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
1913.12.21 - 1995.06.17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교육가
소설가, 교육가이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화랑의 후예」, 이듬해 『동아일보』에 「산화」가 거듭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무녀도」(1936), 「황토기」(1939)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1945년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 210번지 13호에 살았는데, 소설 「혈거부족」(1947)에서 해방 직후 성북동과 돈암동 등지의 풍경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서라벌예대 교수와 문학 관련 협회를 이끌며 박경리를 포함해 수많은 문인들을 문단에 추천하고, 양성하였다.
성북동
  • 김동리_무녀도 표지(삼성출판박물관)
  • 지연기(紙鳶記) (3)
  • 해방(解放) (38)
  • 해방(解放) (42)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金東里
  • 이명칭: 시종(始鍾: 자), 창봉(昌鳳: 본명), 창귀(昌貴: 호적명)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문인
  •   인물 개인 교육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근거자료 원문

  • 김동리(1913~1995) : 경북 경주 출생. 1945년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에 작은 한옥을 마련하여 살았다. 서라벌예대 교수와 문학 관련 협회를 이끌며 박경리를 포함해 수많은 문인들을 문단에 추천하고, 양성하였다. 소설 「혈거부족」(1947)에서 해방 직후 성북동과 돈암동 등지의 풍경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5쪽
  • 반면에 소설가이신 김동리 선생님은 자주 강의를 하셨어요. 주로 글 쓸 주제 하나 던져주시고는, 다음 수업 때까지 글을 써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손’에 대해서 몇 매를 써와라 이런 식으로. 산문을 가르치셨으니까 그렇게 하신 것이죠 - 북디자이너 정병규 인터뷰 中 (2014. 12. 1. 서교동 투썸플레이스)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No.104
  • ○ 김동리(金東里) - 작가의 삶 · 경북 경주 출생(1913~1995), “해방 후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 · 성북구 거주 문인은 아니었으나, 「지연기」, 「해방」, 「혈거부족」 등에서 성북동을 적극적으로 배경으로 사용 · 김동리가 한국문단에서 갖고 있었던 영향력으로 볼 때 성북동의 문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5쪽
  • 소설가이다. 1934년 시 「백로」가 《조선일보》에 입선하였고, 다음해 소설 「화랑의 후예」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열여섯 살 많은 큰 형인 한학자 김정설의 영향을 받았고, 형이 있는 다솔사와 해인사에 머물며 글을 쓰기도 했다. 1945년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에 작은 한옥을 마련했다. 민족의식을 뚜렷이 내세워 1946년 조지훈, 조연현, 박두진 등과 ‘조선청년가문학가협회’를 만든 이래 문단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와 문학 관련 협회를 이끌며 박경리를 포함해 수많은 문인들을 문단에 추천하고, 양성하였다. 대표작 「무녀도」는 1936년 《중앙》에 발표한 뒤 몇 차례 수정을 거쳐 1978년 장편 「을화」로 다시 냈고, 4년 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다. 전통과 종교를 다룬 소설 「황토기」, 「등신불」과 자신이 겪은 사회상을 담은 소설 「흥남철수」, 「밀다원시대」 등 수많은 소설과 수필을 남겼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27쪽
  • 김동리(金東里) 1913-1995 동리(東里) 소설가. 경북 경주 출생. 1935년 중앙일보에 「화랑의 후예」, 이듬해 《동아일보》에 「산화」가 거듭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무녀도」(1936), 「황토기」(1939), 「역마」(1948)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순수문학과 신인간주의의 문학사상을 제창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 해방 후 1세대 작가 김동리는 1913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김동리는 어머니 나이 마흔두 살에 낳은 막내로 항렬자 봉鳳을 이어 본명은 창봉昌鳳(호적에는 창귀昌貴)이었다. 4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가세가 기울자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에 있던 큰형의 집에 머물게 된다. 큰형 범부 김정설은 한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열여섯살 아래인 동생에게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범부는 김동리가 문학의 길을 가는데 영향을 끼쳤고, 동생에게 동리東里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온종일 형의 서재에서 철학, 세계문학, 동양고전 등의 책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1934년 시 「백로」가 조선일보에 입선, 이듬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이후 범부가 머물던 경남 사천 다솔사와 합천 해인사에 기거하며 글쓰기에 매진하였다. 