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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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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성욱
    인물
    백성욱
  • 박은
    인물
    박은
    조선 초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고 종암동에 거주했던 문신이다. 고려 말 학자 박상충(朴尙衷, 1332-1375)의 아들이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사위이다. 제1, 2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을 도와 공을 세웠다. 우의정에 오른 후에도 조밥으로 식사하며 재물에 욕심내지 않는 박은의 청빈함에 감명을 받은 태종이 북바위 근처의 밭(지금의 종암중학교 부근)을 하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보문사 불화
    유물
    보문사 불화
    보문사(普門寺)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보문사 석가불도>, <보문사 대웅전 신중도>, <보문사 지장보살도>를 소장하고 있다. 석가불도(釋迦佛圖)는 보문사 대웅전 내에 그려진 140×180㎝ 크기의 불화이다. 석가여래가 법화경(法華經)을 설파한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을 묘사했다. 중앙의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아래쪽 좌우에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다. 신중도(神衆圖)도 역시 대웅전 내에 200×140㎝의 크기로 그려진 것이다. 인도의 재래적인 토속신(土俗神)인 신중(神衆)을 그렸다. 신중은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수용된 불교의 호법신(護法神)들인데 별도로 그림을 그려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중도에는 화기(畵記)가 남아있어 불화 조성과 관련된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상궁(尙宮)의 시주로 불화 조성 경비가 마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는 묘승전 내에 지장보살을 그린 것으로 145×200㎝ 크기이다. 중앙에는 지장보살과 그 좌우에 가까이 모시는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를 그렸으며, 이들 삼존상(三尊像)의 뒷면에는 금색의 빛을 발하는 원형광배(圓形光背)를 표현하였다. 보문사의 대웅전이 고종 2년(1865)에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불화들은 이로부터 2년 후인 1867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모두 비단에 채색하였고, 1996년 9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변영호
    인물, 유물
    변영호
    종암동에 거주했던 국가무형문화재이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마을에서 하는 사자놀이를 보고 혼자 연습하다가 17세에 퉁소를 불면서 직접 북청사자놀이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정월 대보름에 사자탈을 쓰고 놀던 민속놀이로, 사자에게는 사악한 것을 물리칠 힘이 있다고 믿어 잡귀를 쫓고 마을의 평안를 비는 행사로 널리 행해졌다. 놀음에는 사자, 양반, 꺾쇠, 꼽추, 사령, 무동, 사당, 중, 의원, 거사 등이 등장하며, 악기로는 퉁소, 북, 징, 장구 등이 쓰이는데, 퉁소가 많이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다. 변영호는 1961년부터 1986년까지 총 21회에 걸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1972년에 공로상, 1974년에 장려상을 수상했다. 1970년 7월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 묘법연화경
    유물
    묘법연화경
    정법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불경이다. 묘법연화경은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 한역한 불교경전으로 ‘법화경’이라고도 하며, 초기 대승경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교경전이다. 정법사 소장본은 송나라 계환(戒環, ?-1182)이 요해(要解)한 주해본을 저본으로 조선 세종 때 간행된 초주갑인자본 계통의 판본을 저본으로 1685년(숙종11)에 경상도 함양의 지리산 안국사에서 대화사 신함(信涵) 등의 주관으로 번각한 목판본으로 전 7권(3책본) 완질본이다. 권1의 말미에 발원문에 이어서 간행 연도와 사찰을 알 수 있는 간기(刊記)와 대시주 등 시주질과 연화질이 기재되어 있다. 현재 전해지는 지리산 안국사에서 개판된 판본은 대부분 결본인 영본 상태로 소장되어 있다. 온전한 판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전국 사찰 중에는 정법사 소장본이 유일하게 결본이 없는 완질본으로 파악된다. 정법사 소장본은 비록 임진왜란 이후에 개판되었으나 매우 드물게 전권이 모두 완전한 상태를 갖추고 있으며 이를 보관하는 책갑또한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2021년 6월 1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몽산화상육도보설
    유물
    몽산화상육도보설
    정법사가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다.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은 중국 송말원초에 활동한 승려 몽산화상 덕이(德異)가 찬술한 법어 중에서 육도와 사성을 합편한 십계를 다룬 부분을 선집한 선종의 지침서이다. 고려말 전래된 이후 조선시대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간행되었다. 현재 약 25종의 판본이 전하고 있으며, 이중 정법사본은 1965년(명종 20)에 황해도 토산에 소재한 석두사에서 간행한 판본이다. 정법사에 소장된 동일한 석두사본이 현재 고려대학도서관에 1부만 소장 되어 있을 정도로 매우 희귀한 귀중본이며 간기와 시주질, 각수질 등이 기록되어 있고 실전된 낙장이 없어 조선 중기 간행된 선종문헌으로 불교학 및 인쇄사 연구 등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에 정법사 소장 『몽산화상육도보설』은 2021년 6월 1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개운사 괘불도와 괘불함
    유물
    개운사 괘불도와 괘불함
