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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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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숭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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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신방
    조선시대 초기부터 성 밖에 있던 한성부 동부 12방 중의 하나로, 현재의 성북구 돈암·동선·삼선·성북·안암·정릉·종암동 일대가 이에 속하였다. 한성부의 영역은 도성과 성저십리(城底十里)로 이루어졌는데 그 범위가 매우 넓어 이에 해당하는 영역을 한성부가 단독으로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기에 1396년 한성부를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었는데 방은 공식적으로 조선 전기 한성부의 가장 하위 행정 조직이었으며, 이때부터 5부 중 동부(東部)에 숭신방(崇信坊)이 확인된다. 이 명칭은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숭신방이 숭신면(崇信面)으로 변경될 때까지 사용되었으며 숭신면은 3년 뒤인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崇仁面)에 편입된다.
  • 동선2구역
    장소
    동선2구역
    성신여대 인근 성북구 동선동4가 304-2번지 일대의 재개발 구역이다. 2021년 현재 도시형 한옥과 1960년대에 준공된 건축물이 다수 남아있는 지역이며, 재개발 사업 진행으로 인해 2022년 상반기 주민 이주가 진행될 예정이다. 2011년 3월 재개발 정비 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12년 5월 12일 조합설립인가를 받아 본격적인 재개발 사업을 시작하였다. 2013년 사업시행인가를 받고, 2019년 관리처분 인가를 받으며 사업 지행을 가속화하고 있다. 2018년 최초 시공사를 제일건설로 선정하였지만 계약 해지를 거쳐 2019년 계룡건설을 최종 시공사로 확정하였다. 총 326세대 규모로 구역이 정비될 예정이며, 2024년 입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
  • 369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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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9마을
    성북구 삼선교로2,4,6길 일대(삼선동1가 11-53번지 일대)의 한양도성 성곽마을이다.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2013년 이후 주택 재개발 정비 구역에서 해제되어 2014년에는 주거 환경 관리 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었다. 이후 해당 행정구역인 삼선6구에서 착안된 369마을이라는 이름이 주민 회의에서 탄생하였다. 또한 369마을은 '마을의 정체성과 문화를 바탕으로 주민이 주도하고 화합하는 세가지 가치를 지닌 언덕 마을(三育丘)'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마을 내 앵커시설로 마을 주민 회의나 문화 프로그램 등이 열리는 369사랑방, 카페 369마실, 전시 및 공연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 가능한 가변 공간인 369예술터, 지역 예술가와 청년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369예술공방 등이 마련되어 있다.
  • 한천마을
    장소
    한천마을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동네로 한천마을의 명칭은 중랑천의 옛 이름인 '한천'에서 유래되었다. 2012년 11월 주택재건축 정비예정구역 해제 이후 2017년 8월에 주거환경개선사업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7월에 주민공동체운영회로 승인을 받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폭넓은 연령층의 지역주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활성화시켜 다양한 세대가 어우러진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마을 소식지를 제작하고 벽화거리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그 밖에도 영양학사(한천로 550) 1층에 자리하고 있는 '한천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에서 여러 특강과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 장위마을
    장소
    장위마을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 232-17번지(318,415㎡)로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서울 동북부지역의 주택지 조성사업을 통하여 형성된 전형적인 주거지역이다. 2005년 장위 재정비촉진지구(장위 뉴타운) 지정 이후 2014년 11월 해체되기까지 약10년간 물리적, 사회적 쇠퇴가 진행되어 노후불량 밀집지역에 대한 새로운 도시재생 모델 제시가 필요했으며, 2015년 1월 서울형 도시재생 시범사업에 선정되어 다양한 사업 및 주민공동체 활성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성북동 익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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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 익청로
    성북동 우정의 공원에서 팔정사까지 이어지는 성북로31가길 일대 길이다.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길 중간 즈음에 '익청로(益淸路)'라는 표지석이 있어 길을 오가는 주민들은 그렇게 부른다. 이 표지석 글은 문인화계의 거목인 중봉 이가범이 쓴 것으로 보인다. 주변으로 숲이 우거져 있고 개울이 흐르는 이 길은 숙정문과 약수터로 이어진다.
