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위동/역사
장소 인문지리
장위동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장위동의 이름은 고려의 명신(名臣)들이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높은 지위’의 뜻으로 장위(長位)라고도 하고, 마을 뒷산의 이름이 장위산(獐位山)이어서 이 때문에 장위라 했다고도 한다. 혹은 조선 말의 대신 윤용구(尹用求)가 여기에 살았는데 그의 호가 ‘장위산인’이었기 때문에 장위동이 되었다 설도 있다. 장위동은 조선 초 한성부에 속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동부 인창방 장위리계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 1911년 경성부 인창면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 1949년 8월 성북구가 분리·신설될 때 장위동은 성북구 숭인출장소의 관할이 되었고, 1973년 숭인출장소가 폐지되면서 성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장위동
  • 장위2동 일대(1)
  • 장위1동 일대(1)
  • 도성도 (도성 밖 동쪽 세부)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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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근거자료 원문

  • 조선시대 장위동 조선시대에는 장위동을 장위리계長位里契라고 하였다. 장위長位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고려조 명신名臣이 이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추측되기도 하고, 또는 마을 뒷산 이름이 장위산獐位山이어서 이를 따라 장위동이라고 했다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추측들에 대한 증거는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이 밖에 조선말의 대신 윤용구尹用求가 여기에 살았고, 그의 호가 장위산인이었기 때문에 장위동이 되었다는 증언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위리라는 지명은 조선 초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말의 인물 때문에 조선 초 기록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시기상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장위동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다. 서울은 조선시대에 한성부였는데, 중부·동부·남부·서부·북부 등 5부로 나뉘어 있었다. 5부 가운데 동부와 북부에는 성외城外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고, 동부에 포함된 성외지역 중 하나가 장위리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보면, 동부의 성 바깥에 있던 계契들은 모두 어영청에 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어영청 후영에 속하는 곳은 없었고, 전영前營, 좌영左營, 중영中營, 우영右營에 소속되어 있었다. 장위리계는 어영청御營廳의 영전營前에 속한 곳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한성부 설명 중에는 ‘금제’와 관련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서 장위 지역이 등장한다. 경성 십리 안팎의 경계가 되는 하천이나 강과 관련된 지명들이 나오는데, 동쪽 경계 지역과 관련하여 대보동大菩洞·수유현水踰峴·우이천牛耳川·상하벌리上下伐里·장위송계교長位松溪橋에서 중량포中粱浦에 이르기까지 하천으로 한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서 장위리 지역에 송계교松溪橋라는 다리가 있었고, 이 다리가 당시 한성부의 경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성부 10리 위치의 하천과 강으로 경계를 삼고 안쪽에 무덤 쓰는 것을 금지하였고, 경성 10리의 산을 경계로 삼은 사산금표四山禁標 안에서는 소나무를 베거나 땅에서 나무 뿌리, 잔디 뿌리, 토석土石을 채취할 수 없도록 하였다. 송계교 근처의 지명을 송계松溪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연행훈지록燕行塤篪錄』을 쓴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이 이 곳에 살았다고 한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그의 증조부이며,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넷째 아들이다. 1681년(숙종 7년)에 24세의 나이로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계에서 전원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장위리의 위치를 고지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1751년(영조 27년) 반포된 『어제수성윤음御製守城綸音』의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에서 확인된다. 이 지도에서 5부 43방 328계 중 하나 였던 장위리를 찾아볼 수 있다. 성곽 동쪽 바깥의 안암동 오른편 산줄기 너머에 같은 남북 방향으로 물줄기가 있고, 물줄기 바깥으로 다시 이를 둘러싸는 산줄기가 있는데 여기에 우장현雨藏峴이 있었다. 그리고 우장현 너머에 장위리長位里가 있는데, 지도상에서 가장 외곽이 되는 곳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중 정조 12년(1788년)에는 각 부의 방과 계의 이름을 새로 정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 장위리계가 인창방仁昌坊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에 행정구역을 정비하게 된 이유는 머리에 가체 얹는 것을 금지하는 절목을 반포해 시행해야 했었는데時頒行禁髢節目, 각부各部에 계만 있고 방이 없거나有契無坊, 방만 있고 계가 없는 곳有坊無契이 있었으므로 그 이름을 정하게 된 것이었다. 이 지역들은 대부분 성외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 보이는데, 앞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보면 성외지역들은 방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장위리계長位里契는 동부의 여러 방坊 가운데 인창방仁昌坊에 속하게 되었다. 