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삼
1878.06.23 - 1937.04.13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성북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10년대 초반부터 간도 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는데 단단한 기반을 마련한 주역이었다. 1931년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7년 순국한다. 이때 김동삼의 시신을 수습해줄 사람이 없었는데 한용운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 일화는 뮤지컬 <심우>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성북동
  • 김성태 가족 1: 독립군 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김성태 가족 소개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김동삼
  • 대한독립선언서
  • 심우장과 김동삼 표지석
  • 독립군 김혁장군 증손자 김성태 가족 인터뷰(1)
  • 독립군 김혁장군 증손자 김성태 가족 인터뷰(2)
  • 독립군 김혁장군 증손자 김성태 가족 인터뷰(3)
  • 김성태 가족 1: 독립군 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김성태 가족 소개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金東三
  • 이명칭: 김긍식(金肯植), 일송(一松)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879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 (성북로29길 24)
  • 비고: 심우장(장례식)

근거자료 원문

  • 심우장과 노시산방 1. 1937년 봄, 심우장 - 한용운, 김동삼, 조지훈 선생을 마지막으로 뵈온 것은 일송 김동삼 선생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셨을 때 때가 때인지라 일송 선생의 시신을 돌볼 사람이 없어 감옥 구내에 버려둔 것을 선생이 망명시절 고인에게 받은 권우眷遇와 지사志士 선배에 대한 의리에서 결연이 일어나 성북동 심우장까지 일송 선생의 관을 옮겨다 놓고 장사를 치르시던 모습이다. 위 글은 시인 조지훈이 1954년 잡지 『신천지』에 쓴 「한용운 선생」의 일부이다. 이 짧은 글에는 3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한용운, 김동삼, 조지훈. 그리고 조지훈은 이 장례를 아버지와 함께 갔으니 아버지 조헌영을 더하면 넷이 된다. 실제로 조헌영은 장례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뒤에 한용운을 대신해서 조사弔辭를 낭독했으니 총 4명이 이 글의 당사자가 된다. 과연 당시의 상황은 어땠으며, 이들은 무슨 관계였을까? (중략) 한용운과 김동삼의 관계는 19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권을 상실한 직후 한용운은 만주로 떠났고 둘은 이곳에서 만났다. 김동삼은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서간도에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한용운은 바로 이곳을 찾아간 것인데, 이때 젊은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스파이로 오해 받아 총을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들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용운은 오래지 않아 조선으로 돌아간다. 그러며 김동삼과 서로 마주할 인연은 끝이 났다. 하지만 만나지 못한다고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을 동지同志라 한다. 동지 사이에 중요한 것은 뜻이지 잦은 만남이 아니었다. 둘은 나이차도 크지 않았다. 김동삼은 1878년생, 한용운은 1879년생. 한 살 한 살 나이 따지는 것이야 요 근래에 생긴 문화였다. 뜻이 맞는 사람끼리는 나이차가 조금 있어도 서로 벗으로 삼는 것이 우리 전통이었다. 한용운은 조선에서 동지인 그의 소식을 계속 접했을 것이다. 1919년 서로군정서에서 참모장을 맡은 것도, 1920년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를 지원한 소식도, 1929년 김좌진, 지청천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촉진회’를 결성한 것도, 그러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에 의해 체포된 것도,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것도 모두 한용운은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중략) 조헌영은 한용운뿐만 아니라 김동삼과의 관계도 깊었다. 한양 조씨인 그의 집안은 대대로 경북 영양 주실마을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김동삼의 고향은 안동이었고 이 두 집안은 인척 관계로 엮이는 경우가 많았다. 조헌영은 단순한 고향 후배의 자격으로 조사를 낭독한 것이 아니었다. (중략) 1937년 봄, 심우장에서는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가 있었다. 차가운 관속에 누워 있었을 김동삼 선생의 시신, 그 관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한용운, 묵묵히 조사를 읽어갔을 조헌영,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지켜봤을 청년 조지훈이 그곳에 있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상황이었고, 식민지 안에 심우장만이 조선 땅으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바로 그 장면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02-205쪽, 207-208쪽
