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른 계절
1972
작품 문학
1972년 『여성동아』에 ‘한발기(旱魃期)‘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장편소설로, 1978년 수문서관(修文書館)에서 ‘목마른 계절‘로 제목을 바꿔 출판하면서 4월 부분이 수정되고 연재 당시에는 없었던 5월 부분이 첨가되었다. 1950년 6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의 서울을 무대로 평범한 개인이 온몸으로 경험한 6.25전쟁을 시간 순으로 서술하였다.
삼선동 동선동 성북동
  • 박완서_목마른 계절 표지(삼성출판박물관)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한발기(旱魃期)
  • 오브젝트 생산자: 박완서
  • 비고:
  • 유형: 작품 문학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근거자료 원문

  • 띄엄띄엄 허술한 구멍가게에다 또 가끔 복덕방의 때묻은 헝겊이 펄럭이는 외에는 거의 똑같은 생김새의 조그만 기와집들이 촘촘히 줄지은 돈암동 뒷길인 진이네 동네에는 일요일마다 아이들이 많았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의 놀이는 때로는 부산스럽게 때로는 까닭없이 처량하게조차 보였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전쟁이 시작된 날, 돈암동의 한옥이 모여있는 골목 풍경을 묘사한 부분이다. 옛날 복덕방 사진을 찾아보면 복덕방이라고 쓴 천을 간판 격으로 걸어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북동에 거주했던 화가인 운보 김기창의 그림 ‘복덕방‘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 두려움과 기대가 반반 뒤섞인 야릇한 흥분이 그녀를 몹시 떠다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혜화동고개를 줄달음쳐 단숨에 집 근처에 와 있었다. 아침나절보다 몰라보게 초췌한 어머니 서씨 부인은 골목 어귀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전차길에서 들어오다 꺾이는 길목인 양회다리께를 열심히 지켜보다가 진이를 만나자, “이제 오니! 그래 어떻든?” 반색을 하며 묻는다. “뭐가요?” “뭐라니? 몰라서 묻니, 난리 말이야. 소문들이 어떻든? 대관절 어디까지 쳐들어왔다든?”
    6월 26일 월요일, 진이는 포 소리를 들으며 등교한다. 오후는 휴강이었고 귀갓길에 ‘북한 괴뢰‘가 남침했다는 벽보와 혜화동 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향하는 군 트럭의 행렬을 본다. 진이는 전쟁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어쩌면 사회주의 혁명이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희망을 떠올리며 돈암동 집으로 걸어간다. 집에 오니 서 여사는 전날 능곡의 학교로 출근하여 집을 떠나가 있는 아들 열이에 대한 걱정에 휩싸여 있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양회다리‘는 성북경찰서 근처에 위치한 성북천을 건너는 다리이다.
  • "그저 이런 때는 식구가 한데 모여서 일을 당해도 당해야 하는데, 그놈의 객지 생활이 원수야, 원수." 서 여사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아까보다 더 열심히 양회다리 근처의 오고 가는 사람들을 살핀다. 수돗가에서 시름없이 김칫거리를 씻고 있던 혜순도 진이를 보자 반색을 하며, "암만해도 심상치 않은데 어떡하죠? 오빠한테 어떻게 연락 좀 할 수 없겠어요, 아가씨?"
    6월 26일, 전쟁이 시작된 다음날이다. 전날 능곡의 학교로 출근해 부재중인 열이를 걱정하는 어머니 서 여사는 돈암동 골목 앞 성북천의 양회다리에 나와 상황을 살핀다. 열이의 아내인 혜순은 임신한 상태이다. 역시 걱정이 가득한 혜순은 진이에게 열이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하고, 진이는 시외전화를 하기 위해 경찰로 근무하는 외당숙 서승환 씨의 집에 가보라고 한다.
  • 돈암국민학교로 들어가는 어귀, 바로 전차 길가로 면한 꽤 큰 기와집 앞에서 진이는 머뭇댄다. (차라리 공중전화로 걸걸 그랬나? 참 시외전화지……) 암만해도 좀 아니꼽고, 더구나 망아지만 한 셰퍼드가 죽어라고 짖어대면 식모나 육촌 오빠들이 나와서 붙드는 동안에 머리 끝을 쭈뼛하며 재빨리 대청으로 뛰어 올라가야 하는 것이 이 집을 방문할 때마다 진이에게는 몹시 굴욕스럽게 여겨졌다.
