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
1904.02.03 - 1967.11.03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화가
한국미술사학자, 화가, 평론가, 수필가이다. 1920년 중앙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자 통학을 위해 성북동으로 이사하면서 이곳과 인연을 맺었다.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으나 오원 장승업의 병풍을 보고 동양화로 전향하였다고 한다. 1934년 노시산방(성북동 274-1)로 이사하여 이태준 등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1944년 노시산방은 김환기·김향안 부부에게 넘기고 의정부로 이사하였다. 1949년 출간한 『조선미술대요』는 한국의 미술사를 다루면서 대화하듯이 쉽게 읽히도록 구어체를 사용하여 저술하였다. 수필로는 1948년에 출간한 『근원수필』이 있다. 6.25 전쟁 이후 9.28 서울수복 때 월북하였다.
성북동
  • 김용준, 수향산방전경, 1944
  • 김용준, 수화소노인가부좌상, 1947
  • 김용준_새 근원수필 표지
  • 김용준_근원 김용준 전집5 표지
  • 김용준 집터 표지석
  • 문장 창간호 표지(삼성출판박물관)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金瑢俊
  • 이명칭: 근원(近園), 선부(善夫), 검려(黔驢), 우산(牛山), 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문인
  •   인물 개인 화가

시기

주소

  • 주소: 02838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74-1 (성북로 168)
  • 비고: 노시산방

근거자료 원문

  • 김용준은 수필가 김향안과 결혼하여 신혼집을 구하던 서양화가 김환기에게 노시산방을 넘겨주었다. 김용준의 아내는 수화의 결혼 예복인 모시 겹두루마기를 만들어주는 정성을 보였다고 한다. 「수화노소인 가부좌상, 1947」, 「수향산방 전경, 1944」은 수화 김환기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는 근원 김용준의 작품들이다. (중략) 맑은 물이 흐르고 울창한 숲이 있던 성북동의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던 벗들과 어울려 살던 그때의 성북동은 김용준에게도 그와 연을 맺은 모든 것들에게도 소중한 한 자락의 이야기일 것이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66-67쪽
  • 그러나 이 혼란의 시기에 김용준 등 혹자는 북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47쪽
  • 2. 노시산방의 두 예술가-근원 김용준 수화 김환기 근원近園 김용준과 수화樹話 김환기의 인연은 고즈넉한 성북동에 깃들어 있다. 그 중 노시산방老枾山房은 근원과 수화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살았던 곳으로 두 예술가를 함께 기억하기 위한 발원지다. 지금은 무심히 시간이 흘러 표석조차 없는 곳으로 변모했지만 여전히 늙은 감나무는 그 시절을 사색하듯 그곳을 지키고 있다. 마당 앞에 한 칠팔십 년은 묵은 성싶은 늙은 감나무 이삼 주株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멓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워 주고 하는 것이, 이 집에 사는 주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지라, 이군이 일러 노시사老枾舎라 명명해 준 것을 별로 삭여 볼 여지도 없이 그 행세를 하고 만 것이다. (중략) 아무튼 나는 내 변변치 않은 이 모옥을 노시산방이라 불러 오는 만큼 뜰 앞에 선 몇 그루의 감나무는 내 어느 친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나무들이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 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 김용준, 「노시산방기」중에서 그의 수필 「노시산방기」로 미루어 근원이 노시산방으로 이사한 것은 1934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수화에게 집을 물려준 것이 1944년 즈음이니 근원은 그의 삼십 대를 온전히 노시산방에서 머물렀다. 이는 그가 1931년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고보와 보성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미술사학자로서 그 입지를 구축해 가던 시절이다. 길진섭과 함께 1939년에 창간된 문학잡지 『문장』의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이태준과 더불어 골동 취미에 빠지기도 하였다. 주목할 것은 1936년부터 「서울 사람 시골 사람」, 「백치사白痴舎와 백귀제白鬼祭」 등의 작품을 시작으로 꾸준히 수필을 발표하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딸과 함께 가족을 이루며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했던 시기이다. 근원 김용준이 노시산방에 머문 시절은 비유하자면 그의 수필과도 같이 순수하고 담백하여 그 인생 전체에 있어 자양분이 되어주는 삶의 한 장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수화 김환기가 노시산방을 물려받은 것은 1944년 김향안과 결혼식을 올린 직후이다. 1944년 5월 1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고희동 선생 주례로 정지용, 길진섭의 사회로. 성북동 274-1. 