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1942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인물 개인 공예가
유물 무형문화재
성북동에 거주하는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기능보유자이다. 매듭장이란 끈목을 이용해 여러 가지 종류의 매듭을 만들거나 술을 다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김은영은 김희진 선생에게 매듭을 배웠으며, '매듭과 노리개', '매듭과 주머니', '매듭과 현대의상'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통해 매듭을 옛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듭의 여러 쓰임을 소개하였다. 2002년부터 자신과 제자들의 작품을 모아 '김은영전승매듭연구회' 회원전을 열었으며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각국에서도 다양한 전시를 개최하였다. 1996년 12월 31일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으며, 2017년 11월 16일 명예보유자로 인정받아 우리의 고유한 매듭기법을 전승하고 있다.
성북동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_작업 모습(3)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_작업 모습(1)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_작업 모습(2)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 작품_매듭(1)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 작품_매듭(2)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_작업 모습(4)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_작업 모습(5)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_작업 모습(6)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 다회틀_12사틀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 다회틀_8사틀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 작품_노리개(1)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 작품_노리개(2)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 작품_노리개(3)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 작품_노리개(4)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 작품_노리개(5)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 김은영 작품_매듭 주머니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3 호 매듭장 매듭匠 시대 : 기능보유자 : 김은영(金銀暎) 소재지 : 서울 성북구 보문동 3가 168 지정연월일 : 1996. 12. 31. 매듭장은 명주실 올을 꼬아 합사하고 염색하여 끈목[多會]을 친 다음 이를 갖가지 모양으로 맺거나 술을 다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다. 복식이나 의식용구의 장식으로 사용하는 매듭은 일명 격탑(格搭)・결자(結子)라고 부른다. 외형상으로는 굵은 끈목을 치는 일, 두 가닥의 끈으로 잇대어 맺어가는 일, 그리고 적절한 술을 만들어 치렁하게 늘어뜨리는 일 등 몇 가지 세분된 공정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매듭은 삼국시대 고분벽화에 그려진 허리띠・깃발・말장식・방장장식 등을 통하여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경공장(京工匠)으로는 상의원(尙衣院)에 다회장(多繪匠)과 매즙장(每緝匠)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다회는 끈목인데 동다회[圓多會]와 납다회[廣多繪]로 구분한다. 동다회는 동글게 친 끈목으로서 그 자체가 도포끈과 같은 띠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주로 매듭 맺는 끈으로 이용된다. 실띠로 이용되는 경우는 조대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납다회는 날줄에다 씨줄로 무늬를 놓아 납작하게 직조하는 까닭에 끈의 구실보다는 띠로서 이용한다. 예부터 여성은 실띠를 띠기 때문에, 위요(圍腰)라 하면 여성의 허리띠를 지칭하며, 또는 편조대・색대자(色帶子)라고 적은 예도 있다. 매듭은 처음 장엄구로 늘이는 유소(流蘇)에 큰 구실이 있었으나 노리개와 같은 장신구로 소품화된 경향이 있다. 즉 기초적인 단추매듭을 비롯하여 맺는 모양에 따라 도래매듭・연봉매듭・동심결매듭・나비매듭・벌매듭・잠자리매듭・생쪽매듭・방석매듭・전복술매듭 등 다양하다. 그리고 끈이나 매듭의 하단에 다는 술에서도 봉술・딸기술・실술・방울술・낙지발술・전복술・금전지술 등이 있다. 매듭은 다양한 결구(結構)에서 표현되는 독자적인 조형감각과 미묘한 색채호상(色彩好尙)의 조화에서 얻어지는 특성으로 생활미화 전반에 폭넓게 이용되었으나 개화기 이후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기능보유자들도 대(代)가 끊어질 위기에 처했으므로 정부는 1968년 12월 매듭장을 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하고, 최은순・김희진을 기능보유자로 지정한 바 있다. 서울시는 김희진에게서 기능을 전수 받은 김은영이 각종 전시회에서 수상하고 한국전통매듭의 아름다움을 국내외에 소개하는 외에 전통매듭의 역사와 작품세계를 소개한 저서를 발간했으므로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 대백과사전≫ 7, 1988.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35-136쪽
