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촌일지
1986
작품 문학
개인의 일기를 엮은 책으로, 1986년 일심사(一心舍)에서 유고를 엮어 출판하였다. 글쓴이가 세상을 떠난 해인 1979년에 작성된 자서가 수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70년대 급격한 산업화까지의 경험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다. 글쓴이는 중간에 일기를 분실하여 책의 전반부는 회상으로 서술하고 후반부는 실제 일기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정릉, 미아리, 성북동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다수 실려있다.
돈암동 성북동 정릉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陽村日誌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홍봉진
  • 비고:
  • 유형: 작품 문학

시기

근거자료 원문

  • 홍봉진(1903~1979)이라는 사람이 쓴 『양촌일지』에 아리랑고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동대문 밖 삼선평三仙坪을 지나 신흥사 옆으로 ‘아리랑고개’를 넘으면 옥수청류玉水淸流가 흐르는 시냇가에 기암奇岩과 청송靑松으로 울鬱을 삼아 깨끗이 지어 놓은 상춘원賞春園을 찾아오시면 미식주효美食酒肴로 값싸게 대접하여 드리겠다.
  • 당시 혜화동惠化洞은 송동松洞 앵두 나무로 유명有名하였고, 동소문東小門 앞에서 학교로 올라가는 길 양옆 시냇가에는 유서由緖 깊은 버드나무 가로수가 열列을 지어 봄이라도 되면 안개 낀 복사꽃, 앵두꽃이 누리를 단장하고 청청靑靑한 유색柳色이 선線을 그어 교외풍경郊外風景이 자못 평화平和로왔었다. 특히 나는 10년전年前 선린상업善隣商業학교를 다닐 무렵에 아버님이 잘 아시는 전前 양주군수陽州郡守 홍태윤씨洪泰潤氏 집을 따라가서 그 앵두밭 사이의 대궐 같은 집 사랑을 다 올라가 보고 그 풍신 좋던 주인主人의 칭찬도 받고 앵두 화채와 송편을 얻어 먹던 추억追憶이 솟아오르는 곳이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78쪽
    여기서 글쓴이가 통학하던 학교는 보성고등학교(普成高等學校)로 종로구 수송동에 있다가 1927년에 종로구 혜화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앞부분의 서술에 따르면 새 교사는 "혜화동 막바지의 성터 일대에 우거진 송림을 배경으로 한" 2층 벽돌 건물으로, 혜화동과 성북동 경계 쯤에 위치하였다. 원문에서 송동이라고 할 때 소나무 송(松)을 쓰고 있는데 나라이름 송(宋)을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 송동(宋洞)은 우암 송시열이 살던 집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송시열 집터는 종로구 명륜동1가 5-99번지이다. 여기서부터 동소문 옆 성북동까지 일대가 앵두나무로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앵두나무는 남아있지 않지만 성북동의 앵두마을이라는 마을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 정릉貞陵 손가장 자리라면 그때는 정능막바지다. 그 다음에 더 발전하여 가지고 지금은 거의 산山 밑까지 버스가 들어가게 되었다. 5, 6백년百年 된 정자나무가 뜰앞을 장식한 그 집은 정능에서는 그집 외에는 볼만한 집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명한 손가장의 주인主人 김기택씨金基宅氏네 집 가정교사가 되었다. 김씨金氏는 과거過去에 숭인면장崇仁面長을 지낸 분이라는데 산비탈 계변일대溪邊一帶의 수만평萬坪을 차지해 생활生活도 매우 넉넉한 편이었다. 金氏는 그 소생所生으로 윤석胤錫이라는 아들 하나와 귀득貴得이라는 딸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내가 맡은 아이는 아들이었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92쪽
    글쓴이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다니고 있는 학생 신분으로 지인을 통해 정릉 손가장에 살던 김기택의 집에 가정교사 자리를 얻게 되었다. 가정교사 하는 집 주변을 묘사한 부분에서 1929년 당시 손가장(孫家庄) 혹은 손가정(孫哥亭)의 모습과 어떤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 집 뒤 별당別堂에 뒤로는 송림松林, 앞으로는 화단, 관상목이 들어섰으며 잡인이 드나들지 않는 조용한 방을 차지하고 아들을 지도指導하라는 것이다. 그집 고모姑母님은 50 조금 넘은 분으로 품위品位있고 인자한 분이었다. 나의 말동무가 되는 분으로 나의 침식을 돌보아 주는 분이셨다. 무엇보다도 그집 음식이 서울 대가大家집에서 내려오는 전통적 고급高級 음식인데 생전 처음으로 먹어보는 것들이었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92-93쪽
    글쓴이가 경성제국대학 학생 신분으로 가정교사 일을 하러 가는 집을 묘사한 부분이다. 정릉 손가장에 살았던 김기택이라는 사람의 집이다. 20년대 후반 손가장에 있었던 가옥의 모습을 알 수 있다.