근원 선생이 손수 지으신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보금자리를 꾸미다. 섬에 내려가서 가족을 데려오다. 홀어머님과 아이들을. ― 김향안, 『월하의 마음』중에서 노시산방은 이렇게 두터운 인연의 매듭으로서 새로운 주인장의 신혼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근원은 노시산방을 수화에게 넘겨주면서 그 이름을 수화의 수樹 자와 김향안의 향鄕 자를 따서 ‘수향산방’이라 부르고 〈수향산방 전경〉이란 그림으로 남겼다. 그 그림 속에는 키 차이가 많이 나는 김환기와 김향안 부부가 오랜 감나무 아래 정겹게 마주 하고 있다. 비록 수화가 그곳에 살았던 시간은 짧았지만 근원과 수화를 묶어주는 근원지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근원은 노시산방을 떠나며 하나의 수필을 남겼고 거기에는 두 사람이 예술가로서 소통하고 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수화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에 산다는 간판을 건 사람이 아니요,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에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노시산방이 지금쯤은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는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 김용준, 「육장후기」중에서 근원과 수화의 삶이 깃든 노시산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 간다. 한국의 미술을 개척한 두 거장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 노시산방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은 우리가 당면한 문화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10-213쪽
  • 근원 김용준 근원 김용준(1904-1967)은 미술사학자이자 화가이며 수필가이자 교육자이다. 그는 근대에서 현대로 이르는 혼돈의 시대에 우리의 고유한 미학을 고취하고자 노력한 순도 높은 예술가이다. 김용준은 한국 미술사상 탁월한 업적들을 이루었고 가장 앞서간 선구자로서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한다. 김용준은 1904년 2월 3일 경상북도 선산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세 살에 개울에서 본 송사리를 마당에 그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1920년 17세가 되던 해 중앙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통학을 위해 지금의 성북동(당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65-2번지)으로 이사하면서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이미 중앙고보 시절 이종우로부터 미술수업을 받았고 학생 신분으로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동십자각〉(원제 〈건설이냐, 파괴냐?〉)이 입선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당시 경복궁 동십자각을 총독부 청사 신축에 따라 현 위치로 옮기는 공사 과정을 그린 것으로 이 작품을 이종우가 인촌 김성수에게 가져가 동경 유학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본래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서양화 1세대인 고희동, 김관호에 이어 김주경, 길진섭, 이마동 등과 함께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유학시절 방학을 이용해 잠시 귀국하게 되었고 어떤 지인의 집에 초청받아 갔는데 그곳에서 오원 장승업의 병풍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겸재와 단원 등 대가들의 그림을 찾아서 공부를 하다가 결국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화면에 칼로 베어낸 생선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생선의 살코기 무늬, 육질이 붓을 몇 번 안 댔는데도 얼마나 사실적으로 표현됐는지 살아 있는 생선으로 착각할 정도였다는 거예요. 그 그림을 보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위대한 화가가 있었구나.’ 감동하셨답니다. 또 붓이 한번 지나가면서 나뭇가지의 볼륨, 입체감이랄까, 농담에 의해서 나뭇가지가 힘차게 올라가면서 끝에 꽃과 과일이 달린 표현들을 보고 굉장한 경지라는 생각을 하신 거죠. 또 그릇의 원근법적 표현, 붓 한 번 찍어서 빛을 받는 부분과 그늘을 받는 부분을 농담으로 표현한 이파리 부분 등, 그 그림에 작가가 살아 움직이고, 대상으로 표현한 것이 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감동했다고 합니다. 이 때 오원 장승업이라는 화가를 알게 되었고, 그 후로 우리나라 그림들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답니다. -서세옥, 「나의 스승 근원 김용준을 추억하며」중에서 오원 장승업은 근원 김용준보다 앞서 성북동에 살았던 예술가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았으나 작품을 통해 교감하는 관계로 그 인연이 인상적이다. 근원은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한 이례적인 작가이다. 