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
1913.02.18 - 2001.01.23
인물 개인 화가
화가이다.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병으로 청각을 잃었다. 이후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들어가 그림을 배웠고,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첫 입선을 하였다. 1946년 우향 박래향과 결혼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4년에 서울로 돌아와 성북구 성북동 55-1에 자리를 잡게 된다. 1962년에는 성북동 집에 30여 평의 화실을 짓고 1971년까지 다양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민화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서 독자적 예술 세계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작품을 출품하고, 또 강제 징집을 고무하는 시화 연재물 「님의 부르심을 받고」의 삽화를 그리는 등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한 경력으로 인해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성북동
  • 김기창·박래현 집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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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같은 길을 가는 부부(夫婦) ; 화가(畫家) 김기창(金基昶) 박래현(朴崍賢) 부부(夫婦) 두 분이 특선(特選)에 누차당선(累次當選) 부처전람회(夫妻展覽會)만도 다섯 번 청각(聽覺) 잃은 부군(夫君)과의 고락(苦樂) 10년(年) [사(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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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창·박래현 집터 표지석
  • 같은 길을 가는 부부(夫婦) ; 화가(畫家) 김기창(金基昶) 박래현(朴崍賢) 부부(夫婦) 두 분이 특선(特選)에 누차당선(累次當選) 부처전람회(夫妻展覽會)만도 다섯 번 청각(聽覺) 잃은 부군(夫君)과의 고락(苦樂) 10년(年) [사(寫)]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金基昶
  • 이명칭: 운포(雲圃), 운보(雲甫)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화가

시기

주소

  • 주소: 02836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55-1 (선잠로 12-11 )
  • 비고: 운우미술관

근거자료 원문

  • 흥이 많았던 예술가들은 이 시절을 그래도 아늑하게 기억했다.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 부부는 외진 곳이라 수도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도 행복한 삶을 꾸렸다. 부인도 천생연분, 자연도 천생연분이라고 기록으로 남긴 그의 글에 사랑이 담뿍 배어 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50쪽
  • 같은 길을 가는 夫婦(부부) (3) 畵家(화가) 金基昶(김기창)(44) 朴崍賢(박내현)(38) 夫婦(부부) 두 분이 特選(특선)에 累次當選(누차당선) 夫妻展覽會(부처전람회)만도 다섯 번 聽覺(청각)잃은 夫君(부군)과의 苦樂(고락) 10年(년) ○…성북동 뒷산 기슭 아늑히 자리잡은 크도 작도 않은 조용한 자택화실에서 「뎃상」에 열중하고 있는 부부는 동양화가 김기창(金基昶, 홍대미술부교수)부부였다. 일곱 살 때 돌연한 열병으로 청각을 잃은 김씨는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머님의 지극한 「사랑의 교육」을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현재는 한국의 중견화가로 으젓하고 황무지같은 동양화를 개척하자는 이념의 사람과 같은 생각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그였다. ○…기자가 김씨를 방문하고 그림을 배우게 된 동기에 대한 물음에 “그저 무한히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10세 때부터는 하루에 한 장씩의 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는 마음이 시원치 않을 정도였으며 또 시(詩)나 글짓기를 뭇척 좋아했는데 여기에 자기의 취미와 소질을 일찍부터 알아채린 어머님이 「화도」로 인도하여 김은호(金殷鎬, 현화가(現畵家))선생밑에서 동양화를 배우게 하여 주심으로써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어머님의 현명」에 퍽 감사한다”고 미리 마련된 백지에 지극한 속필로 대답하였다. ○…열여덟살 때부터 「선전(鮮展)」에 출품을 하기 시작하여 24세부터는 연거푸 4회나 「특선」이 되어 「창덕궁상」(당시의 최고상)과 「총독부상」을 받으면서부터 씨의 화가로서의 역량은 충분히 인정되고도 남았음인지 「여일(麗日)」이라는 그림이 네 번째로 특선되어서는 「추천화가」로 선정되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중략)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을 무렵 동경에서 유명한 미국맹인 「헬렌켈라」가 왔을 때 그의 비서를 일부러 김씨에게 보내어 「보청기」를 사용토록 권고도하였으나 「그림에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하여 이를 물리쳤다고 하며 그 때 김씨는 그림 한 장을 「켈라」여사에 보냈는데 「켈라」여사는 그림에 대한 감상을 「타이프」로 찍어서 자신이 「싸인」을 하여 보내온 일도 있엇다고 한다. ○…김씨 부부는 서로의 애정 외에 작품 생활에도 충실하여 금년으로 5회째의 「부처전람회」를 가졌다고 하며 이는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라고- ○…둘의 수입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잉어도 잡고 송사리도 잡는다”고 대답한 김씨의 몸에서는 말의 자유와 청각의 자유를 빼아낀 대신 「유-모라스」한 인간미가 넘쳐 흘렀고 또한 퍽 친근미가 있어 좋았다. 『동아일보』 1957. 4. 4.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3-82