  • 매듭장이란 끈목을 이용해 여러 가지 종류의 매듭을 만들거나 술을 다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끈목은 여러 가닥의 실을 합해서 3가닥 이상의 끈을 엮는 것을 말하며, 술이란 끈이나 매듭의 아래에 장식을 위해 다는 것으로 각종 악기, 불교용기 등에 쓰였다. 복식이나 의식도구 장식으로 사용되는 매듭은 격답, 결자라고도 한다. 매듭의 기원은 원시시대부터 볼 수 있으나 그 목적이 장식을 위한 것이든, 실용적인 것이든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매듭의 기법은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소속의 매듭장이 있었음을 『대전회통』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매듭의 재료로는 명주실, 모시실, 닥나무실, 삼베실, 털실 등이 쓰이고 끈의 색감·굵기·맺는 방법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다. 지방에 따라서 그 이름도 다르다. 매듭의 이름은 생쪽, 나비, 잠자리, 국화매듭 등 우리가 쉽게 보고 사용하는 온갖 물건, 꽃, 곤충이름에서 따왔다. 술 또한 쓰임새에 따라 딸기술, 봉술, 호패술, 방울술 등 다양했으며, 같은 종류일지라도 궁중과 지방에 따라 그 품격이 달랐다. 매듭장은 전통공예기술로서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해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1996년 12월 31일 무형문화재 매듭장 기능보유자로 김은영씨가 인정받아 우리의 고유한 매듭기법을 전승하였으며, 2017년 11월 16일 명예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문화재청,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항목명: 매듭장
  • 1. 성북동의 문화재 ○ 서울시 무형문화재 종목 :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명칭 : 매듭장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동   예능보유자 : 김은영 지정일 : 96.12.3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1쪽
  • 빈 콩깍지를 엮어 방석을 만들던 아이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인사동 골동품점에 가면 나비 모양, 국화 모양 매듭이 달린 노리개가 있었다. 지금은 구하지 힘든 귀한 노리개이지만 그때는 그 가치를 몰라 골동상들이 어린 손님에게 선물로 주곤 한였다. 고운 색실을 엮어 만든 여러 가지 모양의 매듭을 보면 '어떻게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빈 콩깍지를 가로 세로로 엮어 방석을 만들며 소꿉장난을 하던 기억이 매듭에 더욱 관심을 갖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와사등>과 <설야>라는 시로 유명한 김광균이다. 전통 문화에 관심이 깊고,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던 아버지는 백자항아리를 새로 구해 가져오는 날이면 딸에게 깨끗하게 씻어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큰 대야에 빨랫비누를 깎아넣고 끓인 물에 항아리를 삶아 깨끗한 물에 헹궈놓으면 하얗고 뽀얀 백자항아리 색이 드러났다. 집에는 도자기와 그림, 글씨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김인승, 진홍섭 같은 개성 출신 화가와 학자가 오갔다. 아버지를 따라 시인이 되려던 꿈은 대학입시를 3개월 앞두고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 스스로 '개성개량종'이라고 말씀하셨던 아버지는 새로운 학문에 관심이 많고 진취적인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어느 날 이화여대에 실내장식 전공이 생긴다는 신문광고를 본 아버지는 미술대학 진학을 권유하였다. 서울대나 이화여대 미술대학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미술 실기시험까지 준비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짧은 기간 동안 석고 데셍을 배워 입시 준비를 한 끝에 실내장식 전공이 있는 생활미술과에 입학을 하였다 당시 실내장식 전공자도, 실내장식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도 제대로 없을 때였다. 그렇지만 미술대학에서 배운 실기와 이론수업은 매듭 작품을 구상하는 안목과 감각을 키우는 데 그 바탕이 되었다.
  •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던 때, 친정집에서 같이 살던 사촌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아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려는 꿈을 접게 되었다. 이때 마침 집안 고모의 소개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와가 전성우와 경복궁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전시장에서 처음 만난다. 혼담이 오가고, 몇 달 만에 약혼을 하였다. 시아버지인 간송 전형필 선생은 몇 해 전 돌아가셨지만 경운동 친정 앞짐에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낸 김승현 선생을 만나러 오시던 모습을 멀리서 몇 번 뵌 적이 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골동품을 가장 많이 가진 수집가로 소개된 분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댁 맏며느리가 된 것이다. 친정아버지도 글씨나 그림을 모으는 취미가 있고, 당시 김환기나 이대원 같은 서양화가들과 친분이 있어 집안 분위기는 친정과 시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송리는 초등학교 때 방학이면 성북동 이모댁에 놀러왔다. 숲이 우거진 성북동에 오면 꿩이 후두둑거리며 날아다니고 잘생긴 바위 위로 물이 흘렀다. 지금 북단장에 앉아 어려서 여름방학에 보았던 옛 성북동 마전터 모습을 생각하면 성북동과 인연은 그때부터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북동 집은 약혼식 후 짓기 시작해 일 년 가까이 공사를 했다. 지금 같으면 금방 지을 수 있는 집일 텐데 그때(1966년)는 알맞은 자재를 구하기도 어렵고 건축기술도 좋지 않아 어렵게 지었다. 거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오는 통유리를 서치하고 싶어도 공장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크기는 그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1967년 4월 혼인을 하고, 완공된 집에서 성북동 생활을 시작한다.
