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1915 - 1982.12.15
인물 개인 조각가
우리나라 1세대 조각가이다. 1932년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에서 일등상을 받아 재능을 인정받았다.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학한 후 서울대 조소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8년 돈암동(현 삼선동)에 30평쯤 되는 집을 구해 살다가 6.25전쟁 이후 서울대 공동관사로 옮겼다가 다시 삼선동에 집을 구해 이사했다. 1953년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조각전에 「무명 정치수인을 위한 모뉴멘트」를 출품해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공모전에 입상했다. 작품의 재료인 나무, 돌의 본연의 물성을 드러내는 추상조각을 남겼다. 주요작품으로는 「전설」(1958), 「3.1운동 기념상」(1963), 「가족」(1965) 등이 있다.
삼선동
  • 우성 김종영(1915~1982)
  • 김종영, 「동소문 고개」, 1933
  • 김종영, 「삼선동 풍경」, 1976
  • 김종영, 「삼선동 풍경」, 1973년경
  • 김종영, 「자화상」, 1940년경
  • 1962년 삼일독립선언기념탑 모형과 김종영
  • 1959년 중앙공보관 전시실에서 월전 장우성과 2인전
  • 그림을 들여다보는 김종영
  • 자택 앞 작업실에서 김종영
  • 김종영, 1968년 유네스코 초청 유럽시찰 중
  • 김종영, 「동네풍경」, 1970년대 중반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金鍾瑛
  • 이명칭: 우성(又誠)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조각가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3가 104-2

근거자료 원문

  • 1. 김종영(1915~1982) 우리나라 1세대 조각가로 첫손 꼽히는 우성(又誠) 김종영은 경남 창원의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 휘문고보에서 평생의 은사인 장발을 만나 조각을 시작하고, 1932년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에서 1등상을 받아 재능을 인정받았다. 스승 장발의 권유로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하였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에 미술학부가 창설될 때 조소과 교수로 학생들을 맡아 가르치기 시작했고, 1948년 돈암동(현재 삼선동)에 30평쯤 되는 집을 구해 살다가 전쟁이후 서울대 공동관사로 옮겼다가 다시 삼선동에 집을 구해 이사를 했다. 언덕 위에 있는 양옥집으로 조각 작업을 하기 좋은 한적한 곳이었다. 1953년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조각전에 「무명 정치수인을 위한 모뉴멘트」를 출품해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공모전에 입상했다. 같은 서울대 미대 교수인 한국화가 장우성과 2인전을 열고, <3.1 독립선언기념탑>과 같은 공공 미술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작품의 재료인 나무, 돌의 본연의 물성을 드러내는 추상조각을 남겼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14쪽
  • 우리나라 1세대 조각가이다. 1932년 동아일보사에서 주최한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에서 일등상을 받아 재능을 인정받았다. 휘문고보에서 평생의 은사인 장발을 만나 조각을 시작하고, 그의 권유로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하였다. 1948년부터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1948년부터 돈암동(현재 삼선동)에 30평 쯤 되는 집을 구해 살았다. 피난 후 서울대학교 뒤쪽에 있던 공동관사에서 7~8년 정도 지내다가 다시 삼선동에 집을 구해 이사를 하였다. 언덕 위에 있는 양옥집으로 조각 작업을 하기 좋은 한적한 곳이었다. 1953년에는 영국 테이트갤러리 공모전에 <무명정치수를 위한 모뉴멘트>를 출품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 공모전에 입선하였다. 같은 서울대 미대 교수인 한국화가 장우성과 2인전을 열고, <3ㆍ1독립선언기념탑>과 같은 공공미술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작품의 재료인 나무, 돌의 본연의 물성物性을 드러내는 추상 조각을 남겼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64쪽
  • 우리나라 조각계를 이끈 김종영은 경상남도 창원 소답리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학문을 하던 사대부 집안에서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다. 열일곱 살인 1932년 동아일보가 주최한 ‘제3회 전조선남여학생작품전’서예부에서 입상한다. ‘원정비元靖碑’ 130자를 두 폭에 나눠 ‘안진경체’로 쓴 작품이었다. 작품을 본 심사위원들은 중학생의 수준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아 그를 불러서 직접 써보게 했다.
  • 김종영이 자라는데 영향을 끼친 사람을 꼽는다면, 한 명은 아버지이고, 한 명은 추사 김정희이다. 아버지 김기호는 생각이 열려 있어 한학에 머무르지 않고 서양 문물을 받아 들이는데 깨어있었다. 선비 집안의 장손이 유학까지 가서 조각을 공부하겠다고 할 때도 두말없이 지원하고 격려하였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성재誠齎’라는 아버지 호에서 글자를 가져와 자신의 호 ‘우성又誠’을 지었다.
