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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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유물 공예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태항아리이다. 인화문으로 보아 전라도 지방에서 15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태호(胎壺)는 주로 왕실에서 태를 담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것으로 내호와 외호로 되어 있다. 태호는 태지석(胎誌石)과 함께 나지막한 산봉우리에 안치되며 겉에 작은 태비가 세워져 도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 태호는 외호와 함께 내호에 있는 명주조각과 망태기의 조각으로 태(胎)를 담는 습속의 한 면을 알 수 있다. 1974년 7월 9일 국보 제177호로 지정되었다.
안암동
  •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1)
  •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2)
  •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3)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粉靑沙器 印花菊花文 胎壺
  • 이명칭: 분청사기인화문태호(내외호)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유물 공예

시기

주소

  • 주소: 02841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1-2 (안암로 145)
  • 비고: 고려대학교 박물관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국보
  • 지정일: 1974.07.09

근거자료 원문

  • ⑩ 粉靑沙器印花文胎壺(內外壺) 높이 42.8㎝, 입지름 26.5㎝, 밑지름 27.6㎝짜리 (外壺)와 높이 26.7㎝, 입지름 8.7㎝, 밑지름 9.5㎝(內壺)짜리 朝鮮 전기 15세기 인화문분청사기의 가장 세련된 작품인 태항아리가 국보 제177호로 지정, 高麗大學校 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태호는 주로 왕실에서 태를 담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것으로 內壺와 外壺로 되어 있다. 胎誌石과 함께 나지막한 산봉우리에 안치되며 겉에 작은 胎碑가 세워진다. 이와같이 태호는 지석과 태비를 동반하므로 陶磁史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태호는 고려대학교 경내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내호는 짚망태기에 넣어져 외호에 담겨져 있었으며 고운 흙이 3분의 2쯤 차 있었다고 한다. 外壺는 口部가 넓고 口緣은. 전을 이루며, 肩部에서 서서히 벌어져 풍만한 胴體를 이루다 좁혀져 세워진 안정감 있는 항아리로 접시모양의 뚜껑이 있다. 문양은 象嵌과 印花技法으로 전면에 촘촘히 시문하였는데, 항아리의 어깨에는 雷文帶와 큼직한 蓮離文帶와 氣花文帶를 돌리고 동체 전면에는 국화문대로 꽉차게 시문하고, 위에는 雨點文이 들은 袱紗文을 黑象嵌으로 장식하고 있으며, 저부에는 큼직하게 重蓮瓣文帶를 촘촘히 돌리고 있다. 특히 袱紗文의 흑상감문양이 강조하는 듯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기벽은 두꺼우며, 저부 일부에 도막으로 때린 繩蓆문양이 일부 나타나고 있다. 釉色은 淡靑을 머금은 K白色으로 전면에 곱게 시유되어 있다. 뚜껑에는 4개의 구멍이 뚫린 연봉형의 낮은 꼭지가 중앙에 부착되어 있고 꼭지를 중심으로 小氣花文帶, 波濤文帶, 雷文帶가 차례로 口緣까지 배치되어 있다. 굽다리는 平底이며, 가는 모래받침으로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뚜껑의 꼭지일부에 흠이 나 있고 동체에 일부 잡물이 스며있어 갈색을 띠며 內底에 균열자국이 나있다. 이 항아리는 1969년 9월 高麗大學校 理工大學부근 〈애기능〉 옆에서 내호와 함께 발견된 것으로 胎誌石과 胎碑는 발견되지 않았다. 특이한 항아리의 전과 풍만한 둥근 몸체와 뚜껑 그리고 시문된 菊花文樣 등으로 보아 15세기 중엽경의 전라남도 光州市 忠孝洞 요지에서 발견된 비슷한 항아리 조각이 있어 전라도 지방에서 제작되어 王家의 胎壺로 사용된 것 같다. 內壺는 구부는 넓고 약간 벌어져 말린 구연에 倚形과 같은 몸체를 지닌 長身의 항아리로 외호에 비해 훌쭉하다. 뚜껑은 접시모양으로 중앙에 구멍이 없는 둥근 꼭지가 붙어 있다. 문양은 胴體 전면에 성글은 小菊花文이 집단으로 꽉차게 시문되어 있으며 뚜껑에는 꼭지 주변으로 2중의 연판문이 촘촘히 印花되어 있으나 희미하다. 유색은 淡靑을 머금은 회백식으로 은은한 광택이 있으며 굽다리는 안바닥을 깎아 세우고 모래받침으로 받쳐 구워냈다. 발견 당시 외호에 담겨 있었으며, 부식되어 알 수 없는 銅錢(常平通寶) 1점이 출토되었으나 胎誌石은 발견되지 않았다. 외호와 함께 내호에 있는 명주조각과 망태기의 조각으로 胎를 담는 습속의 한 면을 알 수 있으며, 印花文으로 보아 전라도 지방에서 15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55-657쪽