    6월 26일, 능곡에 위치한 학교로 출근하느라 집을 떠나있는 열이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진이는 근처 외당숙네 집으로 찾아간다. 외당숙인 서승환 씨는 경찰계 중진이다. 지금의 성신여대역과 삼선교 사이의 대로변, 돈암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어귀에 외당숙네 한옥집이 있다. 집안으로 들어선 진이에게 당숙모는 까칠하게 대한다. 진이와 열이가 사회주의에 심취해 있는 모습을 알고 있는 당숙모는 전쟁으로 인해 자기 가족의 안위가 불안해지자 그 둘을 ‘빨갱이‘라고 비꼬며 진이를 경계한다. 진이는 결국 열이에게 전화를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 서 여사는 아까 싸놓은 보따리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를 집어서 진이에게 안기더니 덮어놓고 등을 밀며 서두는 바람에 두 여자는 거리로 밀려나고 만다. 거리에는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지 달려가는 사람이 꽤 많았다. 통행이 차단됐다는 큰길을 피해 삼엄하게 바리케이드가 쳐진 성북서 앞을 지나 언덕바지 뒷길로 접어드니 혜순의 걸음걸이가 점점 신통치 않아진다.
    권우, 1722, 북교목마(北郊牧馬), 50쪽
    6월 27일 화요일, 본격적으로 전쟁의 분위기가 돈암동을 감싼다. 동네 사람들은 쌀을 볶아 미숫가루를 만드는 등 피난 준비에 한창이다. 하지만 진이네 서 여사는 지난 일요일에 능곡의 학교로 출근한 열이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선뜻 집을 떠나지 못한다. 서 여사는 딸 진이와 며느리 혜순에게 자신은 남을테니 두 사람만이라도 피난을 떠나라고 이른다. 임신한 혜순은 남편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걱정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뗀다.
  • 떨리는 손으로 널빤지를 젖히기 시작한 것은 노인이 먼저였지만 굴 밖에 먼저 나선 것은 진이였다. 굴 밖 언덕에서 곧바로 바라보이는 미아리 고개의 흰 길을 육중한 탱크의 행렬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골목까지 국군 아닌 군인이 둘씩 짝을 지어 따발총을 겨눈 채 샅샅이 살피며 걸어오고 있었다.
    6월 28일 수요일, 방공호에서 하룻밤을 지샌 진이와 혜순. 방공호의 위치는 앞부분에서 ‘성북서 앞을 지나 언덕바지 뒷길‘, ‘언덕배기 왼쪽 돌산에 뚫린 커다란 굴‘로 묘사되었다. 미아리고개로 인민군이 넘어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다.
  • 그녀도 끝내 아침에 굴 앞 비탈길을 줄달음쳐 내릴 때의 신선한 감동을 되찾지 못한 채 돈암동 어귀 천변가로 들어섰다. 동네 앞 오동나무 근처까지 오니 아이들이 동그랗게 들어선 곳이 있어 그녀도 별 생각 없이 그들 축에 섞인다. 동회를 파수 보는 듯한 아주 나이 어린 인민군―그가 겨누고 서 있는 따발총의 무게가 애처롭도록 그렇게 나이 어린 인민군과, 그 앞 오동나무 아래 평상에 걸터 앉은 은색 수염의 호인형의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6월 28일 적치 첫 날이다. 전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몰두하고 있던 진이는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순간 흥분한다. 하지만 방공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버려진 시체를 마주쳐 전쟁의 적나라한 잔인함을 목도하자 당혹과 의심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진이가 성북천변에서 목격한 어린 인민군과 동네 할아버지의 대화는 이상을 외치는 구호와 현실의 인간다운 생활 사이의 괴리 등 전쟁의 모순을 잘 드러내고 있다.
  • 저녁 먹고 바람 쐬러 나가는 천변가 수양버들 밑 노인네들 축에서 겉돌기 시작한 지도 오래였고 하루도 마실을 안 오면 못 견디던 옆의 은행집 할머니도, 또 그 옆 향나무집 할머니도 발을 끊은 지 오래였다. 구멍각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수군대던 동네 여인네들도 그녀가 가까이만 가면 말을 딱 끊고 하나둘 꽁무니를 빼 그녀 혼자 동그마니 남기가 일쑤였다.
