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혜
1910 - ?
인물 개인 언론인
기자이다. 1930년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2년 월간 여성교양잡지 『신가정』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베이징[北京]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주요섭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1936년 베이징 YWCA회관에서 결혼하였다. 1943년에는 주요섭이 일본의 대륙 침략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추방되어 귀국하였다. 귀국 후 김자혜와 주요섭은 돈암동 254-1번지에 자리 잡았다. 1945년 김활란 박사를 중심으로 창립된 한국여학사협회에 참여하여 여성으로서 사회에 봉사하고, 교육과 자기계발을 위한 활동에 펼쳤다.
돈암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金慈惠
  • 이명칭: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언론인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254-1

근거자료 원문

  • 김자혜(金慈惠) 1915/16-? 기자. 독립운동가 김조길의 장녀이자 소설가 주요섭의 부인이다. 1930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2년 월간 여성교양잡지 《신가정》의 취재와 실무를 맡았다. 1945년 김활란 박사를 중심으로 창립된 한국여학사 협회에 참여하여 여성으로서 사회에 봉사하고, 교육과 자기계발을 위한 활동에 펼쳤다.
    원문에는 1915년생 혹은 1916년생으로 소개되어 있으나 1995년 동아일보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85세로 소개되어 있다. 따라서 1910년생인 것으로 추정된다.
  • 작가와 기자로서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지하독립신문을 발간하던 주요섭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35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 푸런[輔仁] 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과 짧은 결혼생활 뒤로 혼자 지내던 그는 북경에서 지내는 동안 동아일보에서 함께 근무하던 독립운동가 김조길 선생의 딸 김자혜와 결혼식을 올렸다. 1937년 일제가 지식인 집단을 포섭할 목적으로 단행한 수양동우회사건 이후 친일노선을 걸은 형 주요한과 달리 주요섭은 일본에 항거하는 지식인으로서 지조를 지켰다. 동아일보에 중편「의학박사」를 연재하며기회주의에 빠진 지식인들을 비판하였다. 상해임시정부와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북경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한 그는 1943년에는 일본의 대륙침략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추방되어 귀국하였다. 귀국 후 주요섭의 가족은 돈암동 254-1번지에 자리 잡았다. 부인의 손길이 닿은 2백분 가량의 화초들이 올망졸망 작은 마당을 메웠다. 아내가 심은 꽃에 물을 주며 아이들을 키우며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3-25

관련 마을아카이브

  • 주요섭
    이야깃거리
    주요섭
    분류: 인물
    시기: 조선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