  • 삼선동/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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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선동/인구
    성북구 삼선동 인구변화와 관련된 내용이다. 혜화문 밖 드넓은 들판을 일컫던 삼선평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1943년 서울에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동대문구에 속하였다가 1949년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돈암동에서 분동되었다. 삼선동이 처음 신설된 당시 1·2·3동이 있었으나 1980년 삼선2동과 삼선3동이 통합되었고, 2007년 삼선1동과 삼선2동이 통합되었다. 삼선1동의 인구는 1947년 13,144명, 1953년 4,992명, 1970년 10,011명, 1990년 15,082명이었고, 1980년 삼선2동의 인구는 12,092명, 삼선3동의 인구는 9,367명이었다. 2018년 기준으로 삼선동의 인구는 26,971명, 세대수는 12,672세대이다.
  • 보문동/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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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문동/인구
    성북구 보문동의 인구변화와 관련된 내용이다. 보문동은 1936년 4월 1일 일제가 경성부 구역을 확장할 때 경성부로 편입되어 신설정이 되었는데, 1943년에는 동대문구의 관할로 속하였다. 1946년 신설동으로 불리다가 일부 지역이 지금의 ‘보문동’이 되었다고 한다. 1991년 보문동의 인구수는 20,861명, 세대수는 6,640세대였고, 2019년 발간된 『제34회 성북통계연보』의 기록 기준으로 현재 인구수는 17,067명, 세대수는 7,941세대이다. 인구수는 줄어든 반면, 세대수는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 동선동/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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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선동/인구
    성북구 동선동 인구변화와 관련된 내용이다. 1949년 성북구가 신설되면서 돈암동의 관할이 성북구로 넘어왔는데,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아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돈암동으로 분리되었다. 동선동의 이름은 동소문동(東小門洞)의 ‘동’자와 삼선동(三仙洞)의 ‘선’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1947년 말까지 동선남부동과 동선배부동은 6,140세대 36,019명의 인구가 거주하였다. 인구의 추이를 살펴보면 2000년대 1만 5천여 명이 거주하였고, 거주 인구가 점차 증가하여 2019년 현재 8,856세대, 16,386명이 거주하고 있다.
  • 장위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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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위동/역사
    장위동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장위동의 이름은 고려의 명신(名臣)들이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높은 지위’의 뜻으로 장위(長位)라고도 하고, 마을 뒷산의 이름이 장위산(獐位山)이어서 이 때문에 장위라 했다고도 한다. 혹은 조선 말의 대신 윤용구(尹用求)가 여기에 살았는데 그의 호가 ‘장위산인’이었기 때문에 장위동이 되었다 설도 있다. 장위동은 조선 초 한성부에 속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동부 인창방 장위리계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 1911년 경성부 인창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 1949년 8월 성북구가 분리·신설될 때 장위동은 성북구 숭인출장소의 관할이 되었고, 1973년 숭인출장소가 폐지되면서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 길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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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음교
    동소문로의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과 길음동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1934년으로, 시멘트로 만들어진 교량이라는 의미로 ‘양회다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의정부나 포천 등지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연결로인 미아로를 따라 건립되어 서울입성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미아리에 공동묘지가 있던 시절에는 상여가 다니는 길목으로도 이용되었다. 이후 1976년 한 차례 보수되었고, 통행량이 많아짐에 따라 전면 확장공사를 벌여 폭 35m, 길이 45m로 1989년 준공되었다.
  • 옛 돈암동
    장소
    옛 돈암동
    현재의 성북구 돈암동, 동선동, 삼선동 일대를 말한다. 혜화문부터 미아리고개에 이르는 지역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한성부 동서 숭신방 동문외계 돈암리'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숭신면 돈암리가 되었다가 고양군 숭인면에 속한 '돈암정'이 되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동대문구 '돈암동'이 되었다가, 1949년에 동대문구에서 분리하여 성북구를 신설하면서 성북구 돈암동으로 될 때 돈암동의 지역이 넓은 관계로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돈암동으로 분리하였다. 옛 돈암동 지역은 성북구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 미아리 산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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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 산동네
    미아리공동묘지가 철거되고 그 자리는 서울로 몰려든 상경민들이 세운 무허가 주택이 빠른 속도로 들어서게 되었다. 서경대학교, 길음초등학교가 있는 북한산 산자락에서부터 길음역 부근까지 이러한 주택들이 모여있어 달동네로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은 길음동 뉴타운으로 개발되어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미아사거리
    장소
    미아사거리
    남북으로 종암로, 도봉로, 동서로 동소문로, 월계로가 만나는 교차로로, 성북구 길음동과 강북구의 경계에 위치한다. 월계로가 나중에 생겨 원래는 삼거리였기 때문에 사거리가 된 이후에도 관습적으로 미아삼거리를 지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배나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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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나무골
    성북구 상월곡동에 있던 마을이름이다. 배나무가 많이 있던 데서 유래된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서울 북공고 주위에 배 밭이 형성되있었다고 한다. 배나무골이라는 명칭외에도 배골・배나뭇굴・이동(梨洞)으로도 불렸다.