참고로 말하면 안암리계安巖里契와 종암리계鐘巖里契는 숭신방계崇信坊契에 소속되게 되었다. 그런데 이보다 2년 전인 정조 10년(1786년)에는 장위리에 사는 사람들이 관련된 기사를 통해서 ‘동부 장위리’라는 표현이 『일성록』에서 사용되고 있어서 의문이다. 장위리가 동부에 소속되는 구체적인 시기가 1788년보다 앞선 일이 되기 때문이다. 같은 날 기사에는 서부의 공덕리와 관련한 내용이 함께 등장한다. 공덕리는 서부 용산방에 속하는 용산방 공덕리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을 보면 방이라는 명칭이 자주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08년(순조 8년)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도 장위리계는 제기리계祭基·전농리계典農里契·벌리계伐里契·중량포계中粱浦契·능동계陵洞契·가오리계加五里契·안암계安巖契·우이계牛耳契·사아리계沙阿里契·청량리계淸凉里契·수유촌계水逾村契 등의 성외지역과 함께 어영청御營廳의 영전營前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상황과 달라진 것이 없다. 한편 고종대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기록을 통해서 당시 장위리 지역에 살고 있었던 주민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고종 22년(1885년) 장위리계長位里契에서는 이소회李所回라는 사람이 초가 8칸 중 3칸이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고, 한도창韓道昌이라는 사람이 초가 10칸 중에 5칸이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잇으며, 8년 후인 고종 30녀(1893년)에는 박인서朴仁瑞라는 주민이 비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근대 이후의 장위동 1910년에 한성부는 경성부가 되었다. 장위동은 1911년 경성부 인창면仁昌面에 속했었다가 1914년 4월 1일부터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으로 편입되면서 경기도가 되었다. 장위동이 다시 서울로 편입된 시기는 1949년 8월 13일이고, 서울특별시 구역이 확장 변경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성북구가 새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장위동이 성북구 내 숭인출장소崇仁出張所에 속하게 되었다. 1950년 3월 15일 장위리長位里는 장위동長位洞이 되었다. 그 중간에도 경성의 관할구역이 대폭 확장되는 시기가 있었는데 1936년이었다. 관할구역이 무려 4배 가까이 증가하였다고 한다. 고양군·시흥군·김포군의 일부가 경성에 편입되었는데, 북동쪽은 중랑천中浪川이 경계가 되었다. 그래서 중랑천의 바로 왼쪽 동네인 회기동, 휘경동, 이문동 등이 고양군에서 경성에 속하게 되었다. 이들 지역과 복쪽으로 인접한 월곡리·석관리 그리고 장위리 등은 경성의 바로 바깥쪽에 해당하였다. 비록 경성의 바깥쪽이었지만 장위동과 그 주변 지역에서는 1930년대 말末 큰 변화의 바람이 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939년에 개통된 결춘철도와 관련이 있었다. 경성의 성동역城東驛에서 출발하여 춘천역春川驛에 도착하는 철도였다. 성동과 춘천 사이에는 고상전-월곡-연촌-묵동-태릉-갈매-퇴계원-사릉-금곡리-평내-마석-대성-청평-산천-중색-가평-서천-백양리-강촌-의암-신남-성산 등 22개 역이 있었다. 이중 성동역부터 퇴계원역退溪院驛 사이 구간은 전기를 이용하고 30분마다 운행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철도와 인접한 지역인 장위리가 새로운 주택지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었다는 것이다. 결국 1939년의 경춘철도 개통은 1950년 장위동 탄생의 전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확장된 장위동 1970년 5월 18일 장위동이 1동과 2동으로 분리되었고, 1977년 9월 1일에는 다시 3동까지 나누어지게 되었다. 장위동 토박이 주민들은 장위 1동 지역이 새로 만들어진 곳이고, 장위 2동 지역이 원래부터 있었던 마을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1975년 분동과정에서 원래부터 있었던 마을이 1동이 되지 않고 2동이 되었다는 점에 의문이 생긴다는 주장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 주민들은 장위1동을 신장위동으로, 장위2동과 3동을 구장위동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1980년대 초반의 장위동 주택들은 대부분 신흥주택으로 한옥과 양옥이 반반이었다고 하며 도로변은 상가가 즐비하게 들어섰고 토착주민이 많은 편이라고 하였다. 또한 주민들의 생활은 중류 정도이며, 매우 순후하며 친절하고 거리와 골목 등이 깨끗한 편이라고 하였다.
  • 장위동의 마을 장위동의 자연부락에는 웃말, 아랫말, 간대마을, 명덕굴(명덕동明德洞), 활량(한량)리 등 5개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웃말은 윗마을이라는 뜻으로서, ‘남녕위재사’ 한옥이 포함되는 지역으로서 장위2동 일부와 장위3동 일부 지역이 해당된다. 아랫말은 아래 마을이라는 뜻으로서, 장석시장이 포함되는 장위 3동 일부 지역이 해당된다. 간대말은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3동 경로당과 파출소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명덕굴은 명덕고을이라는 뜻이고, 장곡초등학교가 포함되는 장위1동 지역이다. 윤용구의 친형이 이곳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활량리는 한량閒良리를 발음하여 부른 표현인데, 장위시장이 포함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이곳에 술집이 많아서 도성 한량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에 기인하는 명칭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지도로 확인되는 지명은 명덕동과 활량리閑良里가 있다. 명덕동은 궁동宮洞 바로 아래쪽에 씌여있는 경우가 많고 한량리는 경춘철도가 지나는 철로의 바로 위쪽으로 인접하여 석관리石串里 반대편에 표기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장위리는 보통 명덕동과 한량리 중간에 위치하도록 표기된 경우가 보통이다.
