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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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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성욱
    인물
    백성욱
  • 황광은
    인물
    황광은
    안암동 영암교회에서 활동한 종교인이다. 1923년 2월 2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시북동의 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1939년, 16세의 나이로 서울에 자리를 잡은 그는 당시 삼각산에 있던 고아원인 '향린원(香隣園)'에서 생활하며 목회자의 꿈을 키웠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였으며 제주도의 한국보육원과 난지도의 보이스타원, 서울 YMCA와 보이스카우트 등지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는 새문안교회의 부목사로, 1960년부터 1961년까지는 대광고등학교의 교목으로 재직하였으며 1961년부터 안암동에 위치한 영암교회의 목사로 활동하였다. 1970년 7월 15일, 심장질환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 박한영
    인물
    박한영
    안암동 개운사에서 활동한 승려이다. 1870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19세에 출가하였으며, 1896년 전라북도 순창에 위치한 구암사를 시작으로 해인사·법주사·백양사·화엄사·범어사 등지에서 불경을 강의하였다. 1908년에는 쇠퇴한 불교를 혁신하려는 뜻을 품고 교단 혁신에 힘을 기울였으며, 1911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우리나라 불교와의 연합을 꾀했을 때 한용운(韓龍雲)·성월(惺月)·진응(震應)·금봉(錦峯)등과 함께 이를 저지하였다. 1926년에는 안암동에 위치한 개운사 내 암자인 대원암에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많은 석학을 배출하였다. 그가 머무를 당시 개운사에는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우리나라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대거 모이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의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전라북도 정읍에 위치한 내장사에서 입적하였다.
  • 혜거
    인물
    혜거
    고려 초기의 승려이다. 초명은 지회(智回)이며, 16세에 출가하였다. 태조가 그의 법문 듣기를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968년에 국사가 되었다. 혜거는 광종 원년(950)에 미타사를 창건하였다. 그 후 문종 원년(1047)에 석탑을 조성 봉안하였고 이로 인하여 「탑골승방」이라고도 불리어졌다. 미타사는 충숙왕대에 중건되었고, 조선 단종 및 순조, 헌종 대에도 중수하였다. 1969년 6차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한용운
    인물
    한용운
    성북동에서 거주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승려이다. 본명은 정옥, 법호는 만해이며 용운은 법명이다. 1905년 백담사에서 출가하였고, 불경 번역과 대중화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경성지회장을 맡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폭로하는 민중대회 사건으로 일제에 피감되었다. 1933년 성북동 심우장으로 이사하였다. 1938년에는 불교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 배후로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성북동 심우장에서 만년을 보내다 1944년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원덕문
    인물, 유물
    원덕문
    돈암동 흥천사(신흥사)에 거주했던 승려이자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로 단청장 기능보유자이다. 단청장이란 목조건물에 광물성 안료인 진채(眞彩)로 채색을 올리는 장인을 의미한다. 그는 경기‧서울‧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승려 낙현[1869-1933]의 제자로 서울 흥천사에 월주고전미술전수원을 개원해 많은 불교미술 작가를 양성하였으며, 1972년에는 단청문양보존연구회를 설립하여 단청 및 전통미술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72년 8월 1일 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 방유룡
    인물
    방유룡
    천주교 사제, 신부이다. 세례명은 레오, 수도명은 안드레아이다. 예수성심 신학교와 대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1930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한국적인 수도원을 설립하고자 노력하였는데 1946년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립하였고, 1953년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설하여 제기동 본당 내 부속건물에 임시수도원을 설치하였다. 1955년 성북동에 본원을 신축하여 입주하였다. 1957년 5월 수도회에서 종신 서원을 하고 난 이후 수도자들의 영적 지도 신부로 활동하다가 1986년 1월 24일 성북동 순교 복자 수도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 김일엽
    인물
    김일엽
    시인, 승려이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으로 여성들의 권익 향상을 주장하고, 스스로 관습에 매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근대 교육을 받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1920년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소설과 시, 평론을 발표하는 한편 신여성 모임을 이끌어 나가며 여성들의 교육과 의식 개혁을 주장하였다. 몇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굴곡을 겪은 뒤 만공선사 문하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 성북동에서 잠시 생활하였으며, 삼산학교 교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말년에 성북동 성라암(星羅庵)을 오가며 지냈는데, 자전 소설 『청춘을 불사르고』를 쓴 곳이 바로 이곳 성라암이라고 전한다.
  • 조영암
    인물
    조영암
    시인이자 승려이다. 1918년 강원도 회양군에서 출생하여 15세에 건봉사로 출가했고, 만해 한용운에게 시와 소설 쓰는 방법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시를 썼는데, 1949년 『죽순』11집에 쓴 「哭 한용운 스승님:伍週忌를 當하야」는 만해 한용운에 대한 최초의 추모글이다. 매우 개성 넘치는 선시를 썼고, 조선시대 설화집인 『고금소총』과 선사들의 시 1만 수를 번역한 『선시총서』를 내기도 했다. 말년에는 참선 수행에 매진했다.
  • 김태신
    인물
    김태신
    승려이자 화가이다. 법명은 일당으로 일엽 스님의 아들이기도 하다.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 그림을 배운 뒤 일본 도쿄제국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의 그림은 자연애와 강렬한 채색을 통한 감정표현에 성공했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그 화폭에 그려진 자연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길을 따라 1988년 출가해 성라암에 주석하다 입적했다.
