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1891 - 1955
인물 개인 교육가
인물 개인 사업가
인물 개인 정치인
교육자, 언론인, 정치가이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다. 1915년에는 중앙학교를 인수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동아일보사를 창립하였다. 『동아일보』를 통해 물진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자 힘썼다. 1932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북악산 기슭 안암의 언덕에 새 교사를 세웠다. 1945년 8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종합대학인 고려대학교를 창립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다. 그러나 1940년대에 학도지원병을 고무하고 징병제 참여를 독려하는 등 친일행적이 인정되어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고, 2018년 2월 서훈이 취소되었다.
안암동
  • 대한뉴스 제52호 '고 김성수 선생 국민장'
  • 대한뉴스 제52호 '고 김성수 선생 국민장'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41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1-2 (안암로 145)
  • 비고: 고려대학교(활동)

근거자료 원문

  • ◎ 金性洙 1891∼1955 교육가·언론인·정치가. 호는 仁村, 본관은 울산, 전라북도 고창에서 호남의 거부였던 暻中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棋中의 양자가 되었으며 13세 때 高光錫과 혼인하였다. 1906년 전남 창평에서 宋鎭禹와 함께 영어를 공부하였고 1908년 18세 때에 군산의 錦湖學校를 다니다 그해 10월 새 학문을 배우기 위해 송진우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正則英語學校와 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 早稻田大學의 정경학부에 입학, 1914년 졸업한다. ‘내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의 교육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1915년 4월 中央學校를 인수 1917년 中央學校長에 취임하였으며 京城織紐柱式會社를 맡아 경영하였다. 1919년 1월부터 송진우·玄相允 등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였고, 그해 10월 민족의 산업을 일으키는 바탕으로 京城紡織柱式會社를 설립하였으며 이듬해 4월 東亞日報社를 창립하였다. 《동아일보》를 통해 1922년에는 物塵獎勵運動을 폈으며, 1923년 民立大學設立運動을 펴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고자 힘썼다. 1929년 2월 재단법인 中央學院을 설립했다. 유럽·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나라의 문물과 교육실태를 두루 살피고 돌아와 1932년 3월에는 普成專門學校를 인수, 교장이 되었다. 사립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대한제국의 내장원경이던 이용익이 설립한 민간에 의한 유일한 민족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그 후 천도교측의 의암 손병희의 은고와 많은 선각 유지들의 공로로 험난한 길을 헤치며 유지되었고 1919년 3·1독립운동에서는 항일독립운동의 큰 힘이 되었지만 운영상의 어려움에 처해있던 것을 1932년 인촌이 인수, 민립대학의 꿈을 펴기 위해 북악산 기슭 안암의 언덕에 새 교사를 세웠고 1937년에는 민족의 성원과 정성을 모아 개교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석탑의 미려한 도서관을 건립하여 영원히 뻗어나갈 민족사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는 1945년 10월 미군정청 고문회의 의장에 취임, 1946년 1월에는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을 다시 맡았고(제9대) 송진우의 뒤를 이어 韓國民主黨의 수석총무(당수)가 되었으며 4월에는 大韓獨立促成國民會 부회장이 되었고, 8월에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종합대학인 고려대학교를 창립, 민족을 위한 민족의 대학을 설립한다는 꿈을 실현하였다. 1947년 反託獨立鬪爭委員會의 부위원장, 1949년 2월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통합되어 民主國民黨이 창당되자 그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1년 5월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에 당선, 취임하였으나 정부의 국회탄압사건에 대하여 李承晩정권에 항거 이듬해 5월 사임하였다. 1953년 11월 民主國民黨 고문이 되어 護憲勢力의 단결을 호소하다가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죽었다. 그해 2월 24일 국민장으로 고려대학교 경내에 안장되었으나 지금은 경기도 남양주군으로 이장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複章을 받았다. 고려대학교는 1991년 8월 학교 경내에 인촌탄생 100주년을 맞아 인촌의 建學理念을 새롭게 되살리기 위한 學術·文化의 종합센타인 仁村紀念館을 설립하였다. 그 자리는 1930년대 말 仁村이 舍힘을 지으려 설계까지 마쳤으나 전쟁의 와중에서 중단되었고 인촌 서거후에는 한동안 그의 幽宅이었다. 인촌기념관은 國際會議室·大講堂·常設展示室 등 학문·문화공간을 중심으로 휴게실·식당 등의 편의시설 및 高麗中央學院·會議室 등을 갖추고 있는 부지 150,186㎡, 건축면적 2,461.98㎡, 연면적 7,177.07㎡의 지하 1충·지상 4층·옥탑 2층의 철근 콘크리트 라멘즈 구조의 건물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51-752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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