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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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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범수
    인물
    한범수
    성북구 석관동에 거주했던 대금·해금·퉁애 연주자이다. 충청남도 서산 출신으로 10세 때 김원삼의 퉁소 소리에 반해 그에게서 퉁소와 단소를 배운 것을 시작으로 1926년에는 단소 명인 윤종선을 사사하였다. 1930년대 라디오에서 대금산조의 시조로 꼽히는 박종기(朴鍾基)의 대금산조를 듣고 감명받아 서울로 찾아와 대금을 잠깐 배웠으나 박종기가 여러 곳으로 다니는 관계로 유성기 음반을 들으며 대금산조를 자습한 뒤 1938년 박종기를 찾아갔다고 한다. 1947년 6월 여성국극협회에 입단하여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여러 단체에 참여해 대금 예술을 국내외에 소개하였다. 1964년부터 국립국악원 국악사양성소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강사로 있으며 후진을 양성하였고, 1975년 5월부터는 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대금을 가르쳤다. 1981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투병하다가 석관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 정법사 자수천수관음도
    유물
    정법사 자수천수관음도
    정법사(성북구 대사관로13길 44)가 소장하고 있는 불교유물이다. 천수관음을 수놓은 것으로 정법사의 주지 스님의 스승이 주신 것이라 한다. 제작 시기는 1939년 중반에서 1940년 초반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마모와 탈색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여러 차례 보수한 흔적이 보이나 전체적인 상태가 양호하고 다양한 전통 자수 기법을 한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좌대 연꽃 가운데에 임태순이라는 이름과 기원문이 있다. 우측에서 좌측방향으로 ‘任兌淳壽/富貴多/男子’, 그 아래에 ‘임ᄐᆡ/슌수/부/귀다/남자’라고 수를 놓았고, 천수관음의 손 위 작은 병 위에 ‘감노수병’이라고 수를 놓았다. 2022년 6월 2일 서울특별시 시도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황광은
    인물
    황광은
    안암동 영암교회에서 활동한 종교인이다. 1923년 2월 2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시북동의 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1939년, 16세의 나이로 서울에 자리를 잡은 그는 당시 삼각산에 있던 고아원인 '향린원(香隣園)'에서 생활하며 목회자의 꿈을 키웠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였으며 제주도의 한국보육원과 난지도의 보이스타원, 서울 YMCA와 보이스카우트 등지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는 새문안교회의 부목사로, 1960년부터 1961년까지는 대광고등학교의 교목으로 재직하였으며 1961년부터 안암동에 위치한 영암교회의 목사로 활동하였다. 1970년 7월 15일, 심장질환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 안암동 일한신궁 건축 논란
    사건
    안암동 일한신궁 건축 논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기 전, 안암동에서 '일한신궁(日韓神宮)' 건설이 추진되었던 사건이다. 1905년 일제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며 '보호정치'를 시작하자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친일파를 종용하여 신궁을 축조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신궁건설 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신궁 조성 예정지는 당시 명칭으로 '한성부 숭신방 안암동 중리'의 어좌봉(御座峰)으로 현재의 안암동1가에 속하는 지역이다. 면적은 무려 1,608평에 달할 정도로 그 규모가 매우 컸는데, 이곳은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후궁이던 원빈(元嬪) 홍씨의 무덤인 원빈묘가 있던 작은 언덕의 서쪽 중턱이었으며며 훗날 돈암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 곳이기도 하다. 신궁은 본전(本殿)으로서 오른쪽부터 ‘단군천황(檀君天皇) 정전(正殿), 천조황(天照皇) 정전,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정전’을 배치하고, 다음에 신전 앞뜰의 오른쪽에 이안전(移安殿)과 왼쪽에 배설청(排設廳)을 신축하고자 하였으며 전면 우측에는 찰전(札殿)과 왼쪽에 수복청(守僕廳) 그리고 정면에는 세 개의 문을 건립할 것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어느 시점에 공사가 중단되어 안암동 신궁 건설은 무산되었다.