    7월, 전쟁이 진행되면서 식량과 물자가 귀해진다. 서 여사는 일상생활 속에서 정서적 연대감으로 친밀하게 이어져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왠지 모르게 따돌림을 당한다. 열이가 학교에서 월급 대신 받아오는 쌀 자루가 그 원인일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다. 전쟁이 마을공동체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당시 성북천이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공동 생활을 이루는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오직 감각으로만 맞는 그는 너무도 생생하게 성적이어서 진이의 결벽성은 곤혹을 겪는다. “난 이쪽이야” 양회다리께서 민준식은 미련없이 진이와 반대방향으로 꺾인다. 가지 않고 시장으로 들어선다. 그녀는 그녀의 온몸에 민준식이 묻어 있는 것 같아 집으로 가기를 잠시 미룬다. 시장 속은 별세계같이 생기에 넘쳐 있다. 팔고 사고 바꾸고 악착같은 흥정과 에누리와 욕설의 악다구니. (중략) 그런 사람들 틈에 섞이니, 하필 이 더위에도 게다가 살벌하기 짝이 없는 난리통인데도 짓궂게 생동하는 어떤 욕망적인 것이 조금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박완서, 2012, (박완서 장편소설 2)목마른 계절, 115-116쪽
    이념의 공허함과 전쟁의 잔혹함, 그 반대편에는 생활이라는 현실과 인간 개인의 본능적 욕망이 있다. 후자는 매우 구체적인 감각들, 즉 더위나 추위, 배고픔, 사랑하고픈 욕망의 육체적 반응 등으로 나타난다. 8월의 서울, 전쟁이 한창인 시공간 속에서 진이는 친구의 약혼자이자 인민군 쪽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민준식이라는 남자를 욕망한다. 이러한 욕망은 시장통 사람들의 생을 향한 욕망과 동일한 선상에 놓인다.
  • 다행히 최치열은 네 사람을 원남동에서 놔주었다. 그녀는 순덕이나 화진, 현민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느 둥 혼자 쏜살같이 돈암동 쪽으로 달린다. 지금도 결코 늦지는 않았을 거야. 모두 이야기해야지. 도대체 왜 이렇게 됐나를, 뭐가 잘못돼서 이렇게 되고 말았나를 털어놓고 의논해야지. 도와달래야지. 지금도 결코 늦었달 순 없을 거야.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가쁜 숨을 헐떡이며 그녀는 급히 달리고 있었다. 양회다리를 돌아서니 집이 보인다. 8월 초순, 황혼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각은 여덟 시를 좀 못 미쳤을까? 대문 앞에서 이쪽을 향해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서 여사의 모습이 보인다.
    8월, 진이는 등교한지 일주일이 넘었지만 강의를 들은 적이 없다. 진이와 몇몇 동기들은 민청위원회 활동에 동원되어 꽤나 바쁘게 지내는 중이다. 최치열은 당 세포위원장으로 당을 위해 열렬히 활동하는 인물이다. 그와 함께 비행기 기금 모금 활동을 다니면서 진이는 깊은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그는 이미 그러한 회의감을 겪었던 오빠를 얼른 만나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 그간 오빠에 대한 오해로 생긴 오누이 사이의 갈등을 풀고 싶어한다. 그리고는 원남동에서 명륜동, 혜화동, 삼선교를 지나 돈암동 집까지 걸어온다. 하지만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 “지금 온통 미아리고개가 미어지게 북쪽으로 끌려가고 있어. 에이 끔찍해.” “뭐, 뭐라고요?” “뭔 뭐야. 의용군으로 잡아다 논 사람들을 지금 이 밤중에 몰래 이북으로 끌고가고 있다니까. 죽일 놈들.”
    밤중에 당숙모가 진이네 집으로 찾아와 가족들을 잠에서 깨우고 불길한 소식을 전해준다. 인민군 측의 의용군으로 끌려가는 행렬이 미아리고개를 지나는데 열이가 그 무리에 있을 수도 있으니 찾으러 가보자는 것이다.
