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북저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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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문학
조선 후기 관료 체제공(蔡濟恭)[1720-1799]이 지은 작품이다. 채제공은 물러난 지 4년째 되는 1784년(정조 8) 봄, 목만중과 함께 도성 안팎의 경치 좋은 곳에 가서 놀았던 일들을 차곡차곡 글로 써서 보관해 두었다. 「유북저동기(遊北渚洞記)」는 그해 봄에 쓴 네편의 기문들 중 대미를 장식하는 글로, 18세기 후반 성북동 봄날의 자취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체제공이나 김조순 같은 당시 전현직 고위 관료들은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성북둔의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는 소소한 권세를 부리기도 했다. 당대 성북동의 봄 풍경과 사대부들의 유람을 실감나게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성북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遊北渚洞記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채제공
  • 비고:
  • 유형: 작품 문학

시기

근거자료 원문

  • 遊李氏園未數日。餘窩睦幼選。賞花北渚洞歸。直抵余。津津說北渚勝不離口。且曰。度了明日花且凋。公若有意乎。雖日日往。願從之。人或謂之狂。當不恤也。余挽以宿。遲明傡馬出。李學士公會,季受兄弟及敍恭,弘選,弘遠輩從。出惠化門。循北城以折未數里。洞呀然以開。卽所謂北渚也。纔入洞。有壇面南四出陛。繚以短墻。其門彤。四之。每歲春三月祭先蚕云。行可百許步。居人橋其川。橋下衆水所會。水汹汹有聲。橋之南有谷。不知淺深。桃花團作錦障。兩厓通紅。心以爲必有異也。然姑捨之。取直路行無幾。又度橋抵御營屯。庭宇頗寬。屯之外小塘甃以石。制雖略繁。花倒水其影不定。稍迤巖壁窿然。如屛如障。巖之下莎與沙半之。意行意坐俯視之。村家點點分麓。大抵以桃花爲藩籬。隱約露出者。或牕之半。或簷之角也。都人士自達官。至閭巷民庶。遊賞如不及。車馬殷殷轟轟。歌呼迭作。間以笙簫。國家百年昇平之象。盡在是矣。余靜者。不耐閙熱。與諸君還取來路。尋向所稱橋南谷者。谷窈以容。水益淸花益盛。僊僊然兩脚輕擧。不知衰且病也。屢度溪危。及城根而止。有茅茨四五間。蕭灑可愛。主人方釀酒。香聞于外。公會買數盞飮。亟稱曰美哉。已而。餠飯自城中至。鋪席崖松下列坐以食。食訖。日已晡矣。送兒輩還。余與三子者。各賦詩一篇。待山氣向曛。復還倉屯遊人歸。獨素月在空。坐池上。煕煕然忘寢。月以色花以香。目之所寓。鼻之所觸。未知其孰多孰少也。公會興甚。典其袍買酒以飮。又各賦詩一篇。時夜可三四皷。相與歸倉舍以宿。枕席如在衆香國矣。余卧念玆洞。非今有也。我興。非昔無也。以我而尋玆洞。不過費徒御半餉之勞而曾不能一至者。以玆洞之無蟠木之容也。今乃始至焉。徘徊歎賞。有若得見其不可見者然。何其晩也。深區奧壑。懷奇抱勝。有十倍百倍於玆者何可勝道。而若不見知於人。則荒塗古今。埋沒以終焉耳。嗚呼。推是以反。奚獨山與水爲然。旣以是語餘窩。朝起感慨以書。 - 채제공(1720~1799), 『번암집』 권35, 記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82쪽