  • 화가 운보(雲甫) 김기창은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18번지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섯 살 부터 와룡동의 서당에서 한학(漢學)과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경험이 후에 예술가의 인생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김기창은 일곱 살에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일 다음 날 소풍 겸 운동회가 열렸는데 이때 장티푸스에 걸렸다. 얼마가지 않아 병은 나았지만 체질상 상극인 인삼을 먹어 고열을 일으켜 청각신경이 마비되어 귀머거리가 된다. 김기창은 병을 치료한 뒤 열 두 살에 다시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너댓 살 어린 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한글과 일본어를 모두 읽지 못해서 학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대신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열일곱 살에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제자로 들어가 수묵의 농담법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순종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한 김은호는 특히 인물을 그리는 실력이 뛰어난 화가였다. 또 한 전통화법에 안주하지 않고 일본화법과 서양의 원근감 등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으로 김기창의 그림 실력은 나날이 발전하였다. 김기창은 1931년 제10회 조선예술전람회에 널뛰기를 그린 <판상도무(板上跳舞)>로 입선하여 미술계에 데뷔한다. 이때 어머니가 지어준 ‘운포(雲圃)’라는 화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후에 ‘포(圃)’글자에서 글자를 가두고 있는 모양인 ‘口’를 없애고 ‘운보(雲甫)’로 호를 바꾸었다.
  • 서른세 살이 되던 1946년 김기창은 서울 중구 예장동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우향 박래현과 결혼한다. 박래현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며 미술을 배운 엘리트여성이었다. 이들의 결혼은 반대가 심했지만 사랑과 미술인이라는 동료애로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이후 김기창은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에 취임하면서 민속공예품과 민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행복한 신혼생활도 잠시였다. 결혼 4년 만에 한국전쟁이 발발, 김기창과 박래현 부부는 군산으로 피난을 간다. 전쟁이 한창인 1950년대 초에는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활을 꾸려나갔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작품의 세계는 넓어졌다. 미군정 당시 서울시장을 지낸 김형민이 지원을 해주어 부산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부산 피난생활 중 그림을 팔아 군산 구암동에 집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예수의 일대기를 한국사람의 모습으로 그려 부산 YMCA의 후원을 받아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3여 년간을 지낸 군산 구암동 생활을 마치고 전쟁이 끝난 1954년에 김기창 가족은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55-1. 이 때 역시 안정된 생활은 아니었지만 ‘운보-우향 부부전’을 소공동의 공보원 전시실에서 개최하는 등 작품 활동을 계속 해 나갔다. 전쟁을 겪은 김기창은 한국의 문화를 주제로 격정적인 표현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싸우는 소, 달리는 군마는 스케일과 힘의 응집을 보여준다. 이 시절은 예술에 대한 넘치는 에너지로 작업에 임하던 때였다. 또한 <엿장수>, <보리타작> 등 반추상 작업을 꾸준히 했다. 정비석이 한국일보에 쓴 연재소설 「민주어족(民主魚族)」(1954. 12.~1955. 8.)의 삽화를 그렸으며, 홍익대학교에서 강사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56년에는 부인 박래현이 제8회 대한미협전에서 <이른아침>으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제5회 국전에서는 <노점(露店)>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여성화가로서는 최정상에 올랐다. 