  • 장위동 동명의 유래를 두고 두 가지 이야기가 들려온다. 고려시대 명신이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는 마을 뒷산 이름이 장위산獐位山이어서 이를 따라 장위동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전해오는 이야기들에 대한 구체적 증거는 찾을 수 없다. 뒷시기의 일이지만 장위동에는 조선 말 이조판서를 지냈던 윤용구尹用求(1853~1939)가 살기도 했다. 윤용구는 석촌石村 · 해관海觀 · 수간睡幹 · 장위산인獐位山人 등의 아호를 사용했는데 이 중 장위산인은 바로 장위동, 혹은 장위산을 염두해 둔 것이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5-16쪽
  • 한성부 동부 장위리계 지명의 유래는 고려시대까지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장위동長位洞 혹은 장위리長位里라는 지명은 조선후기의 기록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영조 연간에 작성한 지도인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를 보면 장위리는 성저십리까지를 아우르는 도성의 동쪽 경계지역 중 한 곳이었다. 사산금표는 조선 왕실에서 도성 가까운 곳에 백성들이 장지葬地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했던 구역이다. 사산금표도에 나온 설명은 아래와 같은데 도성의 동쪽 경계는 대개 우이천과 중랑천을 기준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경성 10리 안에 동쪽은 대보동(大菩洞)ㆍ수유현(水踰峴)ㆍ우이천(牛耳川)ㆍ상하벌리(上下伐里)ㆍ장위(長位)ㆍ송계교(松溪橋)에서 중량포(中梁浦)에 이르기까지 하천으로 한계를 삼으며, 남쪽은 중량포 전관교(箭 串橋)ㆍ신촌(新村)ㆍ두모포(豆毛浦)에서 용산(龍山)에 이르기까지 하천과 강으로 한계를 삼으며, 북쪽은 대보동ㆍ보현봉(普賢峯)ㆍ저서현(猪噬峴)ㆍ아미현(峨嵋峴)ㆍ연서구관기(延曙舊館基)ㆍ대조리(大棗里)에서 석관현(石串峴) 서남쪽 물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산 등으로 한계를 삼으며, 서쪽은 석관현ㆍ시위동(時威洞)ㆍ사천도관(沙川渡串)ㆍ성산(城山)ㆍ망원정(望遠亭)에서 마포(麻浦)에 이르기까지 하천과 강으로 한계를 삼아서 그 안에 입장(入葬)하는 자는 원릉(園陵)의 수목을 도벌(盜伐)한 형률과 같이 논죄하며, 강제로 시일을 정하여 파 옮기고 능침의 화 소(火巢)나 외안 금표(外案禁標) 안에 투장(偸葬)한 자는 사형을 감하여 정배한다.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 (규장각 소장 古軸 4709-88). (서울역사편찬원 편, 『서울 洞의 역사 : 성북구』 4, 서울역사편찬원, 2018, 215쪽에서 재인용))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 이밖에 조선후기 조정에서 활동했던 관료들이 장위리에서 머물렀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다. 숙종 연간의 기록을 보면 임금이 장위리에 머물고 있는 정승 이이명李頤命(1658~1722)과 김창집金昌集(1648~1722)을 수차례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 연간에 정승을 지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 또한 장위동 일대에 별업別業을 짓고 머물렀다. 조선왕조의 관찬사료와 그들의 문집들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조선후기 장위리에는 이들 말고도 다수의 중앙관료들이 별업을 짓고 머물렀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7-18쪽
  • 관청이나 중앙 관료 외에도 조선후기 장위리에 사는 백성의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 기록도 있어 주목된다. 아래에 인용한 1725년(영조 1) 9월 『승정원일기』를 보면 장위리 백성들이 담당했던 국역國役은 인근 의릉懿 陵과 관련된 역으로 중량포, 청량리 사람들과 함께 부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방이 한성부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예조에서 보내온 공문을 받아 보니, 능 밑에 사는 중량포(中浪浦), 장위리(長位里), 청량리(淸凉里) 민호(民戶)의 역을 견감해 주는 일이었는데, 수릉관(守陵官)의 장계로 인하여, 능내(陵內)에서 철거된 경우 중량포의 민호에 대해서는 제반 방역(坊 役)을 특별히 견감(蠲減)해 주고, 장위리와 청량리의 민호에 대해서는 3년에 한하여 방역을 견감해 줌으로써 조정에서 넉넉히 구휼해 주는 성대한 뜻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빙(藏氷)에 있어서는 중대한 국역(國役)에 관계되므로 으레 강가나 산 밑에 사는 백성이라면 사대 부 및 평상시 방역에 응하지 않는 부류를 막론하고 뽑아서 부역을 시킵니다. 그러나 중대한 국역에 비해 민호가 적기 때문에 늘 구차하고 소홀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번 세 마을의 백성에게만 장빙의 국역을 면제해줄 수 없으니, 일체 부역에 나가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 니다. 이런 내용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601책, 영조 1년 9월 24일(무오). (서울역사편찬원 편, 『서울 洞의 역사 : 성북구』 4, 2018, 216~217쪽에서 재인용))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8쪽
  • 영조와 정조 연간 한성부의 인구가 증가하고 영역이 확대되면서 장위리는 한성부에 속한 행정구역의 한 곳으로 편성되었다. 1751년(영조 27)에 작성한 『어제수성윤음御製守城綸音』의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을 보면 장위동 지역은 동부東部 장위리계長位里契라는 이름으로 어영청 전영前營 소속의 성외에 포함되었다. 어영청은 훈련도감, 금위영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군영의 이름이다. 1788년(정조 12) 도성 내외의 방과 계의 명칭을 새롭게 정했는데 이때 장위리계는 역일계, 역이계, 사계, 마장리계, 답십리계, 전농리계, 청량리계, 제기리계, 중랑포계 등과 함께 동부 인창방仁昌坊에 소속되었다. 이후 제작된 여러 고지도에서는 장위리라는 지명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외 명덕동, 활량리 같은 장위리에 속한 작은 마을과 우장현, 석관현같은 고개의 이름도 더러 눈에 띈다. 1867년(고종 4)에 간행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한성부는 5부 47방 340계로 편제되었는데, 이때 장위리계는 동부 인창방이 아닌 동부 숭신방崇信坊 소속으로 편제되었다. 고종대의 『승정원일기』를 통해서 당시 장위리 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1885년(고종 22) 장위리계에서는 양인良人 이소회李所回라는 사람이 초가 8칸 중 3칸이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고, 한도창韓道昌이라는 사람이 초가 10칸 중 5칸이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으며, 8년 후인 1893년(고종 30)에는 양인 박인서朴仁瑞가 비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9쪽