  • 성북천 하늘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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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천 하늘다리
    성북천에 놓인 다리이다. 박완서 소설에는 양회다리가 자주 등장하는데 성북천이 복개되면서 사라졌다. 성북천 하늘다리는 성북천이 복원되면서 양회다리가 있던 비슷한 위치에 새로 만들어진 다리이다. 양회다리는 석회로 만든 다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박완서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집에서 성북경찰서까지는 골목을 나가서 신안탕 앞에서 꺾여서 천변을 끼고 2백 미터쯤 가다가 널찍한 양회다리만 건너면 곧이었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양회다리는 돈암동에 사는 주인공의 집 위치를 알려주는 지표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신안탕이 있던 자리인 마을버스차고지에서 하늘다리까지 실제 거리는 약 150m이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삼선동과 동선동의 경계에 위치한다.
  • 정든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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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든마을
    성북구 솔샘로6길 18-8(정릉동 685-157) 일대의 마을이다. 정든마을은 정릉시장과 정릉천, 북한산이 인접하고 있는데, 좁은 골목에 시멘트 벽돌로 지은 2층집들은 1957-1958년 사이에 산업부흥과 주택난 해소를 위해 이른바 ‘부흥주택’으로 지어진 것이다. 1960-1970년대에 지어진 한옥들 그리고 근래에 지어진 현대식 주택들도 함께 공존하고 있어 한국 현대 주거문화의 발달사를 볼 수 있는 주택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재개발의 열풍에 마을이 사라질 뻔했다가 2012년 부흥주택과 한옥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도시재생 지역으로 결정되었다. 2013년에는 서울시와 성북구청의 지원으로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진행되어 생활 편의성과 안전성을 높였고, 작은 공원과 도서관이 만들어지고 벽화도 그려져 눈길을 끈다.
  • 장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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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마을
    성북구 삼선교로4라길 23-28(삼선동1가 300) 일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장수마을은 한국전쟁 후 서울로 모여든 서민들이 움막, 천막집, 무허가 판잣집 등을 짓고 삶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마을 뒤쪽의 한양도성 성곽 아래 가파른 구릉길을 따라 작고 나지막한 가옥들이 옹기종기 서로 맞붙어 있다. 이 지역이 재개발지역으로 선정되자, 전면 철거와 획일적인 아파트 재개발이 아닌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2008년에 주민협의회를 만들고 마을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마을 내에 작은 카페도 열었고, 마을박물관을 만들어 전시회도 진행하고, 벽화거리도 조성하여 관광객의 발길도 늘고 있다. 2010년대부터 확산된 도시재생사업의 선구적 형태이며,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에 선정되었다.
  • 손가정 마을
    장소
    손가정 마을
    정릉3동 정릉시장 일대에 밀양 손씨들이 대대로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마을이다. 밀양 손씨 32세손인 손만기(孫萬琦) 형제가 터를 잡은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현재는 시조 이래 45대부터 50대 정도의 후손들이 약 20가구 거주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7월 그믐에 손만기의 묘에서 시제를 지낸다. 손가정 마을 사람들은 조선 후기까지 주변의 땅을 일궈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진행된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잃은 후에는 손가정과 청수동 골짜기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하거나, 석재를 다듬는 석공일을 하기도 했다. 정릉천 곳곳의 바위에는 돌을 깼던 흔적과 반야교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남겨 두었다. 현재 정릉천 근처 두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옆에는 손가정 터에 대한 유래가 적힌 표지석이 있다.
  • 성북동포백훈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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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포백훈조계
    조선 후기 성북동 일대에 설치되었던 사회 조직이다. ‘포백’이란 ‘마전’이라고도 하며 생베나 무명을 삶거나 빨아 볕에 말려서 희게 하는 일이고, ‘훈조’란 콩을 삶아 메주를 쑤는 일을 말하며, ‘계’는 구성원들의 공동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조직이다. 조선시대 어영청은 도성의 수비와 왕의 시위를 위해 설치된 군부대인데, 그 재정 충당을 위해 ‘둔전’을 설치했다. 성북동 일대에도 둔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땅이 척박하고 농지도 부족하여 다른 재정 확보 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조 때 성북동에 일종의 수공업 협동단체인 포백훈조계를 설치하여 둔전민의 생계와 부대의 재정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포백은 도성 안의 무명, 베, 모시 점포의 물건을 맡도록 하였으며, 제조한 메주는 궁궐에 납품하도록 하였다.