  • 여대현
    인물
    여대현
    보성전문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41년 4월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 일본에서 항일결사 효민회를 조직해 활동한 최홍준을 만나 일본의 민족차별에 대한 실상을 듣고 식민통치에 항거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민족문화 향상과 실력양성에 주력하였으며, 조선어 연구를 통한 민중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2월 성북동에 있던 여대현의 집에서 최홍준·성장환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안을 토론하며 독립의식을 길렀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할 것으로 판단하고 다가올 독립에 대비하였다. 항일 활동을 지속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해방 이후 1968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김왈영
    인물
    김왈영
    4.19혁명 때 희생된 민주열사이다. 1954년 4월 1일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김왈영은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 시위에 참여하여 경무대 입구 바리케이드를 뚫다가 목에 총상을 입어 사망하였다. 당시 사망자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는데, 보도과정에서 김왈영의 왈(曰)을 일(日)로 착각해 ‘김일녕’이라고 오기했기 때문이었다. 1962년 4.19혁명 공로 건국포장 역시 ‘김일녕’이라는 이름으로 수여되었다. 그의 존재가 발견된 것은 2020년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4.18의거 60주년 특별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언론에 보도된 고대생 희생자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였다, 이후 ‘김일녕’이라는 이름으로 전산화된 학적부의 생년월일과 사진을 국립 4·19민주묘지 안장자 기록과 비교하여 ‘김일녕’이 국립묘지의 ‘김왈영’과 동일 인물임이 확인되었다.
  • 일제강점기 학병거부 운동
    사건
    일제강점기 학병거부 운동
    1943년 일제의 강제 징병에 저항한 학도지원병 거부운동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이후 학생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 시켰고, 조선인 학병 해당자들은 일제의 갖은 강압과 회유에 여러 형태로 저항하였다. 보성전문학교 법과·상과 학생들은 경성제국대학 학생 등과 함께 조선총독에게 학병거부 이유서를 작성하여 보내거나, 총독 관저에서 학도병지원제와 식민정책의 부당성에 대해 의견을 내세우는 등의 학병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1944년 평양사단 보병 42부대에 배속된 보성전문 상과 학생 손희용 등은 소속 부대 및 다른 부대의 학생을 규합해 탈출과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학병으로 차출된 학생들의 지속적인 군대 이탈과 대일 투쟁 전개는 일제에게 위기의식을 안겨주었다.
  •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사건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운동경기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승부를 겨루는 행사이다. 두 학교가 공식적으로 운동경기에서 만난 것은 1925년 열린 제5회 전(全) 조선 정구대회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사립 전문학교인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가 자주 맞붙게 되면서 두 학교의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화제가 되었고, 이들의 경기는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대상 속에서 민족의 혼을 살리는 민족적인 경기로 인식되었다. 1945년 12월 양교 OB구락부와 조선 축구협회의 공동 주관으로 열린 축구전은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의 시발점이 되었고, 1956년 현재의 정기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57년부터는 고려대가 주관시에는 고·연전으로, 연세대가 주관시에는 연·고전으로 부르기로 양교가 합의하였다.
  • 서윤복
    인물
    서윤복
    고려대학교 출신의 체육인이다. 서윤복은 고려대학교 육상부 소속으로 안암동에 있는 손기정의 자택에 합숙하며 손기정의 지도를 받았다. 1946년 5월 제1회 조선마라톤선수권대회, 같은 해 9월 제1회 전국육상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높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듬해인 1947에는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동양인 최초로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당시 그가 세운 세계 신기록은 2시간 25분 39초였다. 1948년 런던 하계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참가하였고, 이듬해에 은퇴 후 육상 지도자로서 후진을 양성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부 감독, 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감독 등을 역임하며 한국 스포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 손기정
    인물
    손기정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육상선수이다. 1932년 양정고보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마라톤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33년부터 1936년까지 13개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였고, 이중 베를린 올림픽을 포함한 10개의 경기에서 우승하였다.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수여 당시 꽃다발로 일장기를 가린 것과 국내 언론사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1937년 보성전문에 입학한 이후 보성전문 육상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해방 이후 안암동에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을 ‘마라톤 선수 합숙소’로 이름 붙이고 마라톤 유망주를 뽑아 훈련시켰는데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1950년 보스턴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은·동을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이 모두 손기정에게 가르침을 받은 선수들이다.