화가 박래현은 동양화의 전통적 관념을 벗어났고 판화 등 새로운 매체와 여성 특유의 감성을 바탕으로 섬세한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1950년대에는 일상적인 풍경에서 모티브를 찾아 이를 재해석하였으나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상을 극복한 순수추상 작품을 선보였다. 1962년에는 성북동 집에 30여 평인 화실을 지었다. 박래현은 남쪽, 김기창은 북쪽에서 각각 작업에 전념하였다. 김기창은 이때 추상의 세계로 진입을 하기 시작했다. 1971년까지 9년 동안 성북동 작업실에서 지내는 동안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김기창과 박래현은 부부였지만 예술가로서 서로에게 자극이 되어 다양한 시도를 도입한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 이후 화실을 인사동으로 옮겨 갔는데, 운보와 운향의 호에서 한 글자 씩 따서 ‘운향화실(雲鄕畵室)’이라고 하였다. 1967년에는 박래현이 작품 전시를 했던 뉴욕에 남아 자신의 작업에 집중하겠다고 하여 7년 동안 떨어져 각자 작업을 했다. 1972년 김기창은 고향인 충북 청원군에 2만 5천 평의 산을 마련하고 집을 짓는다. 한옥에서 살고 싶어 하던 바람대로 고향땅에 한옥을 지었다. 친한 친구였던 최순우와 의견을 나누었고, 정자처럼 조촐한 집을 한 칸 짓자던 바람을 실현하였다. 성북동 승설암(인곡 배정국의 집)에 있다가 주인을 잃고 나돌다 김기창이 사들인 수석도 마당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김기창은 서울에 있을 때보다 한층 자연과 가까워진 집에서 지내며 그를 대표하는 작품인 바보산수화 작업을 활발하게 하였다. 바보산수 시리즈는 산, 새, 꽃, 말, 사슴, 농악, 소나무, 대나무, 오두막, 문자도 등 민화의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서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들이다. 김기창은 바보처럼 순수한 마음의 눈으로 봐야 느낄 수 있는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1974년 미국에 갔던 박래현이 귀국하였다. 돌아온 후 제일 먼저 성북동 집을 개조하였다. 그리고 작업을 위해 판화도구를 가지러 간 미국에서 암을 진단 받고 돌아온다. 2년 간 투병 끝에 1976년 성북동 자택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김기창은 박래현의 묘를 청원 집 가까이에 둔다. 다음 해 김기창은 성북동 집을 고쳐 ‘운향미술관’(현재 운우미술관)을 개관한다. 인생의 동반자이자 예술적 동지를 잃었지만 김기창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장애아들을 위한 후원회와 전시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또, 성북동에 사는 화가들이 기증한 작품을 팔아 기금을 마련하는 성북장학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김기창, 박래현 부부가 살던 성북동 운향화실은 사라졌다. 많은 작품이 탄생했던 집이자 미래의 화가들을 키우겠다는 꿈을 세운 곳이기도 했다. 지금 성북동에는 운우미술관만 남아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을 기억하게 한다.
  • 1913-2001 서울 출생. ‘바보산수’라 불리는 독자적인 화풍을 선보인 화가이다. 일곱 살 때 병으로 청각을 잃었다. 이당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웠고, 서양의 원근감과 일본 화법을 두루 받아들였다. 1931년 조선예술전람회를 통해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해방 후 국립민속박물관에 근무하며 민화와 민속품에 관심을 갖게 되어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한다. 한국전쟁 후 성북동 55-1번지에 자리를 잡고 아내 박래현과 공동 전시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다. 일상적인 풍경에서 모티브를 찾아 화폭에 담았던 1950년대와 달리 1960년대에는 순수추상 작품을 선보였다. 박래현이 1976년 세상을 떠난 뒤 바보처럼 순수한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느낀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바보산수에 담는다. 다음해 성북동 집을 고쳐 ‘운향미술관’(후에 운우미술관)을 개관하고 장애아동을 위한 후원회와 전시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1984년에는 어머니의 고향인 충북 청원에 한옥으로 ‘운보의 집’을 짓고 내려가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48쪽
  • ·운보 김기창의 삶과 작품세계 23일 타계한 운보 김기창 화백은 왕성한 실험정신으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뛰어난 작품들을 선보인 한국화단의 거목이다.그는 7세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후천성 귀머거리가 됐다. 17세때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에 들어가 그림을 배운 지 6개월만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판상도무(板上跳舞)'로 입선해 일찍이 대가의 소질을 보였다.1937년 선전에서는 '고담'으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광복 이듬해 동료화가 우향 박래현과 결혼,아내로부터 입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 말문을 틔었다.그 뒤 수차례에 걸쳐 부부전을 개최하는 등 금슬을 과시했지만 76년 아내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만년을 외롭게 지냈다.