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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으로 성북동 고개를 넘어 다니면서 헐려 가는 성벽을 외면할 수가 없다. 고개 마루에는 왜정倭政 때 세웠던 고적 보전의 성터의 석비石碑가 서 있기는 하나 이 석비가 무색할 정도로 성석은 굴러가 주춧돌이 되고 성터에는 구멍가게가 서곤 한다.
김환기는 아침저녁으로 성북동 고개를 넘어다니며 보는 한양도성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그는 마땅히 그러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나, 서울을 둘러 싸고 있는 고성이 없어진다면 참으로 쓸쓸한 서울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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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미는 돌이라는 소재가 더욱 절실하다. 한양漢陽 성벽에 어떠한 역사가 서렸든 간에 거기에는 무수한 세월의 때가 묻어 인공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자연인 것이다. 10년, 20년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 위대한 자연이 이제 우리들 손으로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보고 어찌 슬퍼하지 않을 것인가.
김환기는 폐허에도 미학이 있다면서 사람들이 로마나 아테네에 가고 싶어하는 것도 이 폐허의 미를 보면서 로마의 역사를 실감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리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세월의 때가 묻어 하나의 자연이 된 한양도성이 우리들의 손에 의해 허물어져 가는 것에 대해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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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나한테 놀러오는 외국친구가 있다. 그는 먼 거리를 자전차를 타는 법 없이 꼭 걸어서 오곤 한다. 한번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창경원 돌담을 끼고 걸어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즐겁다는 것이다. 필시 나도 이 성북城北에 사는 것은 산성山城을 바라보고 돌담을 끼고 거닐 수 있는 무용無用의 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김환기는 외국 친구들에게 왜 자신에게 놀러 올 때 굳이 자전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오는지 묻는다. 친구들은 창경원 돌담을 끼고 걷는 것이 즐거워서라고 대답한다. 김환기는 이에 동조하면서 산성을 바라보며 돌담을 끼고 거니는 것이 성북동에서 사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