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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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릉 선의왕후 석상
    유물
    의릉 선의왕후 석상
    봉문 앞에 상모양으로 놓인 육면체 석물을 석상(石床) 혹은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이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고석(鼓石) 혹은 족석(足石)으로 부른다. 조선 초기에는 석상에 고석을 5개씩 놓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4개씩 받치고 있다. 선의왕후릉 석상 전체 높이는 91cm이다. 석상은 크기가 260×176cm, 두께는 50cm이다. 4개의 족석이 받치고 있는데, 족석 높이는 41cm로서 경종릉 석상과 거의 동일한 크기이다. 족석은 네 면에 나어두문(羅魚頭文)을 양각했고, 상하단에는 연주대를 돌렸다. 족석 하부 바닥에는 다듬은 지대석 2매를 깔아 석상을 받치고 있다.
  • 의릉 선의왕후 석양
    유물
    의릉 선의왕후 석양
    선의왕후릉의 석수(石獸)는 각각 상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 각 2쌍, 중계와 하계의 문석인과 무석인 뒤쪽 측면으로 배설된 석마 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양은 높이 66cm, 길이 118cm이다. 전체적으로 풍만하면서도 균형 잡힌 모습이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은 몸통과 조화를 이룬다. 눈·코·입은 선각으로 나타내는 등 경종릉 석양과 유사하다. 귀를 둘러싸고 있는 뿔은 둥글게 말려있으며, 마디도 표현했다. 뿔 사이에 사실적으로 표현된 귀는 선명하게 나타난다.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의 막혀 있는 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을 양각으로 조식했다. 엉덩이에는 짧은 타원형의 꼬리와 함께 꼬리 밑에 있는 성기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 의릉 선의왕후 석호
    유물
    의릉 선의왕후 석호
    선의왕후릉의 석수(石獸)는 각각 상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 각 2쌍, 중계와 하계의 문석인과 무석인 뒤쪽 측면으로 배설된 석마 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호는 높이 85cm, 길이 116cm이다. 전체적으로 몸통의 길이가 짧아 비례감이 어색하다. 앞다리는 세우고 뒷다리는 구부려 엉덩이를 대고 앉아있는데, 구부정한 자세이다. 얼굴은 입을 벌리고 웃고 있어 해학적인 느낌을 준다. 양 눈은 오목하게 들어가도록 했고, 코는 오뚝하며, 입은 벌리고 있어 이빨이 드러나 있다. 목에서 가슴으로 연결되는 부위를 볼록하게 사실적으로 나타냈다. 꼬리는 경종릉 석호처럼 몸통의 윗부분까지 끝을 둥글게 말아 올리고 있는 형태이다. 발은 뭉툭하며, 발가락과 마디도 표현했다.
  • 의릉 선의왕후 석마
    유물
    의릉 선의왕후 석마
    선의왕후릉의 석수(石獸)는 각각 상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 각 2쌍, 중계와 하계의 문석인과 무석인 뒤쪽 측면으로 배설된 석마 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마는 높이 78cm, 길이 117cm이며, 경종릉 석마와 비슷한 형식을 하고 있다. 균형 잡힌 자세에 배와 엉덩이 등에 풍만함이 잘 표현되었다. 눈·코·입은 선각했으며, 이마와 목덜미에는 양쪽으로 나뉜 갈기를 표현했다. 다리 사이는 각각 막혀 있고 양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을 양각했다. 엉덩이 위쪽부터 바닥까지 길게 꼬리가 내려왔고, 꼬리털은 선각했다.
  • 의릉 선의왕후 문석인
    유물
    의릉 선의왕후 문석인
    문석인은 중계(中階)에 2구를 배치했고, 높이 175cm, 좌우너비 70cm, 앞뒤 길이 60cm이다. 복두를 쓰고 단령(團領)을 입고 앞·뒤쪽에 앞치마와 비슷한 복식을 드리웠다. 복두의 형태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형태이며 끈은 귀 앞을 지나 턱 밑에서 양쪽으로 고를 내어 묶었다. 포와 소매가 길고 넓어서 주름이 많이 잡혀있다. 단령 안에는 소매통이 좁은 옷을 받쳐 입어서 단령 소맷자락 바깥에 좁은 소맷자락이 보이고 손으로 홀을 쥐고 있다. 허리에는 야자대(也字帶)를 둘렀고, 남은 띠는 오른쪽 허리에서 왼쪽 아래로 늘어뜨렸다. 과판의 무늬는 꽃잎이 8장인 꽃으로 꾸몄으며 과판 3개가 뒷면에 드러나 있다. 홀(笏)은 윗부분 가장자리를 살짝 둥글리고 아래쪽은 사다리꼴로 조금 넓어진 형태이다.