  • 보성전문학교 체육부
    인물
    보성전문학교 체육부
    보성전문학교 체육부는 현재 고려대학교 체육위원회의 전신이다. 보성전문학교 체육부에는 축구부, 농구부, 럭비부를 비롯한 15개 운동부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당시 전교생 580명 가운데 300명이 운동부에 가입해 있을 정도로 보성전문 학생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보성전문 체육부 소속의 여러 운동부원은 국내 경기뿐 아니라 베를린 올림픽, 일왕배 전일본 선수권 대회 등에서도 여러 차례 좋은 성적을 거두며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울분을 푸는데 일조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체육부 출신의 선수들은 이후 대한민국 스포츠의 주축을 차지하게 된다.
  • 유진오
    인물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자 문학가·법학자·정치인이다. 1920년대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 법과 강사로 활동하였고, 1937년에는 교수에 임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대학교육의 근간이 되는 법령 초안을 작성했으며, 대한민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의 헌법 초고는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다가 고려대학교의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문학·법학·교육·정치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930-1940년대 중일전쟁을 선전하거나 징병제와 지원병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고 좌담·대담·강연 등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을 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이전
    사건
    보성전문학교의 안암동 이전
    보성전문학교는 수송동을 시작으로 낙원동, 송현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32년 김성수는 보성전문을 인수할 당시 새로운 부지 선정과 신교사 건립을 약속한 바 있다. 안암동의 부지가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1933년 중앙학원을 통해 6만 2천여 평의 넓은 부지를 매수하였다. 송현동 교사의 부지 6백여 평에 비하면 1백여 배 넓은 면적이었다. 안암동 신교사는 최대 550명의 학생을 수용할 것을 예상하고 교장실, 사무실, 응접실, 회의실, 교실, 중강당 등으로 구성된 본관이 설계되었다. 신교사의 설계는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수로 일하고 있던 박동진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4년 새로운 교사로 이전하던 날 교수·직원·학원은 송현동 구교사에서 고별식을 갖고 행렬을 갖추어 안암동으로 이전하였다.
  • 염인수
    인물
    염인수
    소설가이다. 1912년생으로, 동경에서 유학을 마치고 대전에서 문학운동을 주도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문학가동맹에서 이념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대전형무소에 체포되었다. 그 이후 대전을 떠나 서울, 군산, 익산 등을 떠돌며 도시의 임금노동자로 살게 되지만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장위고개」는 장위동 건설 현장의 노동자로 살았던 5년여의 기간 중 1968년 한 해를 일기 형식으로 남긴 작품이다. 그 밖에 단편소설 「고구마」(1946), 「시험」(1947), 장편소설 『깊은 강은 흐른다』(1989), 수필집 『남산일기』(1991), 『정』(2003) 등을 발표했다.
  • 김용우
    인물, 유물
    김용우
    국가무형문화재 단청장(丹靑匠) 명예보유자이다. 단청장이란 목조건물에 광물성 안료인 진채(眞彩)로 채색을 올리는 장인을 의미한다. 단청문양보존연구회 설립자이자 초대 기능보유자인 흥천사 월주 원덕문스님을 사사하였다. 1988년 8월 1일 단청장 전수교육조교로, 2020년 7월 27일 명예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단청문양보존연구회(정릉동 소재) 이사장을 지내며, 불교미술의 맥을 잇고 있다.
