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2004
작품 문학
자전적 소설로 2004년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같은 제목의 단편이 2002년 『문학과사회』 여름호(58호)에 발표된 바 있다. 이 소설은 노인이 된 화자가 과거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액자식 구성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화자는 1950년대 6.25전쟁을 전후로 하여 성북구 돈암동에 거주하였는데, 같은 동네로 이사를 온 먼 친척 동생 뻘 되는 ‘현보‘라는 남자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성북천으로 불리는 안감내, 성신여고, 성신여대, 성북경찰서 등 돈암동 주변이 배경으로 많이 등장하여 당시 성북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북구
  • 박완서_그 남자네 집 표지(삼성출판박물관)
  • 옛 동도극장 자리
  • 동도극장 신문광고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박완서
  • 비고:
  • 유형: 작품 문학

시기

근거자료 원문

  • · 박완서, 「그 남자네 집」, 『문학과 사회』 통권 58호 2002년 여름호.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8쪽
  • 박완서를 좋은 소설가로 여기게 된 때는 『그 남자네 집』이란 장편소설을 ‘향토사 연구’라는 의무적인 계기로 읽고 난 후였다. 그런데 학창 시절 재미없게 읽었던 그 박완서 소설이 아니었다. 작가 특유의 수다스러운 문체가 주인공의 삶과 잘 어울려 있는 것이 마치 내 옆에서 누군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이 소설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그중 작중화자의 이웃집 소녀로 나오고 나중엔 ‘양공주’가 되어 미국으로 떠난 춘희가 있다. 화자는 이 여성의 삶을 같은 동네에 사는 아주머니로서 보고 접한 그대로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 시선이 리얼하면서도 따뜻했다. 많은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양공주는 현대사의 질곡이 낳은 비참한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소설 속 춘희는 화자의 이웃사촌이자 동생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화자와 춘희간에 유지되는 그 다정한 거리감이 좋았다. 더 나아가 화자는 소설 말미에서 춘희의 삶을 역사적으로 조망해 보려고 시도하는데, 이를 위해 그는 지난 시절 양공주와 같은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상당하며 이것이 한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한 바를 마땅히 우리는 따져봐야 한다고 써나간다. 이 대목에서 나는 충격과 감동을 함께 느꼈다. 박완서의 소설은 그저 재미있기만 한 소설이 아니었다. 일상과 역사를 결부시켜 이야기하는 솜씨가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단단하고 따뜻한 발언을 할 수 있는 작가를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봤을 때 왜 그동안 박완서를 모르고 그녀의 소설을 읽지 않았는지 후회되기도 하였다. (백외준)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30-31쪽
  • 성신여대면 돈암동에 있을 텐데? 나는 좀 놀란 소리로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동으로 나뉘어져 제작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후배가 가르쳐준 건 새 이름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쪽 지리에 훤했다. 위치를 자세히 물어보니 성신여대와 성북경찰서 사이인 게 분명했다. 내 처녀 적의 마지막 집도 성신여고와 성북경찰서 사이에 있었다.
    젊은 시절 돈암동에 살았던 화자는 후배가 새로 이사한 동네가 성신여대 근처라는 것을 듣고, 과거 자신이 살았던 집을 떠올리게 된다. 소설에서 말하는 성신여대와 성북경찰서 사이는 지금의 행정구역상 동선동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 돈암동은 외진 동네가 아니다. 도심에서 멀지도 않다. 혜화동 고개를 넘어 미아리, 길음동, 수유리로 통하는 대로를 거치는 일이 50년 동안에 어찌 한두 번만 있었겠는가. 그 길가에 내가 단골로 다니던 동도극장이 없어진 것도 오래전이다. 그게 없어진 걸 안 것은 버스나 전차의 차창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그게 있던 자리가 허전해 허리를 비틀고 고개가 아프게 뒤돌아보았다. 그때 내가 안타깝게 배웅한 건 단지 극장 자리가 아니라 비 내리는 흑백화면 속의 장 마레나 샤를 부아예였을 것이다.
