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1916 - 1999.11.14
인물 개인 사업가
사업가이자 문인이다. 성북동의 ‘청암장’을 인수하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였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법정 스님에게 요청, 대원각 7천여 평의 땅을 송광사에 시주하였다. 시인 백석의 연인이기도 하였던 그녀는 백석을 이해하기 위해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며, 백석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아 『내 사랑 백석』이란 에세이를 출간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9년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화장하여 길상사(성북구 선잠로5길 68)에 뿌려졌다.
성북동
  •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창건 1997년12월14일
  • [동네산책23] 길상화가 되어버린 자야여사를 찾아서
  • 길상사 내 길상화 공덕비
  •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창건 1997년12월14일
  • [동네산책23] 길상화가 되어버린 자야여사를 찾아서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金英韓
  • 이명칭: 진향, 자야, 김숙, 길상화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사업가

시기

주소

  • 주소: 02839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21-3 (선잠로5길 68)
  • 비고: 대원각(활동)

근거자료 원문

  • 백석과 김영한이 동거한 기간은 3년, 백석은 김영한과 사랑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여러 편의 시를 썼다고 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김영한의 이야기라고 그녀는 말한다. (중략) 뜨거웠던 젊은 날의 사랑은 기생과 동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백석의 부모님에 의해 위기를 맞았다. 백석의 부모님은 백석과 김영한을 떼어놓기 위해, 백석에게 결혼할 것을 강요했다. 백석은 그런 부모님의 뜻을 차마 거역할 수가 없었다. 백석은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하지만, 이내 도망쳐 나와 김영한의 품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기를 몇 차례 되풀이 하면서도 백석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사랑을 택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괴로워했다. 김영한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김영한은 집안의 반대로 끝까지 이룰 수 없는 인연이라는 것을 알기에 백석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백석은 단숨에 서울로 달려가 김영한을 만나려 하였으나, 3·8선이라는 장벽에 막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의 뜨거운 사랑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41-44쪽
  • 오두막편지와 무소유로 잘 알려진 법정 스님이 머물렀던 길상사는 원래는 대원각이라는 유명한 요정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 7천여 평의 땅을 시주한 한 여인이 있었다. “그 돈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그의 시를 읽는 것이 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나에게 그의 시는 쓸쓸한 적막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이었다.” <내 사랑 백석. 김자야 에세이> ‘그’는 시인 백석이었고,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여인은 김영한이다. 김영한은 어려운 집안 사정 탓에 16살 어린 나이에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영생여고보의 회식 자리에서 처음 만난 백석과 김영한은 서로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먼저 서울로 올라온 김영한을 따라 백석도 서울로 올라왔고, 김영한의 자취방에서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을 이어나가게 된다. 전통적인 혼례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여느 부부와 같았다고 한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41쪽
  • 김영한은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 돈을 벌기 시작하고 고급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 되었다. 제3공화국 군사정권 시절 밀실 정치의 본산이었던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서울의 3대 요정으로 꼽히며 승승장구했다. 그럼에도, 김영한은 7월 1일 백석의 생일이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며 그를 그리워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며, 백석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아 <내 사랑 백석>이란 에세이를 출간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9년 세상을 떠났고 한 줌의 재가 되어 길상사(성북구 성북동 323)에 뿌려졌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44-45쪽
