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1932.10.08 - 2019.09.08
인물 개인 화가
만화가, 화가이다. 1955년부터 신문에서 4컷 시사만화인 〈고바우영감〉을 연재하면서 현대사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담아낸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한국전쟁 때 정릉동 집 다락에 석 달 가까이 숨어 지내며 전쟁의 참상을 스케치했고, 인물캐릭터 200여개를 만들었다. 〈고바우영감〉은 1950년부터 『사병만화』·『만화신문』 등의 기관지와 『월간희망』 등에 수록하다가 1955년부터 『동아일보』에서 장기연재하였다. 이후 『조선일보』·『문화일보』 등을 거치며 자리를 옮기다 2000년 9월 끝맺는다. 〈고바우영감〉은 14,139회에 걸쳐 연재한 한국 최장수의 시사만화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생존작가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원화가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됐다. 박수근 화백, 박고석 화백을 이웃으로 두고 명동 모나리자 다방에서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정릉 입구 오두막 선술집에서 들러 목을 축이곤 했다는 것이 그의 회상이다.
정릉동
  • 고바우 영감 표지(삼성출판박물관)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9일 미아리에서 월곡까지>,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9일 절규하는 남녀 >,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9일 국군전투기의 폭격>,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30일 소달구지에 올라탄 북조선군>,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다락방에서의 은신>,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0일 인천상륙작전 5일후>,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5일  화염에 휩싸인 서울>,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6일 북으로 가는 부역자>,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6일 붉게 물든 북쪽하늘>,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7일 도망치는 북한군>,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8일 철모 쓴 국군병사들>,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8일  시체 위를 자동차가 통과하다>,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8일 시가전>, 1953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돈암동 종점의 국군병사의 사체>,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정릉부근에서 들리는 총성소리>,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돈암동 종점 공산군의 서울 입성>, 1950
  • 『고바우 영감』 원화(1)
  • 『고바우 영감』 원화(2)
  • 『고바우 영감』 원화(3)
  • 『고바우 영감』 원화(4)
  • 『고바우 영감』 원화(5)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돈암동 종점>,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반격을 준비하는 국군>,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7일 돈암교 부근>,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낙산위에서 청량리쪽>,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부상당한 국군병사>,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낙산산정의 패잔병들>,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6월 28일 국군과 인민군 >, 1950
  • 김성환, <6.25스케치 1950년 9월 29일  서울 탈환>, 1950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金星煥
  • 이명칭: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화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근거자료 원문