    후배의 이사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살던 옛 동네를 떠올린 화자가 옛 돈암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에서 언급되는 동도극장은 실제로 1948년 돈암교 전차정류소 앞에 문을 열었으며, 계속 운영되다가 1981년 문을 닫았다. 미아리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에 위치해 있었던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다고 한다.
  • 그가 성신여대역까지 마중을 나와주었다. 어디쯤이라고 말만 해주면 찾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도 나와준 건 고마운 일이었다. 그를 따라간 동네는 내머릿속에 입력된 그 옛날의 돈암동이 아니었다. 가볍고 세련되고 없는 것 없고 활기가 넘치는 전형적인 대학촌이 거기 펼쳐져 있었다.
    화자가 성신여대 근처로 이사간 후배의 집에 가는 장면이다. 화자는 젊은 시절 돈암동에서 살았는데, 약 50년 사이에 많이 변한 동네의 모습에 놀라고 있다.
  • 저만치 산 밑으로 성신여대의 높은 축대가 보였다. 내가 살던 돈암동 집도 골목만 나오면 꼭 그만한 각도로 그만큼 떨어져서 성신여고를 바라볼 수 있었는데. 그럼 내가 나의 옛 집터에서 점심을 먹었나. 기분이 이상해지려고 했다.
    화자의 후배가 새로 이사한 동네인 성신여대 근처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장면이다. 음식점 창 밖으로 성신여대를 보며 자신이 젊은 시절 살았던 집을 떠올리고 있다.
  • 안감내만 찾으면 그 집을 쉽게 찾을 줄 알았다. 성북동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삼선교, 돈암교를 거쳐 우리 동네 앞을 흐르던 개천을 우리는 그때 안감내라고 불렀다. 안감내는 수량이 풍부하고 맑아서 동네사람들은 큰 빨래만 생기면 그리로 들고 나갔다. 개천과 나란히 난 천변길은 인도와 차도가 따로 있을 정도로 너른 한길이고 개천 쪽으로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어 차가 많지 않는 당시에는 타동네 사람들까지 일부러 산책을 올 정도로 한적하고 낭만적인 길이었다.
    화자는 성신여대 근처로 이사한 후배의 집 구경을 하러 갔다가 자신도 젊은 시절 그 동네에 살았다는 이야기를 후배에게 하게 된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배는 자신의 집으로 가기 전, 화자가 살았던 집을 찾아보자고 제안하고 둘은 집을 찾아나선다. 성북천은 안감내라고도 하였으며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성북구와 동대문구를 가로 질러 청계천에 합류되는 하천으로, 소설의 내용에 따르면 성북천은 당시 동네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성북천은 1960년대 이전까지 빨래를 하는 사람들과 수영을 즐기는 아이들이 많았던 맑고 깨끗한 하천이었다고 한다.
  • 안감내가 복개됐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복개됐더라도 개천과 천변길을 합치면 8차선 넓이쯤은 되는 대로로 남아 있어야 했다. 80년대 초 처음으로 유럽여행을 가서 센 강을 보고 애걔걔 그 유명한 센 강이 겨우 안감내만 하네,라고 생각할 정도로 내 기억 속의 안감내는 개천치고는 넓은 시냇물이었다. 집만 나서면 개천 건너로 곧바로 성북경찰서의 음흉한 뒷모습과 거기 속한 너른 마당이 바라다보였다. 그만한 거리감 없이 우리 식구가 거기서 허구한 날 그 건물을 바라보며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사를 간 후배의 집에 놀러가기 위해 돈암동 근처를 찾은 화자는 후배와 함께 자신이 젊은 시절 살았던 집을 찾아보기로 한다. 이 부분은 화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성북천의 모습을 묘사한 장면으로, 성북천만 찾으면 자신이 살았던 옛 집을 쉽게 찾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성북천은 이미 복개되어 화자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복개되었던 하천을 다시 복원한 상태인데, 2003년 6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현재는 많은 주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운동을 하는 공간이 되었다.