  • 삼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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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덕마을
    성북구 솔샘로 15다길(정릉동 716) 일대의 마을 이름이다. 1960년대 말 민간개발회사(삼덕개발)가 토지를 분양하면서 삼덕단지가 형성되었는데, 단독주택지로서 주변 환경과 기반이 조성되어 낮은 단독주택으로 이루어진 정겨운 저층 주거단지이다. 당시 교수, 작가, 예술가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다수 입주하였고, 북한산과 가까워 안게 된 각종 제한으로 인해 개발열풍이 비껴간 오래된 단독주택지의 원형적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이채롭기도 하다. 삼덕마을에는 지붕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패널과 마을곳곳에 설치된 빗물저금통이 눈에 띄는데, 2012년 서울시 에너지자립마을 조성사업에 선정되어 정릉종합사회복지관과 함께 친환경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생산, 활용하고 있다.
  • 북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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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정마을
    성북구 성북로 23길 일대의 마을 이름이다. 북정마을은 심우장 뒤편 한양도성 성곽이 보이는 언덕에 있다. ‘북적마을’로도 불렸는데, 조선시대 포백훈조 계가 여기 있던 시절, 인부들이 ‘북적북적’ 거리는 소리 또는 메주 쑬 때 ‘북적북적’ 끓는 소리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아름다운 경관과 맑은 공기 덕분에 한용운 등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살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과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무너진 한양도성 성곽 아래 판자촌을 이루어 살면서 마을이 커졌다. 마을을 한 바퀴 빙 두르는 도로는 1983년에 완공한 소방도로인데 이 도로 안팎에 500여 가구가 모여 산다. 마을버스 정류장 앞 너른 길은 크고 작은 마을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정릉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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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골
    성북구 솔샘로17가길(정릉동 757번지) 일대의 마을이다. 정릉천을 따라 북한산 방향으로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면 낡은 대문, 구불구불한 길, 다듬어지지 않은 계단이 이어지는 정릉골이 나온다. 정릉천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정릉골 팻말을 대신하는 ‘정릉골’ 문자와 소설가 박경리의 대표작 『토지』 그리고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토지』 『김약국의 딸들』 등의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박경리가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정릉골에서 살았고, 소설 『토지』 1~3권이 이곳에서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정릉골은 여전히 재개발이 화두가 되고 있고, 마을을 떠난 이들도 많고 빈집도 늘어났지만, 지역 주민들은 인근 학교의 학생들과 마을에 벽화도 그리고 다양한 축제도 여는 등 따뜻한 마을을 가꾸어가고 있다.
  • 앵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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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두마을
    성북구 성북동 1가 105번지 일대의 마을이다. 조선시대 성북동 일대에는 복숭아나무와 앵두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현재의 경신중학교에서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사이의 마을은 속칭 앵두마을이라 불렸다. 이 마을이 주목받게 된 것은 성북동 일대에 한옥이 남아있는 집들이 많아서 이를 보존하고 지원할 방안을 추진하면서부터이다. 2014년 성북구청이 신청하여 사대문 밖에서는 처음으로 선잠단지 일대와 앵두마을이 서울시의 한옥밀집지역을 지정되었다.
  • 아리랑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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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고개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이름이다. ‘아리랑고개’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홍봉진이 1929년 ‘상춘원’이라는 요리집의 위치를 홍보하기 위해 ‘신흥사(흥천사) 옆 아리랑고개’라는 문구를 사용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설, 1930년대 일본인들이 정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용하여 고급 음식점을 꾸미고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길목에 붙여 널리 알렸다는 설, 1926년 나운규가 발표한 영화「아리랑」의 배경이 되어 널리 알려졌다는 설 등이 있다. 성북구에서는 1997년에 아리랑고개를 ‘영화의 거리’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기념가로수와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등 영화의 거리로 특화함으로써 전통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명소로 탈바꿈시켰다.