  • 장위동은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방이 강행된 후인 1911년에 한성부를 개칭한 경성부 인창면에 편입되었으며, 다시 1914년 4월 1일을 기하여 전국의 부군면을 자의로 통폐합할 때 장위동은 성 외外 지역에 해당된다 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편입되었다. 일제강점기 장위리는 비록경성의 바깥쪽에 있는 농촌 지역이었지만 1930년대 말 변화의 바람을 맞기도 했다. 그것은 1939년에 개통된 경춘철도와 관련이 있다. 경춘철도는 지금의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었던 성동역과 강원도의 춘천역을 잇는 철도였다. 성동과 춘천 사이에는 고상전-월곡-연촌-묵동-태릉-갈매-퇴계원-사릉-금곡리-평내-마석-대성-청평-상천-중색-가평-서천-백양리-강촌-의암신남-성산 등 22개 역이 있었다. 이 가운데 월곡역과 연촌역을 잇는 철도는 지금의 화랑로와 광운대역 일대를 통과했으므로 항간에서는 철도와 연접한 장위리가 새로운 주택지가 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따라서 1939년 경춘철도의 개통은 1950년대 이후 장위동 일대가 주택지로 개발되는 전조였다고 할 수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21-22쪽
  • 장위리는 1949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 구역이 확장되고 성북구가 만들어지면서 다시 서울로 편입되었다. 1950년 3월 15일 장위리에서 장위동으로 명칭이 개정되었고, 1955년 4월 서울특별시조례 제66호 「동 설치조례」에 따라 법정동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석관동과 합쳐 장석동이 설치되었다. 1970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13호에 따라 동의 관할구역을 조정하면서 법정동과 행정동의 명칭을 통일했다. 이로써 장위동과 석관동이 분리되고, 장위동에는 행정동 장위1동과 장위2동이 설치되었다. 이후 1977년 9월 1일 다시 3동까지 나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언뜻 보기엔 장위1동이 장위2동보다 더 오래된 동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분동될 당시 주민들은 장위1동을 신장위동, 장위2동과 3동을 구장위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위동의 서쪽 고지대에 위치한 장위1동 지역은 1950년대까지만 해 도 산비탈 지역으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곳이었지만 1960년대 동방생명에서 땅을 매입하여 신흥주택지로 개발하였기 때문이다. 장위2동과 3동은 편평한 저지대로 조선시대부터 마을들이 자리한 곳이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22쪽
  • 장위동 · 석관동 마을과 민속의 특징 장위동과 석관동에는 아직까지 이중계里中契, 마을 주민들의 유대, 상호부조, 공동재산 등으로 대변되는 마을공동체적 특징이 남아있다. 이는 도시 민속에서 중요한 연구 항목으로, 이 특징이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배경과 현황 파악이 중요하다. 때문에 이를 위하여 장위동과 석관동 사람들의 삶 자체, 즉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고, 어떤 공동체적 유대를 가지고 어떤 풍속을 지키며 살아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동 연혁을 살펴보면, 장위동과 석관동이 서울로 편입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895년 갑오개혁 때는 한성부 동서東署 인창방 동소문외계에 속하였고, 1910년 10월 1일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예속시키면서, 이듬해 4월 1일 경성부 성외 지역에 8면제를 시행할 때 장위동, 석관동은 경성부 인창면에 편입되었다. 또 1914년 4월 1일 경성부 구역을 축소할 때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에 속하여 광복 때까지 계속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 확장될 때 장위동과 석관동은 서울시로 재편입되어 성북구에 속하였다. 명칭도 장위리, 석관리로 불리다가 1950년 3월 15일 동명 개정이 있을 때에 와서야 비로소 장위동, 석관동이 되었다. 현재 장위동은 1, 2, 3동이 있고, 석관동은 1, 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다시 석관동으로 통합되었다. 자연마을을 살펴보면, 장위동에는 웃말, 아랫말, 멍덕굴, 간대마을, 활량리 5개 마을이 있었고, 석관동에는 푸석골이 있었다. 석관동은 일제강점기에 와서 인구가 늘어나 윗말, 아랫말로 나뉘었고 마을 사람들은 마을 이름보다는 그 마을이 속했던 행정구역 1구, 2구로 호칭한다. 이런 마을들에 세거성씨들도 살았는데 잘 알려진 성씨가 바로 장위동 해평 윤씨다. 남녕위 윤의선尹宜善(1823~1887), 장위산인 윤용구尹用求(1853~1939)로 대변되는 장위동 해평 윤씨는 윤의선 대에서 시작하여 3~4대정도 이 곳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나 마을사람들은 더 오래 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석관동에는 푸석골에 여흥 민씨 집성촌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관련 기록이 전무한 상태다. 진주 강씨 역시 석관동에서 오래된 성씨 중 하나이다. 고조高祖대부터 들어와 살았다고 하니 지금까지 대략 6~7대 정도 이어져 내려온 셈이다. 장위동, 석관동은 5, 60년 전까지만 해도 넓은 벌판에서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네에는 암암리에 소를 도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5, 60년 전까지만 해도 도당제의를 올렸고, 여름엔 대동놀이, 정월엔 윷놀이를 했었다. 잔치나 상이 났을 때는 동네에서 다 함께 도와주었고, 마을 공동체조직인 이중계가 존재하여 마을 공동재산을 관리하고, 상부상조하며 마을의례를 조직했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52-153쪽