  • 복개된 개천 자리 다음으로 표적이 될 만한 건 성북경찰서였다. 그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찾은 게 아니라 우리가 맴돌던 지점에서 후배가 조오기,라고 손가락질해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내가 천주교회와 신선탕 중간 지점에 서 있는 걸 알았다. 나의 옛집은 바로 신선탕 뒷골목에 있었고, 그 남자네 집은 천주교당 뒤쪽에 있었다. 천주교당도 신선탕도 천변길에 있었다. 교회는 중축을 했는지 개축을 했는지 그 자리에 있으되 외양은 많이 바뀌고 커져 있었지만 목욕탕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이고 이름까지 그대로였다.
    화자가 후배와 함께 돈암동 근처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 살았던 집을 찾고 있는 장면이다. 성북천이 복개 되어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과 달라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성북경찰서를 찾아서 옛 집의 위치를 생각해보고 있다. 내용 중 등장하는 천주교회는 돈암동 성당, 신선탕은 돈암동 성당 근처에 있었던 ‘신안탕‘이라는 목욕탕으로 보인다. 신안탕은 현재 ‘아리랑교통‘이라는 마을버스 회사로 바뀌었다(서울시 성북구 고려대로7길 98).
  • 나는 그놈의 목욕탕 때문에 그 넓지 않은 이면도로가 안감내를 복개한 길이라는 걸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릿속 지도의 거리는 실재하는 거리가 아니라 다만 확보하고 싶은 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선탕 뒷골목의 옛 조선 기와집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일대에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서 정확한 집터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화자는 돈암동으로 이사 간 후배의 집에 놀러가기 위해 돈암동을 찾는다. 후배와 함께 자신이 젊은시절 살았던 옛 집을 찾던 화자가 바뀐 동네의 모습에 놀라는 장면이다. 1950년대의 돈암동은 조선 기와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며, 기와집들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다세대 주택으로 바뀌게 되었다.
  • 그 남자네가 안감천변으로 이사 온 것은 우리가 그리로 이사 간지 한 달도 안 돼서였을 것이다. 우린 아직 새집이 자리가 잡히지 않아 어수선할 때였다. 어머니가 철물전에 가는 데 따라가서 바께쓰, 쓰레받기, 부삽, 쥐덫 따위 너절한 것들을 들고 오다가 그 남자네가 이삿짐을 부리는 걸 만났으니까.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부분이다. 화자는 돈암동 근처로 이사 간 후배를 만나기 위해 그 동네를 찾았다가 50년 전 자신과 같은 동네에 살던 ‘그 남자‘를 떠올리게 된다. ‘그 남자‘의 이름은 현보이다. 현보의 어머니는 화자의 어머니의 외가 쪽의 먼 친척이고, 화자가 돈암동으로 이사 한지 얼마 안되어 같은 동네로 이사를 왔다.
  • 그 남자네 집은 천주교당 뒤쪽, 성북경찰서 옆 양회다리로 통하는 큰 한길가에 있었다. 그 집은 한길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긴 해도 대로변에 바깥마당을 끼고 있는 집이었다.
    화자는 후배에게 50년 전 같은 동네에 살았던 ‘그 남자‘ 현보의 집 이야기를 하게 되고, 함께 그 집을 찾아나선다. 이미 대학촌으로 변했고, 가정집들도 양옥집으로 모두 바뀌었지만 화자의 기억 속에 있는 위치에는 그 남자가 살았던 집인 조선 기와집이 남아 있었다. 화자가 설명한 그 남자네 집은 현재 보문로34길 부근으로 추정된다.