운보는 타계한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이 "의지의 작가요, 정열의 뭉치"라고 불렀듯 다양한 작풍을 섭렵하며 1만5천여점(삽화.데생 포함)의 작품을 남겼다.인물. 산수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초기의 동양화에서부터 한국 산하의 정기를 힘차고 대담하게 그린 청록산수, 조선시대 민화의 정취와 익살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바보산수, 예술정신을 자유롭게 펼친 추상작품 등 그가 다룬 주제와 표현방식에는 한계가 없었다.특히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활짝 핀 ‘바보산수’에서 그는 과감한 생략과 강조를 통해 우리의 민화를 계승한 자유롭고 해학적인 화풍을 보여주었다.운보는 바보산수에 대해 “나는 작가 정신이 어린이가 되지 못하면 그 예술은 결국 죽은 것이라는 예술관을 가지고 있어요.바보란 바로 덜 된 것이지요.예술도 끝이 없는 것이어서 언제나 덜돼있을 수 밖에 없지요.”라고 말했었다. 대표작으로는 ‘정청’ ‘군마도’ ‘군작도’ ‘가을’ ‘갓 쓴 예수 ’‘흥락도’ ‘문자도’ ‘점과 선 시리즈’등이 꼽힌다.운보는 농아복지에 특히 관심이 많아 80년 8월 사단법인 한국농아복지회를 발족시켰으며 83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열린 제1회 세계 농아연맹에 최초의 한국대표로 참석해 한국을 가입시켰다.“화가가 예술만을 위해 살다보면 환쟁이로 전락하지만 봉사가 곁들여지면 정말 예술가가 되지요”라던 그는 장애인들에 용기와 신념을 심는 일에 무엇보다 힘썼다. 80년대 중반에 외가가 있던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운보의 집' 을 세우고 그 옆에 운향미술관과 도예전시관, 운보공방 등 문화공간을 조성한 그는 이 곳에서 농아들에게 도자기 기술을 가르쳐 자립기반을 닦도록 했다.그러면서도 노르웨이 방문시 웅장한 자연과 폭포들을 보며 ”저 신의 소리를 한번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인간적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한국전쟁 때 동생들과 헤어진 그는 지난해 11월 제2차 남북이산가족상봉 때 북에서 온 동생 기만(基萬 ·72 ·공훈화가)씨를 50년만에 병상에서 만나 그간의 그리움을 아쉽게 달래야했다.96년 5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래 긴 투병생활을 하면서 “우향이 오라고 한다”는 말을 자주 하던 그는 이제 그리던 아내 곁으로 갔다. 『중앙일보』 2001. 1. 26.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9쪽
  • ○ 조지훈과 김기창의 필담 “필담을 주고 받던 기억은 성북동 골짝에 이웃해 사는 오늘까지 생생한 회고담으로 떠오르기도 한다.”(조지훈, 김기창 저 「서평 화방여적」, 『경향신문』1962. 12. 1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4쪽
  • 11. 김기창(1913-2001) 운보 김기창(1913-2001)은 미인도로 유명했던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청’(1934)을 비롯해 몇 작품이 상을 받으면서 널리 이름을 알렸고 작고시까지 수십년간 ‘바보산수’, ‘청록산수’ 등의 작품세계를 선보이며 최고의 동양화가로 일세를 풍미했다. 8살이 되던 해, 장티푸스에 걸린 후유증으로 청각을 잃었으나 천재적 소질로 인해 2만 여점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고, 아내인 우당 박래현의 내조는 그의 미술인생에 있어서 천군만마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부터 몇 년 간은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미술계의 시대적 요구 때문에 외면 받는 시기도 있었다. 그 시절 국립민속박물관에 근무하면서 민화와 민속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후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옛 명성을 서서히 되찾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에 성북동 55-1번지에 집을 짓고 아내인 우당 박래현과 공동 전시를 열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당의 제자답게 미인도를 포함한 인물, 풍경, 동물, 화조 등의 구상화 뿐 아니라 추상화, 수묵, 채색 등 소재와 주제의 제한을 받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30년대 초기 작품들은 사실적이면서도 섬세한 표현이 돋보이며, 50년대에는 힘찬 구도와 필력으로 싸우는 소, 달리는 군마, 수백 마리의 참새 떼 그림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의 나이 50대 후반부터 청록산수를 선보이기 시작해 1976년 평생의 동반자였던 아내 박래현이 세상을 뜨자, 민화에 바탕을 둔 '바보산수'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천진하고 해학적이면서도 소박한 자연속의 삶을 표현했다. 1만원권 세종대왕 초상의 도안자이기도 한 그는 말년에는 고향인 청주의 ‘운보의 집’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이어나갔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99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김기창 주소(현재): 성북동 55-1 분야: 미술(동양화) 비고: 박래현의 남편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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