  • 자연마을과 세거 성씨들 장위동 마을은 생업에 종사하는 민중들이 살아가는 최소 단위의 공동체 문화 기반이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장위리와 석관리에는 자연마을이 존재했었다. 좌측의 지도는 장위리와 석관리에 있던 마을 위치를 성북구 도로명 주소 지도에 표기해 놓은 것이다. 본 마을 위치 지도는 토박이들의 구술과 조선총독부 토지조사부에 근거하여 작성하였다. 당시 장위리에는 웃말, 아랫말, 멍덕굴, 간대말, 활량리 등 5개 마을이 있었다. 멍덕굴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개 마을들은 웃말을 중심으로 낫과 같은 모양을 이루었다고 한다. 윗말은 장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남녕궁南寧宮’이 있는 마을이기도 한 윗말 앞에는 ‘궁논’이 있었다. 조선총독부 토지조사부에 보면 이 ‘궁논’은 윤용구의 소유로 되어있다. ‘남녕궁’에서 바라보이는 서쪽, 지금의 돌곶이로에 윤대감의 묘가 있었다. 이 묘는 1960년대 초반에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윗말은 장위3동 일부와 2동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아랫말의 현재 위치는 장위3동에 해당된다. 지금은 복개되었으나 당시에는 흐르는 냇물이 있었고, 냇물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여 ‘수멍텅’이라고도 불렸다. 이 냇물은 모여서 한내, 즉 지금의 중랑천으로 흘러갔다. 아랫말은 당시 장위리의 제일 끝 마을로서 현재 온누리병원 북쪽 길 아래로 아랫말이었고, 남쪽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석관동과 마주하고 있다. 간대말은 장위리 한가운데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위치는 장위3동에 해당하며. 한천로를 따라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즉 한천로 94길과 한천로 90길이 만나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한천로 83길과 만나는 지점까지 그 사이의 지역이 간대말이었다. 멍덕굴은 명덕고을의 와전된 말로, 주민들은 이곳에 윤용구의 형이 살았고 또 그 윗대부터 이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윤용구 집안의 높은 뜻과 행동을 기리는 의미에서 ‘명덕明德’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현재 장위1동에 해당하며 장곡초등학교 서북방향에 있는 마을로 조선총독부 토지조사부에는 윤용구 형의 아들 윤헌영尹獻榮의 소유로 되어있다. 멍덕굴은 장위리 중에서도 하나의 섬처럼 되어 있던 곳으로서 이곳에는 무당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장위리에서는 도당제를 매년 지냈다고 하고 이 지역은 장위리 지역보다 가구 수가 많지 않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활량(한량)은 한량리閑良里의 와전된 음으로 조선시대 이 마을에 술집이 많아 도성 한량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 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장위2동에 해당하며 현재 장위2동 주민센터 앞거리, 즉 돌곶이로 27길, 28길을 기준으로 그 북쪽에 형성되어 있던 마을로 돌곶이로30가길을 중심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 1912년에 작성된 『고양군 숭인면 장위리 토지조사부』에 의하면 장위리에는 윤씨, 최씨, 우씨, 한씨, 박씨, 김씨, 이씨 등 성씨가 거주하면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중 윤용구와 그의 조카 윤헌영尹獻榮의 토지가 많았는데, 윤용구만 하더라도 밭 38,351평, 논 26,266평, 대지 27,736평, 임야 760평, 늪지池沼 311평, 분묘지 549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윤용구의 거주지는 경성부 북부 가회방 제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같은 거주지를 쓰고 있는 큰아들 윤건영尹建榮은 장위리에 밭 225평만 소유하고 있었다. 윤용구의 둘째 아들로 그의 친형 윤정구尹定求의 양자로 보내진 윤헌영은 거주지가 장위리로 되어있고, 밭 15,096평, 대지 6,403평, 논 4,588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해평 윤씨는 언제부터 장위리에 들어왔을까? 장위리 토박이 우덕수 씨는 단양 우씨가 장위리에 들어온 후로 본인이 7대째라고 한다. 또 어른들에게 전해 듣기로 해평 윤씨가 단양 우씨보다 한 세대 먼저 들어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단양 우씨는 대략 18세기 말, 해평 윤씨는 대략 18세기 중반 정도에 장위리에 들어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해평 윤씨대동보』에 의하면, 22대 윤의선尹宜善은 분묘지를 장위리에 쓰고 있고, 윤회선尹會善 및 그의 윗대는 대부분 장단長湍군에 분묘지를 두고 있다. 그리고 23대인 윤정구, 윤용구, 24대 윤헌영, 윤건영은 모두 장위리에 분묘지를 두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았을 때 해평 윤씨가 장위리에 들어오게 된 것은 부마 윤의선 때부터였으며 그 아래 23대, 24대를 거쳐 거주했을 것으로 짐작되나, 장위동 토박이들의 이야기와 시기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어 좀 더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해평 윤씨 후손들은 1960년대에 와서 모두 땅을 팔고 나갔다고 한다. 『고양군 숭인면 장위리 토지조사부』에는 또 다른 윤씨들이 나온다. 이를테면 윤석기尹錫起, 윤석린尹錫麟, 윤규원尹奎遠, 윤홍원尹弘遠, 윤윤근尹允根, 윤경식尹景植 등이다. 이들도 윤용구와 같은 집안이었을까? 애석하게도 그들 이름은 해평 윤씨 항렬자行列字를 따르지 않는다. 때문에 이들은 같은 해평 윤씨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덕수 씨는 장위리에 해평 윤씨 말고도 또 다른 윤씨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해평 윤씨보다는 적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윤의선이 장위동에 들어온 것은 부인인 덕온공주와 관련있다. 