  • 오늘날 정갈한 사찰의 풍광과 법정스님의 말씀으로 기억되는 길상사는 한때 요정 대원각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 대원각은 백석의 ‘나타샤’ 김영한金英韓이 1951년 650만원의 거금을 주고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청암장’을 인수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길상사로부터 나타샤의 애한과 백석의 치기어린 사랑이 법정스님의 말씀으로 정화되는 이미지를 기억한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44쪽
  • 성북동 깊숙한 산자락의 대원각 주인이었던 고(故) 김영한 여사가 7천여 평 대지와 건물 40여 동의 부동산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김여사의 유해 또한 화장장으로 이곳에 뿌려져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64쪽
  • · 전 대원각 주인 김영한 씨 별세 시가 1천억원대의 고급 요정 대원각(大苑閣)을 시주해 97년 도심 속의 수행사찰 길상사(吉祥寺)로 탈바꿈시킨 김영한(金英韓)씨가 14일 오전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83세. 일제 때 가무(歌舞)의 명인으로 유명 시인 백석(白石)의 연인이기도 했던 金씨는 51년 서울 성북동 청암장을 인수해 3공 시절 삼청각과 함께 '밀실정치' 의 요람이었던 대원각을 운영해오다 87년 법정스님의 수필집 '무소유' 를 읽고 시주를 결심했다. 빈소는 서울 중앙대부속용산병원, 발인은 16일 오전. 02-794-7499. 『중앙일보』 1999. 11. 15.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8쪽
  • ○ 백석과 김영한 「백석과 자야」, 『한겨레신문』 1999. 11. 2.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85쪽
  • 1916년 출생 (1999년 타계) 1932년 16살 무렵 조선권번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기명을 받음 ·조선 권번에 들어가 정악계(正樂界)의 대부 금하 하규일 선생의 문하생 겸 양녀로 한국의 전통춤과 음악을 전승 ·‘진수무향(眞水無香)’ 깨끗하고 청정한 물은 잡스러운 내음을 풍기지 않는다는 말에서 ‘진향(眞香)’이라는 기명을 받음 1933년 해관 신윤국 선생(조선어학회 회원)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 ·동경에 있는 문화학원(야간 여학교) 3학년 편입 1930년대 중반 파인 김동환이 발간하던 <삼천리>지를 통해 수필<눈오는 밤>으로 문단에 데뷔 ·이후 문학기생으로 세인의 관심을 받음 1936년 가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해관 신윤국 선생 수감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 해관 신윤국 선생 면회를 위하여 귀국 ·스승의 면회를 위하여 함경남도 흥원 형무소 도착, 그 당시 민족주의자나 사상범은 면회가 불가능 하였다 함. 1936년 가을 백석과의 운명적인 만남 (백석 25세, 진향 21세) ·해관 선생의 면회를 위해 주변에 거주하기 위하여 그렇게도 싫어했던 기생의 복색을 다시 입고 함흥 권번으로 들어감 ·함흥권번에 소속되어 함흥에서 가장 큰 함흥관으로 나갔던 첫날 영생고보의 교사가 이임하는 송별회 자리에서 백석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음. ·1936년 늦가을 함흥시내에서 <자야오가>라는 당시선집을 사옴 ·백석이 이를 보고 진향의 아호를 ‘자야’로 합시다 라고 제의 자야오가(子夜吳歌) 이백(李白) 長安一片月 장안에 조각달 비추이는데 萬尺擣依聲 집집마다 잠 못 이루고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秋風吹不盡 가을바람 하염없이 불어오니 總是玉關情 옥문관으로 치닫고 싶은 마음뿐이라네 何日平胡虜 어느 날에 오랑캐를 평정하고 良人罷遠征 우리 님이 먼 곳에서 돌아올까 1936년 늦가을 - 1940년 2월: 백석과의 만남 기간 ·이 기간 동안에 자야와 백석은 청진동에서 동거를 하며, 부모의 권유로 백석이 세 번의 결혼을 하지만 다시 자야에게로 돌아오게 됨. (백석의 부모는 기생을 며느리로 삼을 수 없다 함) 1942년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중국으로 떠나 살자고 했지만, 자야는 백석의 앞길을 막는 일이라 생각하여 거절. 2월 초에 백석 혼자 만주로 떠나고 이것이 둘의 마지막이 되었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갈라지면서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영원한 이별을 맞음 ·이 무렵을 전후하여 김영한씨는 일본에서 영문학을 배운 백석을 이해하기 위하여 중앙대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악착 같이 일해 재산을 모음 1955년 '김숙'으로 이름을 바꾸고 배밭골이라 불리우던 길상사 인근의 땅 2만평을 650만원에 매입 ·목조건물을 짓고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한식당을 열음 ·무려 17년간 빛을 갚으며, 필요할 때마다 땅을 떼어 팔다보니 2만평 부지가 7천평 밖에 남지 않음. 1970년 삼청터널 개설되며 요정정치 대명사로 권력의 중심 ·권력가나 재력가가 아니면 문턱을 넘을 수 없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으며, 본격적으로 재산을 불리기 시작 1980년대 무렵 돌연 대원각 운영을 접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남 1987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다 심경의 변화를 맞이함. 10여 년에 걸쳐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절로 만들어 줄 것을 청함. 법정스님이 그녀의 청을 받아 들여 대원각이 '길상사'로 변모 1997년 길상사 창건식에서 법정스님으로부터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음 1999년 11월 14일 김영한 <길상화> 타계 ※ <내가 모은 재산은 백석 시인이 남긴 시 한구절의 가치도 없다> 김영한씨는 백석의 생일(7월 1일)이 되면 음식을 먹지 않고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고 하며, 1997년 2억원을 출연하여 창작과비평사에서 <백석문학상> 제정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52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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