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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릉에서 지낸 시기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천승세 「점례와 소」, 이무영의 「계절의 풍속도」, 박경리의 「노을진 들녘」, 홍성원의 「따라지 산조」등 신문 연재소설의 삽화를 그렸다. 박고석은 삽화에 대해 ‘일종의 주제화라 할까 그림인 동시에 작품의 전개에 따라 변화와 강조를 생각하는 등 하여간에 재미있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짧게는 4화부터 길게는 300회가 넘는 연재소설의 삽화를 날마다 빠뜨리지 않고 그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글을 쓰는 작가도, 소설을 읽고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삽화가도 마감에 쫓기기 마련이었다. 시간이 촉박할 때는 기자가 작가의 집까지 찾아가 원고를 받아오거나 작가가 직접 신문사로 원고를 가져다주었다. 정릉 이웃인 박경리가 쓴 「노을진 들녘」의 삽화를 그릴 때는 황달까지 앓아 몸져누울 지경에도 달필로 삽화를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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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는 풀이 죽은 일혜를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가시겠어요?"
종로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정릉으로 향하였다. 정릉에 도착하자 그들은 개울을 따라 무작정 골짜기로 올라갔다. 일요일이 아닌 때문인지 별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적한 숲 속에 흐르는 물소리만이 시원하게 감각된다. 바위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일혜는 밀짚모자를 벗어 들고 영재를 바라보며 웃었다. 실낱같이 가늘게 엮어놓은 금으로 된 네클리스가 가볍게 흔들렸다.
송화리를 도망치듯 떠난 영재는 일혜를 만나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잊으려고 한다. 일혜는 매일 영재를 찾아가다가 함께 정릉으로 가자고 하여 현지 호텔에서 함께 1박을 하고, 거기서 영재는 상호와 민여사의 밀회를 목격한다. 골짜기, 개울, 호텔 등을 통해 정릉 지역이 이전부터 서울 외곽의 휴양지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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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리의 영천댁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사흘 후 영재는 부랴부랴 돈암동으로 하숙을 옮겼다. 하숙을 자주 옮기는 영재의 변덕을 잘 아고 있는 동섭이었지만 이번만은 그도 참을 수 없었던지 불평을 했다. 영재가 하도 서두르는 바람에 시부적거리며 따라오기는 했어도 여러 가지 면으로 이번 하숙은 먼저 하숙보다 조건이 나빴다. 명륜동에서는 도보로 학교까지 갈 수 있었지만 돈암동에서는 전차를 타야 했고, 방은 널찍하였으나 이층이라 겨울에는 고생이 될 게고, 꼬불꼬불 꼬부라진 골목길을 몇 바퀴나 돌아가야 하는 것도 동섭에게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잠자리를 옮기면 익숙해질 때까지 잠을 못 자는 것도 큰 탈이었다. 그는 짐을 정리하면서,
"신경질도 이만하면 최고급이야."
하고 투덜거렸다.
"잔말 말어."
영재는 자기의 짐도 동섭에게 내맡긴 채 죄 없는 담배만 태우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주실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영재는 하숙을 명륜동에서 돈암동으로 급히 옮긴다. 영재는 자신의 죄에서 도망치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하고자 한 것이지만 언젠가 자신이 들킬 것이라는 사실에 불안해 한다. 이전에 영재가 있었던 명륜동 하숙에 비해 "전차"와 "꼬부라진 골목길" 등 돈암동 하숙은 영재의 학교와는 떨어진 불편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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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는 밥상에서 물러났다. 동섭도 수저를 놓으며,
"자네 신경이 요즘 퍽 약해진 모양이야. 차나 한잔하러 가자."
"그러지."
일어섰다.
돈암동 종점에 있는 조촐한 다방에 그들은 들어갔다. 다방 안은 담배연기가 자욱하였다. 종점이라 전차에서 내린 손님들이 차를 한잔 마시러 들어오는 모양으로 자리는 거의 비어 있지 않았다. 영재와 동섭은 겨우 빈 자리를 하나 찾아 앉았다.
"다방은 명륜동보다 낫군."
영재는 처음 와보는 다방을 둘러본다. 얼굴이 해사한 소녀가 미소하며 전축에 레코드를 갈아 넣는다.
영재는 밥을 먹고 동섭과 함께 돈암동 전차종점에 있는 다방에 들어간다. 혼잡한 다방에서 영재는 수명과 재회하며 "숙명적인" 느낌을 받고, 동섭을 통해 소개받는다. 동섭은 일혜를 만나면서도 수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영재를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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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는 부드러운 가루눈이 내리고 있었다.
종점에 있는 다방 앞에까지 왔을 때 동섭은 다방 문을 밀었다. 좀 궁금하기는 했으나 영재는 눈을 털고 동섭의 뒤를 따라 다방에 들어섰다. 동섭이 가자는 대로 구석 자리에까지 간 영재는,
"아!"
경악의 소리와 함께 관자놀이가 움직였다. 참으로 의외로 사람이 그곳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녹색 머플러로 얼굴을 깐 홍수명이었다.
동섭은 돈암동 하숙집에서 술이 깬 영재와 전날 술집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다가 전차 종점에 있는 다방으로 향한다. 다방에는 수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수명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영재는 동섭에게 일혜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수명이 돌아오자 영재와 동섭, 수명은 택시를 타고 시내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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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는 미아리 고개로 올라섰다. 그리고 정릉으로 꺾어지는 길 어귀에 있는 다리목까지 멈추었다. 그의 눈은 미아리 고개에서 동편에 솟은 언덕에 가려진 지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아서서 다리 위를 걷기 시작한다. 다리가 끝나자 그는 되돌아섰다. 그리고 또다시 다리 위를 걷기 시작한다. 왔다가는 가고 가서는 되돌아오고 몇 번이나 그 짓을 되풀이하는 동안 황혼은 사라지고 거무죽죽한 하늘에 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영재는 소매를 걷어 시계를 들여다본다.