  • 새로운 삶, 매듭으로 엮다 유학은 포기하였지만 계속 공부를 하고 싶던 때 당시 국립박물관 미술과장이던 최순우 선생에게 김희진 선생을 소개 받아 매듭을 배운다. 결혼을 하고 며느리로, 아내로, 어머니로 바쁜 생활을 하는 틈틈이 매듭 작품을 만들었다. 한창 작품을 할 때는 집안일을 마치고 새벽 3시까지 다회(多繪)를 치고 매듭을 짜는 일에 매달렸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남매를 낳아 키우며 하루를 쪼개고 쪼개어 남들보다 더 긴 하루를 살았다. 전업작가로 활동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5회),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다.
  • 1977년 무렵부터 매듭을 배우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몇 명씩 모아 집에서 수업을 했다.
  • 마흔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들어갔다.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교수, 대학교를 갓 졸업한 동기들, 예전과는 다른 학교 분위기,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대학원 생활이었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는 한두 번이면 익히고 외우던 내용도 반을 새워가며 여덟 번, 아홉 번을 봐야 했다. 나태해지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다시 노력을 계속하였다. 매듭을 시작하고 모은 자료와 대학원에서 공부한 내용으로 논문 「우리나라 매듭의 역사」를 발표하고, 졸업 후에는 대학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교수의 꿈을 이룬다.
  • 1996년에는 그간에 쌓은 노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으로 지정받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지정이었다. 매듭장으로 지정되며 그만큼 사회에 책무를 느껴 전통문화를 잇는 제자를 키우고 매듭을 보급하는데 힘쓴다. 2002년부터 자신과 제자들의 작품을 모아 '김은영전승매듭연구회' 회원전을 열었다. '매듭과 노리개', '매듭과 주머니', '매듭과 현대의상'과 같은 다양한 주제를 통해 매듭을 옛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매듭의 여러 쓰임을 소개하였다.
  • 한국의 전통 매듭을 이어나가는 길 (중략) 송리는 복식연구가 석주선 선생의 조언으로 의궤(儀軌)나 풍속화 등 기록과 유물로 남아있는 옛 매듭을 되살려내는 일에 매달렸다. 우리나라 매듭을 정립한 승승 김희진 매듭장에 이어 전통 매듭 복원과 보급에 힘을 쏟았다. 요즘 시중에서 흔히 보는 매듭은 우리나라만의 매듭이 아닌, 중국과 일본 매듭이 쥐섞인 것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상품들과 시장 상인들이 어깨 너머로 혹은 외국 책을 보고 만든 변형된 매듭이 쓰이고 있다. 송리는 아름다운 우리 매듭이 올바로 알려지고 쓰이길 바라는 마음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간을 쪼개어 강의를 하러 다닌다. 매듭을 만들고 매듭 전통을 이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지만 옛 사람들의 미(美)와 멋을 떠올리며 하나씩 완성해갈 때 느끼는 기쁨과 보람은 이 길을 계속가는 이유이다. "단풍과 같이 아름다운, 봄의 새싹과 같이 고운 색감 실을 엮어 화사한 조화 속에 하나하나 발랄한 생명력을 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은 그의 작품마다 드러나 있다. 훗날, 선조들이 남긴 문화재와 성북동의 자연이 어울린 북단장에 전통을 잇는 예술과 삶이 단긴 공간이 생기길 기대해 본다.
  • 연보 1942년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울여자대학교 미술대학원 공예학과 졸업 경력 한국매듭연구회 부회장, (사)서울무형문화재 기능보존회 이사장, (사)녹미미술문화협회 이사장, 서울산업대 전임교수 등 수상 국전 공예분야 입선, 전승공예전 특별상·국무총리상·장려상, 신사임당상(2006) 등 개인전 가나화랑(1995), 일본 다도미술관(1997), 로마동양예술박물관 등 7회 작품소장 국립민속박물관(한국), 로마국립동양예술박물관(이태리),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미술관(영국), 씨애틀동양예술박물관(미국), 교토다도미술관(일본) 등
  • · 매듭장 김은영 여사 인터뷰 『이 베갯싸개에 놓인 수(繡)를 좀 보세요. 꽃마다 다 뿌리가 달렸죠? 조선왕조의 공주들은 이상하게 명(命)이 짧더래요. 그래서 부디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공주 옷에는 꼭 뿌리까지 수를 놨대요.』 꽃수도 고왔지만 수놓은 천에 매듭을 달아 베갯싸개를 만든 장본인 역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게 고운 모습이었다. 전영우(全暎雨.61) 보성고등학교장겸 간송미술관장 부인 김은영(金銀暎.53)씨.『이건 연봉매듭, 저건 가지방석매듭』하고 설명 에 열을 올리는 金씨는 지난달 가나화랑에서 30년 가까운 매듭 작업 동안 첫 개인전을 연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했다. 『강남주부들에게 이런 우리 것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는 金씨의 매듭작품은 유난히 예스럽고 은은한 멋을 풍기는 것이 특징.