  • 신상웅
    인물
    신상웅
    소설가이다. 1938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경북 의성에서 성장하였다. 중앙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한 그는 1968년 《세대》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히포크라테스 흉상」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시대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사실주의 소설을 썼다. 서울의 주택난과 투기를 목적으로 한 다주택 소유자들을 꼬집은 「도시의 자전」을 비롯하여 그의 전 작품이 2003년 총 10권의 전집으로 재출간되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및 예술대학원 원장을 지냈으며, 제6회 한국창작문학상(1973)을 수상하였다.
  • 박순녀
    인물
    박순녀
    소설가이다. 1928년 함흥에서 태어나 해방 후 월남하였다.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방송국(현재 KBS의 전신)에서 드라마 작가로, 동명여고에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196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케이스 워커」가 당선되고 1964년 《사상계》에 「외인촌 입구」로 신인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어떤 파리」, 「아이 러브 유」, 「기쁜 우리 젊은 날」 등의 소설에서 역사적, 사회적 주제를 다룸으로써 작품 세계를 확장하였다. 1958년 소설가 김이석(1914-1964)과 결혼하였고, 그에게 들은 화가 이중섭 이야기를 토대로 사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이중섭을 찾아서」를 썼다. 이 소설이 실린 동명의 소설집으로 제51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최일남
    인물
    최일남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다. 1932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국문과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1953년 《문예》에 「쑥 이야기」, 1956년 《현대문학》에 「파양」이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만국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에서 문화부장을 지낸 그는 언론인 다운 예리한 시각으로 현실을 비판하되, 그것을 해학과 풍자의 언어로 풀어낸 소설을 다수 발표하였다. 개인주의화된 서울의 세태를 짚은 「돈암동」(2004)을 비롯하여 『만년필과 파피루스』, 「서울의 초상」, 「흐르는 북」 등의 작품이 있다. 월탄문학상, 한국창작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1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황동규
    인물
    황동규
    시인이다. 1938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소설가 황순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국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세 때 쓴 「즐거운 편지」 등이 1958년 『현대문학』에 추천되며 등단하였다. 사랑을 향한 서정적 감수성부터 인간 삶의 근원적 문제,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까지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혔다. 특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연작시 『풍장』을 비롯하여 「점박이 눈」, 「권진규의 테라코타」 등은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시적 탐구를 보여준다. 한국 시단의 거장으로 불리며, 미당문학상(2002), 홍조근정훈장(2003), 만해대상(2006), 호암상 예술상(2016) 등을 수상하였다.
  • 정병호
    유물, 인물
    정병호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칠장(漆匠) 중 남태칠 분야의 명예보유자이다. 칠장은 칠기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하며, 그중에서도 남태칠은 대나무의 표피를 벗겨내고 다듬어 칠기의 백골 및 재료로 만든 후 옻칠을 도장하는 전통공예 기법이다. 2009년 3월 5일 남태칠 기능 보유자 인정 이후 종목의 전승에 크게 기여해 왔으며 최근 건강 악화에 따른 전수교육이 불가하다고 판단함에 따라 2021년 1월 18일 명예보유자로 인정하였다. 주소지는 성북구 종암동이며, 서울공예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 김영기
    인물
    김영기
    화가이다. 1911년 서울에서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중국 화단의 거장 제백석(齊白石)을 사사하고 북경 보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등단한 이래, 문인화적 필치에 현대적인 기법을 더하여 한국적 수묵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특히 ‘동양화’ 대신 '한국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며 한국 미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조선미술사』(1948), 『동양미술사』(1971), 『동양미술론』(1980) 등을 저술하여 미술이론가로도 활동했으며, 이화여대 홍익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돈암동 전차종점 인근 주택에 거주한 바 있으며 기와집이 어우러지는 돈암동 풍경화를 다수 제작하였다.