「등신불」은 다솔사를 소재로 쓴 소설인데, 신라시대 고찰인 다솔사는 당시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운동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지방거점이었다. 독립운동자금 조달기구 백산상회의 연락소로 만해 한용운, 범산 김법린, 효당 최범술 등이 오갔고, 김동리는 이들을 통해 민족의식을 다졌다. 1942년 일본이 강요한 ‘문인보국회’의 참여를 거절하자 김동리가 한글을 가르치던 다솔사 부설 광명학원이 폐쇄되었다. 이어 큰형 범부가 구속되고 가택수색과 예비검속의 수난을 당하였다. 「바위」, 「무녀도」, 「황토기」, 「사반의 십자가」, 「등신불」 등의 작품으로 입지를 다지며 명성이 높아지던 때였으나, 통한과 분노로 해방이 될 때까지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한다. 1945년 2월 하순 서울로 올라온 김동리는 미당 서정주의 집에서 잠시 지내다 얼마 후 돈암동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다음해 가족들은 큰 가방 하나뿐인 단출한 이삿짐을 가지고 상경하였다. 해방이 되었지만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일본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간신히 조국으로 돌아 왔으나 거처할 곳도 생계를 마련할 길도 없었다.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여 토끼굴 같은 방공호에서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돈암동 사람들의 모습이 소설 「혈거부족」(1947) 속에 담겼다. 삼선교와 돈암교 사이에 놓인 그다지 높지 않은 구릉, 그러나 언덕이라기보다는 분명히 산줄기의 끝이었다. 이 산줄기를 타고, 허연 신작로가 널따랗게 커브를 그리며 돌아간 산지 일대의 구멍들 속에 그들은 살고 있었다. “사철 여름 같았으면…….”그들은 조용히 그리고 끈기 있게 이 길고 지루한 겨울과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김동리, 「혈거부족」
  • 서울에 올라온 뒤부터 뜻이 맞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해방 후 문단 1세대 작가로서 민족문학의 정립과 발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였다. 김동리는 “민족문학은 인간주의 문학이요, 본격문학이요, 순수문학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도 인간주의 민족문학을 성취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라 주장하였다. 1946년 조지훈, 조연현, 황순원, 최인욱, 박두진, 박목월, 서정주, 김달진 등과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듬해인 47년 정월 하순이던가 2월 초순이던가 나는 솔선해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 돈암동 경동고등학교 밑에 있는 조그만 한옥이었다. 나는 이사를 온지 사흘째 되는 날부터 거리에 나가기 시작했다. 거기서 최초로 다시 만난 사람이 서정주 조연현 씨였다. 뒤이어 최태응 조지훈 박두진 김송 김윤성 씨들을 만났고 잇달아 곽종원 김달진 박종화 이헌주 양주동 김광섭 김진섭 정지용 이하윤 염상섭 이원조 설정식 박영준 이무영 김동석 제씨들을 만났다. 김동리는 문학 동네 촌장이라 불릴 만큼 많은 인재들을 발굴하여 길러냈고, 문단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56년 4월 미아리고개 너머 산을 깎아 만든 자리에 서라벌예술대학의 3층짜리 교사가 지어졌다. 1953년 용산구 후암동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대학이 새로 건물을 짓고 돈암동 산3-1번지로 이사를 온 것이다. ‘문인 사관학교’라고 불린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에는 김동리를 비롯해 당대 최고의 시인 서정주, 안수길, 박목월, 곽종원, 이광래, 정태용, 김구용, 양원달 등이 교수로 있었다. 김동리는 문학에 소질이 있는 전국 고등학생들을 찾아 문학의 꿈을 키우게 하였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서 공부하며 문단으로 진출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인 박경리도 김동리를 통해 등단하였다. 돈암동 210번지 13호 집으로 박경리가 들고 온 소설을 읽고 미발표 작품을 현대문학에 추천한 것이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여학교의 선배언니가 아들 다섯을 데리고 살던 돈암동의 선생님 본가에서였다. 가을이었던지 여름이었던지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장독대가 바로 코앞에 있는 마루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선생님은 몸집이 작달막하고 얼굴은 둥그스름했으며 책을 통해 상상해온 문사하고는 거리가 먼 인상이었다. 박경리, 「선생님에 대한 추억」 김동리의 문학에는 삶과 죽음의 문제, 신과 인간, 우주의 근원 의식이 담겨있다. 신라 천년의 전설이 어려 있는 경주의 산하에서 나고 자란 기억은 작품의 뿌리이자 바탕이 되었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지나친 음주에 반발한 어머니가 집에서 모시던 신주단지를 내다버리고 교회를 다니면서 겪은 종교적 갈등과 가정불화, 소꿉친구 선이와 사촌 남순 누나의 죽음은 주검과 폐허의 이미지로 작가의 의식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인「무녀도」는 경주의 한 무당 가족이 겪는 무속과 기독교의 갈등, 전통의 해체와 인간의 보편성을 다룬 작품이다. 고유의 토속성과 인간중심의 민족문학론을 제창하며 우리의 전통적 소재를 인류의 보편적 차원으로 그려낸 작가 김동리는 뇌졸중으로 1995년 숨을 거두었다. 사후 「무녀도」를 장편으로 개작한 「을화」가 노벨문학상 본선에 진출하여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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