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92
작품 문학
자전적 소설로 1992년 웅진출판에서 출간되었다. 화자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개풍군 박적골에서의 이야기부터 1950년대에 화자의 가족들이 자리를 잡은 서울 성북구에서의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이 소설에는 화자의 어린시절부터 20대까지의 시간이 담겨 있으며, 특히 소설을 통해 6.25전쟁 당시 성북구 돈암동의 모습과 상황들을 알 수 있다.
돈암동 동선동
  • 박완서_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표지
  • 옛 동도극장 자리
  • 동도극장 신문광고
  • [성북소담] 제 3화 '박완서의 소설로 보는 성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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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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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브젝트 생산자: 박완서
  • 비고:
  • 유형: 작품 문학

시기

근거자료 원문

  • 한번은 형사가 신문로 집에 그런 친구 중의 한 사람을 찾아온 사건을 기화로 엄마는 갑자기 그 집을 팔기로 결심을 했다. 오빠가 생활을 돌보지 않아 숙부의 도움으로 살림을 꾸릴 때라 집을 줄여 돈암동으로 이사를 했다. 마침 돈암동 전찻길 가에 살림집이 딸린 큰 가게 터가 하나 나왔는데 숙부가 그걸 사고 싶어하던 중이었다. 이것저것 브로커 노릇을 하던 숙부가 세상이 조금씩 안정되는 것과 발을 맞추어 안전한 장사를 해보려는 것 같았다.
    화자의 오빠는 해방 후 좌익운동을 하였는데, 함께 활동하는 친구들과 함께 집에 모여 모임을 가지곤 했다. 그러다가 집으로 형사가 찾아오자, 신문로에서 돈암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 후 오빠가 대학 야간부에 진학을 하게 되자, 화자의 어머니와 숙부는 오빠가 좌익운동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라 생각하여 안도감을 느낀다.
  • 결국 우리는 돈암동 집에서도 안정을 못 하고 6.25가 날 때까지 거의 1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신문로 집에서처럼 우리집이 불온한 모의의 아지트가 됐다고 판단되는 즉시 엄마는 치를 떨며 발작적으로 이사를 결심했고, 어떤 때는 집에 있는 세간살이를 그냥 놔둔 채 야반도주를 해서 숙부네와 합쳐서 산 적도 있다.
    화자의 오빠는 해방 후 좌익운동을 하였는데, 어느날 집으로 형사가 찾아온 뒤 화자의 가족은 신문로에서 돈암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하지만 화자의 오빠는 계속 해서 좌익운동을 하였고, 그럴때마다 쫓기듯 이사를 다니게 된다.
  • 6·25 전까지 돈암동에서만 세 번 이사를 다녔는데 아마 삼선교 근처에 살 때가 오빠가 가장 깊숙히 좌익운동에 투신했을 때가 아닌가 싶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시대적으로도 남로당이 가장 활발하게 지하운동을 조종할 때였고 오빠의 태도도 그때는 도무지 우리 식구 같지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완전히 딴 데 사로잡혀 있었다. 밤에 누가 찾아오면 도망갈 길까지 마련해놓고 있었다. 그 집엔 부엌에 뒷문이 있었는데 뒷문 밖은 옆집과의 사잇담이 있는 좁은 골목이었다. 겨우 사람 하나 비비고 나갈 만한 골목은 그 끝이 길로 면한 높은 벽돌담이었고, 반대로 가면 딴 집 뒤꼍을 여러 번 통과해, 정당한 길로 가면 한참 걸릴 우리 집과는 반대쪽 동네에 다다르게 돼 있었다. 오빠가 도망을 간다면 그 길을 택할 게 뻔해 가끔 엄마는 여러 집의 뒤꼍이 연결된 그 어두운 미로에 혹시 장애물은 없나 살펴보곤 했다. 그리고 “이 집에 이 길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누” 하면서 대견해했다. 오빠를 위해선 어쩌면 상당히 유리한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도 안 돼서 별안간 뜬 것은, 다행이랄까 오빠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집은 방이 우리 식구 수효보다 많아 넷이나 되었다. 돈도 아쉽고 해서 문간방을 세를 주면서 엄마는 오빠 때문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그러나 고르고 골라 세를 준 사람이 지내고 보니 오빠를 닮은 사람이었다. 별로 살기가 어려워 보이지도 않으면서 바깥 남자는 직업이 없었고 시일이 지나자 그 방에서 수상한 사람들이 모여 모의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즉각 엄마는 그 집도 빨갱이 집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무렵 오빠가 우리 집을 아지트로 제공하는 일은 없어졌는데 교대로 문간방이 아지트가 되었으니 엄마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오빠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지만 엄마는 집터 탓까지 하면서 한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동병상련 같은 마음도 있어서 내보낼 생각은 안 한 것 같다. 엄마는 그 집 걱정까지 떠맡아서 불안해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 경찰이 우리 집을 에워싸고 그 남자를 잡아갔다. 그대 놀란 엄마는 마치 시골서 염병이 돌 때, 그 병으로 온 식구가 몰사한 집을 마을 사람들이 태워 없애듯이 발작적으로 우리 집을 버리고 숙부네로 들어갔다. 집이 팔릴 때까지 그 집엔 그 남자의 식구들이 남아 있기로 했다. 그 남자에겐 아내와 남매가 딸려 있었다.