  • 오장환
    인물
    오장환
    일제강점기 돈암동에 거주한 시인이다. 휘문고보 재학 시절, 당시 교사로 부임한 정지용으로부터 시를 배웠고 1933년 『조선문학』에 시 「목욕간」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8년 일본 유학 중 귀국하여 관훈동에 '남만서방(南蠻書房)'이라는 서점 겸 출판사를 경영하였는데 이때 자신의 두 번째 시집 『헌사』와 김광균의 첫 시집 『와사등』을 출간했다. 돈암동에 거주하며 김광균, 김기림, 임화 등 문인을 비롯해 작곡가 김순남, 화가 이쾌대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교유하였다. 조선일보 팔등잡문에 연재한 내용 중 정릉리(현 정릉동), 돈암정(현 돈암동 일대)에 관해 쓴 내용이 나온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고 이후 월북하였다. 시집으로는 『성벽』, 『헌사』, 『병든 서울』 등이 있다.
  • 한홍택
    인물
    한홍택
    안암동에 거주한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동경도안전문학교에서 디자인을,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귀국 후 1940년부터 유한양행에서 근무하며 광고 제작과 디자인을 담당했다. 1946년 ‘대한산업미술가협회’의 전신인 ‘조선산업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1975년까지 회장직을 지냈으며, 홍익대 공예과와 덕성여대 응용미술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의 디자인 작품의 특징으로는 회화성, 한국적 소재 등을 꼽을 수 있다. 개인전을 꾸준히 개최하며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장한 그는 한국 그래픽 디자인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김만형
    인물
    김만형
    화가이다. 1916년 개성에서 태어나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다.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면서 등단한 그는 색채와 질감을 강조한 그림들을 주로 그렸다. 안암동에 거주한 바 있으며, 조선미술동맹에서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월북했다. 손응성 등과 함께 친일미술단체인 단광회(丹光會)의 일원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청량근린공원
    장소
    청량근린공원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석관동 409)에 위치한 근린공원이다. 1940년 3월 12일에 개원하였고, 1995년 청량근린공원 조성이 계획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청량근린공원은 홍릉 및 의릉이 위치하고 있어 대부분의 면적이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있다. 총 면적은 762,642㎡이며 어르신건강마당, 산책로, 파고라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중에서도 어르신건강마당은 1,980㎡ 규모의 노인 전용 운동공간으로써 어르신들을 위한 다양한 운동 기구들을 갖추고 있다. 성북구에서는 문화재청과 협의하여 문화재구역 일부를 개방하여 의릉 ~ 돌뫼어린이공원 ~ 성북정보도서관을 연결하는 산책로를 조성하였다.
  • 이인성
    인물
    이인성
    1912년 대구에서 출생한 서양화가이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음 입선한 후, 수채화와 유화 작품으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5년까지 다이헤이요미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1934년 9월 7일 동아일보의 실린 이인성의 글 '향토를 찾아서'를 보면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가 여름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하여 서울을 찾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산 일대를 돌며 스케치를 했던 그는 현 정릉동의 아리랑고개를 보고 「아리랑고개」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1947년 9월 12일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 성북회화연구소 설립 당시 지도교사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성북지역 쇄포 업자와 경성포목상조합의 임금분쟁
    사건
    성북지역 쇄포 업자와 경성포목상조합의 임금분쟁
    1933년 발생한 경성부 내 포목상인과 성북동표백업자들간의 임금분쟁이다. 1932년 경성포목상조합과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현 성북동) 및 연희면 일부에 거주하는 쇄포(晒布)업자 간에 표백 값 인하문제는 두고 발생한 분쟁이다. 표백 값 인하를 둘러싸고 양측이 수개월간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6월 15일에는 이 문제가 경성지방법원에까지 보고되었다. 이 갈등의 표면적 이유는 금전 문제였으나 표백업자들이 조합을 만든 뒤부터 임금 형식의 보수를 요구하자 포목상들이 그들의 태도를 불공하게 느낀 것도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갈등은 포목상들이 쌍문리(현 도봉구 쌍문동)에 직속 표백장을 설치하면서 일단락되었다.