장위2동 76-56번지에 위치해 있는 김진흥가는 조선 말 순조의 넷째 딸 덕온공주(1822~1844)의 묘가 근처에 들어선 후 그 옆에 지어졌다고 알려졌다. 또 윤의선의 소유였으므로 정식 당호는 ‘남녕위재사’였다. 짧게 ‘부마가옥’으로 불린 이 집은 부마의 아들 윤용구가 갑오개혁 이후 들어와서 장위산인이란 별호를 달고 기나긴 은거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이렇게 보았을 때 당시 윤용구는 경성부 북부 가회방 재동에 거주지를 두고 ‘남녕위재사’에서 은거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풀이된다. 1960년경부터 해평 윤씨 집안에서 분묘지를 이장하고 땅을 매도하기 시작했고, 이 기회를 타서 사람들이 땅을 사서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택지가 되어 현재는 많은 주택이 밀집되어 있는데,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큰 동네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라고 한다. 여기에서 잠깐, 조선시대 양자 관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위에서 서술했다시피 친형제 사이었던 윤정구와 윤용구는 양자관계로 얽혀 있다. 당시 조선시대에는 가계계승을 최우선 목적으로 양자를 입양하여 양부가 갖고 있는 모든 권리, 즉 혈통과 경제적 재산, 사회적 신분까지 물려주었다. 때문에 양자의 양부와 친부는 동성동본을 원칙으로 삼았다. 윤정구와 윤용구의 생부는 윤회선이다. 즉 윤정구는 윤용구의 친형이다. 윤회선과 윤의선은 동성동본 18촌 사이로, 그들의 관계는 해평 윤씨 윤두수의 아들 13대 방昉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윤두수尹斗壽의 큰아들 방昉은 두 명의 아들 리지履之와 신지新之가 있었는데 이 두 아들로부터 직계로 22대까지 내려오면 회선, 의선이 된다. 윤의선은 회선의 둘째 아들 윤용구를 양자로 삼게 되고, 회선의 큰아들 정구는 윤용구의 둘째 아들 헌영을 양자로 삼게 된다. (160쪽 표 참조)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57-160쪽
  • 공동체적 특성을 반영하는 이중계와 개별 친목계 마을공동체 조직, 이중계와 향우회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일상 의례, 공동 행사, 공동 노역을 통해 결속된 자신들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마을 조직들은 시대와 사회구조에 따라 명칭과 성격은 달리하지만, 오랜 전통을 가지고 발전해 왔다. 동계洞契는 그 중 중요한 전통조직이다. 통상 전근대 시기에 해당하는 ‘전통적’ 조직으로 인식되는 동계는 최초에는 재지사족을 중심으로 향촌을 지배하고 교화할 목적으로 형성되어 상하합계上下合契 방식으로 행해졌다. 그 후 점차 왜소화되어 양반만의 상호부조적인 결사체로 되거나 관官의 하부구조로 재편되고, 자연촌 단위에서는 기층민을 중심으로 촌계류村契類 조직들이 나와 실제적인 촌락 운영을 담당하였다. 이중계里中契는 바로 이런 촌계류村契類 조직 중 하나로 마을 단위로 조직된 계조직이었다. 현대에 와서 도시 속에 존재하는 이중계는 이런 촌계류村契類 조직의 많은 기능이 쇠퇴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서술했다시피 장위동 지역은 웃말, 아랫말, 멍덕굴, 간대마을, 활량리 등 5개의 자연마을이 합쳐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옛 마을들은 이미 사라져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나 마을을 유지시키던 마을공동체조직은 아직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2018년 4월 필자가 성북구를 조사할 때만 하더라도 웃말, 아랫말, 활량리에 모두 이중계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2019년 현재는 마을소유의 건물이 재개발구역에 들어가 보상받음으로써 활량리와 아랫말은 이미 이중계가 해체된 상태다. 지금 장위동에 이중계가 남아있는 곳은 오직 웃말뿐이다. 장위동 활량리 이중계는 예전부터 이어져 오던 마을 단위 계 조직이었다.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결성된 이중계는 장자들만이 회원 자격을 가진다. 마을소유의 건물17을 임대하여 생긴 임대료 및 회원들이 낸 회비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마을소유 건물이 재개발구역에 들면서 지금은 회원들이 보상을 받고 활량리 이중계를 해체했다고 한다. 활량리 이중계에서는 해체 이전까지 ‘영좌領坐’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옛날에는 이중계 추봉秋捧 날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쌀을 거둬서 영좌나 소임에게 쌀 얼마씩 지급을 했는데 이 전통은 해체되기 전인 2018년까지도 이어졌다. 상달 추봉 날이 되면 동네잔치를 열고 영좌에게 70만원 정도 지급한다. 그러면 영좌가 그 돈을 소임과 나눈다. 영좌는 예전에는 동네 제일 어른이 맡았었는데, 지금은 젊은 사람도 영좌를 맡는다. 그래도 나이와 상관없이 영좌를 맡으면 ‘동네어른’ 칭호를 받는다. 영좌 이야기 한마디면 누구도 거역할 수가 없다고 한다. 2018년 성북구 조사에서 이중계 총무를 여러 차례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가 없어 문서를 확보하지 못했다. 활량리 향우회는 이중계와는 달리 마을 토박이들의 타지 이주가 잦아지면서 조직된 토박이 계모임이다. 장자 여부와 상관없이 활량리 토박이면 회원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예전에 이중계에 가입할 수 없었던 차자次子 이하도 가입이 가능하며, 장자들은 이중계와 향우회에 동시에 가입되어 있다. 「향우회규약」에서는 토박이 기준을 처음에는 1953년 이전 활량리 출생자로 국한시켰다가, 그 후 연로한 회원들이 사망하면서 1962년 이전 출생자로 자격을 늘렸다. 또 젊은 사람들을 회원으로 들이기 위하여 그 부모가 1962년 이전 활량리 출생자이면 직계 자손에게도 회원자격을 부여하도록 바꿨다. 향우회는 월회비 및 정기예금 이자 등 금액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처럼 향우회 회칙도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쳤는데 원래 회원들이 사망하면 지분을 ‘태워주던(지분을 나누어주는 것을 의미)’ 것에서 2008년에 회칙을 개정하면서 75세가 되면 지분을 태워주고 회원자격은 유지시켜 주는 것으로 바꿨다. 그 원인은 살아있을 때 본인이 부은 지분을 사용하라는 취지에서라고 한다. 또 2016년에는 젊은 사람들이 신규 회원 가입을 원할시는 지분을 내고 가입해야 하는 원래 조항을 바꿔 회비만 납부하도록 개정하였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62-165쪽
