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조네 사람들
1995.04.01
작품 문학
『소설과사상』에 연재했던 연작 장편을 묶어 1995년 4월 고려원에서 펴낸 작품으로, 미아리 산동네에 아홉 개의 방이 길게 늘어선 장석조씨네 집에 사는 아홉 가구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소진은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미아리 산동네로 이사하였다. 그는 '장석조'의 집에서 아홉 가구가 함께 살았는데 이 소설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소설 속에는 전쟁통에 북에 가족을 두고 내려온 공사판 십장 오영감, 똥지게꾼 광수애비, 성냥공장에 다니는 딸과 그 딸에게 얹혀사는 폐병쟁이 진씨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장석조네 사람들』은 70년대 서울 변두리 동네의 풍경과 근근히 하루를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길음동
  • 김소진_장석조네 사람들 표지
  • 길음동 7단지 아파트 상가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김소진
  • 비고:
  • 유형: 작품 문학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1995.04.01

근거자료 원문

  • 김소진의 장편소설 『장석조네 사람들』은 미아리고개 넘어 길음동 돌산 밑 판자촌을 배경으로 하는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소설 속에 나타나는 길음동 판자촌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한 지붕 아래 아홉 개의 방이 한 일(一)자로 늘어서 있어 동네 사람들이 기찻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장석조씨네 집터는 옆의 행길보다 석 자 정도는 높게 다져져 있었다. 바로 옆으로는 아무렇게나 고랑을 파놓은 시커먼 시궁창물이 해자(垓子)처럼 휘우듬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직 맨홀을 깔지 않았기에 뒷돌산 채석장에서 옮겨온 두툼하고 길다란 화강암 두 개를 시궁창 위로 쓰러뜨려 시늉만으로 다리 노릇을 하게 걸쳐놓았다. 한데 그 돌다리의 너비가 어른 한 사람이 겨우 건널 수 있을 만큼 조붓해서 애고 어른이고 그리고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쩍 하면 가랑이를 벌려 훌쩍 건너뛰곤 했다. 그러다가 삐끗 걸음걸이가 어긋나면 시궁창 바닥에서 긁어낸 펄흙을 되는 대로 양쪽에다 질퍽하게 쌓아 개어놓은 데 신발 뒤꿈치가 박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층 방은 흔히 루핑이라고 불리는 시커먼 기름종이를 지붕으로 삼고 있었다. 기찻집의 제일 안쪽 끄트머리에 붙은 방은 유일하게도 지붕이 슬래브였다. (중략) 그러나 바람이 조금이라도 세게 불라치면 잘 그을린 감자 껍질처럼 훌꺼덕 벗겨져버릴 듯이 엉성한 날림집이었다." 미아리 달동네는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중반 사이,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도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곳으로 김소진이 살던 ‘장석조네’는 한 지붕 아래 아홉 가구의 세입자가 사는 일명 ‘기찻집’이었다. 작품 속에서 묘사되고 있는 70년대 길음동 판자촌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인다. 집 옆으로는 시커먼 시궁창 물이 아무렇게나 흐르고 있고, 사람들은 그 위를 위험천만하게 뛰어 다닌다. 판자촌의 집들은 루핑이라고 불리는 방수지로 겨우 지붕을 삼고 있는 실정이다.
    박수진 외 4인, 2014, 미아리고개 이야기자원 모음집, 106-107쪽
  • 한 지붕 아래 아홉 개의 방이 한 일(一)자로 늘어서 있어 동네 사람들이 기찻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장석조씨네 집터는 옆의 행길보다 석 자 정도는 높게 다져져 있었다. 바로 옆으로는 아무렇게나 고랑을 파 놓은 시커먼 시궁창 물이 해자(垓子)처럼 휘우듬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직 맨홀을 깔지 않았기에 뒷돌산 채석장에서 옮겨온 두툼하고 길다란 화강암 두 개를 시궁창 위로 쓰러뜨려 시늉만으로 다리 노릇을 하게 걸쳐놓았다. 한데 그 돌다리의 너비가 어른 한 사람이 겨우 건널 수 있을 만큼 조붓해서 애고 어른이고 그리고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쩍 하면 가랑이를 벌려 훌쩍 건너뛰곤 했다.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9-10쪽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살고 있는 장석조네 집의 외관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한 지붕 아래 방이 일자로 늘어서 있어 기차집이라 불리는 장석조네 집 옆으로는 시궁창 물이 흐르고 있다. 아직 맨홀을 깔지 않아 임시 방편으로 돌산 채석장에 돌을 옮겨다 다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어른 하나가 겨우 넘어다닐 정도로 그 간격이 넓어 자칫하면 시궁창 바닥에 빠지는 낭패를 보기도 한다.