  • 김한성
    인물
    김한성
    성북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한 자로, 성북정 125번지(현 성북로 87 일대)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당원들과 공산주의 이론연구와 실천운동, 동지 포섭, 조선에서 혁명운동 전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1940년 7월 기관지 출판을 위해 이종갑에게 등사기와 부속도구 구입에 대한 지령을 내리고, 8월 조희영과 기관지 출판에 관해 협의하였다. 같은달 11일부터 15일까지 등사기를 사용하여 국제정세에 대한 소견과 소련을 지원, 후방을 교란하자는 내용이 담긴 기관기 43부를 출판하여 배포하였다. 이 기관지는 인근에 거주하고 있던 박진홍, 권선정 등에게 배포되었다. 1941년 9월 공산주의 운동이 발각되자 돈암동의 이재옥, 동소문동의 이상호 자택 등지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 숭인면사무소
    장소
    숭인면사무소
    일제강점기 성북 지역을 관할 하였던 행정기관이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지방제도를 개혁할 때 숭신면과 인창면이 통합되어 숭인면이 되었고, 성북지역은 고양군 숭인면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숭인면사무소는 1915년 1월 창신동에서 제기리로 이전되었고, 같은 해 10월 제기리에서 원리(현 안암동)로 이전하였다. 1936년 경성부의 구역이 확장되면서 성북리·돈암리·신설리 등은 경성부에 편입되고, 정릉리·미아리·장위리·석관리 등은 숭인면으로 남게 되었다. 이때 신설리 87번지에 있던 숭인면사무소 자리에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49년 8월 성북구가 신설된 당시 미아리에 숭인출장소가 설치된 것으로 보아 1936년 이후 숭인면사무소는 미아리로 이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 채동선·이소란 가옥
    장소
    채동선·이소란 가옥
    성북구 성북로8길 12-8(성북동 183-17)에 있었던 음악가 채동선·이소란 부부의 집이다. 채동선은 1931년부터 6.25 전쟁으로 피난 가기 전까지 약 20년간 이곳에 거주했다. 그의 부인 이소란이 1980년대까지 거주했다는 사실은 신문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집은 양식 가옥 얼개의 1층에 맞배지붕의 일식 가옥이 올라간 절충식 근대 가옥으로, 주위에 넓은 정원도 함께 있는 전형적인 1930년대 문화주택이다. 이곳은 채동선의 대표 가곡을 작사했던 시인 정지용과 작곡가 홍난파 등 예술가들이 드나들며 교류했던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사실상 빈 폐가가 되어 예술인들의 작품 전시장이나 공연장으로 간간이 활용되었으나 2019년 아파트 건립을 위해 철거작업이 진행되면서 헐리게 되었다.
  • 이육사 집터
    장소
    이육사 집터
    종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집터이다. 이육사는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특히 종암동에서 거주하던 시기인 1939년부터는 「청포도」, 「절정」 등 그의 대표작을 발표하였다. 그는 지금의 종암동 62-1번지에 거주하였으며, 현재 빌라가 밀집되어 있는 주택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지역민들의 복합문화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는 '문화공간 이육사'가 들어서 있다.
  • 김영재 집터
    장소
    김영재 집터
    동소문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김영재의 집터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김영재의 거주지는 '서울 성북(城北) 동소문(東小門) 3가(街) 77'이었다. 한성대입구역과 성신여대입구역 사이의 대로변에 위치한 해당 장소의 건물에는 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건물 뒤쪽은 성북천과 접해있다.
  • 김동수 집터
    장소
    김동수 집터
    삼선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김동수의 집터 추정 장소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김동수는 '서울 돈암(敦岩) 200-16'에서 거주하였다. 옛지도를 통해 집터 추정 장소를 정하였다. 집터 추정 장소에는 현재 빌라 건물이 들어서 있다.
  • 서승효 집터
    장소
    서승효 집터
    독립운동가 서승효의 집터 추정 장소이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서승효의 거주지는 '서울 성북 돈암 산 48'이었다. 현재 집터 추정 장소에는 1965년에 준공된 돈암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임광세 집터
    장소
    임광세 집터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임광세의 집터 추정 장소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서울 동대문(東大門) 돈암(敦岩) 29-55'였다. 길음교사거리 가까이에 위치한 임광세의 집터는 현재 동소문로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길음교사거리를 바라보며 촬영하였다.
