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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지정
성저5리 정계비 城底五里定界碑
시대 : 조선시대(태종 10년, 1410)
소유자 : 국유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정릉동 403-6
조선초 한양 천도 후 한성부 관할구역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한성부는 도성 밖의 5~10리까지 관할구역으로 삼고 이를 나타내는 표석을 도성 주위 사방에 세워 놓았으나 오늘날에는 이 비석만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도성 밖의 한성부 관할구역은 성저5리(城底五里) 또는 성저10리(城底十里)라고 칭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성저10리는 동쪽으로는 양주의 송계원(松溪院)과 대현(大峴)까지였고, 서쪽으로는 양화도 및 고양의 덕수원(德水院)까지였다. 남쪽으로는 한강과 노도(露渡)까지였다.
태조 이성계는 도성 안과 성저10리 전역을 5부(五部) 52방(坊)으로 나누어서 행정을 집행하게 하고, 태조 5년(1396)에는 한성부에 명하여 방명표(坊名標)를 세우게 했다. 따라서 이 당시에 성저5리 정계비나 성저10리 정계비를 세워 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76cm, 너비 42cm, 두께 24cm 크기의 이 비석은 그 정면에 ‘성저5리 정계입표 경인 3월 일(城底五里定界立標庚寅三月日)’이라 새겨 있으므로 경인(庚寅)은 태종 10년(1410)으로 추측된다. 이 비는 1970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경복궁 근정전 회랑(廻廊)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시멘트로 된 표석을 세워놓았는데, 현재는 그 표석마저 없어져 성저5리 정계비가 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참고자료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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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城底五里定界碑
朝鮮 초기에 관할구역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세운 높이 76㎝, 너비 42㎝, 두께 24㎝의 비석이 성북구 정릉동 403번지 6호에 있었다.
건립연대는 미상이나 경계석표 정면에 지금은 많이 마모되어 눈으로 읽기 곤란하지만 ‘城底五里 定界立標 康寅三月日”이라고 새겨져 있어 太宗 10년(1410)으로 추정할 수 있다.
朝鮮 초기에 漢城府의 관할지역은 都城 즉 성안과 城底 10리되는 지역 일원이었다. 世宗때 편찬된 世宗地理誌에 의하면 城底10里는 동으로는 楊州의 松溪院과 大峴에 이르기까지였고 서로는 楊花渡 및 高陽의 德水院에 이르기까지였으며 남으로는 漢江과 露渡에 이르기까지였다. 太祖는 서울의 성안과 城底10리 전역을 五部로 나누어서 한성부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태조 5년(1396) 4월 19일에는 漢城府에 명해서 도성으로부터 5리 되는 지점에 五部의 坊名標를 세우게 하였으나, 현재 다른곳의 표석은 모두 없어지고 오직 이 碑만이 남아 었다.
이 碑는 1970년 문화재관리국에서 경복궁 근정전회랑으로 옮겼고, 그 자리에는 시멘트로 된 遺址標를 세웠었는데, 현재는 유지표도 없어져 성저오리정계석표가 있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19-7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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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貞陵洞 408번지 淸水莊 유원지로 올라가는 큰 길가에 史題 제 110호로 정해진 ‘城底五里定界陣’가 서 있었다. 이 碑는 漢陽定都 후 城內 城外의 坊里境界 및 거리 등을 표시해서 세웠던 것으로 地上높이 2尺 5寸, 폭 1尺 4寸, 두께 8寸의 크기인데 그 정면에 ‘城底五里 定界立標 庚寅三月 日’이라 새겨 있다. 따라서 비를 세운 해의 干支 庚寅은 太宗 10년(1410)의 庚寅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立標物은 도성 주위 사방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城底五里定界標만이 오직 하나 남아 있을 뿐이며 이 표석도 현재는 景福宮 勤政殿 廻廊에 옮겨져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