    개운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화이다. 19세기 후반기 서울, 경기지역의 대표적인 화승인 응석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연꽃을 든 본존’과 ‘관음보살’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도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형식의 괘불도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이다. 이 괘불자의 시주자는 다섯명의 상궁을 비롯단 다수의 청신녀(여성 재가신도)가 참가하고 있어 왕실과의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개운사 괘불함>은 1879년에 제작된 <석가불괘불도(釋迦佛掛佛圖)>를 보관하는 용도이다. 명문이나 표식은 없지만 괘불도와 동시기에 제적된 것으로 판단된다. <개운사 괘불도와 괘불함>은 2020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선가귀감
    유물
    선가귀감
    정법사가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다. 『선가귀감』은 조선 중기 승려 서산대사 휴정이 불가의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 주해를 달고 송과 평을 붙여서 편찬한 책이다. 합본되어 있는 『선교석』은 휴정의 저술로, 불교에 있어서 선과 교(敎)의 차이점을 후학들에게 논술한 책이다. 이 책의 간본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초간본은 1579년(선조 12)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유점사본은 1590년(선조 23), 송광사본은 1607년과 1618년(광해군 10), 삭녕의 용복사본은 1633년(인조 11)에 간행되었다. 정법사 소장본은 용복사에서 간행된 판본이다. 용복사 판은 판식 앞서 1618년에 개판된 송광사본을 저본으로 1633년에 용복사에서 복각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2021년 7월 29일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
  • 숭신방
    장소
    숭신방
    조선시대 초기부터 성 밖에 있던 한성부 동부 12방 중의 하나로, 현재의 성북구 돈암·동선·삼선·성북·안암·정릉·종암동 일대가 이에 속하였다. 한성부의 영역은 도성과 성저십리(城底十里)로 이루어졌는데 그 범위가 매우 넓어 이에 해당하는 영역을 한성부가 단독으로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1396년 한성부를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었는데 방은 공식적으로 조선 전기 한성부의 가장 하위 행정 조직이었으며, 이때부터 5부 중 동부(東部)에 숭신방(崇信坊)이 확인된다. 이 명칭은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숭신방이 숭신면(崇信面)으로 변경될 때까지 사용되었으며 숭신면은 3년 뒤인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崇仁面)에 편입된다.
  • 박한영
    인물
    박한영
    안암동 개운사에서 활동한 승려이다. 1870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19세에 출가하였으며, 1896년 전라북도 순창에 위치한 구암사를 시작으로 해인사·법주사·백양사·화엄사·범어사 등지에서 불경을 강의하였다. 1908년에는 쇠퇴한 불교를 혁신하려는 뜻을 품고 교단 혁신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1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우리나라 불교와의 연합을 꾀했을 때 한용운(韓龍雲)·성월(惺月)·진응(震應)·금봉(錦峯)등과 함께 이를 저지하였다. 1926년에는 안암동에 위치한 개운사 내 암자인 대원암에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많은 석학을 배출하였다. 그가 머무를 당시 개운사에는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우리나라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대거 모이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전라북도 정읍에 위치한 내장사에서 입적하였다.
  •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 (壯勇營 本營圖形 一括) 정간 기미본
    유물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 (壯勇營 本營圖形 一括) 정간 기미본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유하고 있는 건축화이다.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 (壯勇營 本營圖形 一括)은 정조 재위 시절, 친위부대였던 장용영(壯勇營)이 주둔한 청사의 본영(本營)을 그린 것으로 1799년에 그려진 채색화(도형 기미본) 1점과 1799년, 1801년에 그려진 평면도안(정간 기미본, 정간 신유본) 2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도형 기미본과 정간 신유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고 정간 기미본만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자료는 도성 안에 설치된 장용영 본영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과 관청의 변화를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정확한 축척에 기초하여 건물의 배치를 상세히 그렸으며 건축물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기에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앙부일구(2022-3)
    유물
    앙부일구(2022-3)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유하고 있는 조선시대 해시계이다.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앙부일영(仰釜日影)'이라고도 하며, 솥이 하늘을 바라보는 듯 한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앙부일구는 약 10점이 알려져 있으며 성신여대 박물관 소장 앙부일구는 그 중 1점이다. 이는 1970년 구입한 것으로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본과 재질, 규격, 형태 등이 거의 유사해 동일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앙부일구 시반에는 남북[午子] 방향으로 북극으로 향한 영침(影針)이 달려 있고,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세로 눈금인 시각선이 15분 간격으로, 계절을 알려주는 24절기의 가로 눈금으로 13개의 절기선이 은상감으로 새겨져 있다. 받침대는 네 개의 다리와 열십자[十]의 다리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 개의 다리에는 각기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의 모습을 새겼으며 용 좌우에 구름 문양을 표현하였다. 열십자[十]의 다리받침은 단을 둔 형태로 끝부분에는 거북이 머리를 새겼으며 정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있다.