  • 김창준
    인물
    김창준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세 때 미국인 선교사 문약한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평양 중앙교회·박구리교회 등에서 시무하다가 1919년 3.1운동 때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로 독립선언서 서명하고 참가하였다. 1924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1926년 귀국하였다. 목사로 있는 중앙교회뿐만 아니라 서울 상동교회·성북동교회·석교교회 등을 돌며 설교를 계속하였고, 1930년대에는 성북동교회에서 강연하였다. 1950년에는 서울에서 남선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여 그 위원장을 맡았다. 6.25전쟁 후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 김교신
    인물
    김교신
    정릉동에서 거주한 종교인,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다. 일본 유학 당시 무교회운동을 전개하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아 송두용,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 함석헌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7년 귀국 후 이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하였고, 1930년 5월부터는 주필 겸 발행인으로 단독 간행하였다. 1936년 정릉으로 이사한 그는 『성서조선』의 간행을 이어나가며 무교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의 머리말인 「조와」에 민족 해방을 염원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성서조선』은 폐간되었다. 이후 1944년 7월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입사하여 일하던 중이던 1945년 4월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201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하윤실
    인물
    하윤실
    성북동에 있던 삼산학교의 교장이다. 만해 한용운을 따르던 불교청년들이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의 당원이기도 하였다. 1928년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보성고보의 선생으로 있었던 그는 1929년 8월 문인이자 신여성으로 알려진 김일엽과 결혼하였다. 1930년 삼산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삼산학교의 운영을 위해 노력하여 성북리에 있던 일부 유지들의 후원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삼산학교를 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 6년제로 개편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결국 보통학교로 승격되지 못하였고 6년제 학교로도 개편되지 못했다.
  • 자초
    인물
    자초
    승려이다. 호는 무학, 당호는 계월헌이다. 1344년에 출가하여 승려 소지의 제자가 되었으며, 혜명국사에게 불법을 배웠다. 1353년에 원의 연경에 유학하여 당시 연경에 있던 나옹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조선 개국 후 태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태조의 왕사로 책봉되었으며, 한양 천도에도 관여하였다. 개운사는 1396년에 자초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처음에는 영도사(永導寺)라 하였다. 이후 정조 3년(1779년) 정조의 후궁인 홍빈(洪嬪)의 묘 명인원(明仁園)이 절 옆에 들어서자 인파(仁波)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개운사로 개명하였다.
  • 법정
    인물
    법정
    성북동 길상사에서 활동한 승려이다. 전라남도 해남군 출신으로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출가하였다. 1994년부터는 순수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97년 12월 김영한이 시주한 대원각을 길상사로 탈바꿈하고, 2003년까지 길상사의 회주를 맡았다. 2010년 길상사에서 입적하였다. 대표적인 산문으로는 『무소유』, 『오두막 편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텅빈 충만』 등이 있다.
  • 만항
    인물
    만항
    고려 말의 승려이다. 승과시험인 구산선(九山選)에 응시하여 장원에 뽑혔으나 명리(名利)를 버리고 금강산·지리산으로 다니면서 수도에 전념하였다. 이후 충숙왕으로부터 ‘별전종주중속조등묘명존자(別傳宗主重續祖燈妙明尊者)’라는 법호를 하사받았다. 충숙왕 6년(1319) 7월 병을 얻어 8월 18일 입적하였다. 이때 나이는 71세, 법랍 58세였다. 왕이 그의 부음을 듣고 혜감국사(慧鑑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호(搭號)를 광조(廣照)라 하였다. 성북구 보문동 3-51에 위치한 미타사는 고려 문종 원년(1047) 혜거국사(惠居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충숙왕 원년(1314)에 혜감국사(慧鑑國師)가 2차로 중수하였다. 이 절은 현재 비구니들의 수련도장이다.
  • 담진
    인물
    담진
    고려시대의 승려이다. 경기도 이천 출생으로 출가하여 난원(爛圓)의 제자가 되었다. 고려 선종 2년(1085) 왕명으로 의천을 수행하여 송(宋)에 가 고승들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귀국후 의천이 속장경(續藏經)을 판각할 때 그 교정을 맡아보았다. 예종 2년(1107)에 예종의 왕사(王師)가 되었다. 화엄학의 대가로서 일승법(一乘法)을 선양하여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성북구 보문동 3-168번지에 있는 보문사는 예종 10년(1115)에 담진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비구니의 수련도장인 소규모의 암자였다. 비구니 사찰로 꾸준히 발전한 보문사는 1972년 대한불교 보문종을 창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문사를 창건하였다.
  • 나옹
    인물
    나옹
    고려 말의 승려이다. 혜근이라고도 한다. 21세 때 공덕산 묘적암에 있는 요연선사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그는 참선과 교학을 같이 닦음으로써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 고려 말의 선풍을 새롭게 선양하였다. 또한 “염불은 곧 참선”이라고 한 것은 이후의 우리나라 선종에서 계속 전승되었다. 우왕 2년(1376) 왕명으로 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정릉 2동에 있는 봉국사는 원래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나옹대사에 의해 창건된 약사사(藥師寺)였는데 조선 현종 10년(1669)에 현재의 명칭인 봉국사로 고쳤다.
  • 이종린
    인물
    이종린
    언론인이자 정치인, 종교인이다. 충청남도 서산출생으로 한학을 수학하다가 상경하여 1907년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1909년 오세창·장효근이 『대한민보』를 창간할 때 논설기자로 민중계몽과 국민지식계발에 힘썼다. 1910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월보』의 주필 및 발행인으로 언론을 통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신문』 주필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3년간 투옥하였다. 1930년대 성북리(현 성북동)에 거주하였는데 1938년 ‘무인멸왜기도사건’ 이후 천도교 구파가 일제에 타협하였을 때 친일적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제헌 국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제2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당시 납북되어 납북 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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