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1995
작품 문학
자전적 소설로 1995년 웅진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앞서 출간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6.25전쟁 당시 1951년 1월 4일에 국군이 다시 후퇴를 하게 되었고(1.4후퇴) 총상을 입은 오빠를 데리고 멀리 피난갈 수 없어 현저동으로 거짓피난을 가 있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민군 치하를 살아내던 화자의 가족은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또 한 번 북쪽 교하로 거짓피난을 갔다가 그 해 4월 4일에 국군이 서울을 재탈환하자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 무분별한 ‘빨갱이 색출‘에 힘없는 보통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절절히 그려내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개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전시 및 전후 사람들의 생존을 향한 몸부림과 생활 풍경 등이 세밀하고 생생하게 담겨 있다.
삼선동
  • 박완서_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표지
  • [성북소담] 제 3화 '박완서의 소설로 보는 성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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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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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브젝트 생산자: 박완서
  • 비고:
  • 유형: 작품 문학

시기

근거자료 원문

  • 돈암동 성북경찰서가 보이는 천변가에는 수양버들이 벌써 삼단 같은 머리를 늘어트리고 살랑대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 동네였다. 거기서 오늘 걸은 거리를 계산해보니, 그렇게 먼 길을 하루에 걷기는 내 생전 처음이었다. 그러나 피곤하다는 생각은 거의 안들었다. 먹은 거라곤 교하에서 개성 피난민이 길 떠나면서 나누어준 백설기 말린 게 전부였다.
    현저동 언덕에 남으로 피난 가는 척 거짓피난을 와있던 화자의 가족들,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올케는 인민군이 후퇴를 하면서 어머니와 오빠는 남고 화자와 올케 두 사람만 교하라는 지역으로, 북쪽으로 피난 가는 척 또 한번 거짓피난을 갔다(교하는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내에 있던 지역). 그리고 4월 국군이 서울을 재탈환한 후에 화자와 올케는 걸어 걸어 서울 돈암동으로 돌아온다. 성북경찰서 앞 성북천변에 지금은 은행나무가 있지만 당시에는 수양버들이 심어져 있던 모습을 알 수 있다. 피난민들이 길을 떠날 때 흔히 떡을 말린 것을 식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극심한 피로감 때문인지 자기 동네에 돌아온 반가움 때문인지 말린 떡만 먹고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 우리 집에라고 사람이 살고 있을까 싶지 않게 동네의 적막은 깊고 완강하고 배타적이었다. 우리 집을 처음 찾아오는 사람에게 성북경찰서 다음으로 일러주기 쉬운 표적이 됐던 신안탕의 2층 건물도 멀쩡하게 남아 있었지만 목욕탕 영업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신안탕만 끼고 돌고 나면, 뒷걸음질을 친다 해도 우리 집이 보이게 돼 있었다.
    1951년 1.4 후퇴 이후 봄에 국군이 다시 서울을 탈환한 뒤 교하에 피난 가 있던 화자와 올케 두 사람이 자신들이 살던 돈암동의 한옥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실제로 성북구청 맞은편 보문2교 방향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위치했던 신안탕이라는 목욕탕을 기준으로 그 한옥집의 위치가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 이불을 벌떡 젖히니 창호지에 아침 햇살이 째질 듯이 들이비치고 있었다. 그제서야 어제 우리 식구의 재회에 현실감이 생겼다. 우리 식구뿐이 아니라 개성서 피난 내려온 큰 삼촌네 식구들까지 몽땅 돈암동 집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돈암동 집 대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우리가 떨리는 마음으로 소리 안 나게 그 틈으로 마당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본 것은 오빠였다. 오빠는 한 손으로 지팡이 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어둠이 모락모락 고여 오는 마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자세로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1951년 4월 국군이 다시 서울을 탈환한 뒤 올케와 함께 교하로 피난 갔던 화자는 드디어 돈암동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오고 다음날 아침, 피로한 몸을 이불 속에 누이고 어렴풋이 잠에서 깬 화자는 일상의 소음, 집안의 냄새 등 평화로움을 느끼게 하는 감각들을 받아들이며 서서히 깨어난다. "돈암동 집 대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부터는 어제 일에 대한 회상이다. 올케와 둘이 교하로 떠나기 전에 현저동에서 함께 인민군 치하의 생활을 견뎠던 어머니와 오빠를 다시 만나 온 가족은 오랜만에 재회한다. 오빠네 조카와 개성에서 피난온 큰 삼촌네도 이 집에 와 있어 열두 식구가 집을 가득 채운다. 오빠는 1.4후퇴 직전에 입은 다리의 총상이 호전되었는지 지팡이를 짚으면 일어설 수 있게 된다.