  • 뭉툭하고 큰 코에 보일 듯 말 듯 한 콧수염, 작은 안경과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한 가닥의 머리카락이 특징인 ‘고바우 영감’은 우리나라 시사만화를 대표하는 주인공이다. 김성환은 50여 년간‘고바우 영감’을 통해 우리 시대를 바라보고, 서민들의 마음을 대신하였다. 1932년 개성에서 태어난 김성환은 서너 살 때부터 연필을 쥐고 방바닥이 까맣게 되도록 그림을 그리고 놀았고,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학교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소문이 났다. 의열단 부단장으로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 김동순은 만주에서 지내다 해방 후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내려온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경복중학교에 다닐 때 학비를 스스로 벌어보려고 그림 실력을 살려 만화를 그렸다. 연합신문에 4컷 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하고, 1949년 화가 김용환이 만든 주간週刊《만화뉴스》에도 전속작가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어린 나이지만 만화가로 데뷔하여 실력을 쌓고 있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만다. 개성 친척집으로 피난을 갔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다시 정릉 집으로 돌아왔다. 정릉 집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친지의 도움으로 마련한 곳이었다. 아리랑 고개를 넘자마자 개울이 있고, 다리를 건너 이어진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있는 집이었다. 안방과 사랑방, 작은 방 세 개가 있고, 삼각형으로 생긴 마당이 붙어 있었다. 개성보다 상황이 나빴던 서울은 끼니거리도 없어 일을 해야 됐지만, 북한군을 선전하는 그림을 그리는 일에 차출 당하거나 군대에 끌려갈 것 같아 다락에 석 달 가까이 숨어 지냈다. 숨어 있는 동안에도 폭격으로 불에 타고, 길거리에 시체가 널려있는 전쟁의 참상을 스케치 하고, 2백여 명이나 되는 인물 캐릭터를 만들었다. (집에 오는 길에는) 큰 개울이 있고. 아리랑 고개 넘자마자 다리가 있어요. 여기 (다리건너기 전에) 병원이 하나 있고. (다리를 건너자마자) 대포집이 있어요. 정릉 집 지붕 담벼락은 여러 개 그렸죠. 마당이 삼각형으로 되어 있었어요. 서울 시내가 불바다가됐을 때 연기가 올라오는 것도 그렸어요. - 김성환의 말 - 9.28 수복이 되고 화가 김병기의 추천으로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에 근무하며 계몽포스터와《만화승리》,《웃음과 병사》같은 주간지를 만들어 국군 활동을 홍보하는 일을 하였다. 전쟁 상황을 생생히 그려내기 위해 위험지역인 최전방까지 들어가 보니, 9.28 수복 후 돈암동에서 처음 본 미군들이 우리 군대와 같은 전선에서 적과 싸우고 있었다. 포탄이 터지고, 바로 옆에서 죽는 이들을 봐야하는 곳이었지만 그 순간까지 스케치를 했다. 전쟁 중에도《만화신보》,《 만화천국》등에 참여하면서 계속 만화를 그렸는데, 1953년 학생잡지인《학원》에 연재한 <꺼꾸리군 장다리군>은 많은 인기를 얻었다. 전쟁 후 서울로 오니 집은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국방부에 들어가기 전 땅을 파고 숨겨 둔 그림과 잡지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불 땔 나무도 없을 때라‘누군가 땔감 대신 가져다 썼겠지’라는 생각에 씁쓸함이 더했다. 전국으로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왔다. 문인과 화가들은 명동 다방에 모여서 서로 안부를 묻고 교류하였다. 달리 갈 곳 없던 이들이 하루 종일 다방에 차 한 잔만 시켜놓고 앉아 있는 모양을 우스갯소리로‘벽화’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릉 이웃이던 화가 박고석도 모나리자다방에서 만나 친해졌는데, 집에 갈 때면 같이 돈암동 종점까지 전차를 타고 와 아리랑 고개를 넘어 정릉 입구의 오두막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허름하고 작은 술집의 좁은 판자 의자에 앉아 빈대떡 안주에 국산 위스키를 마시며 그림 얘기를 나누는 재미가 있었다. 화가 장욱진이나 김기창, 박수근도 명동 다방에서 사귀었다. 박수근은 그의 그림처럼 순박한 사람이었다. 그림을 사간 미국인이 편지를 보내오면 영어를 읽을 줄 몰라 영문과 출신인 김성환의 아내에게 가지고 와서 해석과 답장을 부탁했다. 후에 박수근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작품 한 점 나누지 못한 아쉬움에 까세(cachet)를 모으기 시작했다. 우체국에서 새 우표 판매를 시작하는 날 편지봉투에 그 우표를 붙이고 당일 소인을 찍은‘초일봉피 初日封皮’에 우표와 관련된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을‘까세’라고 한다. 50여 년 동안 김환기, 이상범, 박고석, 장욱진, 김기창, 이현세, 허영만, 이두호 등 작가 161명이 그린 550여 통의 그림을 모았다. 