서울성북동 간송미술관과 한 울타리 안에 자리잡은 단층집 거실도 그런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벽난로 곁에 걸 린 남편의 동양화 한 점, 빛바랜 헝겊소파 옆에 놓인 오래된 토기 한 점. 꾸민 데 없이 자연스레 일상에 젖어든 전통미를 느끼게 했다. 金씨는 그런 안목을 일제 때 우리 문화재를 모으는 데 돈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던 시아버지(澗松 全灐弼)뿐 아니라 「모던한」 시 세계와는 달리 골동품 보는 눈이 높았던 친정아버지(詩人 金光均)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워낙 따랐어요. 아버지 따라 인사동에 자주 가곤 했는데 이런 저런 구경을 하다 보면 매듭술 달린 노리개 같은 것도 사주시곤 했지요.』 시인과 화가는 잘 통한다고 했던가. 남편은 『장인이 좋아서 결혼했다』고 말할 정도로 서화를 보는 안목이 통했다고 한다. 친척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서울대와 이대에서 각각 미술을 전공한 데다 이런 집안 분위기까지 비슷해 더 쉽게 가까워졌다. 1년 남짓한 약혼 시절 동안 TV에서 매듭을 보고 매료된 金씨에게 무형문화재 매듭 선생님을 소개시켜 준 것도 남편이었다. 『실은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더하고 싶었는데….』 맏며느리이자 2남2녀의 어머니인 金씨는 번번이 남편의 반대에 부닥쳤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집안에서 할 수 있는 게 매듭 밖에 없었다』는 말에는 그런 남편에 대한 원망도 은근히 묻어난다. 金씨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마흔 일곱의 나이에야 서울여대공예과 대학원에 진학, 뒤늦게 공부욕심을 채웠다. 서울대 미대에서 강의를 하다 학교 형편 때문에 교장 자리를 맡은 남편도 작년에 회갑기념전을 열었으니 돌아보면 두 내외는 바라던 것을 꾸준히 이룬셈. 『서로의 작업에 영감을 주는 동반자』라는 金씨부부는 몇 해 전부터는 이집트, 러시아로 함께 여행을 떠났던 동반자이기도 하다. 결혼 초 『가장 소질이 있는 한 아이는 그림을 시키자』던 두 사람의 약속은 서울대 서양화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 둘째 딸 덕분에 지켜졌다. 경영학을 하는 막내를 빼고 다른 두 자녀는 집안내력을 대물림이라도 하듯 각각 한국미술사, 중국사를 전공하고 있다. 『중앙일보』 1995. 7. 12.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64-165쪽
  • 「와사등」을 쓴 시인 김광균의 딸인 송리(松里) 김은영 여사는 어릴 적 부친을 따라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 들렀을 때, 아름다운 노리개에 푹 빠졌던 기억을 매듭과의 첫 만남으로 기억한다. 고운 색실을 꼬고 엮어서 만든 노리개의 술을 보면서 집에 와서 기억을 더듬어 만들어보곤 했다. 부친의 권유로 이화여자대학에 신설되는 장식미술학과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하면서 유학의 꿈을 키우던 중, 같은 집에서 함께 지내던 사촌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교수의 꿈을 접게 된다. 때마침 집안 고모의 소개로 간송 전형필의 장남 전성우 화백을 소개받아 몇 달 만에 약혼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1967년 결혼 이후 살게 된 성북동 집은 약혼 이후 짓기 시작해서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공사를 했다.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던 송리는 당시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선생의 소개로 김희진 선생을 소개받아 매듭을 배운다. 큰 살림을 하는 결혼한 몸으로 사남매를 키우고 집안을 건사하면서 매듭을 하기 쉽지 않았지만 새벽시간을 쪼개가며 열심히 매듭장인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그 결과 전승공예대전 특별상(5회),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며 매듭예술가로서 이름을 조금씩 알려갔다. 1977년부터는 매듭을 배우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모아 집에서 수업을 했다. 46세에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졸업논문으로 ‘우리나라 매듭의 역사’를 발표하고 대학강단에도 서서 교수의 꿈도 뒤늦게 이루었다. 1996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3호 매듭장으로 지정받아 오랫동안 매듭 장인으로서 고군분투한 결실을 보게됐다. 2002년부터 자신과 제자들의 작품을 모아 ‘김은영전승매듭연구회’회원전을 열고 있다. ‘매듭과 노리개’, ‘매듭과 주머니’, ‘매듭과 현대의상’ 같은 다양한 주제를 통해 매듭을 옛 것으로만 치부해버리는 요즘 사람들에게 다양한 현대적 쓰임과 아름다움을 소개하고 전파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20-221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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