  • 공동체적 특성을 반영하는 이중계와 개별 친목계 개별 친목계 계는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자발적인 참여와 합의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든 비교적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모임이다. 한국인들에게 친목계는 아주 익숙한 단어로 한국사회에는 다양한 계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위에서 서술한 마을단위의 친목조직인 이중계 외에도 장위동, 석관동에는 다양한 목적계, 공동노동을 위한 계, 목돈 마련을 위한 계들이 존재했었다. 이런 계들의 공통의 특성은 ‘모여서 함께 하다’이며, ‘함께 모일 때 생기는 힘’, 즉 ‘공동체적 힘’은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바이다. (중략) 상인들만의 개별 친목회로 장위시장의 우정친목회를 들 수 있다. 이 친목회는 장위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로 회원 요건을 정하고, 회원 간의 상부상조와 친목 도모를 주 목적으로 한다. 1990년에 설립되어 29년째 유지되고 있다. 초창기에 30명이 가입되었다가 이사 등 변동으로 인하여 장위시장에 남아있는 사람이 12명 정도 된다. 외부에 이주한 후에도 계속 친목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까지 합치면 현재 회원은 총 24명이다. 우정친목회는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데, 모임 때 회비조로 한 달에 2만원씩 4만원을 낸다. 경조 시는 상미上米 3가마, 또는 해당 년에 정하는 금액에 따라 전달하며, 회원 당 2회로 한정한다. 주로 1년에 한번 야유회를 간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66-167쪽
  • 공동체 관행과 놀이 공동체 관행과 탈관 풍속 마을 공동체 조직인 이중계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옛 마을을 떠올리게 하고 민속을 지속시키는 주축이 되었다. 장위동과 석관동 모두 5, 60년대만 하더라도 초상이 나면 다른 농촌과 마찬가지로 마을주민 모두가 간단한 술 등을 사서 부조하였고, 부인들은 상가에 모여 청량리시장에서 사온 베로 밤새 상복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주해 온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상포계를 조직하여 초상 때 태우는 일도 있었으나 예전 마을에서는 주로 이중계가 상포계 역할까지 담당했다. (중략) 장위동, 석관동 지역 사람들은 예전에 주로 탈관을 했었다고 한다. 탈관은 상례에서 시신을 넣어 장지까지 운반한 관을 매장 직전에 제거하는 풍습으로 경기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탈관을 하는 이유는 시신이 흙과 닿아 고르게 부패하기를 바라는 관념에서 생긴 풍습이라고 한다. 탈관은 보통 시신을 모실 광중壙中(구덩이 속)을 내광과 외광으로 구분하여 파는데, 내광은 시신의 체형에 맞추어 시신의 형태와 비슷하게 파고, 외광은 네모반듯하게 직사각형으로 판다. 하관은 관을 광중 앞에 안치하고 관뚜껑을 열고 시신만을 무명으로 한 들끈을 잡고 조심스럽게 광중으로 내린다. 하관이 끝나면 맏상주가 폐백을 올리고 홍대를 덮는다. 장위동에서는 홍대는 한번만 덮는다. 그런 후 맏상주가 첫 삽을 파서 관 위에 뿌리는 취토를 한다. 취토가 끝난 후 광중을 메우는 달구질을 하는데 달구질을 회다지라고도 한다. 장위동에서는 회와 흙을 번갈아 가며 세 번 정도 덮으면서 다진다고 한다. 그렇게 외광을 완전히 메우고 나서 봉분작업을 한다. 장위동 토박이 우덕수 씨는 윤대감묘 이장 때 처음으로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입관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74-175쪽
  • 세시풍속과 놀이 가설극장 70년대에 들어와서 장위동에 대동극장, 석관동에 이문극장이 세워졌다. 이 두 극장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마을사람들이 주로 천막을 친 가설극장을 이용했다. 이 가설극장의 위치는 대략 지금의 장위동 사랑제일교회 근처였다. 영화 한 번 보는데 그 당시 50환 정도 받았다고 한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77쪽
  • 세시풍속과 놀이 어린 시절 놀이 어린 시절 놀이로는 박쥐 잡이, 쥐불놀이, 자치기, 개구리 잡이, 낟가리 놀이 등이 있었다. 쥐불놀이는 정월 들어 첫 번째 드는 쥐날, 즉 상자일上子日이나 대보름날 밤 농촌에서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불을 놓는 민속놀이다. 장위동 토박이 우덕수 씨도 어린 시절 논두렁에 가서 깡통에 솔방울 같은 것을 넣고 불을 붙여 휙휙 돌리면 아주 보기 좋았던 기억이 있다고 하였다. 개구리 잡이는 여름철에 남자아이들이 주로 노는 놀이였다. 개구리는 주로 논에 가서 잡았는데 철사로 삼지창을 만들어 개구리를 잡았다고 한다. 개구리 다리는 꼬챙이에 껴서 구워먹었고, 몸통은 통에 넣어 팔았다고 한다. 당시 장위동에는 닭장(양계장)이 많아 개구리를 사료로 썼는데, 한 통 잡아 팔면 20환을 받을 수 있었다. 낟가리 놀이는 가을 벼 수확 후 아이들이 즐겨 노는 놀이 중의 하나다. 가을 벼 수확 후 논두렁에 낟가리를 둥그렇게 쌓게 되는데, 장위동 지역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볏단을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어른들 몰래 쌓아놓은 낟가리 중 한 두 개 짚단을 빼내고 그 속에 들어가 놀곤 했었다. 낟가리가 바람을 막아주어 그 안은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박쥐 잡이는 동네 아이들의 또 하나의 놀이었다. 윤대감 묘가 남녕위재사에서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주변에 돌로 축대를 쌓고 기와를 얹었다고 한다. 그 기와 속에 낮에는 박쥐가 들어가 있다가 밤에는 날아다녔는데, 날아다니는 박쥐를 잡는 것은 동네 아이들의 또 하나의 놀이였다고 한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78쪽