  • 본적: 경북 안동 주소: 성북동(장례식) 계열과 단체: 통의부 <활동 내용>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07년 안동(安東)에서 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 등과 함께 협동중학교(協東中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1909년에는 서울 양기탁(梁起鐸)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은밀히 회합하여 독립운동기지 설치문제와 독립군의 양성문제를 협의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당하자 1911년 만주로 건너가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이시영(李始榮)·이철영(李哲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윤기섭(尹琦燮)·김창환(金昌煥) 등과 더불어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재만동포의 농지개척과 이주민의 안정책을 도모하였다. 또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전력을 기울였으며, 아울러 군관양성과를 병설하여 젊은 장교들을 양성하였다. 1911년에는 유인식과 같이 통화현(通化縣)에 중어학원(中語學院)을 설립하여 한·중 양민족의 친선을 도모하였으며 1913년에는 합니하(哈泥河)에 여 준(呂準)·이 탁(李 )·이상룡 등과 함께 교포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재만동포의 민생·교육 등에 전력을 기울였다. 동년 말경에는 이 탁·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기 위하여 유하현의 밀림지대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개설하여 그 장주(庄主)에 추대되어 다수의 청년동지들을 규합, 3년간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에서 서 일(徐一)·여 준·신팔균(申八均)·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39인이 민족대표로서 연서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으며 1919년에는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자 4월초에 이상룡·이 탁 등 남만 각지의 지도자들과 상의하여 유하현 삼원보에서 부민단의 범위와 사업을 확대하여 한족회(韓族會)로 개편하고 서무부장에 취임하였으며 또한 남만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후, 군정부가 상해(上海)임시정부(臨時政府)의 휘하로 들어가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되자 참모장으로 취임하여 독판(督辦) 이상룡을 보필하였다. 1920년에는 군정서를 길림성 화전현(樺甸縣)에 옮겼다가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그 소속부대를 안도현(安圖縣) 밀림속으로 다시 옮기고 병사(兵舍)를 건축하여 제2군사 기지로서, 유사시에 대비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북로군정서군 및 홍범도군(洪範圖軍)과 합세하여 밀산(密山) 및 노령(露領) 등지로 이동하였다. 1922년에는 연해주(沿海洲) 각지와 흑룡강(黑龍江) 등지를 순회하며 독립운동의 책원지를 물색하는 한편, 동년 8월에는 봉천성(奉天省) 흥경현(興京縣:현재 신빈현)에서 오동진(吳東振)·현정경(玄正卿) 등과 함께 지금까지 분산 연립조직되었던 각 단체의 통합을 성공시켜 민족 단일의 독립운동단체인 통군부(統軍府)를 조직하고 그 교육부장에 임명되었다. 그후, 약 2개월 뒤에는 통의부(統義府)가 조직되자 그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3년 1월 3일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대표로 참석, 의장에 임명되어 회의를 주재하다가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 갈등이 계속되자 양파를 조정, 독립운동기구를 일원화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동년 6월 3일 삼십여개의 단체의 개조파 대표와 성명을 발표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1월에는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의성단(義成團)·광정단(匡正團) 등 지방단체들을 망라하여 길림성 화전현에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참모장 및 행정위원에 취임하였다. 1925년 9월 24일, 이상룡이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고 이듬해 2월, 그를 국무원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동년 10월 10일, 국무령 홍진(洪震)이 또다시 국무원에 임명하였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1927년에는 길림에서 김좌진·이청천(李靑天) 등이 정의부·신민부·참의부(參議府)를 합하여 민족유일당촉진회(民族唯一黨促進會)를 조직하자, 위원장겸 군민의회(軍民議會)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4월에는 길림에서 김기풍(金基豊)·김진호(金鎭浩)·이 탁·오동진 등 35인과 발기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 재만농민의 생활개선과 생산증가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 일본군이 만주로 계속 진출하자 동지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북만으로 갔다가 동년 10월 초, 하얼빈(哈爾濱)의 정인호(鄭寅浩)의 집에 투숙 중 이원일과 함께 일경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경성으로 이감된 후,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0년-김동삼 독립기지건설 위해 만주 답사 1911년-김동삼 만주로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 설립 및 독립기지건설에 주력 1925년-김동삼 만주에서 정의부 활동 1937년-김동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 심우장에서 장례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0-12쪽