  •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
    유물
    의릉 선의왕후 무석인
    무석인은 하계(下階)에 2구를 배치했고, 높이 186cm, 좌우너비 72cm, 앞뒤 길이 68cm이다. 무석인은 둥근 눈, 콧구멍이 잘 보이는 코와 함께 콧등에 가로로 주름이 잡혀있다. 입가에 곱슬 수염만 있고 나머지는 직선으로 된 수염을 세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 아래로 드리우거나 양옆으로 휘날리게 표현하였다. 복식은 구름무늬 옷감으로 만든 포(袍)를 입고 상반신에는 소슬무늬 갑옷을 입었다. 하반신에는 표범가죽을 두른 후, 허리에 비늘무늬의 갑옷과 허리띠를 한 모습이다. 팔에는 비갑을, 다리에는 경갑을 두르고 있으며 검집은 왼쪽 허리에 매달았다. 하반신에는 갑옷 무늬가 보이지 않고, 어깨에 맹수 얼굴 무늬가 왕릉보다 크고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 의릉 선의왕후 망주석
    유물
    의릉 선의왕후 망주석
    망주석은 높이가 245cm로 경종릉 망주석과 비슷한 크기와 형식을 갖추고 있다. 형태는 팔각을 이루며, 원수-주신, 대석-지대석의 석재 2매로 이루어져 있다. 주신이 대석에 끼워진 형식이다. 원수는 연봉형을 이루며, 연주대를 돌렸다. 운두에는 여의두문을 양각했다. 주신 상부의 우측 세호(細虎)는 아래쪽을 향하고 있으며, 좌측 세호는 위쪽을 향하고 있다. 세호는 네 다리와 몸통 등이 명확하게 표현되었으며, 등갈기와 꼬리털 등이 사실적이다. 대좌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대의 위쪽과 아래쪽으로는 각각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조식했고, 각 면에는 안상을 표현했다. 중대와 하대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지대석은 사각 형태이다.
  • 의릉 선의왕후 장명등
    유물
    의릉 선의왕후 장명등
    경종릉 장명등과 유사한 형식이다. 중계에 배설된 사각 장명등으로 높이는 230cm이다. 정자석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상당의 원수는 연봉형이다. 하단은 원형을 이루며 하엽형의 덮개로 장식했다. 상부와 하부의 중간에는 연주를 둘렀다. 옥개석은 사모지붕 형식을 하고 있으며, 각 면마다 네 변의 지붕 합각부를 삼각형으로 돌출시켰다. 격석은 네 면에 각각 화창을 조성했고 모서리를 모죽임했다. 대석은 3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상대가 비율적으로 가장 크며, 중대는 가장 작은 비율로 구성되었다. 상대에는 위 아래쪽에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조식했고 각 면마다 사각의 구획 안에 연꽃, 모란 등 화문을 양각했다. 중대에는 각 면에 안상을 조각했다. 하대는 각 모서리마다 장식성이 높은 운족(雲足)을 표현했다.
  • 의릉 경종 무석인
    유물
    의릉 경종 무석인
    무석인은 하계(下階)에 2구를 배치했고, 높이 174cm, 좌우너비 68cm, 앞뒤 길이 65cm이다. 눈이 튀어나왔고, 코는 넓고 들려서 콧구멍이 잘 보인다. 복식은 구름무늬 옷감으로 만든 포(袍)를 입고 상반신에는 소슬무늬의 갑옷을 입었다. 하반신에는 표범가죽을 두른 후, 허리에 비늘무늬의 갑옷과 허리띠를 한 모습이다. 팔에는 비갑을, 다리에는 경갑을 두르고 있으며 검집은 왼쪽 허리에 매달았다. 투구는 옆드림을 젖혀서 하단의 끈으로 뒷덜미에서 고를 내어 묶어주었다. 투구에 이마 가리개와 차양을 별개로 조각한 것 역시 실물 구조를 반영한 부분이다. 목둘레를 따라 길쭉한 오각형 무늬를 방사상으로 새겨 장식했다. 이는 다른 능은 물론 선의왕후릉에서도 볼 수 없는 특징이다.