친했던 과거도 회상이 되고 기분이 좋지 않거나 일이 잘 안돌아가고 해서 기분 나쁠 때 아무거나 꺼내보거나 하면 마음이 가라앉죠. 그림을 보면서‘이걸 그릴 때 이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생각하면 정말 재미있어요. - 김성환의 말 - 총 1만 4,139회를 연재한 대기록을 갖고 있는 ‘고바우 영감’은 1950년 주간《만화신보》에 처음 선보였다. 초기에는 콧수염에 중절모를 쓴 모습이었고, 지면을 옮기며《신태양》,《희망》등에도 실렸다. 몇 년 뒤인 1955년 동아일보에 근무하던 시인 이상노가 문화면에 만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을 했다. 성인이 볼 수 있는 만화를 발표할 수 있는 곳이 부족한 때라 선뜻 승낙을 하고 그해 2월 1일부터 연재를 하였다. 당시 작품을 연재하던 잡지《학원》고료보다 훨씬 적은 돈을 받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한 달, 일 년, 이 년…, 꾸준히 만화를 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바우 영감’때문에 신문을 본다는 독자층도 생겼다. 고바우 캐릭터는 정릉 집 다락방에 숨어서 만든 200여 개 만화 캐릭터 중 하나예요. 영감으로 한 이유는 만화는 의례 아이들만 보는 걸로 알고 있어서 노인으로 그리면 어른도 볼게 아니냐 해서 노인으로 한 거고. 그냥 토속적인 의미로 옛날에 이름 붙이기 전에 아들이 나오면‘바우’라고도 불렀으니까. 다른 만화 주인공들과 다르게 하기 위해 처음부터 고바우 표정을 없앴어요. 표정 대신 머리카락 한 올로 표현했죠. 보통 때는 앞으로 구부러져 있다가 화가 났을 대는 똑바로 서고 놀라면 구불구불해지고. - 김성환의 말 - ‘고바우 영감’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 4컷 만화 아래 붙는 광고 수입으로 당시 동아일보 부장 9명 월급을 댄다고 할 정도였다. 다른 신문에서도 다투어 만화를 실었고, 라이벌 신문사에서는 만화를 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월급을 주겠다는 얘기까지 하였다. 고바우는 사회를 대변하는 캐릭터가 되었고,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고바우가 등장했다. 인기가 높아지며‘고바우 영감’의 영향력이 커져 필화사건으로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아들 노릇을 하며 돌아다닌 사람에게 아첨하는 관리의 모습을 풍자한 만화로 시경市警에서 경범죄 처벌을 받았다. 고바우 영감이 / 고개를 넘다가 / 고개를 다쳐서 / 고약을 발랐더니 / 고만 낫더래 - 작자 미상, 1950~60년대 어린이들이 부른 노래 -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내용 검열을 당해 내용을 지우거나 고쳐야 했고, 즉결재판과 벌금형, 협박까지 당했다. 외국 언론에서는 대표적인 사회 비평만화인‘고바우 영감’을 주목하였다. 1963년 AP통신은‘말을 함부로 못하게 된 한국인’이라는 제목과 함께 군사정부의 언론탄압과 고바우 만화를 소개하였다. ‘고바우 영감’이 신문에 실리지 않는 날이면 외신기자들이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며 소식을 전했다. 1980년 조선일보, 1992년 문화일보로 지면을 옮겨 연재를 이어갔다. 12월 31일이면‘OO년의 만상’이란 제목으로 한 해를 마감하며 고바우영감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기록하고 비평하였다. ‘만년계장, 재능도 학력도 별로 없고 출세도 못하며 미인이라고 자랑할 수 없는 아내와 딸을 가진 평범한 오십대 후반의 소시민으로 소심한 기질에 초라하기까지 한 고바우 영감’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2000년 9월, 반세기 동안 시대와 함께 한‘고바우 영감’연재를 끝맺었다. 이 해에 고바우 50주년 기념우표가 발행되었고, 2013년 생존 작가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고바우 영감 원화原畵가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되었다. 만화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김성환은 1961년 국립도서관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한국화와 서양화를 선보이는 개인전을 10여 차례 넘게 연 화가이다. 1960년대에는 동화작가 마해송이 쓴 동화에 한국화처럼 그린 동화책을 여러 권 내기도 하였다. ‘고바우 영감’신문 연재를 마친 뒤로는 화가로서 온전히 작품 활동을 하며 지내고 있다. 틈틈이 집베란다에 새 모이를 두고 먹이를 먹으러 온 새들의 고갯짓, 날갯짓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순간을 포착해 스케치를 한다. 김성환은 일반적인 화가들과 달리 큰 그림은 작은 방에서 그리고, 작은 그림은 큰 방에서 그린다. 큰 그림에는 치밀함을 담고, 작은 그림에는 공간의 기운을 넣으려는 생각에서이다. 최근에는 한국화에도 고바우를 그려 넣어 신문을 떠난 고바우 영감이 마치 우리 산천을 유람하는 듯한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20세기 우리 사회를 함께 걸어온 고바우영감이 이제 그림 속으로 들어가 우리 곁에 살아 있는 듯, 김성환의 작품 세계는 계속되고 있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90-96쪽
