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1926
작품 영화
1926년 나운규(1902-1937) 감독이 만든 첫 영화이다. 일제의 무력침탈로 식민지가 된 당시 상황과 식민지 현실과 우리 민족의 울분을 영화에 옮겨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성북구 안암동은 영화 『아리랑』의 촬영 장소로, 당시 기와집 한 채와 초가집 십여 채가 있는 산중 골짜기가 배경이 되었다. 영화 『아리랑』을 기념하기 위해 돈암동과 정릉 사이에 있는 아리랑고개에는 영화의 거리와 아리랑시네센터가 조성되었다.
안암동 정릉동
  • 영화 아리랑(3편)(1)
  • 영화 아리랑(3편)(2)
  • 영화 아리랑(1)
  • 영화 아리랑(2)
  • 영화 아리랑(3)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나운규
  • 비고:
  • 유형: 작품 영화

시기

근거자료 원문

  • 아리랑고개는 일제강점기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전국에서 상영된 흑백 무성영화 <아리랑>의 촬영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아리랑>은 1926년 나운규 감독이 만든 첫 영화이다. 일제의 무력침탈로 식민지가 된 당시 상황과 식민지 현실과 우리 민족의 울분을 영화에 옮겨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 막바지에 아리랑의 영진은 일본 순사의 앞잡이를 낫으로 찔러 죽이고 밧줄에 묶여 아리랑고개 너머로 잡혀가는 장면이 나온다. 객석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고 관객 모두가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고 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도 이제는 거의 세상을 떠났고, 단성사에서 상영된 이후 영화필름도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여주인공 신일선 씨의 기억으로는“신설동에서 전차를 내려 호떡을 사먹으며 걸어 지금의 고려대 후문쯤의 고개에서 촬영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촬영 위치는 알 수 없다. 한편, 홍봉진(1903~1979)이라는 사람이 쓴 『양촌일지陽村日誌』에 아리랑고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동대문 밖 삼선평三仙坪을 지나 신흥사 옆으로‘아리랑고개’를 넘으면 옥수청류玉水淸流가 흐르는 시냇가에 기암奇岩과 청송靑松으로 울鬱을 삼아 깨끗이 지어 놓은 상춘원賞春園을 찾아오시면 미식주효美食酒肴로 값싸게 대접하여 드리겠다. 이는 1929년 홍봉진이 숭인면장을 지내고 요릿집‘상춘원’을 연 부호 김씨의 부탁을 받아 광고를 만들면서 고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당시 상춘원이 신흥사의 고갯길로 올라가 후미진 곳에 있어 찾기가 어렵자, 홍봉진은 고갯길 당집 앞 노송의 가지에‘아리랑고개’라고 쓴 간판을 매달고 광고문에 상춘원을‘신흥사 옆 아리랑고개’에 있다고 알렸다. 그런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영화 <아리랑>에 나오는 아리랑고개가 이곳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홍봉진은 영화와 관계없이 붙인 이름이라는 기록을 남겼으나, 상춘원의 선전 광고문을 걸었던 고개를 지금까지 아리랑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화 <아리랑>을 기념하기 위해 돈암동과 정릉 사이에 있는 아리랑고개에는 영화의 거리와 아리랑시네센터가 조성되었다.
  • 안암동은 영화 〈아리랑〉의 로케 장소였다. 당시 기와집 한 채와 초가집 십여 채가 있는 산 중 골짜기가 배경이 되었다. 성 밖이라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동대문까지는 전차를 타고 올 수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순전히 20리쯤 걸어야 촬영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1926년 4월 어느 날 첫 촬영이 있었을 때는 수백 명의 엑스트라와 스탭들이 동대문에 모여 안암동까지 긴 행진을 시작했다. 단, 예외는 있었다. 여주인공은 신일선은 감독의 특별한 배려로 인력거를 타고 안암동 촬영장까지 갔었다고 한다. 영화 속 아리랑고개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 지금의 안암동 어디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 다만 작은 마을 옆으로 난 나지막한 고갯길이 있는 곳 어디쯤 아니었을까?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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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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