  •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보에 입학, 평생의 은사인 장발 선생을 만난다.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하고 모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장발은 재능 있는 제자들을 키우는데 적극적이었다. 장발의 권유로 졸업 후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유학한다. 김종영은 인물의 묘사나 조각 기법, 인체 조각에만 중점을 두고 가르치는 학교 분위기에서 벗어나 조각의 근본에 다가가고자 서양 고전 조각과 작가들의 작품집을 탐독하였다. 고전주의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조각 언어로 해석한 프랑스 조각가 아리스티드 마이욜, 독일의 조각가 게오르그 콜베 등의 작품집은 조각을 공부하는 김종영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릴케의 문학과 클래식 음악을 즐겼다. 동경미술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1941년은 태평양전쟁으로 사회가 불안하고 청년들이 군대에 강제 징집 당하는 전시戰時상황이었다. 고향에 내려가 마을 일을 보는 직책을 맡아 다행히 징용을 피하였고, 혼인을 하고 집안을 돌봤다. 그를 다시 미술계로 이끈 것은 서울대학교에 미술대학을 만들고 학장을 하던 장발이었다. 1948년부터 혜화동, 부산 송도 임시 교사校舍, 관악구 서울대 시절을 모두 거치며 미술대학 조소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 해방 후 5년 만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혼란 속에 빠뜨렸다. 김종영은 돈암동 집에서 숨어 지내다 고향 창원에서 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전쟁 중이었지만 부산의 한 요릿집을 빌려 작은 교사를 마련한 미술대학은 신입생을 뽑고 수업을 하고, 전람회를 열었다. 재료도 부족하고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6·25동란 때 각백은 돈암동의 한옥에 살고 있었다. 이 엄청난 재난 속에서 각백이 나에게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아. 움직일수록 적탄을 맞을 기회가 많아지니까’하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견디다 못해서 가족을 이끌고 8월 중순께 과천으로 피난했다. 9·28이 되어서 다시 만났을 때 각백은 벽에 걸린 족자를 가리키면서 저것이 살려주었다고 했다. 족자 뒤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밤에 인민군들이 플래시를 들고 찾아 왔을 때 종이 한 장 사이에 두고 간이 콩알만 했다고 말했다. 그 족자에는 초서체로 ‘必勝(필승)’이라고 쓰여 있었다. - 박갑성의 회고 -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 미술계에 큰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김종영이었다. 1953년 영국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열린 국제조각대회에 한국 대표로 뽑혀 석고 조각 작품을 출품했다. 대회 주제는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52개국에서 3천여 명이 접수한 큰 규모의 국제대회였다. 김종영은 우리나라 작가 중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입선하였다. 우리나라 미술계에도 대단한 사건이었고, 그 자신에게도 중요한 전환점이 된 계기였다. 해방 후 서울로 올라와 살던 대학 관사에는 따로 화실이 없어 창고처럼 큰 교실 한쪽 구석을 작업실로 써야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래도 학생을 가르치고, 작품 창작을 하는 생활은 한결같았다.
  • 작품 활동에 비해 개인전을 열거나 단체전에 참여하는 횟수는 아주 드물었다. 대외 활동은 1949년부터 열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총 19차례(2~21회, 14회 불참) 심사위원 활동과 예술원 회원, 서울시문화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것 정도이다. 1959년 월전 장우성과 연‘2인전’은 화가와 조각가가 함께 연 전시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었다. 서울대 교수로 같이 근무하던 장우성은 한국화단을 이끌던 화가였다. 국립공보관에서 열린 2인전에는 김종영의 조각 여덟점과 소묘 다섯점, 장우성의 그림 스물두 점이 전시되었다. 이후 1979년 11월에 제자들이 뜻을 모아‘김종영화갑기념전’을 열 때까지 20년 동안 개인전을 한 차례도 열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김종영을 늘‘각백선생’이라 불렀다. 각백은 어느 날 스승인 장발이 던진 말이다. 그림 그리는 이를 화백畵伯이라고 하니 조각하는 이는 각백이라는 말이었다. 곧, 김종영은 조각을 빼고 말할 수 없고, 조각이 그 자체라는 뜻이기도 했다. 옛 사람들이 불각不刻의 미를 최고로 삼는 것은 형체보다도 뜻을 중히 여겼던 탓이다. 현대 조형이념이 형체의 모델보다도 작가의 정신적 태도를 더욱 중시하고 있는 것은 동양사상의 불각의 미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 김종영,「 불각의 미」- 예술이 정신적인 활동이라고 본 그는 기술이나 작업 방식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 보다 정신을 수양하고 풍부하게 해야 한다고 여겼다. 추사가 유배지의 고독 속에서 학문과 예술을 펼쳤듯이 김종영도 평생 조각과 예술에 침잠沈潛하였다. 1950년대 중후반부터는 추상조각을 선보였다. 1956년 석고로 된 <추억>이라는 작품에서 보인 추상성이 2년 뒤 발표한 철조각 <전설>에서 이어진다. 