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적: 서울 숭인정 63-10
주소: 서울 안암정 200-12
계열과 단체: 朝鮮人解放鬪爭同盟(일명 ‘CHT’)
<활동 내용>
서울 출신으로 昌新公立普通學校를 거쳐 1936년 4월 경성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김윤종은 同校 4학년 재학 당시 일본 수학여행을 가는 대신 그 비용을 돌려받아 그 일부를 일본군의 慰問袋로 송부하였다. 이 때문에 김윤종은 일본군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고 교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나, 동료들로부터는 냉대를 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윤종은 당시 일본의 ‘內鮮一體’ 주장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때마침 1940년 5월부터 朴贊五·金永俊과 교제하게 된 김종윤은 이들의 영향으로 민족주의 사상에 눈을 뜨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게 되었다.
1940년 11월 경성공립중학교 학생이던 任元彬·宋澤永 등은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朝鮮人解放鬪爭同盟(일명 ‘CHT’)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임원빈 등은 同 동맹 내부에 書記局, 理論部, 實踐部를 설치하고, 1940년 11월부터 ‘CHT대회의 선언’이라는 선언문 작성, 기관지 ‘火線’의 발행, 연구단체 鴙林共進會을 결성과 기관지 ‘供進’의 발행 등에 대해서 협의하고 조직 확대와 동지 규합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김종윤도 同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퇴학을 당하고, 1942년 12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참고문헌>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942. 12. 2, 1944. 3. 2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에는 거주지가 "서울 안암정 200-13"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정일 2020.6.4)
활동내용에서
1) "경성공립중학교"는 "경기공립중학교",
2) "두번째와 세번째, 네번째 문장의 "김윤종"은 "김종윤",
3) "일본 수학여행을 가는 대신 그 비용을 돌려받아"는 "일본 수학여행에 참가하여 여비추가금을 반환받아"
4) "鴙林共進會"는 "鷄林共進會"
5) "供進"은 "共進"의 오기임을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