  • 세종로의 은행나무들이 자기 안에 깊숙이 숨어 있던 노랑 중 최고로 순수한 금빛을 환장을 한 것처럼 한꺼번에 분출하던 날, 5호선을 타고 집으로 가다 말고 동대문운동장에서 4호선으로 갈아탔다. 교보에서 산 책 보따리가 제법 무거웠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성신여대 정거장에서 내렸다. 나는 결코 길눈 같은 거 어둡지 않았다. 곧장 그 남자네 집으로 갔다. 혼자여서 아무것도 은폐할 필요가 없었다 여전히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돈암동에서 후배를 만난 날 기억 속에 남아 있던 50년 전 현보(그 남자)의 집을 찾아갔던 화자는 그 이후, 다시 한번 그 집에 찾아가게 되고 그 집의 문 앞에서 현재는 그곳에 없는 현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 그 남자를 다시 만난 것은 전쟁 중이었으니까 대충 50년 전쯤이라고 해두자. 우리 집에 아녀자만 남고 나서였다. 나는 아이들과 여자를 동격시하는 아녀자란 말이 싫었지만 차차 동의하게 되었다. 전쟁이 휩쓸고 간 후 집안 꼴이 그렇게 되었다. 남자들은 성북경찰서를 거쳐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전쟁이 난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전선은 서울 북쪽 몇십 리 안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고 피난 못 간 서울 사람들은 가난뱅이들뿐이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현보가 살던 집을 찾아갔던 화자가 50년 전, 돈암동으로 이사왔던 현보를 전쟁 중 다시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을 통해 1950년 6.25전쟁 당시 돈암동의 상황을 알 수 있다.
  • 삼선교까지 전차 한 정거장 거리를 그를 따라 되돌아갔다. 천변에 불빛이 보였다. 도깨비불처럼 귀기가 돌게 창백한 불빛은 간데라 불이었다. 카바이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찐빵집보다 더 허술한 천막집이었는데 이상스럽게도 궁기는 없었다.
    전쟁 중 미군부대에서 일을 했던 화자는 어느 날 퇴근 길 전차 안에서 현보를 만난다. 현보와 화자는 서로 반가워하며 인사를 하고 빵집으로 향하였는데, 잠시 후 현보가 자리를 옮기자며 화자를 데리고 삼선교의 한 포장마차로 가게 된다. 삼선교는 동소문동과 성북동, 삼선동이 만나는 교차로에 있었던 다리로, 성북천이 복개될 때 철거되었다. 포장마차에서 둘은 서로의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화자는 포장마차 주인을 통해 현보가 국군으로 징집되었다가 몸을 다쳐 제대하게 됐음을 알게 된다. 내용에 언급된 간데라 불은 카바이드 가스에 불이 달리도록 쇠붙이로 만든 등을 말한다.
  • 그는 느리게 조근조근 말했다. 삼선교에서 안감천변 목욕탕 뒷골목 우리 집까지 오는 동안에 그의 이야기는 끝났다. 딱 고 길이에 분량을 맞춘 것처럼. 그 거리는 얼마 안 됐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도 간결하게 요약된 것이었다.
    포장마차에서 현보가 상이군인임을 알게 된 화자는 현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따져 묻고, 현보는 삼선교에서 돈암동으로 돌아 오는 길에 화자에게 그동안의 일을 설명해준다. 현보는 인민군이 후퇴하고 서울이 수복되는 사이 국군으로 징집되어 군대에 갔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명예제대하여 돈암동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 가로등 없는 골목길을 5리를 10리, 20리로 늘여서 걸으면서, 또는 삼선교의 포장마차 집의 새파랗고도 어둑시근한 카바이트 불빛이 무대조명처럼 절묘하게 투영된 자리에서, 그는 나직하고도 그윽하게 정지용, 한하운의 시를 암송하곤 했다.
    화자는 몸을 다쳐 명예 제대한 현보와 재회한 후 그와 함께 서울 이곳 저곳을 놀러 다닌다. 현보는 미군부대 앞에서 거의 매일 화자를 기다렸고, 둘은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이 부분에서 나오는 포장마차는 화자와 현보가 재회한 날부터 함께 갔던 곳으로, 화자는 현보의 시를 듣는 것은 ‘흉흉한 전시를 견디게 한 사치‘라고 표현하였다.