  • 하루는 김씨金氏가 날더러 말하기를 정릉貞陵이 지금은 산간山間 벽지僻地이지만 수석水石이 깨끗하고 삼각三角의 영봉靈峰을 배경背景으로 해서 멀지 않은 장래將來에는 좋은 주택지住宅地가 되어서 자기自己의 토지土地가 큰 물건이 될 터인데 이 일대一帶를 일반一般에게 널리 소개紹介하기 위하여 요리料理집을 시작始作하겠으며 그 집의 이름은 상춘원賞春園이라고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그 광고문廣告文을 지어 달라는 것이다. 나는 우선 그 위치位置를 안내案內하기 위하여 동대문東大門 밖 삼선평三仙坪을 지나 신흥사新興寺 옆으로 ‘아리랑 고개’를 넘으면 옥수청류玉水淸流가 흐르는 시냇가에 기암奇岩과 창송蒼松으로 울을 삼아 깨끗이 지어 놓은 상춘원賞春園을 찾아 오시면 미주가효美酒佳肴로 값싸게 대접하여 드리겠다는 뜻을 써 주었다. (중략) 1929년에 내가 가정家庭교사 노릇을 잘 하기 위하여 멋대로 명명命名한 이름이 요사이 와서는 누구 한 사람 의심疑心하는 사람이 없이 모두들 '아리랑 고개', '아리랑 고개'하고 넘어 다닌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93쪽
    돈암동에서 정릉으로 올라가는 고개가 지금 ‘아리랑고개‘라고 불리고 있는데 그 이름의 기원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김씨‘는 김기택이라는 사람으로 글쓴이가 가정교사를 하는 집의 남자어른이고 정릉 손가장에 살고 있다. 그가 상춘원이라는 요리집을 열게 되면서 글쓴이에게 광고 문구를 부탁했고 이때 글쓴이는 임의로 ‘아리랑고개‘라는 이름을 지어 썼다. 식당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세운 ‘아리랑고개‘라는 푯말로 인해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고 지금은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 그 전에는 정릉고개라고 불렸다고 한다.
  • 내가 살고 있는 미아리 작은 무너미에서 시내로 들어오려면 미아리고개부터 길 양편으로 몇 백인지 몇 천千인지 알 수 없는 많은 노점露店이 깔리어 돈암동으로, 삼선교로, 혜화동으로 이어지는데 생전 보지도 못하던 광목, 지까다비, 바가지 모자, 빨래 비누, 설탕, 수건, 건빵 등 여러 가지 전시 통제품이 온통 터져나왔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166쪽
    글쓴이는 계동에서 살다가 미아리고개 근처 작은 무너미로 이사와 잠시 살게 된다. 나중에는 성북동에 집을 짓고 살게 된다. 무너미는 ‘물이 넘는다‘는 뜻으로 한자어로 하면 수유(水踰)이다. 현재 강북구 수유동이다. 무너미는 웃무너미와 아랫무너미(작은 무너미)로 나뉜다. 미아리고개에서 돈암동, 삼선교까지 이어지는 길에서 노점상들이 성황리에 영업하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지카다비(地下足袋ちかたび)는 일본어로 노동자용 작업화를 가리킨다. 엄지발가락이 나뉜 일본식 버선 밑바닥에 고무를 붙여 신발처럼 밖에서 신을 수 있게 한 것이다.