  • 의릉 경종 문석인
    유물
    의릉 경종 문석인
    문석인은 중계(中階)에 2구를 배치했고, 높이 177cm, 좌우너비 70cm, 앞뒤 길이 60cm이다. 문석인은 복두를 쓰고 단령(團領)을 입고 앞·뒤쪽에 앞치마와 비슷한 복식을 드리웠다. 복두의 형태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형태이며 끈은 귀 앞을 지나 턱 밑에서 양쪽으로 고를 내어 묶었다. 포와 소매가 길고 넓어서 주름이 많이 잡혀있다. 단령 안에는 소매통이 좁은 옷을 받쳐 입어서 소맷자락이 보이고 손으로 홀을 쥐고 있다. 허리에는 야자대(也字帶)를 둘렀고, 남은 띠는 오른쪽 허리에서 왼쪽 아래로 늘어뜨렸다. 과판의 무늬는 꽃잎이 8장인 꽃으로 꾸몄으며 과판 4개가 뒷면에 드러나 있다. 홀(笏)은 윗부분 가장자리를 살짝 둥글리고 아래쪽은 사다리꼴로 조금 넓어진 형태이다. 신발은 테두리에 선을 돌렸다.
  • 의릉 경종 석상
    유물
    의릉 경종 석상
    봉문 앞에 상모양으로 놓인 육면체 석물을 석상(石床) 혹은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이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고석(鼓石) 혹은 족석(足石)으로 부른다. 조선 초기에는 석상에 고석을 5개씩 놓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4개씩 받치고 있다. 경종릉 봉분 앞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석상은 전체 높이가 89cm이다. 크기가 261×175cm, 두께는 51cm로서 4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다. 고석 높이는 38cm이며, 네 면에 나어두문(羅魚頭文)을 양각했고, 상하단에는 연주대를 돌렸다. 나어두문은 아랫입술부분이 문고리 형태이다. 고석 하부 바닥에는 다듬은 지대석 2매를 깔아 석상을 받치고 있다.
  • 의릉 경종 장명등
    유물
    의릉 경종 장명등
    장명등의 높이는 230cm이며, 중계의 중앙에 위치한다. 정자석-개석, 격석, 대석-지대석의 3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다. 정자석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상단의 원수는 연봉형이다. 하단은 원형을 이루며 하엽형의 덮개로 장식했다. 상부와 하부의 중간에는 연주를 둘렀다. 옥개석은 네 변의 지붕 합각부를 삼각형으로 돌출시켜 표현했다. 옥개석 처마 끝은 밖으로 약간 반전했다. 격석은 네 면에 각각 화창을 조성했고, 모서리를 모죽임했다. 대석은 3단으로 구성하고, 상대에는 만개한 연화문과 국화문을 양각했다. 중대에는 각 면마다 안상을, 하대는 높은 운족(雲足)을 표현했는데, 장식성이 돋보인다.
  • 의릉 경종 석마
    유물
    의릉 경종 석마
    경종릉의 석수(石獸)는 각각 상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 각 2쌍, 중계와 하계의 문석인과 무석인 뒤쪽 측면으로 배설된 석마 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마는 높이 96cm, 길이 147cm이며,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모습이다. 석양과 마찬가지로 머리가 몸통에 비해 약간 작다. 얼굴은 정면을 바라보고 네 다리를 곧게 뻗어 서 있다. 뒷다리의 허벅지와 배 등은 볼륨감있게 표현했다. 눈·코·입은 선각했으며, 이마와 목덜미에는 양쪽으로 대칭되도록 갈기를 표현했다. 다리사이는 각각 막혀 있고 양 측면에는 초화문(草花紋)을 양각했다. 엉덩이 위쪽부터 바닥까지 길게 꼬리가 내려왔고, 꼬리털은 선각했다.
  • 의릉 경종 석호
    유물
    의릉 경종 석호
    경종릉의 석수(石獸)는 각각 상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 각 2쌍, 중계와 하계의 문석인과 무석인 뒤쪽 측면으로 배설된 석마 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호는 높이 80cm, 길이 132cm이며, 앞다리는 세우고 뒷다리는 구부려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있다. 자연스러운 몸통의 표현에 비해 짧은 앞다리는 도식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머리 표현은 신체의 굴곡을 고려하지 않아서 몸통과 머리가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눈, 코, 입 모두 돌출되었고, 이빨 역시 과장되게 드러나 있는데, 민화의 호랑이 표정과 유사하다. 앞발의 발가락은 마디를 선명하게 나타냈고 발톱 표현도 명확하다. 석호 꼬리는 다른 능의 경우 대체로 바닥에 놓여진 것에 비해 이 경우는 끝이 둥글게 말린 꼬리를 위쪽으로 올려서 표현했다.