  • 숙부는 돈암시장 근처에서 지게벌이를 하고 숙모는 뚝섬 살곶이 다리 밑에 가서 푸성귀를 받아다가 역시 돈암시장에서 벌여놓고 판다고 했다. (중략) "요새는 지게벌이보다 나까마벌이가 더 쏠쏠하시단다. 시장만 예전처럼 번창하게 되면 아주 나까마로 나서실 모양이시더라. 그러니까 너무 안돼 말아라." 숙모가 되레 나를 위로하려 들었다. '나까마'는 무얼 파는 장산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중략) 숙부의 출근은 늘 느지막했다. 요새는 지게도 안 지고 나갔다. 돈암시장에서 숙부는 '나까마 박 씨'로 통했다. 아마 지게만 졌더라면 박 씨보다는 박 서방이 더 어울렸을 것이다. 그것만 해도 어딘지 몰랐다. 가끔 집까지 찾아오는 사람도 생겼다. 필요한 물건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팔아달라고 부탁하러 오기도 했지만 얼마나 나갈 물건인지 감정을 의뢰하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숙부는 하루하루 그럴 듯해졌다.
    1951년 4월 국군이 다시 서울을 탈환하고 흩어졌던 식구들도 돈암동 집에 모두 모이고 작은아버지네도 잠시 이 집에 들어온다. 여전히 식량난이 심해 열두 식구의 하루치의 식량 걱정을 할 때, 숙부와 숙모가 돈암시장에 나가 벌어오는 돈으로 온 식구가 끼니를 해결한다. 숙부는 처음에는 지게일과 ‘나까마‘라고 불리는 주로 미제품인 구제를 구해 되파는 ‘중간 도매상‘ 일을 병행하다가 점차 ‘나까마‘ 일이 잘되어 자리를 잡게 된다.
  • 근숙이 언니네는 돈암시장 뒷골목에 있었다. 오래된 낡은 집이었지만 터가 넓고 부엌이 따로 달린 방이 많은 게 세놓아 먹기 좋게 생긴 집이었다. 전에 세 살던 사람 중엔 피난 갔다 돌아온 집도 있어서 그 큰 집에 근숙이 언니 혼자 있어도 별로 휘해 보이지 않았다. 돈암시장 안에도 그 언니네 소유의 점포가 여러 동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은 정식 점포는 세입자가 환도를 하지 않아서인지 거의 닫힌 채였고, 노점이 더 성업 중이었다. 장사란 비슷한 업종끼리 서로 어울려야 손님이 꼬이는 법이라, 포목이나 귀금속, 아동복, 메리야스, 바느질집, 누비이불집 등 깨끗하고 값나가는 물건을 취급하던 가게 앞을 푸성귀, 생선, 잡채나 순대 따위 즉석 먹을 거, 툭하면 들고뛰는 미제 장수 등 노점들이 차지를 하니까 점포에 세 들려는 사람도 없다고 했다. 현재도 별 근심 없이 가족들 오기만을 기다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앞날은 더 밝고 풍족할 것 같은 언니가 부러웠다.
    근숙이 언니는 돈암동 토박이로 향토방위대에서 알게 된 사이이다. 1951년 4월 서울 재탈환 이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를 하던 전세 중에 다시 후퇴령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서울을 인민군에 내주지 않고 위기를 지났지만, 후퇴령이 내렸던 당시에는 또다시 사람들이 피난 보따리를 쌌고 다리가 불편한 화자네 오빠도 식구들과 피난을 떠난다. 화자는 근숙이 언니를 포함해 향토방위대 사람들과 함께 피난을 갔고 중간에 대원들이 따로 움직이면서 결국에 온양까지 가서는 근숙이 언니와 둘이 남아 고생을 하다가 서울로 함께 돌아온다. 돈암동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와 숙부, 숙모만 계시고 화자의 어머니와 오빠네 식구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숙부가 일자리를 얻으면서 숙부네는 나가고 화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식구들을 걱정한다. 근숙이 언니네는 집이 넓어 세를 주기도 하고 돈암시장 안에 점포도 있어 풍족해 보인다. 하지만 점포는 문이 닫혀 있고, 대신 노점들이 활기를 띠고 있는 풍경이다.