    오빠의 좌익운동으로 신문로에서 돈암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 화자의 가족은 이후에도 몇 번의 이사를 더 하게 된다. 삼선교 근처에서 살 당시, 부엌에 뒷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문으로 나가면 옆집과의 사잇담이 있는 좁은 골목이 나왔다. 화자의 어머니는 아들이 도망칠 때 그 길을 이용할 것을 알고 그곳에 장애물은 없는지 살펴보곤 하였다. 하지만 그 집에 세를 들어 온 남자 또한 좌익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경찰이 찾아와 잡아가는 것을 보고 화자의 가족은 화자의 숙부의 집으로 가게 된다. 내용에 언급된 삼선교는 동소문동과 성북동, 삼선동이 만나는 교차로에 있었던 다리로, 성북천이 복개될 때 철거되었다.
  • 돈암교 가까운 전찻길 가에 가게 터가 달린 숙부네는 안채도 넓어서 양쪽 집을 합쳐 봐야 다섯 명에 불과한 식구가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나는 독방까지 쓸 수가 있었다. 거기 사는 동안 오빠의 혼담이 무르익었다. 오빠를 지하운동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그전부터도 집안 내에선 엄마가 아들의 재혼을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이 많았었다. 엄마라고 왜 그런 생각이 없었을까만 누구보다도 아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 먹혀들어갈 일은 하지 않았을 뿐이다.
    삼선교 근처에서 살던 화자의 가족들은 남는 방에 세를 준 남자의 좌익운동으로 경찰들이 집에 찾아오게 되자, 돈암동에 있는 화자의 숙부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화자의 오빠는 병으로 아내를 잃고 좌익운동에 더 몰두하였는데, 가족들은 이 모습을 보고 걱정하며 오빠의 재혼을 바란다. 하지만 화자의 오빠는 선보는 것조차 싫어한다. 그러던 어느날, 친척집에서 우연히 세 겹의 사돈쯤 되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되고 오빠는 이 여자를 마음에 들어한다. 그 후 오빠와 그 여자는 교제를 시작하고, 결국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 삼선교 집에 남아 있던 문간방 식구들도 시골의 시가로 내려가서 집을 비워 놓으니까 필리는 게 더디다고 근심들을 했다. 그래도 그 집이 팔리고 새로 돈암동 종점 쪽으로 이사할 동안이 오빠가 그 여자하고 충분히 교제할 수 있는 기간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숙부네를 나와 이사하면서 새 식구를 맞아들였다.
    화자의 가족이 삼선교 집의 남는 방에 세를 줬던 남자는 좌익운동으로 경찰에 잡혀가고, 그 남자의 가족들은 이후 얼마 간 삼선교 집에서 더 생활하다가 이사를 한다. 화자의 가족들은 돈암동에 살고 있는 화자의 숙부의 집에서 생활을 하며 집을 팔고 돈암동 종점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된다. 화자의 오빠는 그 사이에 친척집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와 교제를 하였고 재혼을 하게 된다. 화자의 가족들은 새 식구와 함께 돈암동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오빠는 결혼 후 더이상 좌익운동을 하지 않고 고양중학교에 국어 교사로 취직하게 된다. 내용에 언급된 것처럼 돈암동에는 전차 종점이 있었는데 지금의 성신여대입구역 부근으로 추정되며, 이 전차는 돈암동에서 종로4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 겉으로는 착실한 모범생처럼 굴면서 싫어하는 수업시간에 딴짓하는 버릇 말고 또 하나의 고약한 장기는 학생입장불가의 영화관 출입하기였다. 돈암동의 동도극장은 프로가 갈릴 때마다 놓치지 않고 가는 단골이었다. 숙부네 가게가 바로 동도극장에서 비스듬히 건너편에 있었는데 가게 유리창이나 벽에다 극장 포스터를 붙이는 대가로 표를 주고 갔다. 숙부는 그걸 나한테 넘겨주기도 하고 같이 가자고 꾀기도 했다. 동도극장이 단골이란 건 엄마에게도 반 친구들에게도 비밀이었지만, 따로 친구들하고도 곧잘 극장출입을 했다. 어둠 속에서 교복의 흰 깃은 단박 눈에 띄게 돼 있어서 날쌔게 안으로 구겨 넣고 시치미 떼고 앉았다고 누가 학생인 걸 모를까마는 세상을 감쪽같이 속여먹은 것 같은 쾌감을 맛보곤 했다.
