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성북동
1982.02
작품 문학
1982년 2월, 『한국문학』 10권 2호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성북구 성북동에 어렸을 때부터 오랜기간 거주한 주인공이 1인칭 시점으로 성북동의 옛모습을 회상하고 변해버린 80년대 현재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전쟁, 산업화를 거쳐 80년대까지 성북동의 변화상을 자연환경, 도로 교통, 주거, 직업, 유흥 등 다방면에 걸쳐 묘사하고 있어 성북동의 역사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성북동 삼선동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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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브젝트 생산자: 정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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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 작품 문학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1982.02

근거자료 원문

  • 『한국문학』10권2호, 1982. 2. 성 밑으로 완만한 구릉을 이룬 삼선동 일대는 자두와 복숭아 나무로 가득 찬 과수원과 목장이 있었다. 이 목장이 폐쇄되면서 별장과 주택이 들어섰다. <…> 거리는 새로 닦은 신작로 주변을 따라 개발되어 갔다. 이 무렵부터 기계 문명이 시작되었다. 신작로 위에 쇠길이 생겼으니 전차선로다. 돈암동 종점에서 종로 4가로 나가는 전차 소리에 알을 품던 산꿩과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멀어졌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6쪽
  • 내가 태어날 무렵엔 고양군에 속해 있었다. 그것이 서울시로 편입되어 성북구로 개편되었다. 성북구 성북동은 언제나 울창한 수목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성벽 밑으로 펼쳐진 언덕 뒤엔 항상 흰 뭉게 구름이 떠 있었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31쪽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성북구로 개편된 때는 1949년이다. 성북구 성북동이 예전에는 숭인면 성북리였다. 자연이 풍부하고 아름다웠던 성북동 경치를 회상하는 부분이다.
  • 동소문이 헐린 것이 어느 해인지 아득한 일이다. 무너진 성벽 사이로 신작로가 뚫리며 미아리 고개를 향했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32쪽
    동소문은 일제강점기에 도시계획을 명목으로 1928년에 문루가 헐리고 1939년에 아치형 석문(홍예문)마저 헐렸다. 이후 1992년 말에 서울시의 문화재 복원계획에 따라 복원공사에 들어갔고 1994년 10월 18일 원래 위치는 아니지만 옛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성 밑으로 완만한 구릉을 이룬 삼선동 일대는 자두와 복숭아 나무로 가득 찬 과수원과 목장이 있었다. 이 목장이 폐쇄되면서 별장과 주택이 들어섰다. 이 무렵 성북동 골짜구니에도 큰 별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32쪽
    19세기 서울의 도시 경관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인 『한경지략』, 『경도잡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서에서 서울 근교 명승지 중 하나로 성북동을 소개하면서 복사꽃을 명물로 꼽고 있다. 그 이전에는 관련된 언급이 없는 것으로보아 18세기말, 19세기부터 성북동 완만한 구릉지대에 복숭아나무가 심어져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박수진 외 5인, 2015, 『성북동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성북문화원 참고). 일제강점기 때부터 성북동에 부호들의 별장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삼선동‘이라고 하였는데 성북동 초입, 즉 성북동의 지하철 한성대입구역 방향 일대를 기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거리는 새로 닦은 신작로 주변을 따라 개발되어 갔다. 이 무렵부터 기계 문명이 시작되었다. 신작로 위에 쇠길이 생겼으니 전차선로다. 돈암동 종점에서 종로 4가로 나가는 전차 소리에 알을 품던 산꿩과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멀어졌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32쪽
    혜화문이 헐린 자리에 새로 난 미아리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신작로‘라고 부르고 있다. 돈암동 노선 전차가 들어온 때는 1941년으로 돈암동 종점에서부터 돈암교, 삼선교, 혜화동, 명륜동, 원남동, 종로4가를 지나 을지로4가까지 이어졌다. 산꿩과 뻐꾸기 울음소리 등 성북동의 자연환경이 도시화로 인해 사라져가는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
  • 거리가 급작스레 변하기 시작한 것은 전차 선로가 열리면서부터다. 공사장이 여기 저기 생겼다. 공사장 주변에 선술집이 따라다녔다. 수목이 울창한 산속에서 태어나 획일적인 기와집이 마구 늘어나는 이 거리에서 나는 자랐다. 조용하던 성북구 일대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화물을 나르는 트럭이 쉴새없이 드나들었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32쪽
    행정 개편 후 일제는 돈암정 일대를 ‘돈암지구’(오늘날 보문동 1-7가, 안암동 1-4가, 동선동 1-5가, 삼선동 1-3가, 동소문동 1-5가를 포함하는 지역)로 설정해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실시했다. (중략) 1920년대만 해도 논밭상태로 남겨져 있던 돈암리 일대는 이 사업의 결과 고밀도주거지로 변모했다. 신규 주택지에는 빽빽이 개량형 도시한옥들이 들어섰으며 그 외 전기, 교통시설, 상하수도시설과 같은 기반시설이 갖추어졌다(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성북문화원). 본격적인 도시개발이 시작되면서 공사 현장이 늘어나고 그에 따라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자리나 아이들의 놀이 등이 영향을 받는 내용이 이어진다.