  • 함석태
    인물
    함석태
    치과의사이자 고미술품 수장가이다. 1889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나 1912년 일본 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 2월,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하였고 같은 해 6월 서울 삼각동에 개원하여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이자 한국인 최초의 치과 개업의로 기록된다. 한편, 뛰어난 심미안으로 도자기와 공예품을 많이 수집하여 1930~40년대 당시 대표적인 고미술품 수장가로 꼽힌다. 소설가 이태준이 편집인으로 있던 『문장文章』(1939. 09)에 기고한 「공예미工藝美」를 보면 함석태의 조선 도자기와 민속품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이듬해 발표한 수필 「청복반일淸福半日」에서는 이태준, 김용준, 손재형 등 당시 성북동을 중심으로 활동한 예술인들과의 교유를 확인할 수 있다.
  • 적조사 신중도
    유물
    적조사 신중도
    적조사가 보유하고 있는 불화이다. 신중도(神衆圖)는 여러 신의 모습을 함께 그린 그림으로, 적조사 신중도는 위태천(韋駄天)을 중심으로 각 2위의 신장, 천녀, 천동이 그려져 있다. 전체 크기는 105×90.3(㎝)이고, 그림의 크기는 95.2×80.4(㎝)이다. 투구와 갑옷, 갑주 등에 금박처리 및 복식의 필선과 각종 문양 등이 섬세하고 명료하여 화승의 우수한 기량을 보여준다. 화기를 통해 흥천사 경내 암자인 적조암 칠성각에 봉안하기 위해 1890년(광서 16년)에 조성되었으며, 긍조(亘照)가 책임화승을 맡고 혜산축연(惠山竺衍)과 경은(敬恩)이 참여한 내용이 확인되었다. 19세기 서울과 경기지방 불화의 화풍을 지니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불화로 2019년 2월 14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의릉 선의왕후 석상
    유물
    의릉 선의왕후 석상
    봉문 앞에 상모양으로 놓인 육면체 석물을 석상(石床) 혹은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이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고석(鼓石) 혹은 족석(足石)으로 부른다. 조선 초기에는 석상에 고석을 5개씩 놓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4개씩 받치고 있다. 선의왕후릉 석상 전체 높이는 91cm이다. 석상은 크기가 260×176cm, 두께는 50cm이다. 4개의 족석이 받치고 있는데, 족석 높이는 41cm로서 경종릉 석상과 거의 동일한 크기이다. 족석은 네 면에 나어두문(羅魚頭文)을 양각했고, 상하단에는 연주대를 돌렸다. 족석 하부 바닥에는 다듬은 지대석 2매를 깔아 석상을 받치고 있다.
  • 의릉 선의왕후 석양
    유물
    의릉 선의왕후 석양
    선의왕후릉의 석수(石獸)는 각각 상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 각 2쌍, 중계와 하계의 문석인과 무석인 뒤쪽 측면으로 배설된 석마 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양은 높이 66cm, 길이 118cm이다. 전체적으로 풍만하면서도 균형 잡힌 모습이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은 몸통과 조화를 이룬다. 눈·코·입은 선각으로 나타내는 등 경종릉 석양과 유사하다. 귀를 둘러싸고 있는 뿔은 둥글게 말려있으며, 마디도 표현했다. 뿔 사이에 사실적으로 표현된 귀는 선명하게 나타난다.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의 막혀 있는 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을 양각으로 조식했다. 엉덩이에는 짧은 타원형의 꼬리와 함께 꼬리 밑에 있는 성기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 의릉 선의왕후 석호
    유물
    의릉 선의왕후 석호
    선의왕후릉의 석수(石獸)는 각각 상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 각 2쌍, 중계와 하계의 문석인과 무석인 뒤쪽 측면으로 배설된 석마 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호는 높이 85cm, 길이 116cm이다. 전체적으로 몸통의 길이가 짧아 비례감이 어색하다. 앞다리는 세우고 뒷다리는 구부려 엉덩이를 대고 앉아있는데, 구부정한 자세이다. 얼굴은 입을 벌리고 웃고 있어 해학적인 느낌을 준다. 양 눈은 오목하게 들어가도록 했고, 코는 오뚝하며, 입은 벌리고 있어 이빨이 드러나 있다. 목에서 가슴으로 연결되는 부위를 볼록하게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꼬리는 경종릉 석호처럼 몸통의 윗부분까지 끝을 둥글게 말아 올리고 있는 형태이다. 발은 뭉툭하며, 발가락과 마디도 표현했다.
  • 의릉 선의왕후 석마
    유물
    의릉 선의왕후 석마
    선의왕후릉의 석수(石獸)는 각각 상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 각 2쌍, 중계와 하계의 문석인과 무석인 뒤쪽 측면으로 배설된 석마 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마는 높이 78cm, 길이 117cm이며, 경종릉 석마와 비슷한 형식을 하고 있다. 균형 잡힌 자세에 배와 엉덩이 등에 풍만함이 잘 표현되었다. 눈·코·입은 선각했으며, 이마와 목덜미에는 양쪽으로 나뉜 갈기를 표현했다. 다리 사이는 각각 막혀 있고 양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을 양각했다. 엉덩이 위쪽부터 바닥까지 길게 꼬리가 내려왔고, 꼬리털은 선각했다.