  • 김성환 1932년 개성 출생 1949년 경복고등학교 재학 중 연합신문 전속작가가 됨 1955년 동아일보 연재만화 담당,‘ 고바우 영감’연재 시작 1956년 현대만화가협회 회장 1961년 첫 번째 개인전(국립도서관 화랑, 서울) 1980년 조선일보에서‘고바우 영감’연재 1992년 문화일보에서‘고바우 영감’연재 1998년 사단법인 한국만화가 협회 고문 2000년 총 1만 4,139회로‘고바우 영감’연재 마침 2001년 고바우만화상 제정,‘ 최장수 연재만화’로 기네스북 등재, ‘고바우 50주년’기념우표 발행 2013년‘고바우 영감’원화 등록문화재 제538호 지정 대표작품 『세태만상』,『세모돌이 네모돌이』, 『꺼꾸리군 장다리군』,『소케트군』, 『고바우 영감』,『나의 육필까세집』, 『고바우 잡학백과』등 상훈 소파상(1974), 서울언론인클럽 신문만화상(1988), 보관문화훈장(2002)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2013, 정릉동 : 잊혀져 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 97쪽
  • 만화 ‘고바우 영감’을 그린 화가이다. 중학교 때부터 신문에 4컷 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하고, 1949년 김용환이 만든 주간週刊 <만화뉴스>의 전속작가로 만화를 그린다. 총 1만 4,139회를 연재한 대기록을 갖고 있는 ‘고바우 영감’은 1950년 주간 <만화신보>에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초기에는 콧수염에 중절모를 쓴 모습이었고, 지면을 옮기며 <신태양>, <희망> 등에도 실렸다. 문화일보에서 2000년 9월 연재를 끝맺었다. 2013년 생존 작가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고바우 영감> 원화原畵가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 때 정릉동 집 다락에 석 달 가까이 숨어 지내며 전쟁의 참상을 스케치하고, 인물 캐릭터 2백여 개를 만들었다.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에서 국군 홍보 만화를 그리다가 전쟁 후 정릉동 집으로 돌아왔다. 박수근 화백이나 이웃에 살던 박고석 화백과 가깝게 지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51쪽
  • 12. 김성환(1932~) 김성환 화백은 동아일보에 1955년부터 연재되던 4컷짜리 만화 ‘고바우’를 연재하면서 우리 신문에 4컷만화를 도입한 장본인으로 현대사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고바우 영감’ 4컷에 담아낸 현대사의 산 증인이다. 1932년 개성 출생으로 아버지 김동순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10여년간 수감됐던 독립투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만주에 거주하던 당시에 그 지역의 유지로 살면서 귀농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친일인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고 한다. 해방이후 귀국해 서울로 온 김성환 화백 일가는 혹독한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10대 초반이던 김화백은 만주에 있을 때부터 학교 미술부장을 맡는 등 그림에 소질을 보였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생계를 도울 생각에 ‘멍텅구리’라는 제목의 네 칸 만화를 그려서 <연합신문>에 보냈다. 신문사에서는 ‘학비를 대주겠다’며 만화를 계속 그려 달라고 요청했고, 1949년 주간 <만화뉴스>의 전속작가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다른 잡지에서도 요청을 받아 17세 때부터 당시로서는 꽤 많은 월 1만원을 받으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됐다. 하지만 곧 한국전쟁이 터지게 되어 다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한국전쟁 때 정릉동 집 다락에 석달 가까이 숨어 지내며 전쟁의 참상을 스케치했고, 인물캐릭터 200여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총 1만4천139회 연재기록을 가진 ‘고바우영감’도 이때 탄생한 캐릭터다. ‘고바우 영감’은 1950년 12월30일 발행된 ‘사병만화’가 첫 시작이다. 