  • 이씨의 정원에서 놀다온 지 며칠 못되어 여와 목유선(유선은 목만중의 자)이 북저동 꽃구경에서 돌아와 곧바로 나에게 와서는 북저동의 멋진 경치에 관해 진진하게 풀어 그 이야기가 입에 떠나지 않았다. “내일을 보내면 꽃 또한 시들 것이오. 공께서 만약 북저동에 갈 뜻이 있다면 비록 날마다 간다고 할지라도 공을 따르겠소. 남들은 혹 미쳤다고 하면서 불쌍히 생각지도 않으리다.”나는 그를 잡아끌어 하룻밤 내 집에 묵게 하고는 이튿날 날이 밝아올 즈음 나란히 말을 타고 집을 나섰다. 학사 이공회 · 계수(이정운 · 이익운의 자)형제와 서공, 홍선(모두 채제공의 인척), 홍원(채제공의 아들)이 따랐다. 혜화문을 나가 북성을 돌아 꺾으니 몇 리 못가서 골짜기가 입을 벌리듯 열려있으니 이른바 ‘북저’라는 곳이다. 비로소 골짜기 안으로 들어서니 제단이 하나 있는데 남쪽을 바라보고 사면에 계단을 두었으며 담장을 낮게 둘렀고 홍살문을 사면에 세웠다. 해마다 여기서 춘삼월에 선잠에게 제사 지낸다고 한다. 백보쯤 더 가니 마을 사람들이 냇물 위로 다리를 놓고 있었다. 다리 아래에는 여러 물길이 모이고 있어서 물소리가 흉흉했다. 다리 남쪽으로 우묵한 곳이 있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복사꽃 무더기가 비단으로 장막을 친 듯 물가 이편과 저편이 온통 붉었다. 마음속으로 필시 기이하다 여겼으나 짐짓 그런 생각조차 놓아버린 채 반듯한 길을 취하여 걸어가니 얼마 안 가서 또, 다리를 건너니 어영둔(성북둔)이 막아섰다. 뜰과 건물이 제법 넉넉했다. 둔의 밖에 있는 작은 연못은 돌담을 둘렀는데 지음새가 비록 엉성하고 번잡했으나 꽃이 물에 거꾸러져 꽃 그림자가 아물거리고 줄기가 구부러져 암벽과 맞닿아 궁륭 모양을 하고 있어 병풍이나 장막 같았다. 바위 밑을 보니 베짱이 반 모래 반이었다. 혹 가다가 혹 앉다가 하면서 내려다보니 촌가가 점점이 산기슭에 흩어져 있는데 대체로 복사꽃으로 울타리를 삼았다. 창호의 일부나 처마의 모서리가 언뜻언뜻 울타리 밖으로 드러나 보였다. 도성의 인사들은 달관에서부터 여항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놀고 구경함을 시간이 모자란 듯이 열중하였다. 수레와 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노래 소리 번갈아 일어나며 사이사이 생황과 퉁소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국가 백년 승평의 모습이 다 여기에 있음이라. 나는 조용한 사람이라 열 내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참지 못하므로 제군들과 함께 왔던 길을 도로 취하여 교남골이라 하는 곳을 찾아갔다. 그윽하고 조용한 골에 물은 더욱 맑고 꽃은 더욱 번성하여 두 다리가 가볍게 들려 춤추는 듯하므로 쇠하고 또 병듦을 몰랐다. 여러 번 시내를 위태롭게 건너서 성뿌리에 미쳐 멈추어 서니 그곳에 너덧 칸 규모의 띠집이 있었다. 쓸쓸하면서도 단정한 분위기의 집이었다. 마침 집주인이 막 술을 빚어 그 향기가 바깥으로 퍼져 나왔다. 공회가 몇 잔을 사서 마시고 곧바로 칭찬하며 이르되 “술맛 참 좋다”고 하였다. 얼마 뒤 성중에서 가져온 떡과 밥이 도착하였으므로 절벽에 자라는 소나무 아래 부들자리를 펴고 나란히 앉아 먹었다. 다 먹고 난 뒤에 해를 보니까 신시쯤(오후 3시~5시) 되었다. 음식을 가져온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나와 더불어 세 사람이 각각 시 한 편씩을 지었다. 싸늘한 산기운을 머금고 석양을 마주하면서 다시 창둔(성북둔)으로 돌아오니 낮에 놀던 사람들은 돌아가고 흰 달만이 텅 빈 하늘에 홀로 떠 있었다. 연못 위에 호젓하게 앉아 있노라니 잠자는 것도 잊었다. 달은 색이고 꽃은 향일뿐이어서 눈으로 보고 코로 맡아도 그중 무엇이 많고 적은지 알지 못했다. 공회는 매우 흥이 나서 제 도포까지 전당 잡혀서 술을 사 마셨다. 