  • 의릉 선의왕후 문석인
    유물
    의릉 선의왕후 문석인
    문석인은 중계(中階)에 2구를 배치했고, 높이 175cm, 좌우너비 70cm, 앞뒤 길이 60cm이다. 복두를 쓰고 단령(團領)을 입고 앞·뒤쪽에 앞치마와 비슷한 복식을 드리웠다. 복두의 형태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형태이며 끈은 귀 앞을 지나 턱 밑에서 양쪽으로 고를 내어 묶었다. 포와 소매가 길고 넓어서 주름이 많이 잡혀있다. 단령 안에는 소매통이 좁은 옷을 받쳐 입어서 단령 소맷자락 바깥에 좁은 소맷자락이 보이고 손으로 홀을 쥐고 있다. 허리에는 야자대(也字帶)를 둘렀고, 남은 띠는 오른쪽 허리에서 왼쪽 아래로 늘어뜨렸다. 과판의 무늬는 꽃잎이 8장인 꽃으로 꾸몄으며 과판 3개가 뒷면에 드러나 있다. 홀(笏)은 윗부분 가장자리를 살짝 둥글리고 아래쪽은 사다리꼴로 조금 넓어진 형태이다.
  •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
    유물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
    무석인은 하계(下階)에 2구를 배치했고, 높이 186cm, 좌우너비 72cm, 앞뒤 길이 68cm이다. 무석인은 둥근 눈, 콧구멍이 잘 보이는 코와 함께 콧등에 가로로 주름이 잡혀있다. 입가에 곱슬 수염만 있고 나머지는 직선으로 된 수염을 세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 아래로 드리우거나 양옆으로 휘날리게 표현하였다. 복식은 구름무늬 옷감으로 만든 포(袍)를 입고 상반신에는 소슬무늬 갑옷을 입었다. 하반신에는 표범가죽을 두른 후, 허리에 비늘무늬의 갑옷과 허리띠를 한 모습이다. 팔에는 비갑을, 다리에는 경갑을 두르고 있으며 검집은 왼쪽 허리에 매달았다. 하반신에는 갑옷 무늬가 보이지 않고, 어깨에 맹수 얼굴 무늬가 왕릉보다 크고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 의릉 선의왕후 망주석
    유물
    의릉 선의왕후 망주석
    망주석은 높이가 245cm로 경종릉 망주석과 비슷한 크기와 형식을 갖추고 있다. 형태는 팔각을 이루며, 원수-주신, 대석-지대석의 석재 2매로 이루어져 있다. 주신이 대석에 끼워진 형식이다. 원수는 연봉형을 이루며, 연주대를 돌렸다. 운두에는 여의두문을 양각했다. 주신 상부의 우측 세호(細虎)는 아래쪽을 향하고 있으며, 좌측 세호는 위쪽을 향하고 있다. 세호는 네 다리와 몸통 등이 명확하게 표현되었으며, 등갈기와 꼬리털 등이 사실적이다. 대좌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대의 위쪽과 아래쪽으로는 각각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조식했고, 각 면에는 안상을 표현했다. 중대와 하대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지대석은 사각 형태이다.
  • 의릉 선의왕후 장명등
    유물
    의릉 선의왕후 장명등
    경종릉 장명등과 유사한 형식이다. 중계에 배설된 사각 장명등으로 높이는 230cm이다. 정자석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상당의 원수는 연봉형이다. 하단은 원형을 이루며 하엽형의 덮개로 장식했다. 상부와 하부의 중간에는 연주를 둘렀다. 옥개석은 사모지붕 형식을 하고 있으며, 각 면마다 네 변의 지붕 합각부를 삼각형으로 돌출시켰다. 격석은 네 면에 각각 화창을 조성했고 모서리를 모죽임했다. 대석은 3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상대가 비율적으로 가장 크며, 중대는 가장 작은 비율로 구성되었다. 상대에는 위 아래쪽에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조식했고 각 면마다 사각의 구획 안에 연꽃, 모란 등 화문을 양각했다. 중대에는 각 면에 안상을 조각했다. 하대는 각 모서리마다 장식성이 높은 운족(雲足)을 표현했다.
  • 의릉 경종 무석인
    유물
    의릉 경종 무석인
    무석인은 하계(下階)에 2구를 배치했고, 높이 174cm, 좌우너비 68cm, 앞뒤 길이 65cm이다. 눈이 튀어나왔고, 코는 넓고 들려서 콧구멍이 잘 보인다. 복식은 구름무늬 옷감으로 만든 포(袍)를 입고 상반신에는 소슬무늬의 갑옷을 입었다. 하반신에는 표범가죽을 두른 후, 허리에 비늘무늬의 갑옷과 허리띠를 한 모습이다. 팔에는 비갑을, 다리에는 경갑을 두르고 있으며 검집은 왼쪽 허리에 매달았다. 투구는 옆드림을 젖혀서 하단의 끈으로 뒷덜미에서 고를 내어 묶어주었다. 투구에 이마 가리개와 차양을 별개로 조각한 것 역시 실물 구조를 반영한 부분이다. 목둘레를 따라 길쭉한 오각형 무늬를 방사상으로 새겨 장식했다. 이는 다른 능은 물론 선의왕후릉에서도 볼 수 없는 특징이다.