  • 보성 전문 학교는 동대문東大門에서 청량리淸凉里로 나가는 중간 언덕 위에 석조石造 2층으로 중후重厚하고 위엄있게 남향南向으로 서있는 두 채의 집으로 되어있었다. 건평建坪이 모두 합쳐 천평千坪은 될 것 같았는데, 무엇보다도 사치스러운 독방 교수실敎授室이 있어서 좋았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167쪽
    1945년 광복을 맞이한 후에 글쓴이는 안암동의 보성전문학교에 교수로 취직하게 된다. 보성전문학교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 글쓴이가 적은 바와 같이 당시에는 두 개의 석조건물만 있었는데, 현재 고려대학교 본관과 대학원도서관(구 중앙도서관) 건물이다. 교수 연구실을 ‘사치스러운 독방 교수실‘로 묘사한 부분이 흥미롭다.
  • 7월月에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마지막 졸업식卒業式을 끝내고 고려대학高麗大學으로 간판看板을 바꾸었다. 그래서 종래 전문專門학교의 3년생年生이라면 대학大學 2년年으로 1년年 낮추어서 편입編入시켰다. 고려대학高麗大學에는 법과法科, 경제과經濟科, 문과文科의 세 과를 두고 각기各其 예과豫科 1년年부터 신입생新入生을 뽑았는데 나는 그 신설新設하는 예과반豫科班 전반全班의 英語料를 담당擔當하였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181쪽
    글쓴이는 1945년 광복 이후에 보성전문학교에 교수로 취직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에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종합대학인 고려대학교가 창립된다. 보성전문학교에 소속된 기존 학생들이 고려대학교로 학적이 옮겨지는 과정과 당시 학과 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 나는 물론 그날부터 장사행각行脚을 그만 두고 성북동城北洞 미륵당으로 갈려들어가는 개천 앞 길가 3간間 고실古室 속에 들어 앉았었다. 마침 오촌五寸 조카 정화晶和(약 35세)가 찾아와서 나하고 같이 숨어 있었다. 3, 4일日 지나더니 패잔병敗殘兵들이 각처各處에 불을 질렀다. 성북동城北洞서 성 안을 바라보려면 남南쪽 일대一帶가 화광火光이 충천沖天하여서 서울 장안長安이 전부 다 타오르는 것 같았는데 특特히 종로 근방이 더 심하였다. 틀림 없이 관철동貫鐵洞 집도 다 타는 모양이다. 그 순간 나는 섭섭하다는 것보다도 여러 가지가 끝장이 나는 게 반가왔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213-214쪽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글쓴이는 개성에서 쌀을 사 서울로 가져와 파는 쌀장사를 했었다. 개성으로 다니기 어려워지자 수원으로 보리 장사도 다녔었다. 이 부분은 9월 28일 국군의 서울 수복 직전의 이야기이다. 미륵당은 현재 동방대학원대학교 자리에 위치했었던 작은 절이다. 현재 성북로가 당시 성북천이 흘렀던 물길이었고 성북로에서 동방대학원대학교로 들어가는 두 길 중 하나인 성북로26길도 물길이었다. 글쓴이가 숨어 있었다는 "성북동 미륵당으로 갈려들어가는 개천 앞 길가 3간 고실"의 위치는 성북로에서 성북로26길로 들어가 어딘가 개천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북동에서 성 안, 즉 종로 방향을 내려다본 풍경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 20일日이 지나면서부터는 문안에서 敗退하는 적병들이 수없이 성북동城北洞 골짜기를 넘어 우리가 숨어 있는 집 앞뒤를 지나 정능, 미아리로 넘어갔는데, 무섭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가 은신해 있는 방에서 바라보이는 솔밭 중간에는 코스모스가 쫙 깔리어 어찌도 아름답던지, 적병들도 달아나며 아름답다고 탄성을 질렀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214쪽