  • 드디어 한길가로 면한 당숙모네 집 창 밑에 그녀들은 섰다. 어둠 속에서도 더 짙은 어둠의 덩어리가 서서히 미아리고개 쪽으로 연달아 움직이고 있다. 한껏 넓힌 동공은 행렬 군데군데 삐죽이 총을 멘 검은 그림자를 식별할 수 있게 밝아진다.
    당숙모네 집은 소설 앞 부분의 묘사에 따르면, 지금의 성신여대역과 삼선교 사이의 대로변, 돈암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어귀에 위치한 한옥이다. 미아리고개는 성신여대입구역에서 길음역 방향으로 가는 길에 위치하므로, 높은 건물이 적던 당시에 당숙모네 집에서 미아리고개가 잘 보였을 것이다.
  • “여보.” 흐느낌과 함께 그의 가슴에 몸을 던진 건 혜순이었다. “어떻게 여기?” “오빠!” “응 너도.” 그것뿐이었다. 총을 앞으로 뻗친 그림자는, “빨리빨리 그만해둬. 좀 봐주려니까 한이 없군.” 열의 어깻죽지를 확 잡아채서 뒤로 돌아 세우더니 총부리로 등을 세게 쿡 찌른다. 그리고 두 개의 검은 그림자는 곧 느릿느릿 움직이는 거대한 검은 덩어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미아리고개에서 진이와 혜순은 의용군으로 북으로 끌려가는 무리에 섞인 열이와 짦지만 강렬한 이별의 만남을 가진다. 이 장면에서 사람들을 끌고가는 무리는 계속해서 ‘어둠의 그림자‘, ‘검은 덩어리‘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총을 든 인민군의 모습을 인간 개인으로서 묘사하지 않고, 뭉뚱그려 어두움이나 그림자로 묘사한 데에는 작가의 특별한 의도가 있어 보인다. 뒤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함께 음미해보면 그 의도가 한층 분명해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거처가 이렇게도 가슴 에이게 소중한데 그것을 마음대로 하는 비정의 거인은 누구일까?"
  • 삼선교 천변가 큰길로 접어들 때까지도 민준식은 그녀 곁에 있었으나 이제 곧 그와의 갈림길이 있을 것을 그녀는 안다. “집이 이 근처예요?” “아니.” “그런데 왜?” “이모 댁이 있어.” “그럼 집엔?” “집은 이제 없어. 너무 컸었어. 우린 단 세 식구뿐이었거든.” “마치 지나가버린 옛이야기를 하듯 하는군요?” “맞았어. 지난 일이야. 지금은 다 없어. 집도 식구도.” “어머나! 안됐어요. 모르고 있었어요.” “뭘?” “폭격당했죠?” “당치 않은 소리. 집은 국가기관에서 쓰고 가족은 남으로 피난 갔어. 출신성분의 오욕? 그럴 만도 하잖아?” 민준식의 얼굴에 어둠이 말끔히 가시고 밉살스럽도록 장난스러워진다.
    8월, 인민군이 서울에서 후퇴 준비를 하는 시기이다. 민준식은 당원이 되어 본인도 함께 북으로 가기를 열망한다. 그는 내력있는 집안의 외동아들로 아버지는 사업가이다. 전쟁 전까지 노력 없이도 모든 필요가 마련된 삶을 살아온 민준식은 권태에 지쳐있었다. 이것이 그가 사회주의에 경도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출신성분‘으로 인해 당원이 되는 길에 어려움을 겪은 민준식과 그 과정을 목격한 진이는 삼선교에서 돈암동 방향으로 함께 걸어가며 대화를 나눈다. 6월에 전쟁이 시작됐을 때 진이와 혜순이 숨었던 방공호가 있는 돌산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자라나 있다. 북으로 가고자 하는 민준식의 발걸음을 잡아두기에 사랑은 충분하지 못한 것인지, 두 사람은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이별의 인사를 나눈다.
  • "난 그래도 다 마련했어요, 쌀도 미역도. 그리고 지금의 건강상태도 좋은 것 같아요. 고모 노릇하기도 굉장히 힘들더군요. 하물며 아버지 노릇이 쉽겠어요. 그래도 해봐요. 아버지 노릇을, 혼자서……. 될 거예요. 그 신임장도 십분 활용하고, 온갖 것을 다 먹을 것과 바꿔봐요. 먹을 것과요." 삼선교에서 민과 헤어질 때 그녀는 이미 터끝만큼의 마음의 꺼리낌도 없었다. 오히려 먹을 것을 무사히 지킨 만족감은 신성한 의무를 완수했을 때의 희열과도 흡사했다.