  • 의릉 경종 문석인
    유물
    의릉 경종 문석인
    문석인은 중계(中階)에 2구를 배치했고, 높이 177cm, 좌우너비 70cm, 앞뒤 길이 60cm이다. 문석인은 복두를 쓰고 단령(團領)을 입고 앞·뒤쪽에 앞치마와 비슷한 복식을 드리웠다. 복두의 형태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형태이며 끈은 귀 앞을 지나 턱 밑에서 양쪽으로 고를 내어 묶었다. 포와 소매가 길고 넓어서 주름이 많이 잡혀있다. 단령 안에는 소매통이 좁은 옷을 받쳐 입어서 소맷자락이 보이고 손으로 홀을 쥐고 있다. 허리에는 야자대(也字帶)를 둘렀고, 남은 띠는 오른쪽 허리에서 왼쪽 아래로 늘어뜨렸다. 과판의 무늬는 꽃잎이 8장인 꽃으로 꾸몄으며 과판 4개가 뒷면에 드러나 있다. 홀(笏)은 윗부분 가장자리를 살짝 둥글리고 아래쪽은 사다리꼴로 조금 넓어진 형태이다. 신발은 테두리에 선을 돌렸다.
  • 의릉 경종 석상
    유물
    의릉 경종 석상
    봉문 앞에 상모양으로 놓인 육면체 석물을 석상(石床) 혹은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이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고석(鼓石) 혹은 족석(足石)으로 부른다. 조선 초기에는 석상에 고석을 5개씩 놓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4개씩 받치고 있다. 경종릉 봉분 앞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석상은 전체 높이가 89cm이다. 크기가 261×175cm, 두께는 51cm로서 4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다. 고석 높이는 38cm이며, 네 면에 나어두문(羅魚頭文)을 양각했고, 상하단에는 연주대를 돌렸다. 나어두문은 아랫입술부분이 문고리 형태이다. 고석 하부 바닥에는 다듬은 지대석 2매를 깔아 석상을 받치고 있다.
  • 의릉 경종 장명등
    유물
    의릉 경종 장명등
    장명등의 높이는 230cm이며, 중계의 중앙에 위치한다. 정자석-개석, 격석, 대석-지대석의 3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다. 정자석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상단의 원수는 연봉형이다. 하단은 원형을 이루며 하엽형의 덮개로 장식했다. 상부와 하부의 중간에는 연주를 둘렀다. 옥개석은 네 변의 지붕 합각부를 삼각형으로 돌출시켜 표현했다. 옥개석 처마 끝은 밖으로 약간 반전했다. 격석은 네 면에 각각 화창을 조성했고, 모서리를 모죽임했다. 대석은 3단으로 구성하고, 상대에는 만개한 연화문과 국화문을 양각했다. 중대에는 각 면마다 안상을, 하대는 높은 운족(雲足)을 표현했는데, 장식성이 돋보인다.
  • 의릉 경종 석마
    유물
    의릉 경종 석마
    경종릉의 석수(石獸)는 각각 상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 각 2쌍, 중계와 하계의 문석인과 무석인 뒤쪽 측면으로 배설된 석마 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마는 높이 96cm, 길이 147cm이며,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모습이다. 석양과 마찬가지로 머리가 몸통에 비해 약간 작다. 얼굴은 정면을 바라보고 네 다리를 곧게 뻗어 서 있다. 뒷다리의 허벅지와 배 등은 볼륨감있게 표현했다. 눈·코·입은 선각했으며, 이마와 목덜미에는 양쪽으로 대칭되도록 갈기를 표현했다. 다리사이는 각각 막혀 있고 양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을 양각했다. 엉덩이 위쪽부터 바닥까지 길게 꼬리가 내려왔고, 꼬리털은 선각했다.
  • 의릉 경종 석호
    유물
    의릉 경종 석호
    경종릉의 석수(石獸)는 각각 상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 각 2쌍, 중계와 하계의 문석인과 무석인 뒤쪽 측면으로 배설된 석마 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호는 높이 80cm, 길이 132cm이며, 앞다리는 세우고 뒷다리는 구부려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있다. 자연스러운 몸통의 표현에 비해 짧은 앞다리는 도식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머리 표현은 신체의 굴곡을 고려하지 않아서 몸통과 머리가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눈, 코, 입 모두 돌출되었고, 이빨 역시 과장되게 드러나 있는데, 민화의 호랑이 표정과 유사하다. 앞발의 발가락은 마디를 선명하게 나타냈고 발톱 표현도 명확하다. 석호 꼬리는 다른 능의 경우 대체로 바닥에 놓여진 것에 비해 이 경우는 끝이 둥글게 말린 꼬리를 위쪽으로 올려서 표현했다.
  • 의릉 경종 석양
    유물
    의릉 경종 석양
    경종릉의 석수(石獸)는 각각 상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 각 2쌍, 중계와 하계의 문석인과 무석인 뒤쪽 측면으로 배설된 석마 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양은 높이 66cm, 길이 114cm이다. 전체적으로 풍만하면서도 균형 잡힌 모습이다. 머리와 몸이 과장되거나 경직되어 있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표현되었다. 얼굴은 몸통과 조화를 이루며, 눈·코·입은 선각했다. 뿔은 긴 타원형 형태로 말려있으며, 윗부분을 마디로 표현했다. 다리 사이는 막혀 있으며, 측면에는 음각으로 초화문(草花紋)을 장식했다.