  • "턱 받치고 기대리는 사람도 해주야 하는기 사람의 인정 아니가서? 둘남이 에미가 초저녁부텀 허턱 걱정하며 저 아래 신풍의원께까지 오르락내리락하더구만. 이제라도 이불자락 들추고 들어가 파리발로 빌면 설마 에미나이가 남정네 요절이야 내겄나구?"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13쪽
    공사판 십장 오영감이 박씨에게 노름판에서 돈을 좀 벌었는지 묻자 박씨는 돈을 따기는 커녕 개평마저 다 잃고 왔다고 말한다. 오영감은 초저녁부터 둘남 에미가 그를 기다리며 산동네 아래 신풍의원까지 오르락 내리락거렸다는 사실을 전한다. 하지만 박씨는 둘남 에미에 대한 미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 "영감님도 차암. 지가 얼굴 마주 보고 말씀 디리기가 뭣해서 그러지요. 현장을 잡는게 알구 보면 아뭇것도 아임니더. 접때 아리랑고개 밑 신흥사 근처 이바구 제가 발써 해드렸지야? 이젠 이노무 자석이 겁대가리도 없다 이깁니더."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18쪽
    오영감의 부인 성금 어메가 집을 나간지 한 달이 지났다. 오영감은 친정에 보냈다며 둘러댔지만 박씨는 끝방에 사는 양은 장수 최씨가 성금 어메를 꼬드겨 재미를 보고있었다고 주장한다. 박씨는 일전에 신흥사에서 있었던 일을 오영감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 아리랑고개 밑 신흥사 절간에 잠깐 손볼 반나절거리 일감을 일찌감치 마무리하고 털레털레 길음천변 쪽으로 방향을 잡아 가다가 천변시장 어귀의 어느 중국집 앞을 지나는데 그 샛골목에 어디선가 많이 본 지게가 눈에 띄었다. 양은 장수 지게였는데 요모조모로 뜯어보니 바로 최씨의 지게가 틀림없었다.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22쪽
    박씨가 양은 장수 최씨와 성금 어메를 함께 봤던 날의 일을 상기한다. 박씨는 신흥사에서 받은 일감을 마무리하고 길음천변 어귀의 중국집 앞을 지나다 양은 장수 최씨의 지게를 발견한다. 박씨는 자신도 중국집에서 요기할 작정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한 방에서 나오는 최씨와 성금 어메를 목격한다. 박씨는 오영감에게 이 사실을 넌지시 알렸으나 오영감은 오히려 남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부탁한다.
  • "아니, 그런데 도망갔다는 이 아짐씨는 어디서 이 모양으로 끌고 오는 겁니꺼? 내사 마 정신이 다 아뜩해서 말입니다." "최씨가 알아냈다네. 멀리도 아니고 요 청수장 못 미처 동방에서 살림집을 내고 있었다는 구먼."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26-27쪽
    최씨가 기절한 성금 어메를 포대 속에 넣고 메고 오자 박씨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묻는다. 오영감은 사실 성금 어메는 청수장 근처에서 주인집 장석조와 살림을 차렸었고 최씨가 이를 알고 중국집에서 만나 성금 어메를 설득하려 했었다고 밝힌다.
  • 광수형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두루 광수 애비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양쪽 마구리를 녹슨 철사로 친친 동여맨 기다란 장대 끄트머리에 똥통을 꿰도록 된똥지게를 한쪽 어깨에 척 건 다음 똥 퍼, 퍼어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다니며 집집마다 들러 분뇨를 퍼날라 돌산 기슭의 자드락밭에 끼얹는 대가로 받는 몇 푼의 지전과 막걸리가 광수형네의 주된 수입원이었다.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49쪽
    광수형은 육손이 형이라 불렸는데 몸집이 우람하고 힘도 쎘다. 광수 형의 아버지는 집집마다 분뇨를 퍼날라 돌산 기슭에 버리는 똥지게꾼이었는데 상호 아저씨는 똥 푸는 아비 밑에서 썩히기 아까운 허우대를 가졌다며 혀를 차곤 했다.
  • 돌산 아래 채석장을 빙 둘러가면 으늑한 한구석에 석수장이들의 숙소로 쓰이는 집이 있었다. 겉은 비록 낡았지만 일반 공사장의 허드레 함바집하고는 종류가 영판에 달라 블록 변소와 가지런한 장독대는 물론 지붕도 기와로 올려 얼핏 여느 규모 있는 여염집과 다를 게 없었다. 실제로 그 집 한켠에 류씨라는 석주장이가 살림을 차리고 가족을 데리고 살면서 집 관리를 겸하고 있었다.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100쪽
    장석조네 박씨와 최씨, 광수 애비가 돌산 아래 석수장이들이 숙소로 쓰는 집을 찾았다. 그 집 한켠에 살며 집 관리를 하고 있는 류씨라는 석수장이는 광수 애비와 서로 터놓고 지내는 사이어서 장석조네 남정네들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편이었다.
