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724ADDCC751B1762X0
이명(異名) 윤지눌(尹持訥)
자(字) 무구(无咎)
호(號) 소고(少皐)
생년 1762(영조 38)
졸년 ?(미상)
시대 조선후기
본관 해남(海南)
활동분야 관료
[상세정보]
윤규응(尹奎應)
1762년(영조 38)∼미상. 본관은 해남(海南). 다른 이름은 윤지눌(尹持訥). 자는 무구(无咎), 호는 소고(少皐).
증조부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조부는 윤덕훈(尹德熏), 아버지 윤운(尹惲)이며, 외조부는 신호(申皓)이다. 1790년(정조 14) 경술(庚戌)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 1위로 급제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윤지범(尹持範)‧주신(舟臣)‧이유수(李儒修)‧한치응(韓致應) 등과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시단 모임을 조직하여 평생을 시로 교류하였다. 초계문신제명록(抄啓文臣題名錄: 초계문신에 뽑힌 제명록)에 등재되었다.
정약용이 쓴 「철원으로 귀양살이 떠나는 윤무구를 보내며」의 대상인 윤무구(윤규응)에 대한 정보이다. 윤규응은 정약용의 외척으로 1795년(정조 19) 6월 4일 전(前) 주서(注書)로서 견책을 받아 철원에 유배되었다가 6월 18일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