  • 의릉 경종 석양
    유물
    의릉 경종 석양
    경종릉의 석수(石獸)는 각각 상계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 각 2쌍, 중계와 하계의 문석인과 무석인 뒤쪽 측면으로 배설된 석마 2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양은 높이 66cm, 길이 114cm이다. 전체적으로 풍만하면서도 균형 잡힌 모습이다. 머리와 몸이 과장되거나 경직되어 있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표현되었다. 얼굴은 몸통과 조화를 이루며, 눈·코·입은 선각했다. 뿔은 긴 타원형 형태로 말려있으며, 윗부분을 마디로 표현했다. 다리 사이는 막혀 있으며, 측면에는 음각으로 초화문(草花紋)을 장식했다.
  • 의릉 경종 망주석
    유물
    의릉 경종 망주석
    망주석은 능침 양편에 자리하고 있다. 높이가 239cm이며, 형태는 팔각, 운수-주신, 대석-지대석의 석재 2매로 이루어져 있다. 주신이 대석에 기워진 형식인데, 주신에 비해 대석이 낮은 비율을 하고 있어 안정감이 떨어진다. 주신 상부에는 세호(細虎)를 표현했다. 우측 세호는 위쪽을 향하고 있으며, 좌측 세호는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세호는 네다리와 몸통 등이 명확하게 표현되었으며, 등갈기와 꼬리털 등이 사실적이다. 대좌는 형식을 간소화시켰으며, 통상 3단 형태가 아닌 2단으로 이루어졌다. 상대의 위쪽과 아래쪽으로는 각각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조식했다. 하대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 정릉 석상
    유물
    정릉 석상
    봉문 앞에 상모양으로 놓인 육면체 석물을 석상(石床) 혹은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이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고석(鼓石) 혹은 족석(足石)으로 부른다. 조선 초기에는 석상에 고석을 5개씩 놓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4개씩 받치고 있다. 현재 정릉의 고석은 2개뿐이다. 이 고석은 장명등과 함께 초장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상의 크기는 205×134cm, 두께는 37cm이며, 고석의 크기는 너비 74cm, 높이 55cm이다. 고석은 사방에 귀면을 닮은 어두문(魚頭文)과 상하로 대칭되게 가장자리를 따라 연주문을 조각했다.
  • 정릉 망주석
    유물
    정릉 망주석
    정릉의 능 앞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망주석의 원수(圓首)는 연봉형으로 끝이 오므라들면서 뾰족하게 처리되었다. 운두에는 연판문이 아닌 여의두문을 2단으로 배치했다. 양각된 여의두문은 평면적이나, 모서리와 여의두문의 중앙 부분을 맞추어 각을 살려 입체감을 더했다. 귀는 초문(草文)으로 정교하게 조각했다. 대석의 상·중·하단은 모두 팔각을 이루며, 각각의 면(面)에는 방형의 창을 내었다. 상대석의 방형 창에는 별도의 문양을 새기지 않았으며, 중대석의 상하에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새겼다. 하대석의 방형 창에도 별도의 문양은 없으나 그 아래에 안상을 고부조(高浮彫)로 새겨서 목가구 다리처럼 보이는 효과를 냈다.
  • 정릉 석마
    유물
    정릉 석마
    봉분을 수호하며 사악한 귀신과 기운을 물리치고 죽은 이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석수(石獸) 봉분 주변에 배치했다. 석마는 넓이136cm, 높이87cm, 꼬리의 길이는85cm이다. 목과 등이 수평을 이루고 안면과 꼬리가 아래로 거의 일직선으로 향하고 있다. 몸통의 길이에 비해 다리는 짧고 굵게 표현했다. 가르마를 탄 앞머리는 두 갈래로 나뉘었고 목 부위를 덮고 있는 갈기 역시 양쪽 아래로 떨어진다. 얼굴, 다리, 몸통 등 각 부위 표현은 이전에 비해 더욱 사실적으로 변모되는 양상을 보인다. 몸통은 풍만함이 느껴지며, 다리는 짧아 비례는 맞지 않지만, 앞·뒷다리의 튀어나온 관절, 가운데에서 갈라진 말발굽을 명확하게 처리했다. 네 다리는 석재로 막혀있고 사방으로 풀꽃을 부조(浮彫)로 새겼다.