  • ▫ 국보 제 177 호 분청사기인화문태호(내외호) 粉靑沙器印花文胎壺(內外壺)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고려대학교 소재지 : 고려대학교 박물관 / 서울 성북구 안암동 5가 1-2 지정연월일 : 1974. 7. 9. 조선 전기 15세기의 내호(內壺)와 외호(外壺)로 된 분청사기 태항아리이다. 이 태호(胎壺)는 태(胎)를 담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으로 내호와 외호로 되어 있다. 태지석(胎誌石)과 함께 나지막한 산봉우리에 안치되어 있으며 겉에 작은 태비(胎碑)가 세워졌다. 이와 같이 태호는 지석과 태비를 동반하므로 도자사(陶瓷史)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태호는 1969년 9월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아기능)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내호는 짚망태기에 넣어져 외호에 담겨져 있었으며 고운 흙이 2/3쯤 차 있었고, 태지석과 태비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태호의 문양은 항아리 어깨에서부터 만자문대(卍字文帶)・중연판문양대(重蓮瓣文樣帶)를 상감으로 새겨 넣고 그 다음 인화기법(印花技法)으로 국화문양대(菊花文樣帶)를 두르고 있다. 그리고 몸체는 전면에 국화문을 가득 채우고, 위로는 흑백 상감의 복사문(伏紗文) 안을 우점문(雨點文)으로 장식하였으며 밑에는 중연판문양대를 백상감하고 있다. 뚜껑의 모양은 꼭지를 중심으로 국화문양대・파도문양대・완자문양대가 차례로 구연부(口緣部)까지 배치되어 있다. 인화문분청사기 중의 가장 세련된 이 태호는 유약은 연한 청색을 띤 회백색의 분청유를 칠하였다. 1963년 광주직할시 동구 금곡동 묘지에서 이것과 비슷한 파편이 발굴, 조사된 바 있으므로 전라도 지방에서 구워져 왕실의 태호로 사용된 것 같다. 내호는 구부는 넓고 약간 벌어져 말린 구연에 통형(筒形)과 같은 몸체를 지닌 장신의 항아리로 외호에 비해 홀쭉하다. 뚜껑은 접시모양으로 중앙에 구멍이 없는 둥근 꼭지가 붙어 있다. 굽다리는 안 바닥을 깎아 세우고 모래받침으로 받쳐 구워냈다. 외호와 함께 내호에 있는 명주 조각과 망태기의 조각으로 태를 담는 습속을 알 수 있으며, 발견 당시 부식된 동전(상평통보) 1점이 들어 있었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원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0, 1989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32-33쪽
  • 분청사기로 만든 태(胎) 항아리로, 1970년 고려대학교 구내에서 건축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태 항아리는 주로 왕실에서 태를 담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내항아리와 외항아리로 되어 있다. 내·외 항아리 각각에 뚜껑이 있으며, 높이 26.5㎝, 입지름 9㎝, 바닥지름 9.5㎝인 내항아리와 높이 42.8㎝, 입지름 26.5㎝, 밑지름 27.6㎝인 외항아리로 되어 있다. 외항아리 안에는 흙이 3분의 2쯤 차 있고, 내항아리는 짚 망태기에 넣어져 외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내항아리 안에는 태(胎)와 태를 싸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 썩어 변질된 채로 남아 있으며 엽전 2닢이 들어 있었다. 외항아리는 풍만하고 내항아리는 홀쭉하다. 외항아리의 무늬에는 어깨에서부터 卍자무늬, 연꽃무늬, 국화무늬로 둘렀으며, 몸통 전체에 국화무늬를 찍어 놓았고, 몸통 아래부분에도 어깨 부위와 같은 연꽃 무늬로 띠를 둘렀다. 내항아리는 뚜껑에 육각형 무늬가 있으며, 몸통에는 국화 무늬가 가득 차 있다. 이 항아리들은 15세기 중엽 인화문(印花文) 분청사기의 가장 세련된 작품 중에 하나이다.
    문화재청,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항목명: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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