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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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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가귀감
    유물
    선가귀감
    정법사가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다. 『선가귀감』은 조선 중기 승려 서산대사 휴정이 불가의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 주해를 달고 송과 평을 붙여서 편찬한 책이다. 합본되어 있는 『선교석』은 휴정의 저술로, 불교에 있어서 선과 교(敎)의 차이점을 후학들에게 논술한 책이다. 이 책의 간본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초간본은 1579년(선조 12)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유점사본은 1590년(선조 23), 송광사본은 1607년과 1618년(광해군 10), 삭녕의 용복사본은 1633년(인조 11)에 간행되었다. 정법사 소장본은 용복사에서 간행된 판본이다. 용복사 판은 판식 앞서 1618년에 개판된 송광사본을 저본으로 1633년에 용복사에서 복각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2021년 7월 29일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조왕도
    유물
    흥천사 조왕도
    흥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왕도이다. 차양 밖으로 일렁이는 수파문이 가득한 바다와 수평선 좌우에 큼직한 해와 달이 떠있는 모습이 보인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을 옅게 표현하였다. 해와달은 곡물생장과 식생활에 필요하여 조왕신에 그려지는 도상 특징의 하나이다. 보응문성이 제작하였는데 그는 조선후기 계룡산파 화승인 금호약효의 제자로 19세기후반에서 20세기 전반까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그리고 서울에 이르기 까지 매우 왕성하게 활동하여 수많은 불화를 제작한 근대기의 대표적인 불화승이다. 2018년 2월 19일 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유물
    흥천사 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흥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석조불상이다. 현재 노전에 봉안된 석조불상은 세 구이며,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조아미타여래좌상(石造阿彌陀如來坐像)과 석조지장보살좌상(石造地藏菩薩坐像)이 있다. 나머지 좌상은 그 조성연대를 추정하기 어려우나. 본존인 석조약사여래좌상은 내부에서 1829년에 금어 영운의윤, 관허정관, 편수 지성이 조성했다는 조성발원문이 조사되어 그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따라 2018년 12월 13일 문화재자료 제74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약사불도
    유물
    흥천사 약사불도
    흥천사가 보유하고 있는 불화이다. 약사여래와 권속들을 그린 약사불도이다. 1847년 수봉 법총을 수화승으로 하여 벽담 도□, 대은 창활, 양전, 계□이 함께 그린 것으로, 신흥사(흥천사의 옛이름)에서 개최된 수월도량 불사 때 아미타불화, 지장보살화, 산신도 등과 함께 조성되었다. 조성연대와 화원, 조성배경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어 당시 흥천사의 세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2016년 4월 7일 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다.
  • 정각사 석가불도
    유물
    정각사 석가불도
    정각사가 보유하고 있는 불화이다. 1897년에 조성된 것으로 화폭은 세로 117㎝, 가로 91㎝로 작은 편인데, 일부 채색이 박락되긴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채색은 적색이 주조를 이루고 녹색과 청색, 흰색, 황색 등을 함께 사용하였으며, 필선은 철선묘의 곧고 강한 묘선이 사용되었다. 화기에 의하면 이 불화는 영운 봉수와 동호 진철, 소현, 편수인 봉화, 상조, 긍엽 등이 함께 조성하였다. 이 불화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조성연대가 확실하며, 조선 말기 서울 지역의 대표적 화승인 영운 봉수와 동호 진철이 중심이 되어 조성한 불화이므로 역사적 가치가 깊다. 2007년 5월 10일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었다.
  • 영취사 오층석탑
    유물
    영취사 오층석탑
    영취사(성북구 보국문로 261-222) 경내에 소재한 석탑이다. 영취사의 대웅전 계단 아래쪽 마당에 위치한 오층석탑으로 원래는 요사채 앞쪽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기단은 2층으로, 하층기단은 넓고 높은 편인데 여러 장의 장대석을 이어 결구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손상이 있으며, 사이사이에 잡석을 끼워 지탱하고 있다. 이 탑은 높고 넓은 기단부와 쌓아올리듯이 탑신을 올린 구성법, 소략화된 층급의 표현 등으로 볼 때 고려 말기~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많이 훼손되어 형체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2007년 12월 27일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되었다.