그는 이미 서구의 사상과 문학을 익히 잘 습득하고 있었고 미술의 세계적인 흐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동양화를 통하여 찾고자 했던 것이 민족 고유의 미학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정신세계와 그 맥을 함께 하는 것이다. 김용준은 구체적인 이론을 더하여 작업 세계를 펼쳐 나갔다. 예를 들어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도〉와 단원 김홍도를 거론하면서 우리 미술을 되찾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붓끝에서 일어나는 호방하고 힘찬 선, 투명하고 분명한 색채, 그리고 대상의 조형적 형태 원리에 의한 구체적이고 명쾌한 표현력 등 어느 누구도 제창하지 못했던 것으로 우리 미술을 개척하는 데 기준이 되는 지표를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 미술 교육자로서 근원 김용준의 활동은 간과할 수 없다.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가 발족하면서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로 선임되어 동양화 실기와 이론을 강의하였고 커리큘럼 등 미술학부 학제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같은 해 ‘국립서울종합대학안’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근원은 사태를 온건히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격론이 벌어져 결국 이듬해 사직하고 동국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가르치게 된다. 짧은 기간 재직하였으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설립에 있어 실질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교육 과정에서 민족미술을 되살리는 교육론과 교육방법을 제시하면서 세계로의 확장된 개안을 확립하고자 한 것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교훈으로 남는다. 김용준은 뿐만 아니라 수필가로서 또한 미술사학자로서 집필 활동을 지속하였다. 1948년 출간된 『근원수필』은 저자의 내면으로부터 담백하게 드러나는 주제들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오랜 시간 머물도록 한다. 이 수필집은 근원의 삶과 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의 인격과 지식의 깊이가 더해져 한국 최고의 수필가로 위치하게 한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다양한 평론을 시도했고 시대적 지성에 몰입하였다. 1949년 출간한 『조선미술대요』는 오랜 시간을 준비해온 미술사 저서로 한국의 미술사를 한글로 집필했다는 가치를 갖는다. 고대부터 당대까지 우리나라의 미술사를 다루면서 대화하듯이 쉽게 읽히도록 구어체를 사용한 점은 주시할 만하다. 현실과 결코 타협할 수 없었던 근원 김용준의 일관된 민족정신과 올곧은 순수성은 결국 월북과 그 이후의 삶에 까지도 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진정한 예술가로서 그 모습은 결국 문화민족으로서 우리가 가는 길을 굳건히 이어줄 것으로 확신한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13-216쪽
  • 근원과 수화 1947년 근원 김용준은 수화 김환기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 〈수화소노인 가부좌상〉은 수화의 모습이 가장 잘 표현되어 근원의 수화에 대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산정 서세옥의 회고에 따르면 수화는 항시 짐 속에 이 작품을 싸서 갖고 다녔고 끝까지 애장하였다고 한다. 서울로 올라온 뒤로 한번은 노시산방의 새 주인 수화를 만났더니 그의 말이 ‘노시산방을 사만 원에 팔라는 작자가 생기고 보니’ 나에 대해 ‘대단히 미안한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 수화는 가끔 나에게 돈도 쓰라고 집어 주고 그가 사랑하는 좋은 골동품도 갖다 주고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옛날 시인 송씨의 집을 산 사람을 연상하게 되고, 옛날 세상에만 그러한 사람이 있는 줄 알았더니 이 각박한 세상에도 역시 그와 같은 사람은 있구나 함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오늘에도 가장 큰 보물을 얻는 것처럼 마음이 든든함을 느낀다. ― 김용준, 「육장후기」중에서 근원 김용준과 수화 김환기는 1930년대 김환기가 일본에서 돌아와 고향과 서울을 오가던 시절 만났으리라 추측한다. 두 사람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전해지며 서울대학교 설립 시절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당시 학생들과 함께한 승가사의 바랜 사진 속에는 김용준과 김환기가 나란히 앉아 있다. 분명 두 예술가는 서로의 마음속에 공감이라는 소통의 단어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근원과 수화는 한국의 미술 문화를 고결하고 독창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렸고 격조 높은 민족적 미학을 새로이 정립했다. 두 예술가를 만나기 위한 여정 속에는 한국의 멋이 깃든 그림과 글이 있으며 자연 그대로의 삶과 사람이 울림으로 퍼져 있음을 느낀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두 사람의 인연으로 가득 찬 성북동 갈림길. 이곳은 근원 김용준과 수화 김환기의 마음을 빼앗은 순수하고 아련한 마을이다. 이제 노시산방은 관념의 공간으로서 근원 김용준과 수화 김환기의 상징적인 터전으로 남게 되었다.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두 예술가가 남긴 정제되고 순도 높은 미적 향취가 여전히 성북동에 남아있다는 것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19-221쪽
