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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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유물 조각
보타사가 보유하고 있는 금동으로 만든 보살상이다. 조성과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제작연대, 조각자, 시주자, 봉안 사찰 등을 알 수 없지만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크기로 볼 때 조선 초 왕실이나 지배층이 발원하여 조성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대좌 위에 앉아 있는 좌상으로, 왼쪽 다리는 대좌 아래로 내려뜨려 바닥을 딛고 오른쪽 다리는 무릎을 세우고 앉는 유희좌(遊戱座)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을 뿐 아니라 조선 초기에 유행한 귀족적 면모의 보살상 양식을 보여주는 예로서, 조선 전기 불교조각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2014년 3월 11일 보물 제1818호로 지정되었다.
안암동
  •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普陀寺 金銅菩薩坐像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유물 조각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
  • 비고: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 제작 추정

주소

  • 주소: 02842 서울특별시 성북구 (개운사길 60-46)
  • 비고: 보타사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보물
  • 지정일: 2014.03.11

근거자료 원문

  • 현재 관음전을 수리하는 관계로 잠시 대원암에 몸을 맡기고 있는 보타사 금동보살좌상普陀寺 金銅菩薩坐像, 보물 제1818호)이다. 이 금동보살좌상은 왼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 바닥을 딛고 오른쪽 다리의 무릎을 세워 앉는 ‘유희좌遊戲座’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유희좌는 고려 후기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통통한 뺨, 반개한 눈, 작고 아름다운 입술 등에서 여성적인 면모가 느껴지는 보살상의 얼굴 표현과 조선 전기 금동상으로는 규모가 큰 점에서 조선 초 왕실이나 지배층이 발원한 상으로 판단되어 조선 초기 중앙에서 유행했던 귀족적인 보살상의 형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39-240쪽
  • 정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타사 인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전기의 금동보살좌상. 내용 보물 제1818호. 불상 높이 81.5㎝, 무릎 폭 30.5㎝. 보관을 쓰고 유희좌(遊戱坐)로 편안히 앉아 정병을 들고 있는 금동보살좌상이다. 머리에는 꽃잎모양으로 겹쳐 만든 동판에 투각한 당초문과 화염문 등을 붙여 제작한 보관을 쓰고 있다. 보관의 중앙에는 동판으로 만든 아미타 화불을 부착하여 관음보살임을 나타냈다. 또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왼발은 편하게 내려앉은 독특한 유희좌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무릎 위에는 쭉 뻗은 팔을 편안히 올려놓았고, 엄지와 중지로 주구가 달린 정병을 살짝 쥐고 있다. 왼손도 무릎 위에서 들어 손등을 보이고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펼쳤다. 이러한 도상은 보타락가산의 관음보살상을 의도하여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유사한 좌세인 윤왕좌(輪王坐)의 도상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보살상에서 더러 확인되지만, 윤왕좌와 유희좌의 자세가 혼용된 듯 보이는 이와 같은 자세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관음보살좌상과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 정도가 알려져 있어 도상적으로 매우 드문 예이다. 머리와 하나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계(寶髻)는 잘라져 나가 흔적만 남아 있다. 머리카락은 보관의 턱이 되는 부분과 앞면에만 표현되었고, 뒷면은 윤곽만 나타냈다. 양어깨에는 귀의 뒤쪽과 귓불을 가로질러 내린 2가닥의 머리카락을 땋아 엮어 3가닥으로 드리웠다. 몇 번의 둥근 매듭으로 엮어 드리운 보발의 표현은 1502년에 제작된 천성산 목조보살좌상(부산 원광사 소장)의 표현과 유사하다. 얼굴은 갸름한 형태이지만 턱살이 많아 아래쪽이 약간 팽창해 있다. 반개한 눈은 치켜 올렸고 콧날은 오뚝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짧고 깊게 조각한 인중 아래로 작고 도톰한 입술이 보이고, 가늘고 긴 목에는 삼도를 뚜렷하게 새겼다. 양악이 두툼한 상협하광(上陜下廣)의 얼굴형에 작고 오밀조밀하게 표현한 이목구비 등의 특징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제작된 금동관음보살좌상(국립춘천박물관 소장, 전 회양 장양면)이나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에 비해 조금 수척해진 모습이며, 1502년의 천성산 목조보살좌상과 비교된다. 신체는 굴곡이 강조되어 늘씬한 형태미를 보이며, 불신(佛身)에는 두 개의 천의(天衣)와 군의(裙衣)를 입었다. 우선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 방향으로 폭이 좁은 천의 하나를 먼저 걸친 다음, 그 위에 다시 폭이 넓은 다른 천의를 숄처럼 양어깨에 걸친 형식이다.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걸친 천의의 정면과 후면의 끝자락은 ‘十’자로 교차시켜 맵시 있게 내려 그 끝을 Ω형으로 주름 잡았다. 양어깨에 걸친 천의 자락은 팔목을 덮어 내렸다. 이 보살상과 같이 하나의 천의로 비스듬히 걸쳐 멋을 낸 다음, 또 다른 천의로 숄처럼 어깨를 넓게 덮어 내린 착의 형식은 조선 전기의 요소로 판단된다. 의의 이 금동보살상은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왼쪽 다리를 편안히 내린 독특한 유희좌 자세와 오른손을 뻗어 정병을 쥔 형태에서 보타락가산의 수월관음상의 도상적 특징을 보여주는 매우 드문 도상이다. 또한 세련되고 간결한 선묘, 늘씬하면서도 균형 잡힌 비례, 그리고 단아한 상호에서 뛰어난 조형성을 느낄 수 있는 조선 전기 불교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서울 普陀寺金銅菩薩坐像)’은 왼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 바닥을 딛고 오른쪽 다리의 무릎을 세워 앉는 유희좌(遊戱座)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유희좌는 중국 북송대부터 유행하여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통통한 뺨, 반개한 눈, 작고 아름다운 입술 등에서 여성적인 면모가 느껴지는 보살상의 얼굴 표현과 조선 전기 금동상으로는 규모가 큰 점에서 조선 초 왕실이나 지배층이 발원한 상으로 판단된다. 어깨에 천의(天衣)를 숄처럼 걸치고 그 한 자락을 수직으로 늘어뜨리고 있는데, 국보 제221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등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볼 수 있는 착의법이다. 또한 이 상은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 아니라 조선 초기에 중앙에서 유행했던 귀족적인 보살상 형식을 보여주는 예로, 조선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문화재청,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항목명: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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