  • 봉국사 석가여래좌상
    유물
    봉국사 석가여래좌상
    봉국사 만월전에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는 석불좌상이다. 두 손을 포개어 놓고 약합으로 생각되는 둥근 보주를 들고 있어 약사여래상으로 신앙되고 있다. 조선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좁고 쳐진 어깨에 이중착의 형식으로 표현된 가사에는 단조롭지만 단정한 3조의 층단 주름이 양 깃과 어깨에 걸쳐진 대의 자락, 옷소매와 발목을 덮은 군의에 일정하게 새겨져 있다. 조선후기 서울 경기 중부지역에서 유행하였던 양식으로 생각된다. 2013년 12월 26일 문화재자료 제57호로 지정되었다.
  • 미타사 산신도
    유물
    미타사 산신도
    미타사에 봉안되어있는 불화이다. 산신도는 산신을 그린 불화로 민간신앙의 대상인 산신이 불교에 편입되면서 제작되었다. 미타사의 산신도는 1915년 초암 세복과 금명 운제에 의해 조성되었는데 19~20세기의 전형적인 화면구성을 보여주며 패널 형식의 그림으로 손상 없이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19~20세기 산신도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경우 긴 꼬리를 위로 쳐들어 살랑거리고 있는 정감 있고 익살스러운 모습인데 비해, 이 그림의 호랑이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경직된 머리에 꼬리를 감추고 있는 색다른 모습이다. 2014년 7월 3일 문화재자료 제62호로 지정되었다.
  • 미타사 독성도
    유물
    미타사 독성도
    미타사에 봉안되어있는 불화이다. 독성도는 부처님의 제자인 독성존자(獨聖尊者)를 그린 불화로 독성존자는 부처님 열반 후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이 독성도는 19~20세기의 전형적인 화면구성을 보여주는 독성도로서 당시 서울․경기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 화승인 초암 세복과 금명 운제가 산신도와 함께 조성한 작품이다. 미타사 소장의 산신도와 유사하게 심산유곡을 뒤 배경으로 한 화면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패널 형식의 그림으로 손상 없이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다. 2014년 7월 3일 문화재자료 제63호로 지정되었다.
  • 미타사 감로도
    유물
    미타사 감로도
    미타사 대웅전에 봉안된 불화로 금어인 고산 축연, 초암 세복에 의해 제작되었다. 화면을 상·중·하단으로 구분하면 상단에는 칠여래 좌우로 관음보살, 인로왕보살, 지장보살이 있으며, 중단인 의식단이 강조되었고 하단의 아귀는 매우 작게 묘사되어있다. 행사를 기록화처럼 묘사하기 위해서 전대보다 더 많은 인물과 장면들로 화면을 채웠다. 이와 같은 유형은 19세기 서울·경기지역에서 성행하던 감로왕도의 도상을 계승한 것으로, 특히 서울지역의 감로도와 비교할 만하다.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로, 한 쌍의 아귀 규모가 줄어든 것은 1918년 당시 감로도의 경향을 나타낸 것이다. 2014년 7월 3일 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되었다.
  • 마포 최사영 고택
    장소, 유물
    마포 최사영 고택
    성북구 선잠로 68-20(성북동 9-21)에 위치한 건축물이다. 이 고택은 대한제국 시기의 관료로서 광업ㆍ금융업ㆍ창고업 등에 종사하며 부를 축적해 재력가로도 널리 알려진 최사영이 1906년 마포동 236에 건립했던 집의 안채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최사영은 이 집에서 1929년까지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여러 차례 소유권이 이전되면서 문화재 지정이 검토되던 2001년에는 1동만 남아 멸실 위기에 있었다. 그에 따라 서울시 민속자료로 가지정(假指定)하여 보존한 후 2002년 문화재위원회의 현상변경 허가를 얻어, 2003-2007년 한국가구박물관에 의해 현 부지 안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고, 2007년 서울시 문화재자료 3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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