  • 의릉 경종 망주석
    유물
    의릉 경종 망주석
    망주석은 능침 양편에 자리하고 있다. 높이가 239cm이며, 형태는 팔각, 운수-주신, 대석-지대석의 석재 2매로 이루어져 있다. 주신이 대석에 기워진 형식인데, 주신에 비해 대석이 낮은 비율을 하고 있어 안정감이 떨어진다. 주신 상부에는 세호(細虎)를 표현했다. 우측 세호는 위쪽을 향하고 있으며, 좌측 세호는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세호는 네다리와 몸통 등이 명확하게 표현되었으며, 등갈기와 꼬리털 등이 사실적이다. 대좌는 형식을 간소화시켰으며, 통상 3단 형태가 아닌 2단으로 이루어졌다. 상대의 위쪽과 아래쪽으로는 각각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조식했다. 하대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 정릉 석상
    유물
    정릉 석상
    봉문 앞에 상모양으로 놓인 육면체 석물을 석상(石床) 혹은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이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고석(鼓石) 혹은 족석(足石)으로 부른다. 조선 초기에는 석상에 고석을 5개씩 놓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4개씩 받치고 있다. 현재 정릉의 고석은 2개뿐이다. 이 고석은 장명등과 함께 초장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상의 크기는 205×134cm, 두께는 37cm이며, 고석의 크기는 너비 74cm, 높이 55cm이다. 고석은 사방에 귀면을 닮은 어두문(魚頭文)과 상하로 대칭되게 가장자리를 따라 연주문을 조각했다.
  • 정릉 망주석
    유물
    정릉 망주석
    정릉의 능 앞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망주석의 원수(圓首)는 연봉형으로 끝이 오므라들면서 뾰족하게 처리되었다. 운두에는 연판문이 아닌 여의두문을 2단으로 배치했다. 양각된 여의두문은 평면적이나, 모서리와 여의두문의 중앙 부분을 맞추어 각을 살려 입체감을 더했다. 귀는 초문(草文)으로 정교하게 조각했다. 대석의 상·중·하단은 모두 팔각을 이루며, 각각의 면(面)에는 방형의 창을 내었다. 상대석의 방형 창에는 별도의 문양을 새기지 않았으며, 중대석의 상하에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새겼다. 하대석의 방형 창에도 별도의 문양은 없으나 그 아래에 안상을 고부조(高浮彫)로 새겨서 목가구 다리처럼 보이는 효과를 냈다.
  • 정릉 석마
    유물
    정릉 석마
    봉분을 수호하며 사악한 귀신과 기운을 물리치고 죽은 이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석수(石獸) 봉분 주변에 배치했다. 석마는 넓이136cm, 높이87cm, 꼬리의 길이는85cm이다. 목과 등이 수평을 이루고 안면과 꼬리가 아래로 거의 일직선으로 향하고 있다. 몸통의 길이에 비해 다리는 짧고 굵게 표현했다. 가르마를 탄 앞머리는 두 갈래로 나뉘었고 목 부위를 덮고 있는 갈기 역시 양쪽 아래로 떨어진다. 얼굴, 다리, 몸통 등 각 부위 표현은 이전에 비해 더욱 사실적으로 변모되는 양상을 보인다. 몸통은 풍만함이 느껴지며, 다리는 짧아 비례는 맞지 않지만, 앞·뒷다리의 튀어나온 관절, 가운데에서 갈라진 말발굽을 명확하게 처리했다. 네 다리는 석재로 막혀있고 사방으로 풀꽃을 부조(浮彫)로 새겼다.
  • 정릉 석호
    유물
    정릉 석호
    석호는 현종 대에 가설된 것이며, 대개 두 쌍씩 배치하나 정릉의 석호는 한 쌍씩 배치했다. 높이는 74cm, 좌우 길이 142cm이며,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측면에서 보면, 얼굴은 약간 숙인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두발은 앞으로 내밀고 땅에 앉아있는 자세이다. 긴 꼬리는 둔부에서 틀어 뒷다리를 감싸고 끝은 동그랗게 말려 땅에 밀착되었다. 두 석호의 꼬리는 좌우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얼굴은 가슴선과 거의 구분되지 않으며, 앞다리는 짧고 배는 불룩하다. 다리 사이는 석재로 막혀있으며 사이마다 풀을 조각했다. 안면은 둥글넓적한 형상에 입은 다물고 있고 중요 부위를 과감하게 부각시켜 조각했다. 이마는 눈 주위와 머리 부분을 구분 짓는 듯 얕은 선으로 부조했다.