  • 3. 식민지 문인·화가들의 사랑방-노시산방 사람들 김용준은 성북동에 살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다. 그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이 상허 이태준이다. 이태준은 김용준의 집에서 그리 머지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집을 지었다. 1933년의 일이다. 김용준이 성북동에 자리 잡은 해는 그의 글에 따르면 기묘년(1939년)에서 5년 전의 일이니 1934년이 된다. 그러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순서로만 보면 그가 이태준을 따라 성북동에 자리 잡은셈이다. 그 둘은 1904년생으로 나이도 같았다. 한 명은 산문의 일인자로 불렸고, 한 명은 회화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으니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점도 비슷했다. 이태준은 김용준이 자신과 한 마을로 이사 온 것이 반가웠는지, 그의 집 마당에 나이든 감나무에서 영감을 받아 ‘늙은 감나무가 있는 산방’이라는 뜻에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어준다. 어떤 이는 노老라는 글자가 주는 늙은 이미지가 별로라고 이야기하였지만 그는 노시산방이란 이름을 좋아했다. 아니 실은 김용준은 ‘노老’라는 글자를 좋아했다. 그의 글을 보면 그는 노경老境이란 경지, 노련老鍊이라는 말을 모두 사랑했다. 혹 이태준이 그런 김용준의 취향을 알고 당호를 지어준 것이라면 그 둘의 관계는 보통은 넘는 것임에 틀림없다. 좋은 당호를 받았으니 자신도 무언가 선물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을까? 김용준은 같은 해 이태준의 『달밤』이라는 소설집의 표지를 장정裝幀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표지 디자인을 해준 셈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39년에는 이태준이 그의 또 다른 친구 정지용과 함께 발행한 잡지 『문장』의 표지도 장정해 준다. 그들이 오랫동안 이웃사촌으로 지내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인연 때문이지는 알 수 없지만 김용준은 정지용의 『지용시선芝溶詩選』의 장정도 맡게 된다. 이태준이 산문의 일인자였다면 정지용은 운문의 일인자였다. 이태준이 성북동에 이사 오기 전부터 친구사이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듯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알음알음 이어진다. (중략) 뿐만 아니다. 이태준, 정지용 등의 구인회가 그러했듯, 조지훈은 박목월, 박두진과 같이 청록파라는 문학계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게된다.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은 이들의 시집 『청록집』이었다. 이 『청록집』의 장정을 맡은 사람이 바로 김용준이다. 『청록집』이 발간되던 해가 1946년이었으니 김용준은 당시 독보적인 장정가(혹은 북디자이너)였을 것이다. 소위 ‘청록파’들은 단순히 독보적 장정가인 김용준에게 장정을 부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지훈→정지용→이태준→김용준으로 이어지는 성북동 인맥도를 거꾸로 찾아올라 가보고 싶은 욕심은 떨치기 힘들다. 그리고 보니 그들의 집도 그렇게 성북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차례로 만날 수 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22-224쪽
  • 지금까지 이태준, 정지용, 조지훈을 이야기 했지만 김용준, 그리고 노시산방과 뗄 수 없는 사람은 노시산방을 물려받은 수화 김환기이다. 김환기는 1913년생이니 김용준보다 9살 어리다. 하지만 당시는 만나면 ‘민증부터 까라’고 하며 한 살 두 살 나이를 따지는 악습이 생기기 이전이었다. 예부터 선비들은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면 그것을 벗이라 여겼다. 그래서였을까? 김용준은 김환기를 각별히 생각했다. 그는 김환기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오늘에도 가장 큰 보물을 얻은 것처럼 마음이 든든함을 느끼’는 인물로 묘사한다. 김환기 역시 김용준을 각별히 생각했다. 노시산방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김환기의 잘못이라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그런 일이 생긴 것 자체를 김용준에게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김용준을 만나면 돈도 주고 아끼는 골동품도 주곤 했다. 그 둘이 각별한 사이임은 김용준이 아끼던 그의 집 노시산방을 김환기에게 넘긴 것에도 드러난다. 김용준이 노시산방을 떠난 후 혹 아끼던 늙은 감나무가 지나가는 자신을 행인처럼 볼까 남의 시를 빌려가며 두려워했다. 김용준은 노시산방을 떠나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집을 팔고서 鬻廬 어쩔거나 근래 들어 뼈를 에는 가난으로 自歎年來刺骨貧 내가 살던 집 이젠 벌써 이웃에게 넘어갔네. 吾廬今已屬西隣 다정하게 뜰에 선 버들에게 묻노니 慇懃說與東園柳 앞으로 만나면 행인처럼 보려는가! 他日相逢是路人 위 시는 이름 모르는 시인의 것이지만, 김용준은 이 시를 빌려 집을 떠나는 안타까움을 말한다. 