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1954.10.01
작품 문학
1954년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1954년 10월 1일부터 1955년 6월 30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되었고, 민중서림에서 1979년에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이 작품은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는 '애인'이 천박한 현실 속에서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하는 작가의 바람이 담겨있다. 창경원에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채 헤어진 남녀가 10년이 지난 후 우연히 재회하지만, 수많은 인연으로 얽힌 관계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한 번뇌와 갈등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작품의 주된 공간적 배경은 안국동과 명륜동이지만, 작품 전개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 공간 중 성북구와 관련있는 곳이 다수 등장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성북동
  • 김내성_애인 상 표지
  • 김내성_애인 하 표지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김내성
  • 비고:
  • 유형: 작품 문학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1954.10.01
  • 비고: 1954.10.01~1955.06.30 265회 연재

근거자료 원문

  • · 김내성, 「애인」, 경향신문, 1955. 6. 15.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74쪽
  • 愛人 (250) 金來成 金榮注 畵 決鬪記(三) 외국 소설이나 영화같은데서는 결투의 장면을 읽기도 하고 보기도했지만 실제로 결투의 정경을본적은 허정욱 자신도 물론없었다. 그러나 결투의 정신만은 전적으로 찬성하고 있는허중령이었다. 사나이와 사나이의최후의 대결은 생명을내건 결투에 있을 수밖에 별다른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운도 소년 시절에는 그렇게생각하고있었다. 그러나 소년 시절을벗어나면서부터 결투의 무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결투로써 최후의 체면을 세울시대는 이미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각국이 결투를 하나의 범죄로서 규정한 것도 오로지 그때문이었다. 더구나 오늘 두 사람의 결투로써 오영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것은 확실히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기사도(騎士道)가 곧 정의를 의미했던 낡은 도덕일 따름이다. 그러나 지운은 그것을 승낙하였다. 결투로써 오영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고 지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으려는 비장한 생각에서였다. 두 사람을 실은 찦차는 안국동 네거리로 빠져 나왔다. “창경원으로 장소를 정하는 것이 어떻소?” 허정욱은 물었다. “아무런 뎨나 좋습니다.” 지운은 대답하였다. 차는 일로 창경원으로 달려 갔다. “외국의 낡은 풍속인 결투에대한 지식이 나에게는 없소. 입회인(立會人) 같은 것을 세운다지만……” “그때의 법률이 결투를 허용했었으니까 입회인을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날에는 살인방조죄에걸리지요. 그런 의미에서도 창경원은 적당한 장소가못될것입니다. 결투에 이겨봤댔자 살인범으로곧체포가 될테니까요.” “산으로 가요.” 그렇지요. 깊숙한산골짜기같은 데가 좋겠지요.“ 이리하여 차는 창경원 앞을 그대로 지나 동소문 고개를 넘었다. “성북동으로 들어 가!” 삼선교에서 차는 왼편으로 꺾어져 성북동막바지를 향하여 개천 가를 곧장 기어 올라 갔다. 올라 가는 동안 지운은 가만히 눈을 감고있었다. 영심의 소녀 시절의 해군복이 눈시울 속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오늘의 자기의 운명이 십년전 그때부터 이미 결정 되어 있었던 것만 같았다. 「愛人」의 후편을 써 놓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약간 한스럽기도 했지만 이처럼영심의 남편 되는 사람의 손에 결려서 쓰러지는편이 제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 보다는 다소 도의적인 죽음 같기도 해서 세속적인 부채를 갚는 것 같기도 했다. 서로가 죽을때는 한번 만나 보고 싶다는 영심의 최후의 한 마디가무척 마음에 알끈했으나그럴 겨를이 허용될 수 있는 허중령의 옆 얼굴이 못 되었다. 의분과 증오의 감정이 폭포수처럼쏟아져 흐를 것만 같은무서운 옆 얼굴이었다. 싸움 터에서의 전투 심리가 그대로 아로사겨져있는 결사적인 푸로필이었다. 진정으로 단념할수 없는 단념을 지운은 할 수 밖에 없었다. “스토ㅍ!” 이상더 올라갈수 없는 계곡 막바지에서 차는멎었다. “김군!” 허중령은 차안에 그대로 버티고 앉아서 호위병인 운전수를 엄숙한어조로 불렀다. “총을 이리 줘.” “네.” 왼편 허리에서 허중령의 권총을 호위병은내주었다. “자네것도 마저 이리줘.” “네.” 젊은 군인은 의아스런 표정으로 오른쪽 허리에서 또하나를 내주었다. “상관의 명령이다! 이제부터하는 내 명령에 절대복종을 맹새하라!” 조그만 반항이라도 있었다가는 권총뿌리로 내려 갈길것만 같은 무서운 표정이었다. “네, 복종 하겠읍 니다!” 호위병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군이 오늘 보고 듣고 한 사실을 당장에 잊어 버리라!” “네?……” “군이 오늘 보고 들은 사실은 영원한 비밀이다!” “네, 네―!” 운전대에 앉아 있는 그대로의 자세로 젊은 호위병은 차렷을 했다.