  • 차미리사 집터
    장소
    차미리사 집터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차미리사의 집터 추정 장소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차미리사는 돈암동 117-1번지에 거주하였다. 현재는 행정구역이 변경되어 해당 번지의 장소를 찾을 수 없었고 추정 지역을 선정하여 촬영하였다. 차미리사는 근화여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추정 지역 내에 마침 무궁화꽃(근화)이 피어있는 장소가 있어 해당 장소를 촬영하였다.
  • 신익희
    인물
    신익희
    정릉동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早稲田]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여, 『학지광』의 발간을 주도했다. 만주와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았고, 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했다.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신익희는 1919년 3월 다시 상하이로 떠나 26년 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했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 등을 역임했다. 광복 이후 임시정부 요인의 한 명으로 귀국한 신익희는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초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으로 활약했고, 1956년에는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앞두고 사망하였다.
  • 김현국 집터
    장소
    김현국 집터
    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 김현국의 집터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김현국은 아나키즘 단체인 문예운동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지금의 고려대학교와 정릉천 사이로 추정되는 안암정86-11번지에 거주하였다. 현재 넓은 공터에 주유소가 들어서 있다.
  • 김준엽
    인물
    김준엽
    안암동의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44년 일본 게이오대학 2학년 재학 중 학도병에 징집되었다. 중국 쉬저우지역에서 기초훈련을 받고 경비중대에 배치되었으나, 1944년 3월 하순 부대를 탈출했고, 이후 중국 중앙군 소속 유격대에 배치되었다. 6월 장준하, 윤경빈 등과 함께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향해 떠났다. 광복군 훈련반에 입교하여 1945년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었으며, 8월 초 미국 전략정보국의 특별군사훈련을 받고 광복군 국내 정진군 강원도반 반장에 임명되어 국내진입의 날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고려대학교 문리대 조교, 교수를 거쳐, 1982년 고려대학교 제9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1980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 3월 27일 돈암리 부근 산 위 약 50명 규모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7일 돈암리 부근 산 위 약 50명 규모의 만세시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 산 위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27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돈암리 산 위 등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하여, 주모자가 체포되고 해산되었다. 돈암리 산 위에서 발생한 만세운동에는 약 50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지칭하는 돈암리 산은 현재 개운산으로 추정된다.
  • 3월 27일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일대 약 500명규모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7일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일대 약 500명규모의 만세시위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부근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안감천은 현재의 보문동 대광초등학교부터 성북구청, 돈암동성당 쪽까지 안암동을 지나가는 성북천의 일부 구간을 부르는 이름이다. 1919년 3월 27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감천, 돈암리 등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하였으며, 주모자는 체포되었다고 한다. 안감천 부근에서 발생한 만세운동에는 약 500명이 참여하였다.
  • 3월 26일 숭인면사무소 앞 만세시위
    사건
    3월 26일 숭인면사무소 앞 만세시위
    고양군 숭인면 면사무소 앞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26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면사무소 앞(현 성북구 안암로 99(안암동5가 85-7) 부근으로 추정)에서 만세시위에 대한 계획이 있어 군중이 모였다. 그러나 당일 면사무소에 문이 닫혀있었으므로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열라고 군중이 함성을 지르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숭인면 월곡리 24번지에 거주하였던 정만산, 숭인면 용두리 218번지에 거주하던 최정식, 숭인면 안감리 17번지에 거주하던 이재성이 유독 시끄럽게 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를 당했다. 이후 세 사람은 보안법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각각 태 90대를 맞는 형벌을 받았다.
  • 3월 26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안감리(안암리) 일대 약 200명 규모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6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안감리(안암리) 일대 약 200명 규모의 만세시위
    성북구 안암동 일대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26일 밤 안감리(현 안암동 일대)에서 약 200명의 군중이 만세를 외치며, 전차 유리창에 독을 던져 파괴하고, 전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에게 하차를 요구하는 등의 압박을 하는 등 폭행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 5명이 출동하였고, 시위는 곧 해산되었다고 한다.