  • 우리는 더위와 실의에 짓눌려 기진맥진한 채 수양버들이 늘어선 성북동 개천가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나는 근숙이 언니한테서 묘안이 나올 것을 단념하지 않았다. 남의 희망을 부추긴 이상 수습할 책임도 당연히 져야 할 것 같았다. "너 그때 향토방위대에 입고 나오던 하늘하늘한 옷 지금도 있지?" "그건 왜 물어? 뚱딴지같이." "너 그거 입고 나올 때 참 보기 좋았댔어. 사무실이 다 환해지니까 남자들도 일할 맛이 나 했구. 그대 김 순경이 매일 드나든 것도 너한테 반했다기보다는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을 거야. 전시에다 이놈의 서울은 최전방이나 마찬가지니까 보이는 것마다 오죽 무뚝뚝하고 살벌하냐?" "그래서?" "평화적이고 여성적인 화사한 분위기도 상품이 될 것 같잖니?" "그래, 그럼 언니는 포주나 해먹어라." 나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박차고 일어섰다. 언니가 따라 일어서면서 자근자근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들어봐. 네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걸 합치니까 뭐가 될 것 같아. 나 이래 봬도 우리 집에서 손님 접대도 많이 해보고 언니들도 여럿이라 마실 것도 잘 만들고 도넛도 만들 줄 알고, 매잣과랑 한과도 만들 줄 안다. 시장 속 우리 가게에서 그런 장사를 동업했으면 좋겠는데 네 분위기는 시장통보다는 조금 더 고상한 데였으면 싶어. 업종도 순대가게 앞에서 해먹을 수 있는 업종이 아니고, 평화시 같으면 다방에 들어가고 싶은 손님이 상대니까."
    1951년 여름, 후퇴령에 향토방위대 단원들과 피난을 떠났다가 서울이 위기를 넘겼다는 소식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직 돌아오지 않는 식구들을 걱정하고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근숙이 언니는 화자에게 "식구들이 돌아왔을 때를 생각하여 무언가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조언한 적이 있다. 그 조언의 연장선에서 근숙이 언니는 같이 도넛 가게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두 사람은 돈암시장이 있는 돈암동 쪽에서 미아리고개 밑(지금의 성신여대입구역)을 지나 삼선교까지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성북동 개천가에 앉아 쉬었는데 그때 근숙언니가 그 제안을 한 것이다. 두 사람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도넛가게 창업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나눈다. 성북천이 복개되기 전 당시 성북동 안쪽까지도 개천이 흐르고 천변에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동업에는 합의했지만 얼마씩 자본을 댈까는 의논도 안 한 채 일이 빠르게 진행이 됐다. 장소가 뜻밖에 쉽게 결정됐기 때문이다. 시장거리도 그랬지만 대로변에는 문을 연 점포가 더 드물었다.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이왕이면 전차 정거장 근방에 눈독을 들였지만 마땅한 복덕방도 없고 해서 마침 문을 연 도장포에 들어가 물어본 게 곧바로 연때가 맞은 거였다. 도장포 주인은 한쪽 다리를 눈에 띌까 말까 하게 저는 30대의 남자였다. 점포는 안으로 살림집과 통하게 돼 있었는데 세를 든 게 아니고 자기 집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그의 신체적인 약점을 알아보기도 전에 자꾸 그 얘기부터 하려고 했다. 모르고 있다가 아, 저 사람이 병신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병신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부모가 이 집을 장만해주었다느니, 병신 자식이 효도한다고, 딴 형제들은 의용군 나가고 제2국민병 나가고 지금 다 소식을 모르는데 자기만 멀쩡하다느니 하는 묻지도 않은 소리들이었다. 그런 신체적인 콤플렉스 때문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운 것 같았다. 피난 가서는 되레 그 기술로 잘난 사람들보다 먹고살기가 더 수월했건만, 대로변에 버젓한 자기 가게 생각이 굴뚝 같아 기를 쓰고 돌아와보니 하루 목도장 두세 개 파기도 어렵다고 했다. 두런거리는 기색에 살림집에서 그의 아내가 아이를 업고 나왔다. 우리가 마땅한 가게 터를 구하러 다닌다는 소리를 듣더니 반색을 하면서 그녀도 이 집이 도장포로서는 너무 넓어 한쪽에 문방구를 차렸으면 한다고 했다. 바로 뒤쪽이 돈암국민학교인데 아침에 등교하는 걸 보면 아이들 수가 하루하루 느는 게 앞으로 유망할 것 같다고 하면서 남편 눈치를 보았다. 남편은 그까짓 코 묻은 돈 챙길 생각 말고 아이나 잘 보라고 퉁명스럽게 잘라 말했다.