    김내성, 1955, 애인(愛人) (250), 4면
    1955.06.15
  • 어떤 일요일, 지운은 석란과 함께 정릉 계곡을 걸어 올라갔다. 구월 하순의 일이었다. 이날 석란은 선명한 회색 투피이스에 화장을 다소 짙으게 하고 나섰다. 까만 비로드 리봉은 석란의 유일한 취미였다. 그날도 석란은 리봉을 달고 왔다.
    김내성, 1979, 애인 상, 133쪽
    영주와 석란과 교제 중인 지운은 어느새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석란과 지운은 정릉 계곡으로 산책을 가는데, 거기서 둘은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이 장면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성북구 정릉 계곡이 공간적 배경이 되고 있다. 당시 정릉 계곡은 가족들의 유원지이자 청춘 남녀들이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곳이었다.
  •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창경원 출입을 월여전부터 단념하고 있던 영심이가 그날은 어쩐지 불쑥 금잉어가 보고 싶어서 몇시간 동안을 춘당지 연못가에서 보내고 창경원 문을 나서려는데 군인을 실은 지이프차 하나가 휙 지나가면서 라우드스피이카로 소리소리 쳤다. "병사들에게 고함! 대한민국 병사들은 계급여하를 막론하고 즉각 원대로 복귀하라!" 지이프차 뒤로 병사를 만재한 트럭도 미아리고개를 향하여 달렸다. 창경원에서 뛰어나온 몇 명의 병사가 달리는 트럭에 비호처럼 올라탔다. "만세! 만세!" 달리는 트럭 위에서 총검을쳐들고 군인들이 흥분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그 뒤를 장갑차가 달리고 야포와 기관총을 실은 육중한 차량이 달렸다.
    김내성, 1979, 애인 상, 219-220쪽
    허정욱과 유민호의 구혼을 거절하며 여전히 과거의 소년을 그리워하던 영심은 어느때처럼 창경원을 갔다가 나오는 도중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때 허정욱은 영심을 마주치고, 둘은 작별을 고하게 된다. 이 장면은 창경원을 막 나온 영심이 미아리고개로 향하는 병력, 군수 물자 수송행렬을 마주친 부분이다. 당시 한국군은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창동과 미아리고개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후방에서의 수송은 미아리고개를 넘어가야 했다. 이러한 장면은 6.25전쟁을 소재로 사용한 작품들에서 종종 이용되는 것이었다.
  • “산으로 가요.” 그렇지요. 깊숙한 산골짜기 같은 데가 좋겠지요.“ 이리하여 차는 창경원 앞을 그대로 지나 동소문 고개를 넘었다. “성북동으로 들어 가!” 삼선교에서 차는 왼편으로 꺾어져 성북동 막바지를 향하여 개천가를 곧장 기어 올라 갔다. (중략) “스톱!” 이상 더 올라갈수 없는 계곡 막바지에서 차는 멈추었다.
    김내성, 1979, 애인 하, 751-752쪽
    영심을 두고 결투를 벌이기로 한 지운과 정욱은 창경원으로 가다가 차를 돌려 성북천을 따라 성북동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정욱은 자신의 호위병에게 오늘의 일은 철저히 비밀에 부칠 것을 명령한다. 이 장면은 결투를 위해 성북동으로 향하는 지운과 정욱의 대화이다. 여기서 결투장으로 깊은 산골짜기가 언급되는데, 당시 창경원 근처 중 마땅한 곳은 성북동 골짜기였다. 결투의 내용과는 별개로, 1950년대만해도 성북동은 지금과 같은 고급주택이 들어서는 등의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저 깊은 산골짜기 중 하나였던 것으로 인식되었다.
  • 와들 와들 떨고 있는 허중령의 커다란 손이 독수리처럼 편지를 구겨쥐며, "스톱!" 하고 외쳤다. "차를 돌려라!" 미아리 고개 위에서의 일이었다. 차는 미아리 고개를 화살같이 되돌아 내려오고 있었다. 얼룩얼룩 눈이 녹다 남은 비탈길이었다.