  • 소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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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마을
    성북구 길음동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 소리마을은 경제적 타당성 등의 여건으로 길음 뉴타운 사업에서 빠진 존치구역으로 남은 곳이다. 따라서 주변 사방은 온통 뉴타운 지대로서 아파트로 구성되어 있고, 소리마을은 일반 주택지로서, 마치 높은 산(아파트)에 둘러싸인 낮은 분지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따라서 도시슬럼화를 방지하고 아파트와는 다른 방식의 삶의 질 향상이 필요하였고,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을 통해 서울시 및 성북구청과 함께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단지 조성과는 다른 살기 좋은 저층주거지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성북동역사문화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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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북동역사문화지구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특화지역으로 선정된 성북동 일대에 대한 명칭이다. 성북동 역사문화지구는 2013년에 서울시의 고시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북악산과 한양도성에 둘러싸인 성곽도시 서울 중에서도 핵심공간인 성북동 전체 지역을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특화지역으로 조성하고 주거환경을 체계적으로 통합·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정하였다. 이 지구의 주요 문화유산은 한양도성, 선잠단지, 서울 성북동 별서, 이종석별장, 심우장, 이태준가옥, 최순우옛집 등이 있으며, 관련 인물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한용운, 소설가 이태준, 시인 김광섭, 작곡가 윤이상, 화백 김환기 등이 있다.
  • 삼태기마을
    장소
    삼태기마을
    성북구 화랑로 18길(상월곡동) 일대의 마을 이름이다. 성북구 상월곡동과 석관동에 걸쳐 있는 천장산에서 내려다본 마을의 모양이 삼태기를 닮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삼태기마을이라 불려 왔다. 2012년 서울시 건강친화마을만들기 시범사업지로 선정되어, 삼태기 마을주민협의체를 중심으로 보다 살기 좋고 건강한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역이다. 마을에 있는 서울국유림관리소 앞에는 삼태기 숲 입구가 있어 걷기 좋은 산책로를 갖추고 있다. 또한 ‘마실사랑방’이 있는데 각종 의료 측정기를 구비하여 주민 건강 관리와 소통과 화합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보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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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문로
    신설동역 교차로부터 성북구청입구 교차로까지의 도로이다. 보문로는 신설동 로터리를 기점으로, 보문동과 삼선동을 남북으로 종단하고 동소문로와 만나는 폭 25∼30m, 길이 2,100m의 도로이다. 이 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나 1930년 당시에도 돈암동 일대에 4,000여의 인구가 집적되어 있었고 신설동과 돈암동을 잇는 길임을 생각할 때 그 당시에도 도로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현재의 노폭으로 확장된 연대 역시 확실치 않으나 이 지역 일대의 인구 성장 추이를 감안할 때 1960년대 전반일 것으로 짐작된다.
  • 미아리고개/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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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고개/명칭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에 대한 여러 이름과 유래이다. 현재의 강북구 미아동에 ‘미아사’라는 절이 있어서 미아리라는 이름이 생겼고, 이 고개가 미아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데서 미아리고개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함경도 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 도로였기 때문에 여진인들이 이 길로 왕래하였고, 그래서 오랑캐가 넘어오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되너미고개’,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 혹은 호유현(胡踰峴)이라고 불렸다.
  • 미아리고개/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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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고개/6.25전쟁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한국전쟁 당시의 미아리고개 상황에 대한 기록들을 모은 것이다. 6.25전쟁 당시의 미아리고개는 북한군의 서울 침투 경로이자 후퇴 경로였다. 서울 침투시에는 격전이 벌어졌고, 후퇴시에는 많은 사람들을 납치하여 끌고 갔다. 그러한 상황에 대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의 기록들인데, 동아일보는 주로 납북자들의 증언을 특집으로 다룬 것이고, 경향신문의 기사는 전쟁 당시 미아리고개의 상황을 다룬 특집 기사이다.
  • 미아리고개/4.19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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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고개/4.19혁명
    1960년 4.19혁명 시기 미아리고개와 관련한 신문 기록들의 모음이다. 동아일보의 기사들인데, 4.19 직후인 4월 20일자 「데모대원을 실은 트럭, 미아리고개를 넘어 창동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부터 시작하여, 미아리에서 있었던 총성과 군중의 집결 등을 다루었고, 5월 17일자 「4.19 당시 미아리의 총성/한양대학 공과대학 정현식의 수기」라는 제목의 4.19 당시 총격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한 기사까지 수록하고 있다.