  • 정릉 석호
    유물
    정릉 석호
    석호는 현종 대에 가설된 것이며, 대개 두 쌍씩 배치하나 정릉의 석호는 한 쌍씩 배치했다. 높이는 74cm, 좌우 길이 142cm이며,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측면에서 보면, 얼굴은 약간 숙인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두발은 앞으로 내밀고 땅에 앉아있는 자세이다. 긴 꼬리는 둔부에서 틀어 뒷다리를 감싸고 끝은 동그랗게 말려 땅에 밀착되었다. 두 석호의 꼬리는 좌우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얼굴은 가슴선과 거의 구분되지 않으며, 앞다리는 짧고 배는 불룩하다. 다리 사이는 석재로 막혀있으며 사이마다 풀을 조각했다. 안면은 둥글넓적한 형상에 입은 다물고 있고 중요 부위를 과감하게 부각시켜 조각했다. 이마는 눈 주위와 머리 부분을 구분 짓는 듯 얕은 선으로 부조했다.
  • 정릉 석양
    유물
    정릉 석양
    석양의 넓이는 49cm, 좌우 넓이는 100cm, 높이는 72cm로 석호와 유사한 크기이다. 얼굴은 아래로 약간 길게 표현했고 큰 뿔은 양쪽으로 말려있으며, 몸체는 통통하고 엉덩이는 약간 솟아있다. 배는 불룩하며, 꼬리는 짧게 올라가 있고 두 다리는 짧게 배치하여 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네 다리 사이는 석재로 막아 몸체를 떠받드는 구실을 하고 있으며 사방으로 풀꽃을 조각하여 장식성을 더하였다. 두 뿔은 목주위에서 한번 휘감았는데, 뿔 모양은 초기 왕릉의 석양 조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다. 네다리의 중간 관절은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발굽의 가운데 골이 뚜렷하게 표현된 것은 초기 석물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사례로, 후대로 갈수록 동물신체의 세부표현이 사실적으로 조각된 양상이 반영된 것이다.
  • 정릉 장명등
    유물
    정릉 장명등
    장명등은 축성 당시 제작된 몇 안 되는 석조물 중 하나로 옛 정릉의 것을 옮겨다 놓은 것이다. 높이는 250cm이며, 하대석의 지대석은 확인되지 않았다. 지면에 묻힌 기대석 외곽도 당초문을 음·양각면으로 나타내어 입체적으로 장식했다. 간주석은 높이보다 폭이 약간 더 넓은 방형이며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형태의 상·하 끝을 모죽임 한 듯 둥글게 치석하여 마감한 사면체이다. 이들 사면의 입면에는 안상을 새기고 그 내부에 화염에 감싸인 삼주문(三珠文)을 두고 있다. 상대석은 간주석의 접합면에 받침을 1단 낮게 두었고 앙련(仰蓮)을 하대석과 같이 8엽을 장식했다. 옥개석은 지붕사모가 중앙에 모여드는 모임 지붕형태로 내림마루가 선명하며 장식이 없다. 옥개석과 화사석 내부는 관통되어 통하도록 되어있다.
  • 정릉 문석인
    유물
    정릉 문석인
    문석인은 공복(公服) 차림에 머리에 복두(幞頭)를 쓰고 손에는 홀(笏)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는 224-239cm, 너비 85-87cm, 두께 64-69cm로서 왼쪽보다 오른쪽이 조금 크고 두껍다. 외곽선은 단순하게 정돈되었고, 신체의 곡선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5등신이고 상하의 비례감이 좋다. 복두는 앞이 낮고 위는 높으며, 이마 위 테두리를 깔끔하게 한줄 돌려 마감처리 했다. 공복은 단령(團領)이고 목 뒤로 속옷의 목판깃이 높게 올라가 있다.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소매 폭은 넓고 길어서 바닥까지 닿아있다. 신체와 복식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도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면을 단순하게 정리했다. 홀과 나란히 배치한 허리띠는 내부에 아무런 장식무늬도 새기지 않았다.