    1950년 9월 20일과 28일 사이 국군이 서울을 되찾기 직전, 인민군이 시내 중심인 종로 쪽에서 외곽인 미아리 방향으로 후퇴하는 장면을 목격한 기억이다. 글쓴이는 당시에 "성북동 미륵당으로 갈려들어가는 개천 앞 길가 3간 고실" 즉 지금의 성북로26길 동방대학원대학교 가는 길 어딘가 숨어지내고 있었다. 당시 그 근방에는 소나무와 코스모스가 무리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하루는 철화哲和가 삼선교三仙橋와 혜화동 쪽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UN군이 시내에 들어왔다고 큰소리로 떠들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얼른 철화哲和를 끌고 들어왔다. 성북동城北洞 골짜기에는 아직도 패잔병이 득실거렸고, 따라서 위험하기 그지 없는 짓이었다. 쥐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으라고 타일렀다. 패잔병이 삼삼오오 지나가는 길목에는 바께쓰나 물동이에 시원한 식수를 가득 부어 놓고 마지막 친절을 가정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214쪽
    1950년 북의 남침 후 삼 개월 정도 지난 9월에 국군이 곧 서울을 탈환하려는 시점이다. 당시 미아리고개가 인민군의 침입로이자 퇴로이기도 하였다. 패잔병들이 미아리고개로 가는 길에 위치한 성북동의 깊은 골짝은 그들이 은신하기에 적당한 장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 성북동城北洞 115번지 집은 1958년年부터 살기 시작하여 철화哲和, 동화東和가 살림 나가고 원탁元卓이, 원평元平이가 미국으로 건너가고, 원경元慶이 원영元英이가 시집가고 현재(1977년年) 두 늙은이가 남아 있다. 이 터는 당초 280평坪이었는데 일제시기日帝時期에 처남 정완규씨鄭完奎氏의 소유所有로 솔밭 아래 천변川邊에 가로놓인 삼밭이었다. 1956년에 대금代金을 미리 완불完拂하고 안방, 건너방, 아랫방 등 23평坪으로 신축新築하였다. 이 집의 특색特色은 약간 남南쪽으로 벌어진 동향東向에 솔밭 약 400평坪이 있었다. 이 솔밭의 북北, 서단西端에는 아름드리 왕王소나무가 각각 한 주씩 지휘자指揮者격으로 서 있고, 그 두 소나무의 아래와 옆으로 약백주約百株의 몇 길씩 되는 소나무가 울창한 송전松田을 만들고 있었다. 언덕의 높이는 약約 50척尺.
    홍봉진, 1986, 양촌일지, 296쪽
    성북동 115번지의 현 위치는 간송미술관에서 개천(지금은 성북로) 맞은편 일대로 추정된다. 잘 알려진 쌍다리돼지불백이라는 기사식당 근방이다. 글쓴이는 1958년부터 1978년까지 이 집에서 거주하였다. 지금은 건물이 남아있지 않을 뿐더러 번지가 분할되어 건물 부지의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렵다. 주거하던 가옥과 소나무가 울창했던 주변의 모습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당시 풍경을 눈에 그리듯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 이전 일제강점기 때 삼밭이었던 모습도 언급하고 있어 성북동 쌍다리 일대의 변화상을 짐작하게 한다.