  • 술집이 생기고 가게가 들어서고 시장이 번창해지며 지형은 바뀌고 사람의 마음도 변했다. 성북동 계곡에서 시작된 성북천이 오염되기 시작했다. 문안에서 천렵하러 나오던 여인들의 발걸음이 뜸해지자 개천을 뒤져 가재와 미꾸라지를 잡으러 다니던 애들의 모습도 개천가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고추잠자리가 날았고 여치가 울었고 반딧불이 어둠 속에 환상의 세계를 수놓았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33쪽
    도시화가 되기 전 성북동 성북천이 자연천으로서 사람들의 생활을 풍부하게 해주었던 풍경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현재 성북동 부분은 복개된 상태로 성북로가 지나는 길이 원래 물길이었다.
  • 조용한 일요일 아침이면 성북동 골짜구니에 서 있는 붉은 벽돌집 수도원을 향해 단정한 옷차림의 모습이 한가롭게 눈에 띄는가 하면 성북동 개천가에 서 있는 신교 예배당엔 장터 채소 가게 아주머니와 자전거포 젊은 부부 등이 애들을 앞세우고 모여드는 모습도 보였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33-234쪽
    붉은 벽돌집 수도원‘은 피정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구 본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벽돌로 된 외관에 흰색 선교자 조각상이 눈에 띄는 이 건물은 한국 가톨릭 최초의 방인 남자수도회로 1953년에 설립된 한국순교복자성직자 수도회의 본원 건물이었다.
  • 어느 해인가 돈암동 쪽 성북동 개천가에 서커스단이 온 일이 있었다. 이때만큼은 성북동 사람들이 온통 흥분하였다. 손님을 부르는 북과 나팔소리가 그런 것을 더 부채질했다. 서커스 구경은 낮보다도 밤이 더 볼 만했다. 카바이트 불빛 속에 전개되는 각종 묘기는 우리들에게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서커스단이 떠난 개천가는 파장이 된 시장터보다 더 어수선했고 허전했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34-235쪽
    구술자료에 따르면 현재 성북동 초입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 쪽에 있는 나폴레옹 제과점 옆 자리에서 서커스단이 공연을 했었다고 한다(송지영, 2011, 성북동-잊혀져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3,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 돈암동 종점에서 전차가 서면 손님들은 모두 다 내렸다. 그 뒤로 따라 내리는 팔에 붉은 완장을 단 젊은 차장은 거리 음반 가게에서 유행하는 어떤 유행가를 휘파람으로 잘 불렀다. 제복과 챙이 빳빳한 제모와 휘파람에 끌려 나는 항상 차장의 꿈을 잃지 않았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35쪽
    전차를 이용하던 승객들과 차장의 옷차림 등 당시의 일상 풍경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돈암동까지 오는 전차는 1939년에 개통되어 1968년까지 운행되었다.
  • 그러기 때문에 성북구 안에선 일제 시대에도 왜색(倭色)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동조동근(同租同根)을 내세워 조선 사람을 일본 민족으로 동화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던 때 그냥 버려둘 리가 없었다. 아사히오카(旭岳) 중학을 삼선동 끝머리 언덕에 자리잡게 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공작의 하나였지만 좀처럼 일본 세력이 이곳은 침범하질 못했다. 아사히오카 중학의 후신이 오늘의 경동(京東)중·고등학교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39쪽
    경동고등학교는 조선공립중학교 관제에 의해 1940년에 욱구공립중학교(旭岳, 일본어 발음 아사히오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1941년에 당시에는 돈암동이었고 지금은 삼선동인 현 위치로 이전해왔다.
