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한
1900.01.08 - 1964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정릉동에서 자라고 돈암동(현 동선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비밀결사 대동단의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부친인 김가진과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활동에 참가하였고, 선전위원회의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낙양군관학교 분교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 계열의 군관학교에 관여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해방 후 돈암동에 거처를 마련했지만 전쟁 때 납북되었다. 임시정부 요인으로 여성 계몽운동에 힘썼던 정정화가 아내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인 김자동이 그의 외아들이다. 김자동의 구술 증언에 의하면, 이들 가족은 해방 이후 돈암동 178-1번지(현 동선동 3가 130-7)의 한옥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동선동
  • 김자동: 6.25전쟁 당시 의용군 징집과 탈출 이야기
  • 김의한·정정화 집터
  • 김자동 구술 돈암동 집 약도
  • 김자동 구술 상하이 임시정부 및 자택 위치
  • 김자동: 6.25전쟁 당시 의용군 징집과 탈출 이야기
  • 독립운동가 김의한,정정화의 아들 김자동 인터뷰(3)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金毅漢
  • 이명칭: 김재한(金載漢), 김의환(金毅煥)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시기

주소

  • 주소: 02840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 3가 130-7 (동소문로26길 27)
  • 비고: 정릉동에 본적을 두고 있으며 돈암동(현 동선동)에서 납북당함