  • ○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김동삼 독립군이 존경한 만주벌판의 지주 1878~1937 / 대통령장 / 심우장(성북동 222-1)에서 장례 한일강제합방 이후 1911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데 이바지했습니다. 의열단 단원을 비롯한 많은 독립군을 양성한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며 서로군정서를 조직하고 군사지휘를 총괄하는 참모장을 맡았습니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으며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한용운이 심우장에서 장례식을 엄수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6쪽
  • ○ 독립을 위해 하나로 뭉친 각계의 사람들 1919년 2월 1일,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 39명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합니다. 무오독립선언 혹은 대한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입니다. 조소앙이 기초한 선언서에는 일본과의 병합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연서자 39인 중에는 조소앙을 포함해 김동삼 등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39쪽
  • ○ ‘경학사’하면 김동삼, ‘이씨 6형제’하면 이규창 먼저 압록강과 두만강의 경계 너머에 있는 간도 지역으로 가봅니다. 간도는 백두산을 기준으로 서쪽은 서간도, 동쪽은 북간도, 그리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쪽 연해주로 구분됩니다. 흔히 그 전체를 가리켜 만주로도 부릅니다. 서간도에서 소개할 단체는 경학사입니다. 경학사는 신민회 회원들이 서간도로 와서 세운 단체로 일송 김동삼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김동삼은 간도에 독립군기지의 토대를 닦아놓은 주요인물로 익히 알려졌듯 순국 후 한용운의 심우장에서 장례식이 치러졌지요. 서간도로 망명하기 전 김동삼은 구한말부터 항일운동 비밀결사단체이자 애국계몽운동단체였던 신민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신민회는 1910년대 초반 항일단체를 논할 때 중심에 있는 단체입니다. 그러나 신민회는 1911년 일본이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본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고 이에 105인의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가두면서 해산됩니다. 이후 김동삼을 비롯한 신민회 회원들은 새로운 독립운동을 계획하기 위해 서간도로 이주해 경학사를 조직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72쪽
  • ○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초석을 다지다 이씨 6형제의 자금은 곧 경학사가 학교를 세우는데 일조합니다. 바로 신흥무관학교입니다. 앞서 소개한 의열단의 주요 독립운동가들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지요. 이 학교 출신들이 만든 항일 부대가 서로군정서입니다. 경학사를 세우는 데 일조한 김동삼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할 때에도 많은 공로를 세웠습니다. 독립운동가 양성 뿐 아니라 이주민들의 정착과 동포들의 농지 개척을 돕는 일도 그의 몫이었지요. 또한 1919년 서로군정서가 조직된 이후 군사지휘를 총괄하는 참모장 역할도 맡았습니다. 이렇듯 김동삼은 1910년대 초반부터 간도 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는데 단단한 기반을 마련한 주역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1910년대 서간도의 상황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74-75쪽
  • ○ 임시정부를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 한반도의 운명을 국제연맹이 임시로 맡아 달라는 이승만의 주장이 알려지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충격을 받지요. 장건상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일을 크게 성토하고 1923년 위기에 빠진 임시정부를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됩니다. 국민대표회의의 의장은 김동삼이 맡았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81쪽
  • ○ 성북인의 목소리 넷 김동삼 김동삼이 옥중에서 남긴 말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1937년 서대문형무소 옥중 유언) “이런 일정한 자리에서 죽게 되는 것도 과분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립군이라면 대개 풀밭이나 산 가운데서 남들이 어데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이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1934년 4월 2일, 옥중에서 아들에게 남긴 말) - 독립운동기지의 초석을 단단히 쌓아놓고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힘썼던 일송 김동삼은 1931년 하얼빈에서 체포돼 평양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결국 1937년 만 59세로 순국합니다.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도 그는 한결 같이 의연한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의 유언에서 나라를 자신보다 더 아끼고 사랑했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아들에게 남긴 말에서 독립운동가의 투철한 신념이 느껴집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수습 회의의 의장을 도맡았던 김동삼. 어떤 이념이나 지역 갈등 없이 당대 독립운동가들에게 존경 받았던 김동삼. 그의 이름은 역사에 늘 푸른 소나무처럼 남게 되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86-87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5

관련 마을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