  • 미아리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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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고개
    성북구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이다. 미아리고개는 조선시대 이후 수도로 들어가는 중요한 진입로였기 때문에 시기별로 많은 역사상이 녹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함경도 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 도로였기 때문에 여진인들이 이 길로 왕래하였고, 그래서 오랑캐가 넘어오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되너미고개’,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이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미아리고개 너머 현 길음2동 일대에 총독부에 의해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북한군이 서울로 침투했던 길이자 후퇴했던 길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던 곳으로 이산의 아픔과 고통이 서린 곳이기도 하였다. 1970~80년대에는 역학촌이 성행하였는데, 도로의 확장과 주변 재개발로 옛 모습은 찾기 힘들다.
  • 미아리 역학촌/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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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 역학촌/인터뷰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의 점집 밀집 지역에서 오랫동안 역술업에 종사했던 역학사들의 인터뷰를 모은 것이다. 현대 역술업이 주로 맹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심남용(청산철학관)의 인터뷰를 비롯하여 8명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미아리 역학촌의 출발과 전성기, 쇠락의 시기와 사회분위기 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 미아리 역학촌/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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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 역학촌/기사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의 점집 밀집 지역에 관한 신문기사의 모음이다. 기사에서 다룬 내용들을 보면, 점성촌이 활황을 누린 1970년대 기사부터 수록되었는데, 특히 80년대엔 점집들에 손님이 넘쳤고 선거, 입시, 당선, 합격 등에 관한 다양한 관심과 기원이 소개되었다. 1998년 IMF 직후에는 개인적인 관심 외에도 위기에 놓인 나라의 운세까지 점 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인터넷으로 점을 치고, 점집의 형태나 운영도 다양해지는 등 새로운 트렌드가 확산되면서 ‘점시장’이 조용히 늙어가고 있다는 기사까지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 미아리 역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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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아리 역학촌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에 점집들이 밀집하면서 형성된 지역을 지칭한다. 1966년 미아리고개의 도로를 확장하면서 고개의 경사를 낮추었고 야트막한 고가도로도 놓였다. 고가도로 밑에는 도로 양쪽 동네를 연결하는 길이 생겼고 행인들이 오갔는데, 이곳에 노점 점집이 들어서고 장사가 잘 되면서 주변에 많은 점집이 모여 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점성촌은 1970~80년대에 호황을 누렸는데, 1998년 IMF 사태 이후 손님이 줄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주변 재개발과 점을 보는 문화가 바뀌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는 일부만 남았는데, 이 역시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이었으므로 2014년 서울시의 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
  • 화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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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로
    성북구 월곡동, 석관동 등을 통과하는 도로이다. 화랑로는 노원구 공릉동에 육군사관학교, 즉 화랑대의 이름으로 유래되었다. 화랑로는 하월곡동의 종암사거리(월암교)를 기점으로 상월곡동, 석관동, 공릉동을 동서로 횡단하여 태릉선수촌에 이르는 폭 35m, 길이 약 8㎞의 구간이다. 이 길은 조선시대 이후 서울과 원산을 연결하는 ‘경원가로(京元街路)’로 혜화문 밖에서 의정부, 춘천으로 연결되던 길이었다. 현재 성북구의 관할 구간은 종암사거리(월암교)에서 노원구 공릉동 경계까지의 3.2㎞ 구간이다.
  • 한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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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천로
    서울 동부에서 중랑천을 따라 남・북으로 관통하는 간선도로이다. 한천로는 한천(漢川)을 따라 개설된 도로라는 데서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중랑천의 옛 이름이 ‘한내’, 즉 시내가 크다는 의미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때는 장안동과 수유동을 잇는 길이라고 해서 머리 글자를 따서 장수로(長水路)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천로는 동대문구 장안동에 있는 전농교로부터 중랑교를 거쳐 강북구 수유동의 도봉로에 이르는 길로, 폭 25m, 길이 10,300m의 6차선 도로이다. 성북구 관내 구간은 석관동에서 장위동에 이르는 2㎞ 구간이다.
  • 하월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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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월곡동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위치한 행정구역인 동의 하나이다. 월곡동은 현재 하월곡동에 있는 천장산의 형세가 마치 반달과 같다고 하여 그 산 근방에 있는 마을을 다릿굴‧다릿골이라 부르는 데서 유래했다. 다릿굴‧다릿골 중 위쪽을 ‘웃다릿굴‧웃다릿골’, 아래쪽을 ‘아래다릿굴‧아래다릿골’이라 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상월곡동과 하월곡동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전설은 이곳에 주막이 많았는데, 지방에서 달밤에 도착해서 숙박을 하고 아직 달이 채 지지않은 새벽 무렵에 일어나 흥정했다고 월곡이라 했다고도 한다.
