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황
1917.04.18 - 2004.12.07
인물 개인 독립운동가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인 1939년에 동교생과 함께 항일결사 조선학생동지회를 조직하고, 3.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거행하고자 하였다.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전국 주요 도시에 하부조직을 설치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돼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김재황의 거주지는 경성부 돈암정 458-349(현 동소문로2길 21)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돈암동
  • 김재황 집터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02860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2가 135 (동소문로2길 21)
  • 비고: 경성부 돈암정 458-349

근거자료 원문

  • ○ 끝까지 싸우겠다는 일념으로 나선 김재황과 최승우 - 일본의 패망이 예측되는 와중에도 자연스럽게 독립이 될 것이라는 낙관보다는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저항을 하겠다는 투지를 불태웠던 이들도 많았습니다. 돈암동에 거주했던 김재황은 제2의 3·1운동을 계획합니다. 연희전문학교에 재학했던 그는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함께 항일결사단을 조직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합니다. 비단 서울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해외유학생들과도 연락망을 구축해 거국적인 거사를 계획했지요. 그러나 1941년 이들의 하부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됩니다. 김재황은 결국 퇴학을 당하고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112쪽
  • ○ 그 외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김재황 - 1917~2004 / 애족장 / 돈암동 458-349 거주 -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1939년 12월에 동교생과 함께 항일결사 조선학생동지회를 조직하고 3˙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거행하기로 다짐했습니다.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한 김재황은 해외 유학생 등과 함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전국 주요 도시에 하부조직을 설치하던 중 1941년 7월 일본 경찰에 발각돼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7, 성북, 다시 역사를 쓰다, 26쪽
  • 본적: 충남 연기군 동면 내판리 280 주소: 경성부 돈암정 458-349 계열과 단체: 학생운동, 조선학생동지회 <활동 내용> 연희전문학교 재학중인 1939년 12월에 동교생 김상흠(金相欽)・서영원(徐泳源)・김영하(金永河)・이동원(李東元)・민영로(閔泳魯)등과 함께 시내 사직동 소재 윤주연(尹柱淵)의 집에 모여 항일결사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동 회는 독립투쟁을 3・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거행하기로 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 동안에 이들은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로 하였으며, 동경유학생 등 해외유학생과도 연락을 맺어 거국적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동지들과 함께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냉천동약수터・연희전문학교 뒷산・벽제관 등 각지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을 길렀으며, 동지규합과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아 전국 도청소재지 및 주요도시에 하부조직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에 동회의 하부조직인 원산상업학교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동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동년 9월에 일경에 피체되었고, 연희전문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피체 후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3월에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6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특이사항> 1990년 애족장 추서 <참고문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6, 282-283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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