재차 시 한 편씩을 짓고 나니 서너 번은 북이 울렸을 때가 되었으므로 서로 어울려 창사(성북둔)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잠자리가 향기의 나라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누워 이 북저동을 생각하니 이 동네는 (내가 누워 있는) 지금이 아니더라도 있는 것이지만, 또 내일 내가 일어나서 생각해보면 (내가 와서 놀았던) 어제가 아니었으면 (내게)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북저동에 찾아올라치면 불과 반 식경의 말 타는 노력만 들이면 되는 것인데 한 번도 이르지 못했음은 북저동에 장대하고 기괴한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르러 여기저기 배회하며 기쁘게 감상하기를,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함이 있음은 어찌 뒤늦게 왔다는 아쉬움 때문이랴. 깊숙이 들어간 구역에 깊은 골짜기에 기이한 절승을 품은 경치가 이보다 열배 백배 좋은 곳이 있음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냐마는 만약 그곳이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면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황량한 길로 남아 언제까지나 묻혀 있을 것이다. 오호라! 이를 미루어 돌아보건대 어찌 유독 산과 물만 그러하겠는가? (가까운 곳의 인재가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말―역자) 간밤에 이를 여와(목만중)에게 말하고 아침에 일어나니 문득 감개가 밀려와 붓을 드노라. - 채제공(1720~1799) , 번암집 권35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45
  • 북둔에 놀러온 사람들은 어떻게 놀았을까? 1784년(정조 8) 봄,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지은 「유북저동기遊北渚洞記」에 당시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혹 가다가 혹 앉다가 하면서 내려다보니 촌가가 점점이 산기슭에 흩어져 있는데 대체로 복사꽃으로 울타리를 삼았다. 창호의 일부나 처마의 모서리가 언뜻언뜻 울타리 밖으로 드러나 보였다. 도성의 인사들은 달관에서부터 여항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놀고 구경함을 시간이모자란 듯이 열중하였다. 수레와 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노래 소리 번갈아 일어나며 사이사이 생황과 퉁소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국가 백년 승평의 모습이 다 여기에 있음이라. ― 『번암집』 제35권 도성의 양반들뿐 아니라 여항의 서민들까지 와서 같은 공간에서 놀고 갔다는 점이 흥미롭다. 대체로 이들은 아침을 먹고 나와 정오쯤 성북둔에 도착했으며 적당한 곳에 술상을 차려놓고 시를 지어 주고받거나 노래를 듣고 부르며 즐기다가 해질녘에야 서둘러 돌아갔을 것이다. 혹 채제공이나 김조순 같은 전현직 고위 관료들이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성북둔의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는 소소한 권세를 부리기도 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54-56쪽
  • 채제공은 물러난 지 4년째 되는 1784년(정조 8) 봄, 목만중과 함께 도성 안팎의 경치 좋은 곳에 가서 놀았던 일들을 차곡차곡 글로 써서 보관해 두었다. 「유북저동기遊北渚洞記」는 그해 봄에 쓴 네편의 기문들 중 대미를 장식하는 글이다. 붓이 차분히 주군의 자취를 따라가며 적은 듯한 그의 기문을 읽노라면 18세기 후반 성북동의 어느 봄날 풍경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온다. 아래는 필자가 그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읽기 쉽게 6개의 장면으로 나누었다. #1. 