  • 의릉 선의왕후 석물
    유물
    의릉 선의왕후 석물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景宗)과 그의 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의 무덤이다. 선의왕후의 본관은 함종(咸從)이며,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의 딸이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지만 이 무덤은 앞·뒤로 무덤을 조성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이다. 선의왕후릉은 앞쪽에 배치하였고 석물은 경종릉과 동일하다. 왕릉에는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대신 무덤 주위에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했는데,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간지가 방위에 따라 문자로 새겨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 망주석, 장명등, 문무석, 석마, 석양, 석호가 있다. 무덤의 석물 배치와 양식은 명릉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를 택하였다. 왕비릉의 석물 배치는 왕릉과 같으나 무덤 뒤에 담을 두르지 않았다.
  • 의릉 경종 석물
    유물
    의릉 경종 석물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景宗)과 그의 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의 무덤이다. 경종의 이름은 윤(昀), 자는 휘서(輝瑞)이다. 숙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장씨이다. 경종은 1724년 8월 25일 일생을 마쳤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지만 이 무덤은 앞·뒤로 무덤을 조성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이다. 경종릉은 뒤에 배치하였고 석물은 선의왕후릉과 동일하다. 왕릉에는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대신 무덤 주위에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했는데,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간지가 방위에 따라 문자로 새겨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양, 석호, 석마가 있다. 무덤의 석물 배치와 양식은 명릉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를 택하였다.
  • 정릉 석물
    유물
    정릉 석물
    정릉은 조선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황후 강씨(?~1396)의 능이다. 태조는 신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 서울 중구 정동에 조성하였으나,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1409년(태종9) 도성 밖 현재의 자리에 옮겼고 남아있던 목재와 석물을 태평관과 청계천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다. 이후 1669년(현종10)에 정릉이 복구되었고 1899년(광무3) 묘호가 신덕고황후로 추존되었다. 능침은 추존된 왕비의 능제에 맞게 조성하였고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 옛 정릉에서 옮겨온 석물이고 나머지 석물들은 현종대에 다시 조성하였다. 다른 왕릉과 비교해보면 무석인, 병풍석, 난간석 등이 설치되지 않았고, 문석인,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 석양, 석호, 석마 등이 있다.
  • 혜화문
    장소, 유물
    혜화문
    성북구 성북동과 종로구 혜화동의 경계에 뒤치한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이다.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불렸으며, 사소문 중의 하나이지만 사대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북쪽의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으므로 함경도 등 북방으로 통하는 경원가도(京元街道)의 관문 역할을 했다. 도성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소문으로 불렀는데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을 새로 건립하면서 동문(東門)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하자 동소문과 혼동되므로 1511년(중종 6)에 동소문을 혜화문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일제강점기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에 전찻길을 내며 헐렸으나, 1994년 10월 18일 지금과 같이 복원되었다
  • 한양도성
    장소
    한양도성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이다. 조선 초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해 성곽을 쌓도록 하고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두었다. 조선시대 때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는데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축조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근대도시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성벽과 성문을 무너뜨렸으나 1968년 숙정문 중건을 시작으로 복원이 시작되었고, 1975년 서울성곽 정화 사업을 통해 전 구간의 중건이 이루어졌다. 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의 70%, 총 13.7㎞(2020년 기준) 구간이 남아있거나 중건되었고, 숙정문·광희문·혜화문 등의 성문도 중건되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 정릉
    장소
    정릉
    성북구 아리랑로19길 116에 위치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를 모신 왕릉이다. 신덕왕후 강씨의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슬하에 2남(무안대군, 의안대군) 1녀(정순공주)를 두었으며, 1396년(태조 5) 음력 8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를 사랑했던 태조는 경복궁에서 바로 보이는 황화방(현 중구 정동)에 능을 조영했는데, 태조가 죽자 태종이 현재 위치로 옮기고 방치했다. 이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했다. 민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 의릉
    장소
    의릉
    성북구 화랑로32길 146-20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이다.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의 무덤인데,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재 위치에 능을 먼저 조성하였고, 영조 6년(1730)에 선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의릉 아래에 능을 조성하였다. 의릉은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능역 내에 있어서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하였다. 이 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뀐 후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1996년에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고,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외래수종 제거, 전통수종 식재, 인공연못 성토, 금천교 복원 등 기초적인 의릉 복원 정비를 마쳤다.