  • 정릉 석양
    유물
    정릉 석양
    석양의 넓이는 49cm, 좌우 넓이는 100cm, 높이는 72cm로 석호와 유사한 크기이다. 얼굴은 아래로 약간 길게 표현했고 큰 뿔은 양쪽으로 말려있으며, 몸체는 통통하고 엉덩이는 약간 솟아있다. 배는 불룩하며, 꼬리는 짧게 올라가 있고 두 다리는 짧게 배치하여 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네 다리 사이는 석재로 막아 몸체를 떠받드는 구실을 하고 있으며 사방으로 풀꽃을 조각하여 장식성을 더하였다. 두 뿔은 목주위에서 한번 휘감았는데, 뿔 모양은 초기 왕릉의 석양 조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다. 네다리의 중간 관절은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발굽의 가운데 골이 뚜렷하게 표현된 것은 초기 석물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사례로, 후대로 갈수록 동물신체의 세부표현이 사실적으로 조각된 양상이 반영된 것이다.
  • 정릉 장명등
    유물
    정릉 장명등
    장명등은 축성 당시 제작된 몇 안 되는 석조물 중 하나로 옛 정릉의 것을 옮겨다 놓은 것이다. 높이는 250cm이며, 하대석의 지대석은 확인되지 않았다. 지면에 묻힌 기대석 외곽도 당초문을 음·양각면으로 나타내어 입체적으로 장식했다. 간주석은 높이보다 폭이 약간 더 넓은 방형이며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형태의 상·하 끝을 모죽임 한 듯 둥글게 치석하여 마감한 사면체이다. 이들 사면의 입면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내부에 화염에 감싸인 삼주문(三珠文)을 두고 있다. 상대석은 간주석의 접합면에 받침을 1단 낮게 두었고 앙련(仰蓮)을 하대석과 같이 8엽을 장식했다. 옥개석은 지붕사모가 중앙에 모여드는 모임 지붕형태로 내림마루가 선명하며 장식이 없다. 옥개석과 화사석 내부는 관통되어 통하도록 되어있다.
  • 정릉 문석인
    유물
    정릉 문석인
    문석인은 공복(公服) 차림에 머리에 복두(幞頭)를 쓰고 손에는 홀(笏)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는 224-239cm, 너비 85-87cm, 두께 64-69cm로서 왼쪽보다 오른쪽이 조금 크고 두껍다. 외곽선은 단순하게 정돈되었고, 신체의 곡선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5등신이고 상하의 비례감이 좋다. 복두는 앞이 낮고 위는 높으며, 이마 위 테두리를 깔끔하게 한줄 돌려 마감처리 했다. 공복은 단령(團領)이고 목 뒤로 속옷의 목판깃이 높게 올라가 있다.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소매 폭은 넓고 길어서 바닥까지 닿아있다. 신체와 복식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도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면을 단순하게 정리했다. 홀과 나란히 배치한 허리띠는 내부에 아무런 장식무늬도 새기지 않았다.
  • 의릉 선의왕후 석물
    유물
    의릉 선의왕후 석물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景宗)과 그의 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의 무덤이다. 선의왕후의 본관은 함종(咸從)이며,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의 딸이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지만 이 무덤은 앞·뒤로 무덤을 조성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이다. 선의왕후릉은 앞쪽에 배치하였고 석물은 경종릉과 동일하다. 왕릉에는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대신 무덤 주위에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했는데,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간지가 방위에 따라 문자로 새겨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 망주석, 장명등, 문무석, 석마, 석양, 석호가 있다. 무덤의 석물 배치와 양식은 명릉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를 택하였다. 왕비릉의 석물 배치는 왕릉과 같으나 무덤 뒤에 담을 두르지 않았다.
  • 의릉 경종 석물
    유물
    의릉 경종 석물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景宗)과 그의 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의 무덤이다. 경종의 이름은 윤(昀), 자는 휘서(輝瑞)이다. 숙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장씨이다. 경종은 1724년 8월 25일 일생을 마쳤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지만 이 무덤은 앞·뒤로 무덤을 조성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이다. 경종릉은 뒤에 배치하였고 석물은 선의왕후릉과 동일하다. 왕릉에는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대신 무덤 주위에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했는데,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간지가 방위에 따라 문자로 새겨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양, 석호, 석마가 있다. 무덤의 석물 배치와 양식은 명릉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를 택하였다.
  • 정릉 석물
    유물
    정릉 석물
    정릉은 조선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황후 강씨(?~1396)의 능이다. 태조는 신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중구 정동에 조성하였으나,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1409년(태종9) 도성 밖 현재의 자리에 옮겼고 남아있던 목재와 석물을 태평관과 청계천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다. 이후 1669년(현종10)에 정릉이 복구되었고 1899년(광무3) 묘호가 신덕고황후로 추존되었다. 능침은 추존된 왕비의 능제에 맞게 조성하였고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 옛 정릉에서 옮겨온 석물이고 나머지 석물들은 현종대에 다시 조성하였다. 다른 왕릉과 비교해보면 무석인, 병풍석, 난간석 등이 설치되지 않았고, 문석인,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 석양, 석호, 석마 등이 있다.
  • 이극로
    인물
    이극로
    국어학자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편찬 집행위원을 맡았다. 이후에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내며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으며 1948년에 월북하였다. 주요 저서로는「조선어 임자씨의 토」, 「조선어 단어성립의 분계선」, 「짓말에 대하여」 등이 있다. 1929년 결혼 후 약 10년 동안 숭례초등학교 부근인 종암동 40번지에서 거주하였다.