특히 작품 속 주인공이 버드나무가 혹여 자신을 행인처럼 볼까 두려워했듯, 김용준도 자신이 떠나면 ‘늙은 감나무老枾’가 자신을 잊을까 노심초사했다. 또한 그는 성북동도 사랑했다. 시골과 같은 성북동의 정취를 사랑했고, 그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성북동과 노시산방은 그가 아끼던 마을이고, 집이었다. 그런 그가 이곳을 떠나야 할 때 맡긴 사람이 바로 김환기였으니, 그가 김환기를 믿고 생각하는 마음은 보통이 아니려니와, 김용준의 체취가 남아 있는 집을 선뜻 택한 김환기의 김용준을 생각하는 마음도 보통은 넘는다. 김용준은 주인이 바뀐 집에 새 이름도 지어준다. 김환기의 호 수화樹話에서 수樹를 따고, 그의 아내 김향안金鄕岸에서 향鄕을 따서 수향산방이라 했다. 자신의 흔적을 지우라는 것일 수도 있고, 이태준이 그랬듯 그냥 벗에게 멋진 당호 하나 선물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유독 아끼던 늙은 감나무에 생각이 닿으니, 혹 그가 늙은 감나무 하나만은 자기 것으로 지키고 싶어 새 이름을 지어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 성북동에는 김용준도, 김환기도 없다. 그리고 김용준을 찾아왔을 이태준도, 조지훈도 모두 떠났다. 그들이 한 번쯤 방문했을 노시산방 역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 가면 늙은 감나무 한 그루는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그 감나무는 지나가는 행인 사이에서 김용준을 기다리고 있을까?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24-228쪽
  • 미술학부에 시험을 쳤습니다. 구두시험을 보러 갔더니, 거기 김용준 선생이 앉아 있는 게 아니겠어요. 나중에 알고보니 근원 선생이 미술학부의 교무 담당 교수이셨던 겁니다. 예전에 만났을 때처럼 뭔가 불만스럽고 화가 난 표정, 어두운 표정, 무뚝뚝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시더군요. “지금 미술가들 중에서 어떤 화가를 알고 있는가?” “몇 분 있습니다만….” “서양화 말고 동양화 하는 화가들 중에서 아는 사람이 있는가?” 그때 얼핏 내 형님에게 들었던 게 생각이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당 김은호 선생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대단히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시더군요. 나중에 알았는데 근원 선생이 이당 선생을 좋아하시지 않았어요. 왜냐면 이당 선생은 친일을 했고, 일본화풍의 그림을 그리고, 그 제자라는 이들도 모두 일본식 그림만 그렸기 때문이죠. “이래서 되겠냐, 우리 그림을 말살하는 일본 화단, 총독부 정책에 의한 침략미술전(조선미술전람회)에 왜 그림을 내냐, 지조도 없이.”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분이셨거든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게 근원 선생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86.
  • 춘곡 선생을 중심으로 여러 미술가들이 모여서 미술학교 설립을 위한 발기대회를 덕수궁에서 가졌는데, 여기에 근원 선생도 참석을 했습니다. 근원 선생은 동경미술학교 졸업 후 보성고보에서 교육경력도 몇 년 쌓으셨으니, 재론의 여지없이 교수 자격이 완비된 분이었죠. 그래서 장발, 고희동 선생과 함께 서울대 미술학부 창립 추진의 주축 멤버가 되신 겁니다. 특히 근원 선생은 서울대 미술학부의 학제나 교과과정을 다 만드셨어요. 사실 서울대 미술학부는 근원 선생의 학교나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당시 서울대 역시 미군정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들이 원활한 교섭을 위해서 영어를 잘하는 장발 선생에게 학부장을 맡겼지요. 모든 교과과정이나 힘든 일은 근원 선생이 다 해 놓고 학부장은 장발 선생이 된 거예요. 내가 생각하기에, 근원 선생은 이때부터 ‘세상일이라는게 이렇구나’하는 실망을 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미국 사람들 세상에서 영어 하나 못 한다고 이렇게 밀린다는 걸 느꼈을 거예요. 그후에 학교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이 없으니까 근원 선생이 교무다 뭐다 다 담당을 했어요.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87.
  • 서울대 미술학부에서 근원 선생은 실기 지도는 물론, 이론으로 동양미술사도 강의하셨어요. 동양미술사 강의 중에 한국미술의 역사나 정신사, 이런 것도 곁들여서 얘기해 주셨죠. 또 서예 지도도 맡아서 하셨어요. 동양미술사 강의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게 생각나네요. 중국의 회화사는 크게 관파와 야파로 나뉘는데, 관파는 이미 이루어진 것을 가지고 기술적으로 수련을 거듭해서 점점 더 다듬어 나갔고, 야파는 혁신적이고 혁명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으로 새로운 회화양식을 창출하려는 경향을 지녔습니다. 대표적인 관파로 청나라 때 사왕오운이라 불리던 작가들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들을 그대로 베끼고 답습하기만 했죠. 그들한테서는 예술가적 인 창조정신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어요. 그저 헌옷 물려받아 입듯이 일생을 살아온 작가들이죠. 근원 선생은 동양미술사 강의에서 이런 폐단을 곧잘 지적하셨어요. 그리고 중국 그림에서 새로운 개척이나 실험정신을 주류로 놓고 강의하셨어요. 예컨대 양주팔괴를 중심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셨어요. 