철이 새로운 재료로 등장해 석고나 나무, 청동 등의 조각과는 다른 형태의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김종영은 조각과 함께 수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초기에는 가족이나 주변 인물들을 그린 스케치가 많았다면,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작품으로 실현되는 추상 형태의 드로잉을 그렸다. 붓, 연필, 펜 등 여러 가지 도구로 수천 장의 드로잉을 그리며 작품을 구상하고 연구하였다. 늘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에서 찾은 만물의 원리와 조화를 작품에 담으려 했다. 그의 추상조각에서 가장 많이 다룬 재료인 나무와 돌을 쓸 때도 본연의 물성物性을 드러냈다. “무엇을 만드느냐는 것보다 어떻게 만드느냐에 더욱 열중하여 왔다. 작품이란 미를 창작한 것이라기보다 미에 접근할 수 있는 조건과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은 김종영의 작품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한한 가치’ 이것은 인간의 자각이다. 인생은 한정된 시간에 무한의 가치를 생활하는 것 인생에 있어서 모든 가치는 사랑이 그 바탕이다. 예술은 사랑의 가공加功 예술은 한정된 시간에 무한의 질서를 설정하는 것 예술의 목표는 통찰이다. - 김종영 - 서울대 교수가 되어 서울로 올라온 뒤 성북구 돈암동(현재 삼선동) 개천가에 27평짜리 집을 구해 살았다. 그런데, 1950년에 친구에게 보증을 서 준 것이 잘못되어 집을 잃고 만다. 피난 후 돌아와서 서울대학교 뒤쪽에 있던 공동관사에서 7~8년 정도를 생활하다 다시 삼선동에 집을 구해 이사를 하였다. 집도 몇 채 없는 언덕배기에 있는 양옥이었다. 한적한 곳이라 작업에 방해되는 것도 없고, 피해끼칠 일도 없었다. 삼선동 옛집은 손님방이 따로 없고 마루가 거실이었다. 70년대 중반쯤이었을까 지붕 처마 끝에서 담까지의 공간에다 작업실을 만들기는 했어도 실제 작업장은 마당이었다. 일곱 평쯤 되는 소위 그 작업실이란 것은 결국엔 창고요, 준비실이 되었고 언제나 초인종을 누르면 선생은 마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 최종태,「 회상·나의 스승 김종영」-
  • 작품 이외의 생활은 극히 단순하였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글씨를 쓰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고, 집과 학교가 그의 공간이었다. 외향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말하길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늘 과묵하고 차분하였다. 예술원상을 받았을 때에도 드러나길 꺼려하며 기자들의 눈을 피해 학교 구석진 곳에서 한나절을 보낼 정도였다. 김종영의 삶에 영향을 준 사람이 아버지와 추사 김정희라면, 곁에서 함께 해 준 사람에는 박갑성과 제자 최종태가 있다. 일본 유학을 함께한 휘문고보 동기 박갑성은 서울대 미술대학에도 함께 근무하여 거의 평생을 곁에서 지냈다. ‘미술대 3총사’라고 불린 김종영, 박갑성, 장우성은 학교 일을 마치면 곧잘 명동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두 친구가 함께 연 2인전을 뿌듯해하며 격려하고 축하하는 평론을 쓰기도 하였던 그는 김종영이 세상을 갑자기 뜬 뒤 ‘우성기념사업회’를 맡아 친구를 기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서울대 제자인 최종태는 스승 가까이에서 뜻을 헤아리고 안팎으로 일을 살폈다. <3·1운동 기념탑>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애쓰고, 환갑전시와 회고전 준비에도 힘썼다. 1963년 국민 성금을 모아 탑골공원에 세운 <3·1운동 기념탑>은 1979년 사전 통보도 없이 철거되어 문화예술계의 큰 반발을 샀다. 1991년에서야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새 자리를 찾아갔지만, 이미 스승 김종영이 세상을 뜬 뒤였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생사의 갈림으로 헤어진 스승의 작품과 글을 모아 전시·출판하고, ‘김종영미술관’ 관장을 맡아 스승을 기리는 일을 하고 있다. 1980년 정년퇴직을 한 김종영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다. 전시를 열며 “예술이란 농부와 같아요. 가을의 수확을 위해 이른 봄부터 거름을 주고 김매는 수고를 아끼지 않듯 예술가도 수확을 잘 거둬야해요.”라며 퇴직 후의 행로를 밝혔다. 그러나 작업실을 겸한 집을 짓고 작품 창작을 하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된 채 안타깝게도 1년 여의 병고 끝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 추상 조각의 개척자’ 김종영은 약 3백점에 달하는 조각과 드로잉 3천 여 점, 서예 작품 1천여 점을 남겼고, 대학에서 30여 년 동안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그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뜻을 모으고 가족이 힘을 보태 2002년 종로구 평창동에 김종영미술관이 세워졌다.
  • 1915 경상남도 창원 출생 1932 동아일보 주최 전국 학생서예 실기대회 일등상 1936~1941 일본 동경미술학교 유학 1948~198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53 국제조각대회 입상 1953~1980 국전 심사위원·운영위원 1959 장우성과 2인전 1963 <3·1운동기념탑> 제작 1980 회고전(국립현대미술관) 1982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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