'만일 와 있지 않다면 전화를 걸어야지.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야지.'
그는 중얼거리며 돈암동 쪽으로 되돌아 내려갔다. 미아리 고개에서 얼마간 내려오니 길 왼쪽 언덕배기에 영재가 목적하는 집이 아슴푸레하게 보였다. 영재는 그 집을 향하여 언덕으로 올라갔다. 낡고 헙수룩한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몹시 쓸쓸해 보이는 집이었다.
수명과 박 상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던 영재는 수명의 집으로 찾아간다. 수명은 학교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불러낸 영재에게 다방에서 이야기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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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그들은 돈암동 뒤껸에 있는 언덕 위에 올라섰다. 하늘의 무수한 별빛과 시가지의 연이은 불빛, 그 중간 지점에서 두 사람은 마주선 채 말이 없다.
"앉으세요."
한참 만에 영재는 수명의 팔을 이끌어 바위 옆에 앉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수명과 좀 떨어진 곳에 주저앉았다. 바람이 슁 하고 불어왔다. 나뭇가지 위에 남은 눈이 안개처럼 휘날린다. 수명의 머플러도 나부꼈다.
영재는 다방으로 가지 않고 돈암동 언덕에서 수명에게 박 상무와의 관계를 묻고 자신이 수명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영재는 대화 중에 자신을 조지 엘리엇의 『사일러스 마너』에 나오는 고드프리에 비유하고, 수명은 영재가 결혼했는지를 물어보지만 영재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답할 뿐 속사정을 말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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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전선에 걸려 있던 달은 간 곳 없고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그들은 돈암교 쪽으로 나갔다.
다방 옆에 무슨 시음장이라 씌어진 초라한 바로 들어갔다. 위층은 무슨 카바레인지 댄스홀인지 삼류 멋쟁이들 남녀가 드나들고 있었다. 이따금 싸구려 밴드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이 아래층으로 흘러들어 왔다. 세 사람은 다 조용히 술을 마셨다. 술을 별로 하지 못하는 동섭은 마시는 시늉만 했고 주로 콩만 집어먹고 있었다. 그는 이런 바의 분위기 속에서 아주 멋적은 모양이다.
송화리에서 송 노인의 장례를 치르고 올라온 영재는 동섭과 상호를 데리고 돈암교 근방 술집으로 들어간다. 술집에서 나온 후 동섭은 상호에게 하숙집으로 갈 것을 제안하지만 상호는 거절하고 비를 맞으며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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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으로 갑니까?"
운전수가 묻는다.
"이쪽으로 도시오. 정릉 쪽으로 가봅시다"
영재는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수명이 묻는다.
"아니."
수명은 영재가 시골로 내려간 일을 모르고 있었다.
"왠지 불안해요."
"아무것도 불안해할 일은 없어요."
영재는 팔을 올려 수명이 기댄 시트 위에 얹었다.
정릉 종점에서 그들은 내렸다.
명동의 다방에서 수명을 만난 영재는 수명과 함께 택시를 타고 정릉으로 향한다. 정릉 종점에서 내린 영재와 수명은 개울을 따라 함께 경국사를 향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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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때 영재는 회사에서 돌아왔다.
"야단났어."
들어서자마자 영재는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동섭은 돌아보며,
"뭐가?"
"고려대학이 일어났어."
"고려대학?"
"아직 신문 안 봤나?"
영재는 호주머니 속에서 석간신문을 꺼내어 휙 던져준다.
"경찰 놈들 골병 들게 생겼어."
영재는 펄썩 주저앉으며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붙여 문다. 동섭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신문에 얼굴을 파묻는다.
감기로 학교를 쉬었던 동섭은 퇴근한 영재가 건낸 석간신문을 통해 3.15 부정선거에 반발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알게된다. 동섭은 이를 알고 곧 밖으로 나간다. 데모를 마치고 돌아가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폭도들에게 습격당한 사실이 다음날 조간신문을 통해 보도되었고, 여러 대학과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4월 19일 데모에 참여했다. 영재와 동섭, 상호도 참여했지만 영재는 경찰이 발포한 총알에 맞고 쓰러진 뒤 수명이 일하는 병원에 입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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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택시를 세우고 차에 올랐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택시가 떠나자 수명은 물었다. 영재는 앞을 바라본 채 소상처럼 대답이 없다.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수명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영재는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그의 상처투성이인 것만 같은 영혼은 수명의 손이 닿지 않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말없이 돈암동까지 가서 택시에서 내렸을 때,
"뒷산에 좀 올라갑시다."
영재가 말했다. 수명은 잠자코 따랐다. 산으로 올라 간 수명은 마르기 시작한 풀밭에 앉았다.
수명과 함께 영화를 본 후 다방에 들어간 영재에게 성삼이 다가와 협박한다. 수명을 먼저 보낸 영재는 다방을 나가 골목에서 성삼과 싸우고, 영재를 기다리던 수명은 영재를 데리고 큰길로 빠져나간다. 함께 택시를 타고 돈암동에서 내린 영재와 수명은 뒷산에 올라가 서로의 불안감에 대해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