미술사에서도 사관이 중요한데, 그분의 사관이 그랬습니다. 또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고졸’해야 함을 강조하셨어요. ‘예스럽고 좀 옹졸한 듯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뿌리를 알고 그려야 하고 순수하고 순박한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되바라지고 화사하기만 한 그림을 추구하면 말미로 몰락한다는 거였죠. 이 ‘고졸’이라는 말을 강의할 때마다 수십 번씩 언급하셨어요. 근원 선생은 종이를 펴 놓고 직접 그려 보이는 교육을 많이 하셨어요. 그림 그리는 자세, 화제쓰는 법 등을 시범 보이신 거죠. 또 그림을 그리면서는 일절 말을 안 하셨는데, 한번은 그림을 그리고 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림이라고 하는 것은 앉아서 손끝으로 만드는 게 아냐.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정신이나 열정을 붓끝을 통해 화면에 쏟아내는 거지. 손끝으로 만드는 건 환쟁이야, 환쟁이. 그리고 작가가 화면 속에 들어앉아 있어야지, 작가는 없고 그림만 남아 있으면 그것 역시 환쟁이야.” 또 근원 선생은, 해방이 되고 나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급한 문제로 일본화풍의 청산을 강조하셨습니다. 선생의 논리는 아주 분명했죠. 일본화는 어디까지나 일본 사람의 그림으로, 풍토가 다르고 감정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고 배경이 다른 그림이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일본화는 굉장히 섬세하고 빈약하고 가벼워서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그림인데, 우리 그림은 그게 아니라는 거죠. 삼면이 바 다인 반도지만 우리는 대륙적인 그림을 그렸고, 자유스럽고 분방하고 생명력있는 그림을 그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 그림은 이 땅에서 쓸어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우리는 붓을 높이 쳐들고 한껏 힘을 분출하는 식으로 죽죽 선을 내그어야 한다. 그렇게 자유분방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 대상의 묘사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죠. “산수, 풍경이라든가 인물, 화조를 그릴 때 다른 사람이 그려 놓은 것을 그대로 베끼는 것은 안된다. 실제 대상을 놓고 묘사해야 된다. 대상 그 자체를 파고들면서, 연구하면서, 그려 나가야 된다. 그 표현방법은, 자유스럽고 힘차고 분방한 선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한 채색보다는 먹을 중심으로 그려야 한다고 하셨죠. 이렇게 근원 선생은, 어떤 방법으로, 어떤 재료로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명확하고 간명하게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술대학 미술학부 동양화과의 지침이 되다시피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일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지만, 한 사람도 어떤 방법으로 우리 그림을 그릴 것인가 하는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못했거든요. 대체로 그때 화가들은 미술사, 미술의 본질, 미술의 시대성 등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습니다. 대개 선생이 가르치는 것을 답습하거나 모사하는 정도였고, 실기에서도 말초적인 방법론만 가르쳤죠. 그런데 근원 선생은 미술에서의 근본적인 정신을 가르쳤고, 우리 미술이 가야 할 길을 제시했어요. 이것이 우리 미술에 공헌한 근원 선생의 크나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88.
  • 원래 근원 선생은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운 분입니다. 동경미술학교를 다니던 어느 해 방학을 이용해 잠시 귀국해서, 고향인 경북 선산에 간 일이 있었답니다. 어떤 지인의 집에 초청받아 방문을 했는데, 그 집에 오원 장승업의 병풍 그림이 펼쳐져 있었더래요. 기명절지화였답니다. 화면에 칼로 베어낸 생선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생선의 살코기 무늬, 육질이 붓을 몇 번 안 댔는데도 얼마나 사실적으로 표현됐는지 살아 있는 생선으로 착각할 정도였다는 거예요. 그 그림을 보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위대한 화가가 있었구나’ 감동하셨답니다. 또 붓이 한번 지나가면서 나뭇가지의 볼륨, 입체감이랄까, 농담에 의해서 나뭇가지가 힘차게 올라가면서 끝에 꽃과 과일이 달린 표현들을 보고 굉장한 경지라는 생각을 하신 거죠. 또 그릇의 원근법적 표현, 붓 한 번 찍어서 빛을 받는 부분과 그늘을 받는 부분을 농담으로 표현한 이파리 부분 등, 그 그림에 작가가 살아 움직이고, 대상으로 표현한 것이 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감동했다고 합니다. 이때 오원 장승업이라는 화가를 알게 되었고, 그후로 우리나라 그림들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겸재니 단원이니 하는 대가들의 그림들을 찾아보고 공부를 하다가, 나중에는 자기 자신이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아가 중국 그림, 글씨, 동양미술 전체를 공부하게 되신 거죠.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89.