  • 그 병은 바로 그 여자에게서 옮겨온 것이었고 그네는 본디 만수무당이 아니었다. 다만 광수 애비가 우연히 정릉청수장 유원지를 노닐다 눈이 맞아 두어 번 어울린 들병이 여인일 뿐이었다. 그 여인이 어느새 영험 있는 만신으로 변신한 것이다.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108쪽
    장석조네 아랫집 갑석이네에서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갑석이가 갑자기 실정하자 갑석 아범이 의원을 전전하다 굿판까지 벌인 것이었다. 그 굿판에서 맥아더를 신령으로 모신다는 만신이 당주로 정해졌다. 하지만 그 만신은 본디 만수 무당이 아니라 청수장에서 광수 애비와 어울렸던 들병이 여인일 뿐이었다. 그 여인이 어느새 영험한 만신으로 변해 있자 사정을 알고 있는 최씨가 광수 애비를 떠본다.
  • 택이 엄마가 은행나무집으로 일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쌍과부집으로 이름을 갈았다는 것인데 그 동네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다시피 원래 주인이던 보령댁은 과부가 틀림없지만(가끔 쌍과부집에 가죽 올가미로 떠돌이개를 붙답거나 사와가지고 돌산에서 장작불로 끄슬려 각을 떠주곤 하는 외눈박이 사내를 보령댁의 기둥서방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거야 혼자 사는 여자에게는 흔히 양념으로 따라 붙는 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택이 엄마는 비록 두 해 넘게 자리보전이나 해 사내구실을 못하지만 어엿한 남편이 아직까지는 두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유부녀였다.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166쪽
    시장통 네 거리에 쌍과부집이라 불리는 집이 있다. 본디 은행나무 옆에 붙어 있는 집이라고 하여 은행나무집이라 불렸는데 택이 엄마가 그 집으로 일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쌍과부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보령댁과 돌산에서 개를 잡는 외눈박이 사내의 염문설이 돌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과부는 보령댁 하나뿐이고 택이 엄마는 남편이 있다. 그렇지만 보령댁은 간판을 갈아 붙이고 난 뒤 단골이 늘었다며 좋아한다.
  • 콩점이는 몇 년 전부터 혈혈단신으로 이 동네에 터를 잡은 실성한 삼십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자기의 이름이 뭔지 어디서 살다 왔는지 등등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왼쪽 볼따구니에 콩알만한 사마귀점이 붙어있어 사람들이 콩점이고 불렀다. 돌산 공터에 있는 물역가게 옆에 기름 먹인 루핑 쪼가리와 퍼런 포장하고 판자때기를 엮어서 만든 허름한 까대기집에서 냄비 두 개하고 숟가락 몽댕이 하나가 전부인 살림을 꾸렸다.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172-173쪽
    콩점이가 쌍과부집에서 해산을 하게 된다. 콩점이는 몇 년 전 이 동네에 나타난 실성한 여인으로 돌산 공터에 있는 물역가게 옆 허름한 까대기집에서 살림을 꾸리고 남의 집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근근히 생활하고 있던 터였다. 한때 산파질을 했던 보령댁이 콩점이의 해산을 봐주고 있지만 난산으로 인해 진척이 더디다.
  • "새벽같이도 지어 날랐구만." "오랜만에 해보는 지게질이어선지 어깻죽지가 좀은 뻑뻑하더라마." "그래두 새벽잠 죽이며 설친 보람은 있겠시다. 츰엔 돌산 너덜겅자락에 밭 간다길래 거 무슨 초라니 방정인가 했더구만……쩝쩝." 진씨는 부러운 듯 묵직한 눈길을 던졌다.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185쪽
    이른 아침부터 흥남댁과 둘남 아비 박씨가 총각무 김칫단을 둘러싸고 실랑이를 하고 있다. 흥남댁에 위압적인 행동에 흥정은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박씨는 여태껏 지고 있던 지게를 내려 놓고 신발 안의 흙을 털어낸다. 아침잠이 없는 폐병쟁이 진씨가 아침부터 돌산을 간다고 부산을 떨더니 보람은 있는 것 같다며 말을 건낸다. 이후 진씨와 말을 주고 받던 박씨는 총각무의 물이 달게 찼는지 먹어보라며 무 하나를 깎아 진씨에게 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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