  • 내 방 앞에는 햇볓이 비낀 발코니를 건너서 전형필씨네 정원, 삼선三仙학교, 그 뒤에는 북악 스카이웨이로 돌아가는 정능 뒷산인데 평균平均 1분分에 한두 대씩 자동차가 지나가고 있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300쪽
    현재 쌍다리 근처 글쓴이가 살던 집터에서 성북로 건너편에 간송 전형필이 설립한 간송미술관과 삼산학교 혹은 삼산의숙을 전신으로 하는 성북초등학교가 있다. 삼선학교는 삼산학교를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수집가 간송 전형필은 성북동에 일정 구간의 토지를 구입해 북단장을 개설하고(1934년) 그 안에 문화재를 보존하는 공간인 보화각을 세운다(1938년). 보화각이 간송미술관의 전신이다(1966년에 개칭). 북단장 자리에는 프랑스 출신의 석유상(장작상)인 플레장이 거주하였던 양옥이 있었다. 전형필은 그 양옥 옆에 작은 한식 기와집을 짓고 가족들과 이주해와 살았는데 배오개에 살던 집에 수시로 내왕했다고 한다(간송미술재단 홈페이지 참고). 삼산의숙은 1908년 지역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되었다. 삼산의숙은 이후 1942년에 공립 삼산국민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46년 성북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학생수가 늘고, 규모가 커지며 학교 부지가 필요했고, 이 얘기를 들은 간송 전형필은 북단장 땅 일부를 기증하였다(『성북동 -잊혀져가는 우리동네 옛이야기를 찾아서3』 참고).
  • 115번지 뒷산山 송림이 한 3百 평 되는데 이것이 국유지國有地다. 58년年에 성북동城北洞으로 들어온 이후에 10년年을 두고 요소요소要所要所에 정자집을 지어 놓고 점유占有해 왔다. 그런데 솔밭 북北쪽에 최광식崔光植이라는 사람의 정원을 만들면서 솔밭머리의 왕송王松을 우선 자기집 마당에 집어넣고 계속해서 송림松林을 차지하려고 우리와 충돌을 시도하는 것이다. 무조건 경계선을 뚫고 자기自己네도 우리와 같이 솔밭을 점령하겠다는 것이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334쪽
    글쓴이는 1958년부터 1978년까지 성북동 115번지 집에서 살았다. 현재 쌍다리불백 식당 뒤편이다. 당시에 꽤 넓은 소나무 숲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7월月 12일日 아침은 할머니의 안내案內로 성북동城北洞 뒷산에 올라가 보았다. 돈 많은 사람들이 돈 처분하기 곤란해서 순전히 사치로 어느 사이에 이 구석 저 구석에 집들을 3, 40채 지어 놓은 것 같다(대한교육보험삼청주택大韓敎育保險三淸住宅단지).
    홍봉진, 1986, 양촌일지, 410쪽
    1976년에 쓴 일기이다. 여기서 뒷산은 성북동 가장 안쪽 우리옛돌박물관이나 일본대사관저 방향으로 보인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북동에 고급주택단지가 형성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 10월月 23일日 성북동 성곽의 복원 공사가 거의 끝나려고 한다. 길도 거의 윤곽이 나타나서 직선 30분分이면 고개까지 닿는다. 고개에서 삼청동三淸洞까지 내려오려면 한 20분分 길이 아카시아와 싸리의 단풍길이다. 때는 6시반時半. 캄캄한 새벽길이 차차 밝아지면서 엷은 안개에 덮힌 길 아래 밀림의 연속이 가늘고 연한 아카시아의 단풍으로 물들어 있어 나무나 땅이 모두가 누런 금빛이다.
    홍봉진, 1986, 양촌일지, 433쪽
    1977년에 쓴 일기이다. 1972년부터 서울시에서 성곽 보수와 개축계획을 세워 성북지구는 1976년 복원 공사를 하였다. 성곽 주변 건물이 일부 헐렸고, 주변에 녹지가 조성되었다. 글쓴이의 이후 날짜의 일기에 따르면 이 공사는 1978년 4월에 완료된다. 당시 성북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길의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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