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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부터 1961년 별세하기까지 정릉동 재건주택에 들어와 살던 소설가 계용묵桂鎔默(1904∼1961)도 정릉약수를 지키던 ‘물할머니’의 이야기를 짧은 수필 속에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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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미아리 고개를 터덕이며 넘다가 길음교를 접어들 때 시선이 왼편으로 쏠리게 되면 바로 눈 아래 시멘트 기와를 인 무슨 목장지대 같은 납작한 건물들이 산으로 둘러싸인 오목한 골 안 일대에 지질펀펀하게 깔려 있음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정릉 재건 주택들이 밀집된 지역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미아리 고개 넘어 길음교로 접어들 때 왼편 아래 산 골짜기 안 일대에 납작한 건풀들이 질펀하게 깔려 있다며 길음교에서 보이는 정릉 재건 주택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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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이 인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환도 후에 집을 잃은 전재민들에게 우선적으로 베풀어진 그 수 삼백칠심이나 나마 세이는 소위 아홉 평짜리의 정릉 재건 주택이다.
그는 납작한 건물들이 골 안에 몰려 있는 데다 판에다 찍어다 낸 듯 꼭같은 건물이 모여있어 인가가 아닌 것 같은 생소한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집들은 전쟁 후 집을 잃은 전재민들에게 우선적으로 나누어준 재건 주택이라고 밝힌다. 그는 이 집들은 겨우 아홉 평 남짓한 집이지만 전재민들에게는 궁궐보다 소중한 집으로, 저마다 온갖 색과 꽃, 기암 괴석으로 꾸며 놓아 색다른 촌락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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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할머니는 처녀 시절에 신령이 내리어 이 약수를 맡게 되었다는 것으로 백발이 흩나는 오늘까지 하루도 쉬임없이 연일 연성으로 수객들의 건강을 위하여 빈다. 이 물로 병을 낫게 하고 자손 만대에 복을 주라고 산시에게 빌고 또 강씨마마─정릉의 유래를 말하는 태조고황제계후신덕성강씨(太祖高皇帝繼后神德星康氏)로 정릉이라는 것은 정동(貞洞)에서 옮겨온 능이라는 이름─이 약수터 너머의 봉국사 보살에게도 빈다.
계용묵의 집 뒤에 있는 개천을 끼고 산쪽으로 좀 더 가면 약수터와 그 곳을 지키는 물할머니가 있다고 한다. 물할머니는 처녀 시절 신령이 내리어 이 약수를 맡게 되었는데, 산신과 정릉의 신덕왕후 그리고 봉국사 보살 등에게 약수터를 찾은 수객들의 건강과 복을 빌어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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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짜구니에서 마음대로 터져 나오는 벌거 벗은 마음 소리, 이 개천가의 빨래방망이 소리, 이 약수터의 물할머니의 푸념, 이 소리들이 내 귀에 멀었던들 나는 이 아홉 평짜리 울 안의 소꿉장난 같은 어른들의 흉내로 아름다움을 만들려는 아름다움으로 정릉을 상 주고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집 뒤에서부터 산으로 올라가는 방향으로 개천을 따라 들리는 소리들에 대해 묘사하였다. 그는 앞서 갖은 색과 꽃과 기암으로 집을 꾸미는 풍토에 휩쓸려 울타리 안을 단장 했지만 자신의 관심은 항상 울타리 밖에 있음을 고백하였다. 여기서 집 뒤 개천을 따라 들리는 벌거 벗은 마음 소리, 개천가의 빨래방망이 소리, 약수터 물할머니의 푸념 소리 등이 계용묵이 정릉을 사랑하는 이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