  • 엄마는 남편과 아들을 잡아가서 다시는 돌려보내지 않은 성북경찰서와 그 옆의 청년단 건물과 직결처분을 해서 한 구덩이에 처넣었다는 소문을 듣고 미친 듯이 시체를 찾아 헤매던 성신여고 뒷산 사이에 끼어 사는 걸 더는 못 참아했다.
    화자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며 현보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시간이 흘러 휴전이 된 후, 화자의 어머니는 돈암동에서 떠나고 싶어한다. 그 동네는 화자의 가족들에게 아픈 상처를 남겼고, 서로를 고발하던 이웃들이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자의 어머니는 이웃에 살던 반장집 사람들을 특히 불편해 하였는데, 반장이 화자의 아버지와 아들을 고발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난 갔다가 돌아온 반장과 화자의 어머니는 그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며 오해와 원망을 풀게 된다. 이 부분은 6.25전쟁 당시 돈암동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 매일 무턱대고 발품만 팔다가 반장네가 따라나서 주자 쉽게 가닥이 잡혔다. 종암동에 있는 방이 여덟 개나 되는 양기와집을 계약하고 우리 집도 합당한 값에 팔았다. 집 판 값에서 이사 비용, 등기 비용까지 제하고 남은 값으로 새 집을 샀는데 대지는 판 집보다 세 곱이나 넓은 집이었다.
    휴전이 된 후, 화자의 어머니는 돈암동을 떠나기 위해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 집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웃의 반장네가 어머니를 도와주었다. 하숙을 치는 게 어떻겠냐는 반장의 말에 솔깃한 어머니는 종암동에 하숙을 칠 수 있을만한 방 8개짜리 양기와집을 구하게 된다.
  • 종암동 양기와집 대청마루 가운데 기둥에는 내 키 높이에, 포탄 자국이 도끼로 뽀개다 만 것처럼 흉측하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게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말하지 않았다. 섬뜩하고 보기 싫을 뿐, 집의 안전을 위협할 것 같지는 않았다.
    화자의 가족들은 돈암동 집을 떠나 종암동에 있는 양기와집으로 이사를 한다. 그곳에서 하숙을 시작하기로 하여 어머니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화자는 이러한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 그 남자네 집 바깥마당의 무성한 나무가 보리수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도망치듯이 그 집 앞을 벗어났다. 그러나 멀리 가지는 못하고 지금은 땅 밑을 흐르는 안감냇가를 중심으로 그 동네를 돌고 또 돌았다.
    돈암동에서 후배를 만난 이후, 혼자서 50년 전 현보가 살았던 집을 찾아간 화자는 잠시 그 집을 들여다 보곤, 그곳을 벗어나 성북천 주변을 돌며 얼마 전 신문을 통해 알게 된 현보의 부고에 대해 생각한다.
  • 전쟁이 끝나기 전, 포성 소리를 들으며 안감천변, 외딴 포장마차의 오뎅국물 속에서 건져 먹던 수상한 힘줄에다 대면 얼마나 고급인가. 우리는 그런 것들을 입맛 따라 군것질하기 위해 질척질척한 바닥에 엉덩이가 닿을까 봐 엉거주춤 불편하게 쭈그리고 앉아서도 그저 즐겁기만 했다.
    현보와의 사이도 멀어지고 미군부대도 그만두게 된 화자는 같은 부대에서 일했던 전민호라는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결혼 생활에 지쳐가던 화자는 어느 날 시장에서 현보의 큰누나를 만나 화자와 헤어진 후 현보가 많이 힘들어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면서 현보와 가끔 만나달라는 부탁을 듣게 되고, 화자는 그 이후 장을 보러 나갈 때마다 동대문시장에서 현보를 만난다. 이 부분은 시장에서 현보를 만난 화자가 함께 군것질을 하며 옛날에 현보와 갔던 삼선교 근처 포장마차를 떠올리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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