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지훈을 찾아가던 길이라 하였다. 그 당시만 하여도 성북동으로 가려면 버스나 택시가 거의 없었다. 종로 4가에서 바꿔 타게 되는 돈암동행 전차를 이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젊은 우리들은 전차를 기다리기보다는 걷는 편이 한결 상쾌했다. 창경원 담을 끼고, 가로수의 그늘이 덮여 있는 원남동 길도 좋았지만, 혜화동 로터리에서 보성학교 옆을 지나게 되는 고갯길은 혼자 걸으며 시상(詩想)을 가다듬기에 알맞았다. 지훈도 시내로 나오려면 이 길을 이용하였다. 간혹 그의 집에서 내가 유(留)하고, 아침에 그와 함께 시내로 나오는 일이 있었다. 그는 그 당시에도 쿨룩쿨룩 기침을 하였다. 늠름한 허우대에 비하면 몸이 약한 편이었다. 조금만 흥분하여도 눈가장자리가 분홍빛으로 상기되곤 하였다. 그는 고갯마루에 이르면 버릇처럼 걸음을 멈추고, 두루마기 앞자락을 한편으로 걷어붙이며 우이동 연봉(連峰)을 우러러보는 것이었다. 먼 산을 우러러보는 지훈의 모습, 그것은 가장 지훈다운 것을 느끼게 하였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봐도 부끄러운 일 아직은 내게 없는데 머언 산을 바라보면 구름 그리매를 보면 나 수정(水晶) 같은 마음에 슬픈 안개가 어린다.
그의 <운예(雲翳)>의 일절. 이것은 성북동 그 고갯길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어서 그는
성북동(城北洞) 넘어가는 성벽(城壁) 고갯길 우이동(牛耳洞) 연봉(連峰)은 말없는 석산(石山) 오랜 풍설(風雪)에 깎이었어도 보랏빛 하늘 있어 장엄(莊嚴)하고나.
하고 노래하였다."
조지훈, 2010,
돌의 미학, 174-175쪽
1948년 8월, 지훈의 연락을 받고 나는 서울로 올라간다. 이때 발견한 전찻길의 검은 장갑은 불길을 암시하는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지훈을 찾아가던 모습을 회상한다. 이 장면에서는 그 회상 속에 등장하는 성북동과 조지훈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당시 성북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돈암동행 전차를 타야했다는 것, 보성학교(현 서울과학고등학교 자리) 옆 길을 통과하는 길을 이용하는 것 등이 있었다. 현재는 전차 대신 넓게 포장된 도로가 놓여있으며, 보성학교 옆 길은 지금도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