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학의 기본 열람실 개가식 서가에서 이 책을 뽑아 읽는 순간 한 미아리 산동네 출신의 문청은 이렇게 탄성을 베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렇게 후줄근한 사람의 땀냄새와 구린내 나는 듯한 목소리 그리고 숨기고 싶은 속내들이 모여 감히 소설을 이루는구나! 그 순간 소설은 형이상학의 권좌에서 내 어깨 위로 내려와 소년기에 묻어둔 산동네의 기억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로 변했다. 아마 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난 끝내 글쓰기의 길로 나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돼지꿈」이 첫머리에서 묘사하고 있는 "벌거숭이 붉은 언덕"과 "언덕 아래로 빈터의 곳곳에 간이 주택과 낮은 움막집"이 웅크리고 있던 동네가 바로 내가 뛰놀던 산동네의 한 자락이었다. 그 산자락 허름한 블록집과 낮은 움막집에서 만난 날품팔이들과 성격이 드센 여인네들, 양아치 형들의 모습과 그 말투들이 바로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김소진은 『돼지꿈』을 자신이 글쓰기의 길로 나서게 한 작품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개를 잡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 자신이 성장한 미아리 산동네의 사람들을 찾아내고, 자신의 경험에서 작품 속의 인물들이 가지는 근거 없는 낙관을 이해한다. 김소진은 잔치판을 위해 눈 앞의 시름을 잠시 덮고 망가진 삶을 부축해 내는 기운이 『돼지꿈』의 진정한 미학으로 평가하고, 울분만 삭히던 식물성 민중에서 뭔가 일을 낼 것 같은 동물성 활력이 넘치는 본격 민중문학의 단초를 찾아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