  • 전라도 큰 부자가 일제의 지방 학정에 견디지 못하여 가산을 정리하여 돈암동 신흥사 앞쪽 언덕에 크고 아담한 건물을 지어 돈암장이라 하였다. 해방 후 이승만 박사가 미국으로부터 환국하자 그는 그곳을 그의 거처로 제공했다. 이로 인하여 성북구는 한때 서대문의 경교장과 함께 정치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문밖 버려졌던 변방이 하루 사이에 중심가로 바뀌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성북구 성북동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엔 변동이 있을 수 없었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40쪽
    자료에 따르면 1945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에게 2년 동안 돈암장을 거처로 제공한 자는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었던 장진영으로 나온다. 작품 속 "전라도 큰 부자"가 이를 가리키는 지는 분명치 않다. 이전에 이 자리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평산목장(平山牧場)이 있었다(돈암리 421번지). 2대에 걸쳐 운영된 평산목장은 계속 유지되지 못하고, 1939년 목장이 있던 터에 집이 들어섰다. 집을 지은 사람은 조선 후기 내시 송정진으로 대목장 배희한(무형문화재 제74호)이 책임목수로 참여하였다. 해방 후 이곳에서 살고 있던 장진영은 6.25사변 때 납치되었다. 한옥 본채가 2004년에 등록문화재 제91호로 등록되었다.
  •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흘러간 노래가 왜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는지 그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은 같은 오랏줄에 묶여 걸어서 그 고개를 넘었다. 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회적인 명분과 지위도 구별없이 우리는 같은 이름의 반동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의 행진을 해야 했다. 늙은이도 있었고 병약자도 있었고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총대를 겨누고 있는 그들은 우리를 마소모양 끌고 갔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44쪽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1956년 발표된 반야월 작사, 이재호가 작곡한 트로트곡이다. 6.25전쟁 때 인민군은 후퇴를 하면서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민간인들을 끌고 갔는데, 그때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는 길에 이들의 가족들이 끌려가는 자신의 남편, 아들, 형제를 찾아보려고 나왔었다.
  • 판자촌이 양성화되었다간 다시 묶이고 묶였다간 다시 풀리는가 하면 개발이란 명목으로 성북동 산허리까지 깎아 내려 성낙원이란 신흥 주택 지대가 생겼고 삼청동 쪽으로 통하는 언덕엔 깎아 놓은 주택지가 붉은 등을 내 놓고 아직도 건물주의 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동안 그쪽에 있던 판잣집과 가건물들은 헐려져 특권층의 주거지로 화해 버렸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49-250쪽
    조선후기에 조성된 정원으로 추정되고 2019년 현재 ‘성락원‘이라고 불리는 정원 주변은 예로부터 꿩이 많아 ‘꿩의 바다‘로 불리었다고 한다. 이 지역으로 고급주택과 대사관저가 들어서면서 부유층이 사는 동네라는 지금의 성북동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 성북동에서 삼선교 쪽으로 흐르는 개천가에 서 있던 공동변소마저도 없어졌으니 성북동 안엔 공동변소란 눈을 비비고 찾아 볼래야 볼 수 없는 형편이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50쪽
    삼선교에서 성북동 방향으로도 성북천이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된 상태로 성북로가 지난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변소가 주변 화장실이 없는 주거건물에서 사용하던 것인지 일반 행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 인스턴트 식품의 발달로 보리 냉차를 팔던 아주머니와 아이스케키통을 짊어지고 골목을 누비던 소년들과 큰 가위 소리를 흔들어 어린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던 엿장수 할아버지의 모습과 겨울밤이면 메밀묵과 찹쌀떡을 사라는 고학생의 고함소리도 사라진 성북동 골목안은 밤마다 통금에 쫓겨 허둥대는 서민들의 강박감만이 긴장감을 더해 줄 뿐이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51쪽
    화자는 보리냉차, 아이스케키, 엿, 메밀묵, 찹쌀떡을 팔러 다니는 행상들의 모습이 만들어내는 여유로운 풍경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을 만나기 전 성북동 골목길에서 판매하던 간식거리와 그것을 팔던 사람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오염된 성북천이 더럽다고 부분적으로 복개되었고 복개된 그 위엔 허술한 상가 아파트가 세워졌다. 나는 지금 이 상가에서 가게의 일부를 얻어 지금까지 복덕방을 경영하며 연명하고 있다.
    정한숙, 1998, 금당벽화, 251쪽
    성북천 복개는 1968년에 동소문로 하류에서 돈암시장까지 구간을 복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복개 구간에 삼선상가 아파트 A·B·C동(1969-71), 성북상가 아파트 C·D·E·OB동(1969-73), 삼익맨션 아파트(1971), 삼성맨션 아파트(1971)가 민간자본으로 세워지게 된다. 이후 1977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삼선교 상류를 복개하였다. 화자가 가게를 얻은 곳은 삼선교에서 가까운 삼선상가아파트나 성북상가아파트일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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