  • 근원 선생의 수필은 당시 문단에서 어느 누구도 쫓아갈 수 없는 글로 인정받았어요. 사실 여러 문인들이 수필을 쓰긴 했지만, 문학가들 사이에서도 ‘수필’ 하면 근원이었어요. 압축된 주제로 짙은 향기를 품고, 인생의 내면 속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 바로 이게 근원 선생의 수필입니다. 당시 문인들이 한결같이 선생의 수필에 감탄했죠. ‘수필은 근원으로 끝이다’ ‘더 이상 좋은 수필 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럴 정도였어요. 『조선미술대요』는 오래 전부터 원고를 준비하셨던 것 같아요. 집필하시던 중에 학교를 그만두신 것 같은데 그때가 경운동 한옥에 사실 때였죠. 내가 서양화 전공하던 동료 서너 명과 함께 선생 댁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근원 선생이 그 원고 때문에 몇 달간 외출을 안 하셨는지 ―원래 선생은 볕에 그을린 얼굴이었어요―, 그때 보니 얼굴이 하얘지셨더라고요. 누런색 담요 같은 것을 잠옷 비슷하게 만들어서 그걸 입고 앉아 계시더군요. 저녁 시간에 갔는데, 선생이 “저녁을 먹고 가야 하는데 너무 여럿이 와서 같이 못 먹겠네” 그러셨어요. 대접하기가 어려우셨던 거죠. 그 『조선미술대요』가 출간되니까 『근원수필』때와 마찬가지로 ‘미술사에는 근원밖에 없다’ 이런 말이 돌았어요.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미술사를 집필한 것은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죠.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는 구어체로 돼 있다는 거예요. 대화하는 것처럼 읽기 편한 문장인 거죠. 그때는 그게 좀 이상해 보였는데, 요즘은 서양이나 중국의 미술사책을 보면 이렇게 쓴 책이 많아요. 이런 면에서도 근원 선생은 일종의 선각자였던 것 같습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93.
  • 육이오 직전인 1949년에서 1950년 상반기까지 근원 선생은 김재원씨를 비롯한 국립박물관 사람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국립박물관에서 해방 이후 나름대로 면모를 일신하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 그 중에 문화 강좌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거기에 근원 선생이 자주 초청되셔서 강의를 했습니다. 동양미술개론, 이조회화, 단원 김홍도, 이런 주제들이었죠. 근원 선생이 미술문화 전반에 걸쳐 눈이 열려 있는 분이다 보니, 박물관 사람들이 계속해서 초빙한 거죠. 또 근원 선생은 라디오 강의를 많이 하셨어요. 일주일에 몇 번씩 정기적으로 방송을 하셨는데,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죠. 나도 근원 선생의 방송을 늘 들었어요. 지금 기억에 남는 건, 조선조말 어린아이들이 신던 꽃신에 대해, 그것이 어떻게 해서 생겼으며, 그 세밀하게 수놓은 기법이며,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유산이니 잘 보존해야 된다는 내용이었어요. 또 장독에 대해서도 얘기하셨어요. 장독대의 아름다움, 옹기의 풍만한 볼륨감, 포용성 등에 대해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단원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도 우리나라의 생활미, 의복이며 가구, 돗자리, 그리고 무쇠솥과 솥뚜껑까지 어느 하나 빠뜨리지 않고 얘기하셨어요. 그 기록들이 지금은 모두 없어져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94.
  • 육이오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근원 선생을 좌익 공산주의자라고 나쁘게 봐 왔어요. 하지만 이분이 얘기하는 걸 들어 보거나 수필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이분은 정신주의자예요. 근원 선생은 항상 “정신이 우선이고 물질은 그 다음이다” “예술가가 가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정신의 불은 꺼져서는 안 된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이분이 공산주의 운동을 했다거나 가담했다는 말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근원 선생의 월북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에게 그렇게 수탈과 박해를 당했는데, 해방이 되니 이번에는 미국 사람들이 와서 군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 조그만 나라에 일본 사람들이 와 괴롭히면서 우리말도 못 하게 하더니, 이제 미국 사람들이 오니까 별 볼일 없는 놈들이 영어 좀 한다고 실권을 잡고 판을 친 거죠. 그런 상황을 감내하기가 힘드셨을 겁니다. 장발 선생에 대한 저항도 있었을 겁니다. 근원 선생이 서울대 미술학부 창립에 그렇게 많은 공헌을 하고도, 장발 선생이 학부장을 맡지 않았습니까. 국대안 반대 운동 때도, 학생들을 포용하지 않고 다 빨갱이로 몰아세우고, 학생들 제적하는 걸 반대했다고 해서 주먹을 행사하고… 선생에게는 이런 것에 대한 저항 심리가 있었을 거란 말이죠. 이게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이었는데, 그 흐름에 민감하게 저항해서 월북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그런 저항감보다 더 큰 것이 바로 천재의 고독입니다. 『근원수필』에도 고독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죠.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자기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데서 나오는 그런 고독인 거죠. 그런 고독이 혼란스러운 사회의 흐름과 맞물리면서 결국 북으로 발길을 돌리게 만든 거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당시 근원 선생은 현실적으로 월북하지 않고는 안 될 상황에 있었어요. 인민군 지배하에 서울대학에 복직해서 몇 달 동안 학부장을 했는데, 그대로 있으면 형무소 신세를 면할 수 없었죠. 북으로 가실 수밖에요.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95.