  • 차미리사
    인물
    차미리사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차미리사는 조국의 자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교육 구국운동이 시급하며, 특히 여성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실천한 근대 민족교육운동가이다. 1900년대 초 외국 유학을 떠난 신여성으로, 미국에서 대동교육회, 대동보국회 활동을 하였다. 1917년 선교사로 귀국한 후 배화학교 사감으로 있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여성 교육과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근화여학교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에는 덕성여자초급대학(현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를 통해 '돈암동 117-1'번지에 거주하였음을 확인하였다.
  • 장위리 존안
    유물
    장위리 존안
    조선시대 말 장위리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문서 자료이다. 1994년 5월, 서울시는 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토박이 선정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의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유물과 기록들을 수집하였는데 이때 수집, 공개된 문서 가운데 하나였다. 이 문서는 성북구 장위3동에서 5대째 살고 있던 최무영(崔茂榮) 씨(당시 63세)가 보관해 오던 것으로 조선시대인 1905년 한성부 장위리의 마을대표 선정 규칙을 담은 일종의 마을자치규범서이다. 총 10조로 되어있는 이 문서에는 마을의 대표를 선정하거나 환경보호에 관한 규범들이 실려 있으며 중죄를 저지른 사람은 주민회의를 열어 마을에서 축출하고 풍기를 문란하게 한 사람은 경고를 주며 덕행을 쌓은 자는 표창하는 등 미풍양속 규범도 제시하고 있다.
  • 홍애시덕
    인물
    홍애시덕
    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유관순과 함께 비밀결사인 여성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1920년 김활란 등과 7인전도회를 조직해 전국을 순회하며 계몽운동을 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결성에 참여하여 여성 권익옹호 및 사회풍토 개선활동을 했다. 1926년 기독교계 인사들과 함께 망월구락부를 결성하여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과 협력을 모색했다. 이후에도 1927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회장 역임하고, 근우회의 결성준비에 참여하는 등 종교를 통한 여성운동과 항일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안암동 4가에서 거주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상세 주소는 알 수 없다.
  • 장기영
    인물
    장기영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영월 출신으로 1924년 상해임시정부에서 안창호, 김구의 권유로 미국에 건너가 인디애나대학을 졸업했다. 1932년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워싱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집하고,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43년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자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충칭[重慶]에 있던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강원도 영월에서 무소속으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체신부장관, 서울특별시장, 신민당 운영위원, 국민당 사무총장, 민중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주소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246-396'이었다.
  • 이동화
    인물
    이동화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36년 도쿄제국대학 졸업 후 혜화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경성콤그룹 학생부의 비합법 독서회에서 이론을 지도했다. 1941년 성북정 하숙집에서 경성콤그룹의 김한성으로부터 혁명운동에 참여할 것을 의뢰받았는데, 경성콤그룹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체포되었다. 1944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했고, 북한으로 가서 평양민보 주필,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김일성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했다. 월남하여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일했고,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55년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혁신계 엄단조치에 의해 1962년 구속, 1964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 윤하진
    인물
    윤하진
    삼선동3가(현 보문로29길 103)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단체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하여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에서 오동진과 함께 사령부 제2영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후에는 국내진공작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압록강 연안에 설립된 광복군총영에서 활동했다. 평안남도 경찰국과 선천경찰서 폭탄투척에 성공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1926년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44년에는 잔칫집에서 일본의 패전을 강조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유봉영
    인물
    유봉영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1919년 철산의 명흥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3.1운동에 앞장섰다. 경찰과 충돌한 후 2,000원을 가지고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재무부에서 일하면서 재정지원을 하다가 여러 차례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6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1940년 폐간될 때까지 재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일보가 복간한 뒤 재입사하여 1971년 퇴사했다. 학교법인 숙명학원 이사장과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주소가 성북(城北) 장위(長位) 219(현 장위동 219-3)로 표기되어 있으나, 그의 별세 기사를 통해 자택 주소는 장위동 219-403번지인 것을 확인했다.
  • 오기열
    인물
    오기열
    돈암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전라북도 진안군 출신으로 1919년 진안 마령면 평지리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하여 게시판에 붙이고, 시위군중을 인솔하며 선두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해방 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남 진안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에 위촉되었다. 같은 해 12월 조소앙 등과 함께 사회당 발기인대회에 참여했다. 1950년 8월, 전주를 점령한 조선인민군에 의해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되었다. 1977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돈암1동에서 거주하였는데, 상세 지번은 확인할 수 없다.
  • 안석응
    인물
    안석응
    돈암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유여대 등과 함께 의주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읍내 교회에 8백여 명의 교인을 중심으로 한 시위군중이 모이자, 대형 태극기 2개를 교회에 세워놓고 종이로 만든 백여 개의 작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었다. 유여대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삼창을 외치고 행진을 했다. 그는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 의주에서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모집을 위해 활동하였고,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신간회 진천(鎭川)지부장으로 활약하며 독립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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