  • 3월 24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일대 60-100명  규모의 만세시위
    사건
    3월 24일 경기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일대 60-100명 규모의 만세시위
    성북구 성북동 일대에서 발생한 독립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24일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현 성북구 성북동)에서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시위를 하였는데 곧바로 해산시켰다고 한다. 시위의 규모는 기록물에 따라 60-100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 최철
    인물
    최철
    정릉동(현 서경로 124)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광복군 최동균(이명 최일성)의 동생이다. 1938년에 형과 함께 뤄양[洛陽]으로 건너갔다. 1940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했고,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특과대학원대한청반에서 훈련을 받고 제1기로 졸업했다. 그 뒤 황포군관학교 보병과에 입교하였으며 광복군 제2지대에 합류하여 제3구대 제3분대장을 맡아 대원 모집과 선전, 정보수집 등의 공작을 수행했다. 1944년 미국 국방성 전략첩보국의 협조로 국내진공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고, 연합군 최후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카이펑, 허난 지구에서 일본군 내 한국인 장병의 인수 공작을 하다가 귀국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조재옥
    인물
    조재옥
    성북동 286번지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조재옥은 1935년 경성법학전문학교 재학 중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에 뜻을 두었다. 1939년에는 자신이 거주하던 성북정 하숙집에서 윤명의, 조희영과 회견하고 독서회를 조직하여 신사상을 연구했다. 1940년 경성콤그룹에 가입하여 조선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위한 실천 활동을 전개했다. 1941년에는 김한성의 집에서 독소전쟁 발발 후의 정세에서 일본과 소련의 전쟁은 필연적이므로 그에 따른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기관지 발행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폐결핵으로 병보석되었으나, 다음 해인 1944년 7월 1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임광세
    인물
    임광세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44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재학 중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의식하면서 영국, 미국에 종속되는 독립을 할 바에는 조선인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여 조선인의 실력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들은 무장투쟁을 위해 경기도 포천의 깊은 산속에 본거지를 두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하는 한편, 미국으로 하여금 B-29폭격기를 통해 무기를 산속으로 공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임광세는 1944년 10월 포천의 아지트로 입산하려던 도중 체포되어 1945년 6월 기소유예로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2013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서울 동대문(東大門) 돈암(敦岩) 29-55(현 돈암동 29-1)였다.
  • 이정선
    인물
    이정선
    상월곡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2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이정선은 1939년 중국 난징의 국립중앙대학 재학 중 항일비밀결사 한족동맹회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여 지하공작을 전개했다. 이후 1942년 5월 중국 시안에서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입대 지망자들을 모집하는 활동, 대적 선전공작, 일본군 동향에 대한 정보수집 등 적후방공작을 전개했다. 1945년 5월에는 한미군사합작훈련인 OSS훈련 무전반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국내 침투공작을 위하여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이정선의 주소는 '서울 성북(城北) 상월곡 6-24'(현 상월곡동 산6-3)였다.
  • 이윤장
    인물
    이윤장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충북 청주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활약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선 애국지사이다. 중국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항일투쟁에 관한 계몽 및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후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어 산시, 허난 지구에서 일본군 와해 공작활동을 전개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74-54'(현 장위동 74-54번지)였다.
  • 엄송여
    인물
    엄송여
    성북구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 개성출신으로 1929년 개성에서 학생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갔다. 1934년에는 중국 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국인학생특별반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1935년 졸업하였다. 1935년 애국단에 가입하여 밀명을 받고 국내에 들어왔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개성역에서 체포되었다. 다음해 2월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육군에 입대하여 6.25전쟁에 참가하였으며, 1956년 육군대령으로 전역하였다. 1977년에는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2002년 대전 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의하면 '서울 성북 □□ 787'에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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