    9월, 인민군이 곧 서울에서 후퇴할 분위기이다. 진이의 올케인 혜순은 출산예정일이 지났지만 아직 소식이 없다. 진이는 해산 도구와 흰쌀, 미역을 준비해두고 매일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이 날 진이는 학교에서 동기인 순덕과 우연히 발견한 콩밭에서 반찬거리를 마련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콩을 딴다. 그리고 다른 동기생인 화진과 현민이 ‘비행기 모금 운동‘ 실적이 낮다는 이유로 당세포위원장 최치열에게 호된 비판을 받고 나오는 모습과 마주친다. 진이와 집 방향이 같은 현민과 혜화동에서 삼선교까지 걸어오며 대화를 나누다가, 현민에게도 임신한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이는 자신이 모아둔 쌀과 미역을 나누어줄지 갈등하다가 이내 나누어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 살아 움직이는 거라곤 개 한 마리 만나지 못한 채 한길까지 나오니 부상한 인민군의 한 무리가 느릿느릿 미아리고개를 치닫고 있다. 열이 끌려가던 길이다. 자칫 쓰러질 듯이 위태로우면서도 그래도 용케 몸을 가눈 것이 혹 누가 누구를 부축한 것도 같으면서 통 누가 누구에게 의지했는지 분간할 수 없는 핏빛 낭자한 행렬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엄살이나 앙탈에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차라리 죽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해버리고 말 것 같은 상태란 얼마나 참담한 상태일까?
    9월. 진이는 올케의 출산이 임박해오자 당숙모를 부르러 가겠다며 집을 나온다. 가는 길에 바라본 미아리고개에는 인민군이 떠나고 있다. 곧 국군이 서울로 돌아올 모양이다. 부상당해 끔찍한 모습을 한 인민군이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진이는 지난 8월에 같은 고개 너머로 의용군으로 끌려가던 오빠 열이를 떠올린다.
  • 진이는 오랜만에 천변가 큰길을 천천히 거닐어본다. 노랗게 물든 수양버들잎이 지저분한 개천물 위로 떠내려가고 옷깃에 스치는 바람이 완연한 가을이다.
    10월이 되었다. 9월 28일 국군의 서울 탈환 이후, 사회는 ‘빨갱이‘ 처벌에 혈안이 되어 무고한 동네 사람들이 절차도 없이 잡혀간다. 학교에서 민청 활동에 참여했었던 진이는 불안을 느끼며 학교도 나가지 않고 있다. 경찰계에 몸 담고 있는 외당숙 서승환 씨가 진이네를 드나들며 ‘이웃의 고발‘을 입막음해 주고 있다. 서 씨가 진이에게 학교에 나가보라 다독이고 떠난 후 진이는 성북천으로 나간다. 지금은 성북천변에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버드나무가 잎을 늘어뜨리고 있는 풍경이었음을 소설의 묘사에서 알 수 있다.
  • 뉘집에서인지 애조 띤 유행가의 가락이 은은히 들려온다. 뭉클하니 슬퍼진다. 슬프고도 감미로운 것, 조금도 정수리에 무게를 주지 않는 투명한 대기, 그러면서도 온갖 사람 사는 재미, 온갖 사람다운 가능성이 용해된 대기, 사람스럽고자 하는 것이 방해받지 않아도 되는 이 기쁨, 이런 것이 자유라는 건가. 개천 건너로 성북서 뒤뜰이 보이고 밧줄 같은 것으로 대여섯 명씩 한데 묶인 여자들이 트럭에 오르고 있는 것도 보인다. 묶여서 동작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순경이 총대로 찌르며 무어라고 욕설까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9.28 서울 수복 이후 10월의 동네 풍경을 스케치한 부분이다. 적치로부터 해방은 자유를 선사했지만, 한편으로는 동네주민 누군가들을 억울한 불행과 고통으로 빠뜨리기도 했다. 진이가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는 자유의 감각과 눈으로 보는 성북천 너머 성북경찰서 뒤뜰의 살벌한 풍경이 대조적으로 묘사됨으로써 당시의 슬픈 모순이 독자에게 선명하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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