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엽
1896.06.09 - 1971.01.28
인물 개인 문인
인물 개인 종교인
시인, 승려이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으로 여성들의 권익 향상을 주장하고, 스스로 관습에 매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근대 교육을 받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1920년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소설과 시, 평론을 발표하는 한편 신여성 모임을 이끌어 나가며 여성들의 교육과 의식 개혁을 주장하였다. 몇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굴곡을 겪은 뒤 만공선사 문하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 성북동에서 잠시 생활하였으며, 삼산학교 교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말년에 성북동 성라암(星羅庵)을 오가며 지냈는데, 자전 소설 『청춘을 불사르고』를 쓴 곳이 바로 이곳 성라암이라고 전한다.
성북동
  • 청춘을 불사르고 표지(삼성출판박물관)

기본정보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896.06.09 - 1971.01.28
  • 비고: 음력생일(1896.4.28.)을 양력으로 변환

주소

  • 주소: 02879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85, 성라암 (성북로31길 27, 성라암)

근거자료 원문

  • 일제강점기 윤심덕,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 3인방으로 불리던 김일엽(金一葉, 본명은 원주, 1896~ 1971) 스님이 자전 소설 『청춘을 불사르고』를 쓴 곳이 바로 이곳 성라암이라고 전한다.
  • 일제시기 발간된 유명한 잡지였던 『삼천리』에는 성북동에 관한 몇 가지 기사가 실려 있다. 1933년 10월에 발간된 잡지에 따르면 서울 부근은 모두 경치가 아름다운데 그 중에서도 성북리는 산수의경치, 공기의 청정으로 유명한 지역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경성부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고 있는데, 특히 성북리는 “한적한 근교이며 지형과 경치가 아름다워 예술을 벗 삼는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성북리는 하나의 문인촌文人村인것 같다고 했다. 1933년 현재 성북리에서 거주하고 있는 문인가는 시인이자 작사가인 김억金億, 여류문인 김일엽金一葉, 평론가이자 소설가였던 김기진金基鎭, 홍효민洪曉民, 단편소설로 유명한소설가 이태준李泰俊,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이종린李鍾麟 등이 있었다.(「城北洞의 文人村」, 『삼천리』 5권 10호, 1933. 10. 1.)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86쪽
  • 당시 하윤실의 아내였던 유명한 여류작가 김일엽金一葉 역시 스스로 삼산학교의 교편을 잡았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14쪽
  • 그 때문인지 문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문인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에도 이미 김일엽, 김기진, 이종린 등이 성북동에 살았고, 만해 한용운도 이태준과 같은 해에 심우장을 짓고 성북동 생활을 시작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23쪽
  • 1896-1971 평남 용강 출생. 시인이자 승려이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신여성으로 여성들의 권익 향상을 주장하고, 스스로 관습에 매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근대 교육을 받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유학 시절 만난 소설가 이광수가 일본 여성작가의 이름을 따 ‘일엽’이라는 필명을 지어줬다. 일본에서 돌아와 1920년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소설과 시, 평론을 발표하는 한편 신여성 모임을 이끌어 나가며 여성들의 교육과 의식 개혁을 주장하였다. 몇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굴곡을 겪은 뒤 만공선사 문하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30년대 초 성북동에서 잠시 생활하였으며, 말년에 성북동 성라암星羅庵을 오가며 지냈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9쪽
  • ○ 문학 김일엽(金一葉, 1896~1971) ·문인·승려 ·본명은 원주(元周), 일엽(一葉)은 아호. 평안남도 용강 출신 ·1920년에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여성해방 주장 ·중년에 수덕사 만공선사 문하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됨 ·삼산학교 교사이자 재가승려인 하윤실과 짧은 결혼생활(1929~1931) 동안 성북동에 거주하며 동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 ·말년에 성북동 성라암(현 성라원)을 오가며 지냄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4쪽
  • [ 50 ] 성라암과 김일엽 1. 김일엽(김원주)(1896~1971) ○ 1896년 4월 28일 평안남도 용강군 출생 ○ 1907년 시「동생의 죽음」을 씀 (순 한글 국문체시) ○ 1913년 이화학당 입학 ○ 1918년 이화학당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일본 닛신여학교(日新女學敎)를 졸업 - 일본유학 중 3·1운동 때 국내 잠입 만세운동 동참 ○ 1920년 2월 여성잡지 『신여자』 창간, 주간으로 활동 - 나혜석, 박인덕, 김활란, 김명순, 차미리사, 이광수 등이 필진으로 활동 ○ 1920년 7월부터 순수문예지 『폐허』의 동인으로 활동 - 오상순, 염상섭, 김억, 황석우, 나혜석 등과 함께 활동 ○ 1921년~1931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문단, 매일신보 등에 칼럼과 논설을 기고 ○ 1929년 8월 승려이자 숭실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의 영문학 교사인 하윤실과 재혼 후 1933년까지 성북동 양옥집에서 생활 (잠시 삼산학교 교사로 활동) ○ 1933년 하윤실과 이혼 후 1933년 예산 수덕사로 들어가 만공선사 밑에서 출가 -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라 가르친 만공선사의 뜻에 따라 20여년 간 절필 ○ 1962년 성북동 성라암(성북동 285번지)에서 회고록 『청춘을 불사르고』 집필 - 이 회고록은 당시 일대 파란을 일으켜 수많은 여성이 불가에 귀의하는 계기가 됨. ○ 1971년 2월 1일 수덕사 견성암의 별실에서 사망 (향년 76세) ※ 아들 김태신(일당스님, 화가이자 스님) 성라암에 거주, 2014년 사망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56쪽
  • ○ 김일엽, 「나의 정조관」(1927):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육체의 정조를 부정하고 정신의 정조가 중요함을 강조 그러므로 과거에 몇 사람의 이성과 관계가 있었다 하더라도 새 생활을 창조할 만한 건전한 정신을 가진 남녀로서 과거를 일체 자기 기억에서 씻어 버리고 단순하고 깨끗한 사랑을 새 상대자에게 바칠 수가 있다 하면 그 남녀야말로 이지러지지 않을 정조를 가진 남녀라 할 수 있습니다. …(중략)… 무한한 사랑이 즉 정조라 하면 정조관념만이 더럽힘을 받는 제한된 감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조는 결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고 단지 사랑을 백열(白熱)화시키는 연애의식의 최고 절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중략)… 우리는 일생을 두고 이러한 연애의식의 최고 절정(대상이 바뀌고 아니 바뀌는 것은 상관없음)에서만 항상 살려고 하는 것이 정조관념이 굳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처녀성이라함은 이성을 대할 때 낯을 숙이고 수줍어만 하는 어리석은 태도가 아니라 정조에 대한 무한한 권위, 다시 말하면 말한 바와 같이 자기는 언제든지 태도가 이지러지지 않은 새로운 영육의 소유자라고 자처하는 것입니다. — 나의 정조관, 『조선일보』 1927년 1월 8일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56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김일엽 주소(현재): 성북동 284-2 분야: 문학(소설, 수필) 비고: 하윤실의 아내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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