    화자는 숙명여고에 다녔는데, 5학년이 되었을 때 문과 담임으로 소설가 박노갑 선생님이 부임한다. 화자는 선생님의 지도 아래 글에 대한 소질을 발견해간다. 화자는 학교 생활을 하며 친구들과 함께 영화관에 가는 것을 즐겼는데, 소설에 나오는 동도극장은 실제로 1948년 돈암교 전차정류소 앞에 문을 연 영화관이다. 동도극장은 1981년까지 운영되다가 이후에는 상가로 바뀌었다.
  • 토요일날 귀가하면 오빠는 허둥대며 목욕탕 먼저 다녀왔다. 우리가 올케를 맞으면서 이사 간 집은 신안탕이라는 목욕탕 바로 뒷집이었다. 그러나 목욕탕이 가까워서라기보다는 멀리 구파발서부터 서울 장안 먼지를 다 뒤집어쓰고 온 몸으로 아기를 안을 수 없다는, 유별난 자식 사랑 때문에 그렇게 목욕을 급하게 구는 거였다. 그러고는 헐렁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기하고 놀기 시작하고, 올케 언니는 부엌에서 지글지글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음식을 만들었다. 오빠는 아기에게 깊이깊이 매혹당해 정신이 없었고, 올케는 이런 부자의 모습에 황홀한 눈길을 보냈다. 나는 그런 세 식구의 모습에 소외감 비슷한 걸 느꼈지만 심술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화자의 오빠는 고양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을 하였는데, 당시에는 통근이 힘들었기 때문에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면서 토요일마다 자전거를 타고 돈암동 집으로 왔다가 월요일 새벽에 떠나기를 반복 했다. 화자의 오빠가 귀가하자마자 허둥대며 갔던 신안탕은 성북천 근처에 실제로 존재했던 목욕탕으로 현재는 ‘아리랑교통‘이라는 마을버스 회사로 바뀌었다(서울시 성북구 고려대로7길 98).
  • 내가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엄마는 돈암동 집을 복덕방에 전세로 내놓았다. 그리고 분주하게 이사 준비를 했다. 오빠는 여름방학에 하고 싶어했으나 엄마는 여름엔 밭에서 따온 상추쌈으로 점심을 먹지 않으면 큰일날 것처럼 서둘러 댔다. 꼭 무엇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이사만 한다면 무슨 발작처럼 생기가 나는 것도 여전했다.
    1950년, 화자는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합격한다. 화자의 오빠는 고양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는데, 학교 사택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어머니는 사택으로 옮기는 것을 적극 찬성하였고, 돈암동 집이 팔리면 화자는 돈암동 숙부네 집에서 생활하며 학교를 다니기로 결정한다.
  • 다음 날 오빠는 새벽같이 학교로 출근했고, 나는 동숭동 문리대로 등교했다. 등교하면서 가로수를 꺾어서 철모와 군용차를 시퍼렇게 위장하고 미아리고개 쪽으로 이동하는 국군을 보고 비로소 섬뜩한 전쟁의 현장감을 느꼈으나 남들이 하는 대로 씩씩하게 박수도 치고 만세도 불렀다.
    6.25 전쟁 당시 성북구 돈암동 근처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1950년 6월, 화자는 대학에 입학을 하고 돈암동 숙부네 집으로 옮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후 화자의 가족들은 오빠가 근무하는 학교의 사택으로 이사할 준비를 마친다. 화자는 인민군이 남침을 시도했다는 뉴스를 들었지만 그 전에도 충돌이 잦았기 때문에 화자는 큰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학교로 향한다.
  • 그러나 하학길은 아침과 좀 달랐다. 여전히 미아리고개 쪽으로 군대가 이동하는 걸 볼 수 있었지만 용감해 보이기보다는 비장해 보였고 환송하는 시민의 태도 또한 불안하고 어설퍼 보였다. 그날 밤새도록 엄마가 구시렁대면서 이럴 때는 식구가 같이 있어야 하는건데 하는 소리를 하고 또 했다.
    6.25 전쟁 당시 성북구 돈암동 근처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화자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의 상황이다. 화자는 이 날 오전, 등교길에 보았던 국군들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감지하고 있다. 화자의 오빠는 고양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를 하고 있어서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걱정되어 밤새 같은 얘기를 했던 것이다.