  • 하나로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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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로거리
    성북구 동선동에 위치한 거리이다. 동소문로 22길이 시작되는 성신여대입구역 1번 출구 부근부터 동소문로 22길과 보문로 34길이 교차하는 구간이다. 2001년 젊은이들이 운집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젊은이거리’라 불렀으나, 남녀노소 모두 하나가 되자는 의미에서 ‘하나로거리’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하나로거리는 성신여대, 성신중고등학교 등 학교가 밀집되어 있어 여성 및 청소년의 유동인구가 많아 상권이 발달하였다. 2004년에는 이 거리를 중심으로 금연 홍보 거리로 조성하였고, 매년 금연과 관련한 행사와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하나로거리는 ‘담배연기 없는 성북’을 지향하고 있는 성북구가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금연메시지를 전해 범국민적인 금연운동을 펼치는 주요 공간이다.
  • 푸석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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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석골
    성북구 석관동을 가리키는 마을 이름이다. 푸석골 또는 돌곶이말이라고도 하였다. 푸석골은 이전에 성황당 나무가 있는 고개를 푸석산이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여흥 민씨들의 집성마을로 푸석산에서 1년에 한 번 산제를 지내고 3년에 한 번 큰 굿을 하였다고 한다. 6.25전쟁 이후는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살게 되어 여흥 민씨의 집성촌의 성격도 차츰 퇴색되어 산제 등의 풍속도 사라졌다.
  • 참살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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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살이길
    성북구 안암동의 길 이름이다. 안암역 교차로에서 안암오거리로 이어지는 길로, 공식명칭은 ‘고려대로24길’이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막걸리 집이나 몇 군데 있는 소박한 길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유흥·향락업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고려대 학생들은 이를 우려하여 해당 업소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펼친 적도 있다고 한다. 1992년 9월에는 ‘안암동 우리마당’이라는 행사를 열고 이 길은 학생들의 주인인 길이라 선언하면서 ‘참된 삶의 길’, ‘참된 삶이 이루어지는 길’ 등의 의미를 담아 ‘참살이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2018년부터는 참살이길 일대에서 지역주민, 상인, 학생이 함께 소통하며 지역의 활기를 불어넣고, 안암동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알리기 위한 ‘끌어안암’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 종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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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암로
    성북구 종암동과 하월곡동을 지나는 도로이다. 서울의 동북쪽에서 성북구로 들어오는 주요 간선도로가 2개 있는데, 하나가 미아로이고, 다른 하나가 종암로이다. 종암로는 동대문구 제기동 종암삼거리에서 성북구 월곡동 미아삼거리에 이르는 폭 30m, 길이 2,250m의 6차선 도로로 전구간이 성북구 관내 도로이다. 종암로는 주변의 재래식 건물이 무질서하게 얽혀 있는 전형적인 구도로였으나, 성북구청은 1997년부터 이를 탈바꿈시키는 공사를 단행하였다. ‘물의 거리’라는 테마를 정하고 종암로 주변의 보도블록과 가로수, 벽화, 그리고 쌈지공원 등을 새롭게 조성했으며, 특히 거리의 명칭에 걸맞게 아름다운 분수대도 만들었다. 또 근처 초등학교 담장은 물결무늬의 벽화로 단장하는 등 구민들이 친밀감을 느끼도록 설계했다.
  • 종암동/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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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암동/인구
    종암동의 인구변화와 관련된 설명이다. 종암동의 인구는 1930년 649명으로 한산한 농촌지역이었다. 1949년에는 6,400명으로 해방 이후 크게 늘었으나, 6·25전쟁으로 2,684명까지 줄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는 서울의 도시화로 인해 인구의 증가 폭이 커짐으로써 1970년에는 52,321명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1974년의 52,585명을 고비로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여, 1980년에는 48,991명, 1990년에는 48,871명으로 감소추세에 접어들었다. 감소의 원인은 종암로 주변의 상가의 확장으로 주거기능의 상대적 감퇴때문으로 보인다. 2018년 기준으로 종암동의 인구는 42,876명 세대수는 17,104세대이다.
