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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문학』 관련
「회원소식」, 『자유문학』, 1957. 7.
「회원동정」, 『자유문학』, 1957. 9.
「문단75인의 지상발언」, 『자유문학』, 195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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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김광섭의 투병 생활은 그의 시작詩作 활동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김광섭이 1956년 6월에 동료 문인들과 힘을 모아 창간한 월간 문학잡지 『자유문학』이 1964년 여름,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76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부족한 재정 때문에 매 호 동분서주, 피눈물을 흘려가며 발간해 온 잡지였다. 그의 50대 정열을 이 잡지에 다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대문학』, 『사상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후배 문인들에게 활동할 공간을 주고, 전후 황폐한 문화 풍토 속에서 우리 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자유문학』. 김광섭에게 ‘한국 현대문학의 건설자’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안겨주기까지 했던 이 잡지의 폐간으로 한동안 그는 실의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든 재간해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원문은 김광섭의 자서전 『시와 인생에 대하여』에 나온 내용을 근거로 작성한 것으로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진 『자유문학』의 폐간 시점과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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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56년에 창간되었던 월간문예잡지.
개설
A5판, 242면. 1956년 6월 자유문학자협회(自由文學者協會)의 기관지로 창간되었으며, 1963년 8월 71권으로 종간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에 김기진(金基鎭), 주간 송지영(宋志英), 편집장은 김이석(金利錫)이었다.
내용
기관지이면서도 범문단적인 문예지 구실을 하였으며, 4·19를 계기로 자유문협의 기관지를 벗어나 김광섭(金珖燮)이 판권을 인계받고 주간이 되었다.
1962년 3월호부터 편집위원제를 두고 김종문(金宗文)이 주간이 되었으며, 이헌구(李軒求), 모윤숙(毛允淑), 안수길(安壽吉), 이인석(李仁石), 이철범(李哲範) 등 5명이 편집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운영난으로 종간되었다.
여 유승규(柳承畦), 김해성(金海星), 이원경(李源庚), 권용태(權龍太) 등 40명의 신인과 신인작품 당선제를 두어 43명의 문인을 등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