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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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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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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홍근
    인물
    이홍근
    사업가이자 문화재 수집가이다. 개성박물관장으로 있던 고유섭에게 일본으로의 문화재 반출을 막아야한다는 얘기를 듣고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 성북동에 석조 건물 두 채를 짓고 동원미술관을 건립하였다. 문화재 수집과 보존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 미술관 시설에도 공을 들였다. 작고 후 5천여 점이 그의 유언에 따라 국가에 기증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작품에는 겸재 정선, 오원 장승업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과 공예품, 도자기 등 다양한 문화재가 포함되어 있다.
  • 김영한
    인물
    김영한
    사업가이자 문인이다. 성북동의 ‘청암장’을 인수하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였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법정 스님에게 요청, 대원각 7천여 평의 땅을 송광사에 시주하였다. 시인 백석의 연인이기도 하였던 그녀는 백석을 이해하기 위해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며, 백석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아 『내 사랑 백석』이란 에세이를 출간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9년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화장하여 길상사(성북구 선잠로5길 68)에 뿌려졌다.
  • 이원만
    인물
    이원만
    사업가이자 정치인이다.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광고용 모자 제조업체인 아사히공예주식회사[旭工藝主式會社] 를 세웠고, 1957년에는 코오롱그룹의 전신인 한국나이롱을 설립하였다. 1960년 민주당 참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그는 5.16이후 공화당 소속 6, 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다. 1994년 성북동 자택에서 타계하였고 같은 해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 받아 금탑산업훈장이 추서되었다.
  • 이종석
    인물
    이종석
    성북구 성북동에 별장이 있었던 조선 말기 부호이다. 1875년 서울 장교동에서 태어난 이종석은 가문이 대대로 부유하였는데 형이 익사하면서 엄비가 하사한 땅을 그대로 받아 장안의 갑부가 되었다고 한다. 1932년 9월 보인학원(현 보인중·고등학교)의 교주(校主)로 취임하였다. 1935년에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장교동에 살던 이종석은 성북동에 여름 별장을 두었는데 이 건물은 별장 건축으로 우리나라 건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종석 별장은 1985년 덕수교회에서 인수하여 지금까지 관리하고 있다.
  • 평산정십
    인물
    평산정십
    사업가이다. 1897년 서울로 건너와 조선 목축업을 하던 아버지 평산정길[平山政吉]의 사업을 도왔다. 러일전쟁 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상해, 홍콩, 싱가포르 등 남태평양을 중심으로 무역 사업을 하다 1908년 부친이 사망한 이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동활인서 터에서 목장(牧場)을 경영하였다. 1920년 전염병의 유행으로 100여 명의 빈민이 발생하였고, 이 중 40여 명은 그의 목장에 수용되었다. 평산정십은 이 빈민들을 위해 군용지인 삼선평 2만 6천 평을 당국에 빌려서 빈민부락을 건설하기로 마음먹고 1921년 5월 경성공회당에서 음악회를 열어 그 수입과 기부금을 빈민부락 건설에 보태기도 하였다.
  • 임종상
    인물
    임종상
    기업인이다. 임종상은 그 조부가 미곡무역으로 일약 거부가 되었고, 자신은 대금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는 성북동에 본집이 있었고, 종로구 창신동에는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창신동 별장은 매우 호화로워 안남국(베트남) 국왕의 저택에 비견될 정도였으며, 세간에서는 '창신궁'이라 불렀다고 한다. 임종상은 재산을 일본 황실에 기부하고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방호단비와 국방비 등 고액의 헌금을 헌납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등 전쟁 지원 단체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9년 민족문제 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백인기
    인물
    백인기
    사업가이다. 전라북도 임실 출생으로 무관이었던 아버지 백남신을 따라 1903년 대한제국의 육군 참위로 임관하였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한 뒤에는 금융인으로 변신하여, 한일은행 전문취체역, 한성농공은행 감사,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전북기업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성북동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1925년 5월 27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한일은행에서 은퇴한 백인기는 성북동에 있는 별장에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1930년대 경성부 성북정 323번지(현 길상도서관 자리로 추정)에서 아들 백명곤 등과 함께 화성사라는 회사를 경영하였다. 이상의 이력은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김성수
    인물
    김성수
    교육자, 언론인, 정치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다. 1915년에는 중앙학교를 인수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동아일보사를 창립하였다. 『동아일보』를 통해 물진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자 힘썼다. 1932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북악산 기슭 안암의 언덕에 새 교사를 세웠다. 1945년 8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종합대학인 고려대학교를 창립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다. 그러나 1940년대에 학도지원병을 고무하고 징병제 참여를 독려하는 등 친일행적이 인정되어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고, 2018년 2월 서훈이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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