출발 이씨의 정원에서 놀다온 지 며칠 못되어 여와 목유선(유선은 목만중의 자)이 북저동 꽃구경에서 돌아와 곧바로 나에게 와서는 북저동의 멋진 경치에 관해 진진하게 풀어 그 이야기가 입에 떠나지 않았다. “내일을 보내면 꽃 또한 시들 것이오. 공께서 만약 북저동에 갈 뜻이 있다면 비록 날마다 간다고 할지라도 공을 따르겠소. 남들은 혹 미쳤다고 하면서 불쌍히 생각지도 않으리다.” 나는 그를 잡아끌어 하룻밤 내 집에 묵게 하고는 이튿날 날이 밝아올 즈음 나란히 말을 타고 집을 나섰다. 학사 이공회 · 계수(이정운 · 이익운의 자)형제와 서공, 홍선(모두 채제공의 인척), 홍원(채제공의 아들)이 따랐다. 遊李氏園未數日 餘窩 睦幼選 賞花北渚洞歸 直抵余 津津說北渚勝不離口 且曰 度了明日花且凋 公若有意乎 雖日日往 願從之 人或謂之狂 當不恤也 余挽以宿 遲明傡馬出 李學士公會季受兄弟及敍恭弘選弘遠輩從 #2. 혜화문을 나와 선잠단 앞까지 혜화문을 나가 북성을 돌아 꺾으니 몇 리 못가서 골짜기가 입을 벌리듯 열려있으니 이른바 ‘북저’라는 곳이다. 비로소 골짜기 안으로 들어서니 제단이 하나 있는데 남쪽을 바라보고 사면에 계단을 두었으며 담장을 낮게 둘렀고 홍살문을 사면에 세웠다. 해마다 여기서 춘삼월에 선잠에게 제사 지낸다고 한다. 백보 쯤 더 가니 마을 사람들이 냇물 위로 다리를 놓고 있었다. 다리 아래에는 여러 물길이 모이고 있어서 물소리가 흉흉했다. 다리 남쪽으로 우묵한 곳이 있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복사꽃 무더기가 비단으로 장막을 친 듯 물가이편과 저편이 온통 붉었다. 마음속으로 필시 이상한 것이 있으리라 여겼으나 짐짓 그런 생각조차 놓아버린 채 반듯한 길을 취하여 걸어가니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出惠化門 循北城以折未數里 洞呀然以開 卽所謂北渚也 纔入洞 有壇面南四出陛 繚以短墻 其門彤 四之 每歲春三月祭先蚕云 行可百許步 居人橋其川 橋下衆水所會 水汹汹有聲 橋之南有谷 不知淺深 桃花團作錦障 兩厓通紅 心以爲必有異也 然姑捨之 取直路行無幾 #3. 북둔도화 또 다리를 건너니 어영둔(성북둔)이 막아섰다. 뜰과 건물이 제법 넉넉했다. 둔의 밖에 있는 작은 연못은 돌담을 둘렀는데 지음새가 비록 엉성하고 번잡했으나 꽃이 물에 거꾸러져 꽃 그림자가 아물거리고 줄기가 구부러져 암벽과 맞닿아 궁륭 모양을 하고 있어 병풍이나 장막 같았다. 바위 밑을 보니 베짱이 반 모래 반이었다. 혹 가다가 혹 앉다가 하면서 내려다보니 촌가가 점점이 산기슭에 흩어져 있는데 대체로 복사꽃으로 울타리를 삼았다. 창호의 일부나 처마의 모서리가 언뜻언뜻 울타리 밖으로 드러나 보였다. 도성의 인사들은 달관에서부터 여항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놀고 구경함을 시간이 모자란 듯이 열중하였다. 수레와 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노래 소리 번갈아 일어나며 사이사이 생황과 퉁소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국가 백년 승평의 모습이 다 여기에 있음이라. 又度橋抵御營屯 庭宇頗寬 屯之外小塘甃以 制雖略繁 花倒水 其影不定 稍迤巖壁窿然 如屛如障 巖之下莎與沙半之 意行意坐俯視之 村家點點分麓 大抵以桃花爲藩籬 隱約露出者 或牕之半 或簷之角也 都人士自達官 至閭巷民庶 遊賞如不及 車馬殷殷轟轟 歌呼迭作 間以笙簫 國家百年昇平之象 盡在是矣 #4. 교남골 나는 조용한 사람이라 열 내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참지 못하므로 제군들과 함께 왔던 길을 도로 취하여 교남골이라 하는 곳을 찾아갔다. 그윽하고 조용한 골에 물은 더욱 맑고 꽃은 더욱 번성하여 두 다리가 가볍게 들려 춤추는 듯하므로 쇠하고 또 병듦을 몰랐다. 여러 번 시내를 위태롭게 건너서 성뿌리에 미쳐 멈추어 서니 그곳에 너덧 칸 규모의 띠집이 있었다. 