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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릴 적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래야 서울에 갓 올라와서 찍은 여섯 살 때의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은 길음국민학교의 후문쯤 되는 곳일 텐데 브로크를 찍는 널찍한 공터를 배경으로 손바닥을 쫙 편 차렷자세에다 털신을 바꿔 신은 모습으로 아침 햇살이 눈부신 듯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얼굴이다.
‘나’(민세)는 어릴적 사진들을 정리하기 위해 ‘큰책’이라고 불리는 낡은 장부를 꺼냈다. 민세가 태어날 땐 이미 가세가 기운터라 그에게 백일 사진이나 돌 사진은 없었고 길음초등학교 앞에서 여섯살 때 찍은 사진이 가장 어릴적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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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밥숟가락만 놓으면 약장수 공연을 보러 돌산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끼니때가 되어도 집으로 내려오지 않기가 일쑤였다. 약장수 천막은 국민학교 지을 터를 닦다가 예산집행이 더뎌진다는 이유에서 공사가 잠시 중단된 곳에 설치됐다.
큰책을 다시 다래끼(아가리가 좁고 바닥이 넓은 바구니)에 집어넣으려던 ‘나’(민세)는 밑에 아버지의 필체로 ‘고아떤 최옥분’이라고 적혀 있는 한 여성의 사진을 보게 된다. 골똘히 생각하던 민세는 이 사람과 닮았다는 '뺑덕어멈'과 얽혔던 일을 회상한다. 당시 아버지는 약장수 공연에 푹 빠져있었고 민세는 휴학을 하던 시절로 아버지가 늦어질 때마다 약장수단의 천막을 기웃거리며 아버지를 찾았다. 사진 속 인물은 약장수들의 극공연에서 인기를 끈 <심청전>에서 뺑덕어멈 역할을 연기한 인물이라 소설에서 '뺑덕어멈'으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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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쭈뼛쭈뼛 대학원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그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과외지도를 하겠으니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선물을 받자마자 오만원을 떼어 용수 아저씨에게 드렸다. 화대였다. 그리고는 그 길로 나 역시 여자를 사기 위해 길음천변으로 겅중겅중 달려갔다.
‘나’(민세)는 용수 아저씨에게 아버지가 '뺑덕어멈'에게 상사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뺑덕어멈'에 대해 동네에서는 그가 돈을 받고 남자와 관계하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는 용수 아저씨의 설득에 아버지의 '상사병'을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책을 판 돈과 아르바이트비 선불 받은 것을 아버지가 '뺑덕어멈'과 관계할 수 있는 '화대'로 쓰라고 용수 아저씨에게 드린다. 그리고 '나'는 길음천변의 성매매 집결지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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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주 한 병을 사서 돌산에 올라가 혼자서 다 비운 뒤 비트적거리며 일러준 장소로 나갔다. 나는 운동화 속의 발가락이 아리도록 땅 위의 짱돌들을 툭툭 걷어차며 서 있었다.
용수 아저씨에게 아버지가 뺑덕어멈과 관계하기 위한 비용을 전달한 며칠 뒤 뺑덕어멈은 ‘나’(민세)를 보지 않고는 아버지와 관계할 수 없다는 말을 용수 아저씨를 통해 전달한다. ‘나’는 소주 한 병을 사서 길음동 산동네 위 돌산에서 마신 뒤 뺑덕어멈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간다. 이후 그 곳에서 만난 뺑덕어멈은 ‘나’를 갸륵하게 여겼지만 나는 그에게 신경질적으로 대응하다 말 실수를 하고 뺑덕어멈은 대화를 끝마치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한국전쟁 때 겪었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아버지가 뺑덕어멈에게 관심을 두었던 '진짜' 이유를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