초기에는 중절모를 쓴 모습이었으나 지면을 옮기면서 <신태양>, <희망> 등의 잡지에도 실렸다. 고바우가 폭 넓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55년 2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고바우’가 연재되면서부터다. 만화를 신문에 게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언론계에서는 고바우의 인기를 확인한 이후 잇달아 연재만화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에서 장기연재를 하다가 문화일보로 자리를 옮겨 2000년 9월 끝맺는다. 2013년 생존작가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고바우영감> 원화가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됐다.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에서 국군홍보 만화를 그리다가 전쟁 후 정릉동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박수근 화백, 박고석 화백을 이웃으로 두고 명동 모나리자 다방에서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정릉 입구 오두막 선술집에서 들러 목을 축이곤 했다는 것이 그의 회상이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12-213쪽
  • 김성환 1932~ 개성에서 태어나 의열단 부단장으로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 김동순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해방 후 서울로 내려오지만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중학생이었던 김성환은 학비라도 스스로 벌 생각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소문이 났던 그는 어린 나이지만 만화가로 데뷔하여 연합신문에 4컷 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하고, 주간 『만화뉴스』의 전속작가로 활동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김성환의 가족은 친지의 도움으로 정릉에 집을 마련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개성 친척집으로 피난을 갔다. 전쟁 후 다시 돌아온 집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집에 오는 길에는) 큰 개울이 있고, 아리랑고개 넘자마자 다리가 있어요. 여기 (다리 건너기 전에) 병원이 하나 있고, (다리를 건너자마자) 대포집이 있어요. 정릉 집 지붕 담벼락은 여러 개 그렸죠. 마당이 삼각형으로 되어 있었어요. 서울 시내가 불바다가 됐을 때 연기가 올라오는 것도 그렸어요. - 김성환의 말 피난을 떠났던 사람들이 서울로 돌아왔다. 달리 갈 곳이 없던 문인과 화가들은 다방에 차 한 잔만 시켜놓고 앉아 안부를 묻고 교류하였다. 김성환은 모나리자다방에서 정릉 이웃 화가 박고석을 만나 친해졌는데, 같이 돈암동 종점까지 전차를 타고 와 아리랑고개를 넘어 정릉 입구의 허름하고 작은 오두막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그림 얘기를 나누었다. 명동다방에서 화가 장욱진, 김기창, 박수근도 사귀었다. 김성환은 1950년 주간 『만화신보』에 「고바우영감」을 처음 선보였다. 총 1만 4,139회 연재라는 대기록의 시작이다. 「고바우영감」은 인기가 높아지고 영향력이 커지면서 여러 차례 내용을 검열 받고 즉결 재판과 벌금형, 협박까지 당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우리나라 시사만화를 대표하는 주인공으로 50여 년간 시대와 함께 하다가 2000년 9월, 연재를 끝맺었다. 「고바우영감」 원화는 생존 작가의 작품으로는 최초로 2013년 등록문화재 제538호로 지정되었을 정도이다. 만화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김성환은 1961년을 시작으로 한국화와 서양화 개인전만 10여 차례 넘게 연 화가로 「고바우영감」 신문 연재를 마친 후로는 화가로서 온전히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화에 고바우를 그려 넣어 신문을 떠난 고바우 영감이 마치 우리 산천을 유람하는 듯한 작품을 발표, 작품세계를 계속하고 있다.
    정릉 마을 한 바퀴 주민실행위원회, 2017, 정릉 마을 한 바퀴,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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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2-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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