  • 근원(近園) 김용준은 경상북도 대구 출생으로 화가이자 수필가이며, 미술사학자이다. 한약재 도매상을 하는 형 김용수를 따라서 열두 살에 충북 영동군 황간면 신흥리에 있는 황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학창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열일곱 살에는 경성중앙고보에 입학하였고,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학생 신분으로 입선을 해서 주목을 받는다. 이때 통학을 위해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65-2번지로 이사하였다. 중앙고보를 마치고 일본 동경미술학교로 유학을 갔다. 동경미술학교는 일본인도 들어가기 힘든 곳으로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모인 곳이었다. 학교를 다니며 그린 자화상과 졸업 작품은 찬사를 받았고, 지금까지 동경미술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 1904-1967 경북 대구 출생. 화가이자 미술사학자, 수필가이다.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고,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귀국 후 장승업의 그림을 보고 동양화에 심취하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 미술사를 연구하였다. 「오원일사吾園--事」, 「조선조의 산수화가」 , 「조선미술대요」 등 논문과 당시 활동하던 화가들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였다. 이태준, 정지용 등 문인들과 교분을 맺으며 문예지와 책 표지화를 그렸다. 고등학교 때 통학을 위해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65-2번지에 살았고, 혼인 후 성북동 32-2번지에 집을 구했다.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소설가 이태준은 늙은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고 하여 ‘노시산방老枾山房’이라는 당호를 지어주었다. 집 앞으로 개울이 흐르고 뒤로는 나무가 울창했다. 마당에 온실을 만들어 화초를 키우고, 수석을 곳곳에 두고 즐겼다. 노시산방은 1944년 의정부로 이사할 때 신혼살림을 차린 서양화가 김환기와 수필가 김향안 부부에게 넘겨주었다. 김환기는 김향안과 혼인할 때 김용준의 아내가 지어 준 모시 겹두루마기를 입고 혼례를 치루기도 했다. 우리나라 수필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근원수필』을 내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를 하던 중 한국전쟁 때 월북하여 1967년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17쪽
  • ○ 미술 김용준(金瑢俊, 1904~1967) ·화가·미술평론가·미술사학자·수필가 ·호 근원(近園)·선부(善夫)·검려(黔驢)·우산(牛山)·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경북 선산 출생 ·1934년부터 1944년까지 성북리 274-1번지에서 가족과 함께 지냄(노시산방)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5쪽
  • ·이태준 등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 ·전통적인 문양과 한국적 회화 전통을 근대적인 단행본의 표지 이미지와 결합 ·주요 장정 ▶ 이태준의 작품집: 『달밤』,『무서록』,『돌다리』,『복덕방』 ▶ 기타: 『문장』, 『청록집』, 『지용시선』 등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9쪽
  • 2. 근원 김용준과 노시산방 ○ 1904년: 대구 출생 (1967 평양 사망) ○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유화 <동십자각>으로 입선 ○ 1931년: 도쿄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 졸업 - 서화협회 회원전에만 몇 번 참여, 화가로서의 활동은 거의 안함 ○ 1934년: 성북동 274-1호(노시산방)에 이사 - 김용준의 집을 상허 이태준이 ‘노시산방’이라 부름 ○ 1944년: ‘노시산방’을 수화 김환기에게 팔고 의정부로 이사 - 김환기는 ‘노시산방’을 ‘수향산방’이라고 바꿔 부름 - 1948년 김환기와 김향안은 종로구 원서동으로 이사 - 1949년 성북동 31-2호로 다시 이사 (현재 꽃담집) ○ 김용준의 작품: 근원수필, 노시산방기 등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50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김용준 주소(현재): 성북동 274-1 분야: 미술(회화/평론), 문학(수필) 비고: 노시산방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 ○ 시로 적은 조국해방의 열망 《문장》역시 성북구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문장》에서 소설을 심사했던 이태준은 성북동에 거주했고 시를 심사했던 정지용은 이종석 가옥에서 활동했으며 돈암동에서 거주한 바 있습니다. 《문장》의 장정(裝幀)은 성북동 노시산방의 김용준이 주도했는데 이들 외에도 《문장》에 참여한 많은 예술인들이 성북구에 거주하거나 성북구를 문학의 아지트 삼아 자주 드나들곤 했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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