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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이 진행되면서 자주 범람하던 성북천도 복개하게 되었다. 성북천은 예부터 마전터이기도 하였지만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면서 수다를 떨던 성북동 여성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물이 맑아 아이들이 천에 모여서 헤엄을 치면서 놀 수 있는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성북천을 바라보던 모습이 달랐다는 점이다.
여성들은 항상 천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빨래를 하였기 때문에 물이 맑았다고 말하는 반면에, 천에 내려가 가까이 보지 않고 여성들이 빨래를 한 후 흘려보내는 땟국만 보았던 남성들은 성북천을 더럽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즐겨 부르던 북둔(성북동)의 복숭아꽃은 성북천이 복개되면서 같이 사라졌다.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성북천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성북인의 모습은 이제 옛 사진과 문헌 그리고 당시 살고 계셨던 어르신들의 입으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현재는 안암천과 이어지는 성북천 하류 부분만을 개복하여 과거 성북동을 가로지르던 냇가가 있었음을 기억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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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北川(성북천)복개着工(착공)
1억 3천만원 투입 연내 완공
城北(성북)구 三仙(삼선)동 삼선교상류 성북천 복개공사가 1일 착공됐다.
성북구는 총공사비 1억 3천 6백만원을 들여 폭 4m 깊이 3m 길이 1백 80m의 암거 3개를 나란히 설치하고 그 위를 포장, 인도와 차도를 구분해 도로를 확장하게 된다.
오는 12월말까지 이공사가 끝나게 되면 지금까지 폭 15m이던 좁은 도로가 40m로 크게 확장돼 삼선교에서 삼청터널로 가는 차량의 소통에 큰 도움을 주게된다.
『동아일보』 1977.09.01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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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90년대 성북동 관련 신문기사(중앙일보)
ㆍ성북천 복개공사장 사고
11일 하오 4시35분쯤 서울 성북동1가 184의 84 성북천 삼선교 상류 복개공사장 옆 축대(높이 5m) 가 무너지면서 축대 위에 있던 신영옥씨(57)집이 붕괴, 안방에서 잠자던 신씨의 맏딸 혜경 양(24) 과 부인 이동원씨(55)가 흙더미에 깔려 병원으로 옮겼으나 혜경 양은 숨졌다. 이 사고로 신씨집 이웃 서복순씨(61·여)집이 반쯤 부서지고 황세열씨(57)집은 심하게 금이 갔으나 집안에 있던 7∼8명은 재빨리 피해 화를 면했다. 사고는 공사를 맡은 석락산업 소속 서울 02-8209호(운전사 이동철·25)포클레인이 하천바닥의 모래를 긁어내는 작업을 하면서 신씨집 축대 밑부분을 깊게 파내 높이5m, 길이 30여m의 축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일어났다. (198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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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성북동에는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많이 살았고, 서로 교류를 하며 지냈다. 조지훈이 살던 집 안방 쪽 축대 밖으로 개천이 흘렀는데, 그 개천 건너에 있는 한옥에는 서울대학교 최문환 교수가 살았다. 개울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가면 운보 김기창 화백과 수화 김환기 화백이 살았다. 길을 건넌 곳에는 작곡가 윤이상이 살았다. 두 사람은 한국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어 친하게 지냈다. 조지훈이 작사를 하고 윤이상이 곡을 붙여 노래를 짓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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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산방과 간송미술관
1. 수연산방-상허 이태준과 구인회
1933년은 이태준에게 특별한 해였다. 그는 그해 성북동 골짜기 개천 옆에 집을 짓고 수연산방이라 이름 지었다. ‘벼루硯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壽 글을 쓰는 집’이란 의미였다. 잠시 집을 비운 일도 있긴 하지만 수연산방은 월북할 때까지 그의 보금자리였다. 1933년, 이태준에게 보금자리의 마련만큼 특별했던 일은 구인회의 결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