거주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독립협회에 참가해 활동했고, 고종 폐위 음모에 휘말려 약 6년간 옥고를 치렀다. 미국에 유학하여 5년만에 학사·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고, 1925년 탄핵 면직되었다. 광복 후 귀국하여 반탁반공노선을 견지하였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을 주창했다. 1948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부산정치파동, 사사오입개헌, 3.15부정선거 속에서 세 차례 더 대통령에 선출되지만,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환국 이후 돈암동의 돈암장에서 약 2년간 거주하였다. 돈암장의 구조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승만은 아래채를 썼고, 위채는 비서와 살림 맡은 사람들, 바깥채는 경비원들이 사용했다.
  • 엄항섭
    인물
    엄항섭
    성북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래 임시의정원 의원, 청년동맹회 집행위원, 한국교민단 의경대장, 한국독립당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 선전부장, 주석비서로 임명되어 광복 전까지 독립운동을 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1월 환국하여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6년 귀국한 가족들과 성북동 산꼭대기 별장에 거처를 마련하고 삼청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성북동에 거주하였다.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 김구와 함께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같은 해 9월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1962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 홍봉진
    인물
    홍봉진
    정치인이자 교육가이다. 1918년 서울로 올라와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고, 경성제국대학 법과·영문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고려대, 국민대 등에서 교수생활을 하였고, 해방 후에는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경기 제18선거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사후에 발간된 자서전 『양촌일지』(1986)에는 1929년 정릉에서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 신흥사 옆 고갯길에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 일, 1944년 주요 도시에 소개령이 내리자 미아리의 초가집을 산 일, 1958년부터 20년간 성북동에 살면서 겪은 일 등이 기록되어 있어 개인사를 통해 성북구의 역사를 알 수 있다.
  • 조헌영
    인물
    조헌영
    성북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한의학자이다.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조헌영(호는 해산)은 1927년 일본에 유학하던 중 신간회 동경지회장을 맡았으며, 귀국해서는 명륜동에 살면서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를 만들어 학술지 『동양의약』을 발간하여 한국 근대 한의학의 기초를 수립하는데 공헌하였다. 1935년에는 조선어표준말사정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명륜동에 거주하던 조헌영은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대 초에 성북동으로 이사 왔다. 해방 후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6.25 전쟁 중에 피난가지 않고 성북동에 머물던 중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한의학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1988년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 조소앙
    인물
    조소앙
    돈암동에서 거주하고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한 후 경신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중국에 망명하여 항일단체 대동당을 조직하였다.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독립운동 지도급 인사 39인의 공동성명으로 발표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비롯한 임정의 이론정립 등 전반에 걸쳐 주역을 맡았고,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다. 성북구 돈암동에 거주하면서 1950년 5.30 총선에 사회당으로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였다. 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조병옥을 꺾고 당선되어 제2대 국회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 납북되어 1958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조병옥
    인물
    조병옥
    동선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후 신간회, 수양동우회 사건 등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성북구에서 출마하였다. 출마 당시 주소는 돈암동 89-7번지(현 동소문로120)로 전차 종점 부근, 현재의 동선동 태극당제과 부근으로 추정된다. 조병옥은 이 선거에서 조소앙에게 큰 표 차로 지며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대구에서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앞두고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안재홍
    인물
    안재홍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사학자, 언론인이다. 그는 1910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11년 9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고, 10월 조선인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였다. 1914년 여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임시정부의 연통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귀국 후 『시대일보』 와 『조선일보』에서 약 10년 동안 언론인 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돈암동 산 11-152번지에서 거주하였다. 미군정기에 민정장관을 역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65년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이원만
    인물
    이원만
    사업가이자 정치인이다.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광고용 모자 제조업체인 아사히공예주식회사[旭工藝主式會社] 를 세웠고, 1957년에는 코오롱그룹의 전신인 한국나이롱을 설립하였다. 1960년 민주당 참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그는 5.16이후 공화당 소속 6, 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다. 1994년 성북동 자택에서 타계하였고 같은 해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 받아 금탑산업훈장이 추서되었다.
  • 김일
    인물
    김일
    자유당 성북구 당 위원장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성북 제2동의 동회장이던 그는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서울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일제시대 이래 주민조직의 핵심을 담당했던 동회의 위상이 1950년대 중반까지는 여전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 서범석
    인물
    서범석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민주당의 중진 정치인이다. 그는 정릉동 산 1번지에 거주하였다. 그는 10대 후반에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중국 북경대학 정경과 2년 중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일보· 시대일보·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1950년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 경기도 옹진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된 경력이 있다.
  • 백상규
    인물
    백상규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미국 브라운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1924년부터 보성전문학교에서 영어영문학·경제학·상학·논리학 등을 강의하였다. 1935년 6월 발간된 『삼천리』를 보면 백상규의 별장이 성북동에 있었는데 이 집은 양옥식 별장으로 시가로 치면 몇만 원이 넘었다고 한다. 광복 후 여운형 중심의 조선인민당에 가입하고, 이듬해 서울 천주교회에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여운형과 함께 최고정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경기도 장단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때 서린동 자택에서 맏아들 남진과 함께 납북되어 남북평화통일축진협의회의 발기인 겸 중앙위원을 지냈다. 1957년 12월 26일에 북한에서 병사하여 평양시 용성구역의 ‘재북인사들의 묘’에 안치되었다.
  • 이종린
    인물
    이종린
    언론인이자 정치인, 종교인이다. 충청남도 서산출생으로 한학을 수학하다가 상경하여 1907년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1909년 오세창·장효근이 『대한민보』를 창간할 때 논설기자로 민중계몽과 국민지식계발에 힘썼다. 1910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월보』의 주필 및 발행인으로 언론을 통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신문』 주필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3년간 투옥하였다. 1930년대 성북리(현 성북동)에 거주하였는데 1938년 ‘무인멸왜기도사건’ 이후 천도교 구파가 일제에 타협하였을 때 친일적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제헌 국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제2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당시 납북되어 납북 중 사망하였다.
  • 모윤숙
    인물
    모윤숙
    시인이다. 190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자랐다. 1931년 4월 북간도 용정(龍井)에 위치한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에 교사로 재직했다. 같은 해 12월 잡지 『동광(東光)』에 시 「피로 색인 당신의 얼굴」을 발표했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교사였던 안호상과 혼인하여 성북천변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1935년 『시원』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 월간 문예지 『문예』를 창간하였고, 이후 예술원회원, 펜클럽 한국위원장, 8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저서로는 『논개』, 『시몬은 누구인가』, 『렌의 애가』 등이 있다. 모윤숙은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와 국민의용대 등에서 활약하였고, 학도병출정을 고무하는 글을 썼다. 이상의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었다.
  • 김성수
    인물
    김성수
    교육자, 언론인, 정치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다. 1915년에는 중앙학교를 인수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동아일보사를 창립하였다. 『동아일보』를 통해 물진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자 힘썼다. 1932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북악산 기슭 안암의 언덕에 새 교사를 세웠다. 1945년 8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종합대학인 고려대학교를 창립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다. 그러나 1940년대에 학도지원병을 고무하고 징병제 참여를 독려하는 등 친일행적이 인정되어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고, 2018년 2월 서훈이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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