  • 만해 한용운 심우장
    장소, 유물
    만해 한용운 심우장
    성북구 성북로29길 24에 있는 유적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님의 침묵」을 지은 시인이며, 불교개혁가였던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 6월 29일 입적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심우장은 벽산 스님이 땅을 제공하였고, 수학교사인 최수동이 설계하였으며, 방응모와 박광, 그리고 아내 유숙원 등이 자금을 보태어 만들어졌다.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한용운은 이곳에 거처하며 그의 또 다른 본거지인 선학원을 출입, 불교 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흑풍』을 집필하는 등 문학 활동도 이어갔다. 현재 심우장 입구에 만해 산책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매년 6월 29일 선생의 기일에 성북문화원 주관으로 추모 다례가 열린다. 2019년 4월 8일 사적 제550호로 등록되었다.
  • 숙정문
    장소, 유물
    숙정문
    삼청로11길 40(삼청동 산 2-49)에 위치한 한양도성의 사대문 중 하나이다. 속칭 북문(北門)으로 불렸던 숙정문은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같이 1396년(태조 5)에 건설되었다. 숙정문은 풍수지리상 북쪽이 음(陰)과 물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평소에는 ‘음란한 풍조’를 방지하기 위해 폐쇄하였다 가뭄이 들면 문을 열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1976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도성의 성곽을 복원할 때 이 문의 문루를 건축하고 「숙정문」이란 편액을 걸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건으로 일반의 출입이 차단되었다가 2006년 4월 다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 선잠단지
    장소
    선잠단지
    성북구 성북동 64-1에 위치한 조선시대 선잠단이 있었던 터이다. 선잠단은 국가에서 양잠을 위하여 잠신(蠶神)으로 알려진 중국 신화 속 황제(黃帝)의 황후 서릉씨(西陵氏)를 배향하는 단(壇)을 쌓고 제사지내던 곳이다. 선잠단의 설치와 제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친잠례가 왕비의 소임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했다. 조선 태종 때 현재 위치에 선잠단을 만들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으나 1908년 단과 제향이 철폐되면서 폐허가 되어 일제강점기에 원형을 상실하고, 땅도 개인 소유가 되었다. 1963년 선잠단지를 사적 제83호로 지정하였다. 2016년 선잠단지 정밀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유구를 기초로 2017년 재현 공사를 진행하였고, 2020년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 북한산성
    장소
    북한산성
    서울 북쪽의 북한산에 쌓은 성곽이다. 서울의 성북구, 종로구, 은평구, 강북구와 고양시 덕양구 일대에 걸쳐있다. 성북구에서는 정릉동의 북한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는 곳이 입구이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시되어 왔기에 여러 왕조에서 성을 쌓고 활용했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산성은 숙종 37년(1711)에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긴 전란을 겪은 후 도성 방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성에는 군사지휘소인 장대가 3곳, 크고 작은 문이 13개소, 우물이 99곳, 창고가 8곳이 있다. 또한 승군(僧軍)을 주둔시키기 위한 사찰도 여러 곳에 두었다.
  •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장소, 유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 고려대학교 내에 있는 건축물이다. 1934년 고려대학교 본관 건물을 짓고, 곧이어 1937년에 본 건물을 완공했다. 설계는 본관과 마찬가지로 박동진이 하였는데, 시공자는 미상이다. 건물의 구조는 화강석을 주재료로 한 L자 모양의 고딕 양식으로, 남서쪽 모서리에 탑 모양의 구조를 세우고 이 곳에 주출입구를 두었다. 특히 동남측 끝단 돌출부에는 네 모서리에 고딕식 튜렛(turret)을 세우고, 남측 창들 사이에는 부축벽(flat buttress)을 세워 기품 있는 고딕양식의 풍취를 더해주고 있다. 오랫동안 도서관으로 사용하다, 중앙도서관을 신축한 후 현재는 대학원동과 교수연구실로 사용하고 있다.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6호로 지정되었다.
  • 고려대학교 본관
    장소, 유물
    고려대학교 본관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에 위치한 근대식 학교 건축물이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완공된 건물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본관으로 사용하였다. 건물의 주재료는 화강석이며, 중앙부의 탑 모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고딕양식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대체로 평면 H자형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중앙에는 넓은 홀이 있고, 앞면 현관의 돌기둥에는 호랑이상이 조각되어 있고, 뒷면의 돌기둥에는 무궁화가 조각되어 있다. 한편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건축가인 박동진[1899-1981]이 설계하였고, 일본인 후지타 고지로[藤田幸二郎]가 시공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최신식 내부시설은 물론 외관도 유례없이 화려하고 웅장하다고 알려졌다.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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