    1951년 여름, 향토방위대에서 알게 된 근숙언니와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식구들을 기다리던 화자는 성북동 개천가에서 도넛가게를 열자는 얘기를 나눈다. 두 사람은 가게 자리를 알아보려고 하는데 복덕방도 찾기 어렵고 해서 돈암국민학교(현 돈암초등학교) 근처 도장포에 들어가 가게 물어보게 된다. 이야기가 잘 진행되어 이 도장포에 도넛가게를 열게 되고, 도장포 안주인도 적극적으로 도넛가게 일을 도와주기로 한다.
  • 길 가다가도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볼 정도로 근사한 가게가 된 데는 설거지나 해주겠다던 도장포 안주인의 공이 컸다. 가게 이름은 자매다과점(姊妹茶菓店)으로 합의를 보았다. 글씨에는 조예 깊고 솜씨 좋은 도장장이가 있으니 간판 쓰는 건 문제없었다. 간판도 그럴듯하게 써 붙이고 칼피스, 소다수, 오렌지 주스, 냉커피, 하는 음료수 이름은 또 따로 써서 가격과 함께 벽에다 비로로도 붙이고, 옆으로 삐딱하게도 붙였다. 나는 원가도 잘 모르면서 근숙이 언니가 매긴 음료숫값이 너무 싼 것 같아 올려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1951년 여름, 후퇴령에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식구들을 기다리던 화자는 근숙이 언니의 제안으로 함께 도넛가게를 열자고 뜻을 모은다. 돈암국민학교 근처 도장포에 가게자리를 물어보려고 들렀다가 마침 도장포 자리를 얻게 되어 ‘자매다과점‘이라는 가게를 연다. 근숙이 언니는 도넛을 만들고 화자는 서빙을 담당한다. 먹고 살 걱정에 의욕적으로 장사를 시작했지만 생각만큼 장사는 잘 되지 않는다. 결국에는 도장포 주인에게 쫓겨나 ‘자매다과점‘은 문을 닫게 된다. 무더운 7월 중복 때의 일이다. 가게 문을 닫은 날 저녁에 식구들이 집에 돌아온다.
  • 숙부와 엄마와 올케, 나 이렇게 네 사람이 장의 수레를 따랐다. 숙모는 아이들을 봐야 하니까 집에 남아 있었다. 우리 꼴을 안 보이고 싶어서 빨리 어둡기라도 했으면 싶은데 해는 질 듯 질 듯 안 지면서 지열을 기름 가마처럼 달구고 있었다. 수레꾼은 비지땀을 흘리면서 숨가쁜 소리로 우리더러 뒤를 밀어달라고 요구했다. 숙부와 내가 번갈아가며 수레를 미느라 개처럼 헐떡거렸다. 환장을 하게 더웠다. 우리는 사람도 아니야, 생지옥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믿지도 않는 주문을 외우듯이 문득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미아리고개를 넘어 공동묘지에 다다를 때까지도 날이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우리는 다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수레꾼이 공동묘지는 안 된다고 했다. 빈자리를 찾으려면 높은 데로 올라가야 하고 또 관리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럼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숙부가 부탁하고 나서, 전쟁만 끝나면 어차피 선산으로 이장을 해야 하니까,라고 덧붙였다.
    오빠는 1951년 1.4후퇴 직전에 다리에 총을 맞아 피난도 못 가고 현저동에서 인민군 치하를 견뎠다. 화자와 올케가 인민군이 후퇴할 때 잠시 피난을 갔다가 4월에 돈암동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오빠의 총상은 아물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후퇴령이 내려져 오빠는 사별한 전처의 부모가 있는 천안으로 식구들과 피난을 갔고 화자는 따로 온양까지 피난을 갔다가 먼저 돈암동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을 기다렸다. 7월 중복 때 오빠와 식구들이 돈암동 집으로 돌아왔고 오일째 되는 날에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돈암동 골목에는 피난 간 사람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장례를 도와줄 이웃도 없었다. 숙부와 숙모가 빌려온 장의 수레에 오빠의 시신을 수의도 없어 깨끗한 옷을 입혀 얇은 널에 눕힌 다음 실었다. 수레꾼을 도와 번갈아가며 수레를 밀어가며 미아리고개를 넘어 미아리 공동묘지까지 장면이다. 이후 화자는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올 때까지도 예를 갖추지 못하고 장례를 치른 일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린다.