  • 다음 날 아침에는 포 소리가 미아리고개 너머에서 쏘는 것처럼 가까이 들렸다. 그러나 긴급 뉴스는 국군이 인민군을 거의 다 섬멸한 것처럼 말하면서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기를 당부했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학교로 향했다. 미아리고개로 뻗은 돈암동 전찻길로 달구지에 가재도구를 실은 피난민이 꾸역꾸역 넘어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들에게 시민들이 뭔가를 물어보려는 걸 순경이 말리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1950년 6월, 화자가 대학에 입학한지 며칠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한다. 이 부분에 등장하는 피난민들은 의정부에서 내려오던 사람들로, 전쟁 당시 성북구 돈암동 근처의 상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장면이다.
  • 엄마는 혼자 나가서 세상이 바뀐 걸 확인하고 들어와서는 숫제 안암천이 흐르는 개천가 큰 길까지 나가 오빠를 기다렸다. 개천가에선 성북경찰서 뒤뜰이 곧바로 바라보였다. 인민군이 경찰서를 접수하고 벌써 반동을 잡아들이는 것 같다고 엄마가 치를 떨며 말했다. 오빠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 들어온 엄마는 눈에 정기가 하나도 없이 흐릿하게 풀려 보였다. 오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오빠는 인제부터 뜻을 펴고 살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엄마를 위로했다. 그건 나의 희망사항이기도 했다.
    화자의 어머니는 직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밤새 기다린다. 아침이 밝자 숙부와 숙모는 상점을 열 수 있겠다며 나갔다가 금방 다시 돌아와 밤 사이에 도시가 인민군에게 점령 됐음을 알려준다. 어머니는 그 얘기를 듣고 안암천으로 나가 다시 아들을 기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자의 오빠는 한 무리의 사람들와 함께 돌아온다. 내용 중 언급된 안암천은 안암동으로 흐르는 성북천의 다른 이름이다.
  • 미아리고개로 통하는 전찻길 가에 있는 숙부네 집에선 야밤에 군대나 민간인이 이동하는 소리를 늘 들을 수가 있었다. 오빠도 북으로 끌려가면서 인솔하는 인민군에게 잠시 양해를 구해 가족에게 소식이라도 전하고자 들렀던 것이다. 겨우 그 말만 전하고 다시 끌려가는 조카를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나로 숙부하고 숙모는 속옷 바람으로 무작정 미아리고갯마루까지 따라가다가 인솔자가 총대로 밀어내는 바람에 놓쳤다고 한다.
    1950년 8월 초쯤, 화자의 오빠는 자신이 일하던 고양중학교로 돌아간다. 월급은 못줘도 쌀 배급은 준다는 동료 교사의 말을 듣고 간 것이다. 하지만 오빠는 출근한지 사흘 만에 의용군으로 붙들려간다. 이 부분은 북으로 끌려가면서 돈암동 전찻길 가에 살던 숙부와 숙모에게 소식을 전하는 장면으로, 화자의 오빠는 중등교사 재교육을 실시한다는 상부의 지시로 교육을 받다가 그곳에 있던 교사들과 함께 의용군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이 장면을 통해서 6.25 전쟁 당시 미아리고개 부근의 상황을 알 수 있다.
  • 그런 숙부네가 역시 동네 사람들한테 고발을 당했다. 정치보위부 앞잡이가 되어 호의호식했다는 치명적인 제보에 의해서였다. 숙부하고 숙모하고 따로따로 연행됐는데 처음엔 숙모가 즉결처분을 당했다고 했다. 그쪽 동네 사람 중 숙모하고 친했던 사람이 일러주면서 성신여중 뒷산으로 여럿이 함께 끌려가는 걸 봤고 연이어 여러발의 총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 어서 가서 시체라도 거두라는 거였다. 우리말고도 그 사람이 일러주어 시체를 찾은 사람이 있고, 식구가 끌려간 후 소식이 없자 행여나 해서 그 산으로 시체더미를 뒤지러 오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인민군이 지나간 후, 고발과 밀고가 많아진다. 화자의 가족들도 동네 사람들의 고발에 의해 가택수색을 당한다. 화자의 숙부와 숙모 역시 고발을 당하는데, 돈암동 전찻길가에 있던 숙부네 가게에 인민군들이 장비와 말을 매어놓고 숙식을 해결하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자와 어머니는 숙모의 소식을 듣고도 성신여중 뒷산에 가지 못하였는데, 숙모는 즉결처분을 단행한 군 장교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져서 재판을 받고 1.4후퇴 전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하지만 숙부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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