    김내성, 1979, 애인 하, 727-728쪽
    지운과 영심의 밀회를 목격한 유민호는 곧바로 허정욱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받은 허정욱은 자신의 부대로 가는 도중 분노하여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온다. 이 장면은 분노한 허정욱이 차를 돌리라는 명령을 내린 후, 미아리 고개를 통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당시 미아리 고개는 서울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특히 이 장면에서는 ‘눈이 녹다 남은 비탈길‘이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는 미아리 고개길이 포장도로가 아니라 마치 산비탈길처럼 울퉁불퉁한 거친 길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 수첩을 도로 지운에게 내주고 허 정욱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지운도 내렸다. 운전수는 대신 차에 올랐다. 둘이는 묵묵히 눈이 쌓인 계곡을 끼고 올라갔다. 한참 걸어 올라가다가 앞장을 선 허중령이 왼쪽편 산비탈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눈길이 미끄러워 두사람은 연방 쓰러지면서 올라갔다. 소나무 가지를 붙잡고 올라갔다. (중략) 둘이가 한참 위로 올라가는데 비교적 평탄한 넓이를 가진 언덕 하나가 나타났다. 그 언덕으로 둘이는 미끄러지면서 올라갔다. 눈은 바람에 날아갔는지, 발목 밖에는 차지 않았다.
    김내성, 1979, 애인 하, 756-757쪽
    결투에 앞서 각자 남길 유서를 읽어본 지운과 정욱은 차에서 내려 성북동 깊숙한 골짜기로 들어간다. 마침내 약간의 공터를 찾은 둘은 결투의 조건을 정하고 결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결투 장소를 찾기 위해 성북동 북악산 계곡으로 들어가는 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성북동이 개발되기 전, 북악산 계곡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눈이 쌓인 북악산 계곡은 나무를 잡아야 간신히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험했으며, 중간중간 약간의 넓이를 가진 공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그지음, 지운은 개천을 끼고 삼선교 다릿목까지 터벅터벅 걸어나와서 전차에 올랐다. 혜화동을 거치고 명륜동을 지나서 창경원 문이 눈 앞을 스치고 흐를 무렵에야 자기가 지금 전차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의식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 지운에게는 자기가 아직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오직 그 한가지 의식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내성, 1979, 애인 하, 773쪽
    지운과의 결투를 중단한 허정욱은 곧바로 영심의 집으로 찾아가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부대로 떠난다. 한편 지운은 골짜기를 내려와 전차를 타고 전차가 가는대로 몸을 맡긴다. 이 장면은 지운이 성북동 골짜기에서 내려와 전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다. 현재 성북천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구 본원에서부터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까지 복개되어 소설 속 성북천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성북천을 가로지르는 삼선교에는 돈암동 종점까지 이어지는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이 전차는 돈암동에서부터 종로 시내로 이어져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대중교통이었다.
  • "곧장 올라갑니까?" 동소문 고개를 올라가면서 묻는 말이었다. "네, 그냥…" 삼선교를 지나 돈암동 종점까지 와서, "어디서 멈출까요?" 운전수는 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지운은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두 시 반을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차는 미아리고개를 넘어 곧장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지운도 말이 없고 영심도 말이 없다. 돈만 받으면 그만인 운전수도 이상 더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하얀 벌판에 희미한 석양이 하얗게 내려 비치고 있었다. 공동 묘지를 지나 미아리 동네 끝까지 나간 택시였다.
    김내성, 1979, 애인 하, 781-782쪽
    창경원에서 재회한 지운과 영심은 택시를 타고 무작정 길을 떠난다. 안국동과 명륜동을 통과한 택시는 동소문 고개를 올라 미아리 공동묘지까지 이른다. 이 장면에서는 정해진 행선지 없이 그냥 직진해 달라는 두 사람의 대답대로 직진한 택시가 지나고 있는 곳이 등장하고 있다. 우선 혜화동과 삼선교를 잇는 길은 동소문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일제시대에 동소문(혜화문)의 철거로 도로가 되면서 넓어졌다. 현재도 이 도로는 이용되고 있으며, 도로 좌측 언덕에 혜화문이 복원되어 있다. 한편 미아리 고개는 현재 넓게 포장되었지만, 과거에는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좁은 비탈길과 같았다. 이 길의 끝에는 미아리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미아리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철거되었다.

기술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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