근거자료 원문

  • 본적: 서울 정릉 주소: 돈암동(납북) 계열과 단체: 임시정부 <활동 내용> 서울 사람이다. 1919년 10월 국내에서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의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부친 김가진(金嘉鎭)과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6월 상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의 상해지부 조직에 참가하여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5월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 폭탄의거로 포악해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상해에서 항주(杭州)로 이전할 때 김구(金九) 등과 함께 강소성(江蘇省) 가흥(嘉興)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 활동에 참가하였고, 선전위원회(宣傳委員會)의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 1월 그는 김구·안공근(安恭根)·이동녕(李東寧) 등과 애국단(愛國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낙양군관학교 분교(洛陽軍官學校 分校)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義烈團)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39년 10월 임시정부 비서처(秘書處)의 비서와 선전위원회(宣傳委員會)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중경방송국을 통하여 국내에 있는 한인들에게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5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3당이 통합하여 신당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립할 때 그는 이의 감찰위원회(監察委員會) 위원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0년 9월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이 중경으로 이전한 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광복군 활동에 대한 공식적인 동의를 얻게 되자 광복군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 주계(主計)에 선임되었으며,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았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27일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에 선임되었으며 한편으로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 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22년-대동단의 총재이자 김의한의 아버지인 김가진 사망 1948년-조소앙, 배성룡, 김의한 등 남북협상에 참여 1950년-조헌영,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손진태 등 주요인사 대거 납북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1-13쪽
  • ○ 6·25전쟁의 발발과 납북된 독립운동가들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조헌영 등 독립운동가로, 건국 요인으로 활동했던 성북인들 또한 전쟁 중 납북을 당합니다. 이로 인해 납북 후 그들의 삶은 물론 지난 일제강점기 당시의 업적들까지도 자세하게 알 수 없게 됩니다. 기록의 단절은 곧 후세의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공백이 되는 것과도 같지요.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30쪽
  • 대동단원들 중에는 주목해야 할 성북구의 독립운동가들이 꽤 많습니다. 의열단의 숨은 조력자로 알려진 오세덕, 임시정부의 요인이자 독립군양성에 헌신했던 김의한, 김의한의 아내이자 역시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여성 계몽운동에 힘썼던 정정화 등 모두 독립운동에 있어 큰 활약을 했던 성북인들입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52쪽
  • ○ 임시정부의 든든한 대들보, 김의한과 정정화 - 1931년, 한국독립당은 한인애국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듭니다. 바로 이봉창, 윤봉길 의거의 뿌리가 된 조직이지요. 한인애국단은 아직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굳건히 살아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직이기도 했습니다. 이들 단체가 계획한 두 사람의 의거는 일본을 크게 위협하는 계기가 됩니다. 한인애국단에는 조소앙 뿐만 아니라 항일 비밀결사단체 대동단의 요인이었던 김의한도 있었습니다. 부친 김가진과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낙양군관학교 분교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 계열의 군관학교에 관여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습니다. 김의한은 윤봉길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의 탄압에 의해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다시 광저우를 통해 충칭으로 이동한 후 광복을 맞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임시정부 활동을 합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84쪽
  • ○ 에피소드 아홉-어느 독립운동가 가족의 이야기 대동단의 총재였던 김가진과 그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 그리고 외아들 김자동. 삼대에 걸친 집안 이력은 우리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국내와 해외를 무대로, 해방 후에는 남북으로 삼대의 운명이 갈렸기 때문이죠. 김가진은 의친왕 이강 망명 시도 실패 전인 1919년 10월에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다 2년 뒤 병사했습니다. 이후 김의한, 정정화 부부가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했습니다. 정정화는 훗날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릴 만큼 당찬 인물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부부도 함께 움직였고 1928년 낳은 아들 김자동 또한 독립운동가 부모님을 따랐지요. 1944년, 청소년이 된 김자동은 중국군에 지원해 일본군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지만 입대가 거부되었습니다. 해방 후 1946년 고국 땅을 오랜만에 밟은 가족은 돈암동에 거처를 마련하지만 오붓한 시간을 누리지도 못한 채 김의한의 납북으로 생이별을 합니다. 이후 김자동은 1956년, 정릉에서 북한방송을 통해 아버지의 소식을 처음 접했고 1964년에는 별세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정정화는 1991년 눈을 감았으며 김자동은 2004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현재까지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85쪽
  • 서울 사람이다. 1919년 10월 국내에서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의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부친 김가진(金嘉鎭)과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6월 상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의 상해지부 조직에 참가하여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5월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 폭탄의거로 포악해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상해에서 항주(杭州)로 이전할 때 김구(金九) 등과 함께 강소성(江蘇省) 가흥(嘉興)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 활동에 참가하였고, 선전위원회(宣傳委員會)의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 1월 그는 김구·안공근(安恭根)·이동녕(李東寧) 등과 애국단(愛國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낙양군관학교 분교(洛陽軍官學校 分校)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義烈團)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39년 10월 임시정부 비서처(秘書處)의 비서와 선전위원회(宣傳委員會)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중경방송국을 통하여 국내에 있는 한인들에게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5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3당이 통합하여 신당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립할 때 그는 이의 감찰위원회(監察委員會) 위원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0년 9월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이 중경으로 이전한 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광복군 활동에 대한 공식적인 동의를 얻게 되자 광복군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 주계(主計)에 선임되었으며,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았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政訓處)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27일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에 선임되었으며 한편으로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 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朝鮮民族運動年鑑 225面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255面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分冊 242面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2卷 160面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2卷 457·514面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3卷 10·279·483·515·855面 臨時政府議政院文書(國會圖書館) 768·772·827·857面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國會圖書館) 750·826面 武裝獨立運動秘史 194面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348·357·363·371·372·378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877·931·937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6卷 186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9輯 470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586面
    독립유공자 공훈록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정정화, 김의한의 아들이다. 1928년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태어난 그는 이시영, 이동녕 선생을 할아버지라고 불렀으며 김구 선생을 아저씨라고 부르고, 윤봉길 의사에게 초콜릿도 받은 그야말로 임시정부의 아들이다. 그 역시 해방 이후에 부모님과 함께 돈암동에 거주하였으며, 당시 이미 20세에 가까운 나이였으므로 돈암동 집의 주소지 등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인터뷰에서는 임정시절의 기억은 물론, 해방 이후 돈암동 시절의 기억, 부모님에 대한 기억, 김구 선생 등 임정요원에 대한 기억 등 다양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성북문화원, 2019,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이 나,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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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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