  • 종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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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암동
    성북구에 위치한 행정구역인 동의 하나이다. 종암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으며, 조선 말 고종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 종암동계였으며,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서 인창방 동문외계 대종암, 소종암이라 칭하였다. 일제강점기 1911년 4월, 일제에 의해 경성부 숭신면 대종암, 소종암으로 개편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숭인면으로 개편되었고, 다시 1936년 4월 대종암리와 소종암리가 종암리로 통합되어 경성부로 편입되었으며, 일본식 동명에 따라 종암정이 되었다. 1943년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으나, 해방 후 1946년 일본식 이름인 종암정 대신 종암동으로 바뀌었고, 1949년 성북구의 신설로 성북구에 속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 정릉동/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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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동/인구
    성북구 정릉동의 인구변화와 관련된 설명이다. 정릉지역의 1930년 인구는 1,391명이었다. 1949년 17, 622명으로 크게 증가하였으나, 6.25전쟁을 거친 1953년에는 4,290명으로 줄었다. 이후 증가세는 계속되어 1961년에는 31,468명, 1970년에는 86,303명, 1980년 88,711명, 1990년 94,302명으로 꾸준히 증가하였다. 인구 증가의 이유는 전형적인 주거지역이고 북한산을 배경으로 하는 환경때문으로 추정된다. 2000년대 이후 점차 인구가 감소하여 현재 정릉동에는 2018년 통계자료를 기준으로 35,322‬세대, 87,364명이 거주 중이다.
  • 정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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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동
    성북구에 위치한 동의 하나이다. 정릉동은 정릉 1~4동의 4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 정릉(貞陵)이 있는 데서 동명이 유래했다. 정릉동의 처음 지명은 ‘살한이’로, 그것을 한자화한 사을한리(沙乙閑里)·사아리(沙阿里)였다. 일제강점기 1914년 경성부 숭신면의 대정릉동·소정릉동·손가정·청수동을 병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가 되었다. 1936년에는 일부 지역이 돈암리에 포함되어 다시 경성부로 편입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남은 지역이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고 1950년 정릉동이 되었다. 정릉동의 면적은 성북구 소재의 동 중에서도 가장 넓으나 북한산 남쪽 산비탈 일대가 포함되어 있어 주거가 가능한 면적은 그리 넓지 않다. 행정구역이 세분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 정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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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로
    성북구 정릉동과 돈암동을 지나는 도로이다. 정릉동의 동명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북악터널에서 정릉동, 돈암동을 횡단하여 하월곡동의 월암교까지 이르는 폭 20~50m, 길이 4,350m의(이후 길이는 4,500m로 연장되었다.) 도로로 전구간이 성북구 관내 도로이다. 이 길은 1972년 도로명을 제정할 때 붙여진 세검로의 일부였으나, 1984년 지역성을 감안하여 북악터널을 기준으로 세검로를 세검정길과 정릉길로 구분되었다. 또한, 폭 2차로에서 7차로 도로에는 ‘로’를 붙인다는 도로명주소 부여 원칙에 따라 현재는 정릉로로 불린다. 이 길은 서울 서북지역에서 도심을 경유하지 않고 동북지역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 구실을 한다.
  • 장위동/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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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위동/인구
    장위동의 인구변화와 관련된 설명이다. 장위동의 인구는 1930년 1,679명으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농촌지역의 단계였다. 1949년에는 석관동과 함께 5,880명이었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석관동과 합쳐 2,682명으로 감소했다. 1970년대를 전후로 지속적으로 증가세를 나타내면서 1970년에는 장위동으로만 39,600명, 1980년에는 68,505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주거환경의 열악성으로 전입을 기피함으로 1988년의 77,190명을 고비로 감소추세로 들어섰고 2018년 기준으로 인구수는 약 4만 7천여 명, 세대수는 약 2만여 세대이다.
  • 장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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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위동
    성북구에 위치한 행정구역인 동의 하나이다. 우이천의 서쪽과 ‘북서울꿈의숲’ 남쪽 일대에 위치한다. 장위동은 마을 뒤에 장위산(獐位山)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오래전 명신(名臣), 즉 ‘높은 지위’의 사람이 살았던 것에서 장위(長位)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장위동은 조선 초 한성부에 속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동부 인창방 장위리계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고, 1949년 8월 성북구가 분리·신설될 때 성북구로 편입되었다. 장위동에는 민속문화재 제25호 장위동 김진흥 가옥이 있는데, 순조의 부마 윤의선과 그의 아들 윤용구가 살았던 곳이다. 1960년대 이전까지 장위동 농토 대부분이 윤용구와 그 친척들의 소유였으나 윤씨가가 매도하고 택지로 바뀌면서 현재는 주택이 밀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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