  • 첫추위에 감기가 들었는지 콧물을 줄줄 흘리던 현이가 몸이 절절 끓기 시작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른용 아스피린을 반으로 쪼개서 물에 풀어 먹이는 게 전부였다. 종점엔 약국도 생기고 성북서 건너 쪽엔 소아과 병원도 들어와 있었다. 신안탕 뒤, 우리 집이 있는 안정되고 보수적인 골목에도 우리 말고 또 한 집이 들어와 있어서, 비록 서로 교류는 없지만 고립감이 덜하던 차였다. 아무리 도강을 금하는 것 같아도 마음만 먹으면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다양하게 마련해놓은 것 같았다. 틈만 일단 발견했다 하면 스스로 틈을 넓혀가며 스며드는 수압처럼 인구가 불어나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1951년 여름 오빠가 죽고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되었다. 현이는 둘째 조카이다. 피난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돈암동에도 점점 사람이 불어나고 병원과 약국이 들어서는 전후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 돈암시장의 순대 냄새와 꿀꿀이죽 냄새가 뒤섞인 냄새, 그 냄새에 오장이 뒤틀리는 듯한 식욕을 이기지 못해 지친 짐승처럼 정기없이 번들대는 눈과 어두컴컴한 얼굴로 두 가지 음식의 영양가와 부피와 주머니 사정을 암산으로 산출해내느라 발걸음을 질정 못하는 막벌이꾼. 브래지어와 거들까지 깃발처럼 내걸고 손님을 부르는 구제품 좌판의 악취보다 더 비위를 뒤집는 야릇한 암내, 그 앞에서 터무니없이 큰 브래지어를 자신의 미숙한 가슴에 대보는 입술 붉은 어린 창녀. 저만치서 마른침을 삼키며 그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호시탐탐 노리다가 그 여자가 아쉬운 듯이 아무것도 못 사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걸 틈타 살금살금 다가가, 귓전에 바짝 퀴퀴한 입을 갖다 대고, 딸라 있수? 후하게 쳐줄게, 나하고 단골 트면 해롭지 않아, 독침처럼 날카롭고 표독하게 속삭이는 달러 장수. 파리과 윙윙대는 푸줏간에서 수시로 가죽 혁대에다 식칼을 갈면서 똑같이 쉬파리나 불러들이는 건고등어 장수를 은근히 얕보는 늙은 백정. 악착같이 한 눈금이라도 더 덤을 받으려는 얌체 손님을 핑계로 다섯 눈금쯤은 더 나가도록 앉은뱅이저울을 조작해놓고 거드름을 피우는 밀가루와 설탕가루 장수. 봉지쌀에서도 단 한 움큼이라도 벗겨먹으려는 싸전 영감과 안 속으려는 어린 새댁 간의, 됫박을 평평하게 미는 방망이를 가지고, 배가 너무 부르다거니, 눈깔이 뼜냐? 나처럼 홀쭉한 방망이로 미는 싸전 있으면 나와보라거니 하는 사생결단의 치열한 싸움. 온종일 목이 쉬게 싸구려와 떨이를 외쳐대도 물건은 안 줄고 허기만 지는 푸성귀와 과일 장수. 점심 거르고 새우젓 조끔 집어먹고 냉수 한 대접 마시는, 고릿한 냄새가 몸에 맨 젓갈 장수. 그런 것들 사이를 놀이터 삼아 요리조리 싸다니다 운수 좋아 남의 걸 슬쩍해서 입정질해도 야단맞지 않는 장돌뱅이 새끼들. 이런 생존의 마지막 발악 속에서도 눈에 띄게 초연하고 고상한 알토란 같은 장사가 있었으니 바로 미제 장수였다. 미제 장수는 언제 단속반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위험 부담 때문에 거의 노점이었고 좌판의 크기도 잘해야 밥상 넓이밖에 안 됐지만 물건만은 금값처럼 에누리 한 푼 없는 현금장사였다. 미제 물건이란 포장이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난여름 자매다과점을 시작할 때 근숙이 언니하고 뒤지고 다닌, 미제 장수들이 취급하던 군용 미제하고는 댈 것도 아니었다. 앞서의 미제가 시레이션에서 흘러나온 거라면 뒤의 것은 PX에서 흘러나온 거라고 했다.
    화자는 근숙이 언니를 통해 미군부대 내 PX에 취직할 기회를 얻게 된다. 미제 장수의 위용은 돈암시장의 각양각색의 장사꾼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띈다. 그리고 그 미제의 대부분이 PX에서 흘러나온 물건이라고 한다. 화자는 PX에 취직해서 집안 식구들을 먹여살릴 만큼 돈을 벌고 싶다는 의욕에 마음을 다지고 면접을 보러 간다. 당시 돈암시장의 모습을 자세하고 길게 묘사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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