쓸쓸하면서도 단정한 분위기의 집이었다. 마침 집주인이 막 술을 빚어 그 향기가 바깥으로 퍼져 나왔다. 공회가 몇 잔을 사서 마시고 곧바로 칭찬하며 이르되 “술맛 참 좋다”고 하였다. 얼마 뒤 성중에서 가져온 떡과 밥이 도착하였으므로 절벽에 자라는 소나무 아래 부들자리를 펴고 나란히 앉아 먹었다. 다 먹고 난 뒤에 해를 보니까 신시쯤(오후 3시~5시) 되었다. 余靜者 不耐閙熱 與諸君還取來路 尋向所稱橋南谷者 谷窈以容水益淸花益盛 僊僊然兩脚輕擧 不知衰且病也 屢度溪危 及城根而止 有茅茨四五間 蕭灑可愛 主人方釀酒 香聞于外 公會買數盞飮 亟稱曰 美哉 已而 餠飯自城中至 鋪席崖松下列坐以食 食訖 日已晡矣 #5. 북둔 연못에 비치는 달빛 음식을 가져온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나와 더불어 세 사람이 각각 시 한 편 씩을 지었다. 싸늘한 산기운을 머금고 석양을 마주하면서 다시 창둔(성북둔)으로 돌아오니 낮에 놀던 사람들은 돌아가고 흰 달만이 텅 빈 하늘에 홀로 떠 있었다. 연못 위에 호젓하게 앉아 있노라니 잠자는 것도 잊었다. 달은 색이고 꽃은 향일뿐이어서 눈으로 보고 코로 맡아도 그중 무엇이 많고 적은지 알지 못했다. 공회는 매우 흥이 나서 제 도포까지 전당 잡혀서 술을 사 마셨다. 재차 시 한 편 씩을 짓고나니 서너 번은 북이 울렸을 때가 되었으므로 서로 어울려 창사(성북둔)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잠자리가 향기의 나라에 있는 것만 같았다. 送兒輩還 余與三子者 各賦詩一篇 待山氣向曛 復還倉屯遊人歸 獨素月在空 坐池上 煕煕然忘寢 月以色花以香 目之所寓 鼻之所觸 未知其孰多孰少也 公會興甚 典其袍買酒以飮 又各賦詩一篇 時夜可. 三四皷 相與歸倉舍以宿 枕席如在衆香國矣 #6. 감회 내가 누워 이 북저동을 생각함은 지금 북저동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일어나 북저동을 잊어버림은 지난날 북저동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북저동에 찾아올라치면 불과 반 식경의 말 타는 노력만 들이면 되는 것인데 한 번도 이르지 못했음은 북저동에 장대하고 기괴한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막 처음 북저동에 이르러 여기저기 배회하며 기쁘게 감상하기를,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함이 있음은 어찌 뒤늦게 왔다는 아쉬움 때문이겠는가? 깊숙이 들어간 구역에 깊은 골짜기가 기이한 절승을 품은 경치가 이보다 열배 백배 좋은 곳이 있음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냐마는 만약 그것이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면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황량한 길로남아 언제까지나 묻혀 있을 것이다. 오호라! 이를 미루어 돌아보건대 어찌 유독 그러하겠는가?(가까운 곳의 인재가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말―역자) 간밤에 이를 여와( 목만중)에게 말하고 아침에 일어나니 문득 감개가 밀려와 붓을 드노라. 余卧念玆洞 非今有也 我興 非昔無也 以我而尋玆洞 不過費徒 御半餉之勞而曾不能一至者 以玆洞之無蟠木之容也 今乃始至焉 徘徊 歎賞 有若得見其不可見者然 何其晩也 深區奧壑 懷奇抱勝 有十倍百 倍於玆者何可勝道 而若不見知於人 則荒塗古今 埋沒以終焉耳 嗚呼 推是以反 奚獨山與水爲然 旣以是語餘窩 朝起感慨以書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60-62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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