  • 생업과 시장 농업 강북구 우이동 도봉산 기슭에서 발원한 우이천은 예전에는 소근내라고도 불렀는데, 장위동과 노원구 경계를 지나 석관동을 거쳐 중랑천, 즉 한내에 흘러든다. 석관동은 중랑천이 중랑구와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고 있고, 중랑천의 지류인 우이천이 석관동 동북쪽을 흘러 지난다. 그래서 장위동, 석관동 곳곳에 우이천,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시냇물이 얼기설기 흘러 지난다. 이는 논농사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 또 석관동에는 천장산, 장위동은 장위산 일부분이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천장산 밑은 전곡田穀의 산지였다고 한다. 천장산에 의릉이 들어서면서 천장산 밑에서 살던 마을사람들은 밀려나 지금의 위치로 이주해 오게 되었고 이 마을은 돌곶이능말이라고 불렸다. 능말이라고 해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주업은 여전히 농업이었다. 이는 『승정원일기』 1725년(영조1) 8월 27일(임진)에서도 잘 나타난다.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아무런 차이 없이 똑같이 보살펴야 할 백성이지만, 본주의 경우에는 능침이 있는 곳이니, 별도로 돌보아 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 게다가 이제 막 산릉의 큰 역사를 겪었기에, 오늘 능행으로 인하여 교외에 나오게 되었으므로 본주의 연로한 백성들을 불러 대령하게 한 것이니, 민폐에 대해 진달할 것이 있으면 상세하게 진달하도록 승지는 말을 전하라.” 하니, 백성들이 아뢰기를, “본주는 연이어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살아갈 길이 없었는데, 올해는 적당하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농사가 다소 풍작이어서 살아갈 가망이 있을 듯합니다. 다만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군향미로 이전하는 수량이 제법 많으니, 지금 다소 풍작이 든 농작물을 북한산성에 죄다 봉납한다면 그 폐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본읍에 봉류(捧留)하고서 그대로 군향미로 삼기를 바라니, 그렇게 한다면 온당하고 편리한 일이겠습니다. 병신년(1716, 숙종42) 이후로 각종 미납분이 해마다 많이 적체되고 있으니, 또한 바라건대 전부 다 탕감하여 본주의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혜택을 입을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리고 본주는 12능침이 봉안되어 있는 곳으로 땅도 넓고 사람도 많아 사체가 자별(自別)함이 다른 읍에 비할 바가 아니니, 또한 바라건대 독진(獨鎭)을 설치하고 과거를 설행하여 인재를 뽑는 규례도 수원(水原)이나 광주(廣州)의 예대로 특별히 거행해 주소서. 이것이 진실로 백성들의 바람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풍년이 들었다고 해도 농사를 지은 수확량의 대부분을 북한산성의 군향미로 내야 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던 이곳 사람들은 그리 풍요롭지 않았던 듯하다. 장위동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양주밥 먹고 고양굿 한다”는 말은 농토는 양주에 두었고 고양에서 거주하므로 식생활은 양주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장위리는 고양군에 속했고, 그 주변 지역인 망우리, 노원, 도봉, 우이 등 대부분 지역이 양주군에 속했던 지역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이 지역 주민들 대부분은 농민이었고 살고 있는 지역에서 땅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웃 마을까지 가서 땅을 부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특산물은 없고 주로 벼, 조, 수수, 고추 등을 재배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장위동, 석관동 사람들의 주 업은 여전히 농사였다. 조선총독부 토지조사부에 의하면, 1912년 장위리 논 132,150평, 밭 93,723평에서 윤용구 및 그의 아들들이 소유하고 있는 전답은 논 30,854평, 밭 53,672평으로 전체 장위리 논 면적의 1/4, 밭 면적의 1/2정도 차지한다. 석관리는 특히 논이 많았는데, 그 면적이 장위리의 두 배에 가까웠다. 이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석관리에 대량의 전답을 점유한 것과 무관하지않다.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논 80,115평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석관리 전체 논 면적 261,529평의 1/3을 차지한다. 석관리 전체 밭 면적은 22,706평인데 그 중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밭은 6,338평이다. 조선총독부 고양군 숭인면 석관리 지적도를 보면 지금의 석관동 주민센터 서남방향에 장위동에서 석관동으로 흘러드는 시냇물이 있었다. 현재는 복개되었지만, 대략 이 곳부터 지금의 지하철 6호선 석계역 방향, 즉 동북향으로 제방이 표시되어 있다. 이 제방은 강줄기를 따라 동북쪽으로 뻗어 중랑천에 이르면 다시 중랑천을 따라 북남방향으로 제방이 표시되어 있다. 이는 당시 중랑천의 범람 방지와 논농사에 유리한 물 관리를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덕수 씨는 60년대까지만 해도 장위동, 석관동에서 논농사 짓는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뚝방 수리에 참여해야 했으며, 만약 참여하지 않으면 논 물을 공급받지 못했다고 한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79-181쪽
  • 생업과 시장 도축업 도축업은 식생활을 비롯한 기타 소비생활에서 필요한 고기肉, 기름脂, 뼈骨, 털毛, 가죽皮 등을 생산할 때 가장 우선 단계로서 동물을 도살, 해체하는 업을 말한다. 조선 후기 미아삼거리에 있는 신근솔이라는 곳은 솔밭이 많아 풍치가 수려했기 때문에 당시 이곳에 주막이 밀집하여 있었다. 지방에서 소를 몰고 서울로 들어올 때에는 신근솔에서 숙박을 하고 소를 매어 놓았다가 장위동 노변 도살장에서 소를 매도한 다음 돌아갔는데 소장사들이 달밤에 도착하여 잔월殘月 아침에 흥정했기 때문에 월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26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도살은 국가에서 허가된 곳에 한해서만 행해질 수 있었고, 도살을 하는 사람들은 백정이라고 하여 천민으로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도축업의 중심 재정원財政源인 도장屠場 경영은 관영과 사설이 있었으나 그 비중 및 양상은 일제에 의하여 수차례 변하였다. 1896년 「포사규칙庖肆規則」은 농상공부 허가를 통하여 일반인의 사도私屠 운영을 할 수 있게 하였으나, 1905년 9월 『도수장병수육판매규칙屠獸場竝獸肉販賣規則』은 도장을 관설官設로 정하여 그 경영을 관에 제한하였고 수육판매업은 관청 신고제로 정하였다. 이때 일제는 도축업의 주요 재원인 도장 경영권을 종래 시도들로부터 완전히 박탈함과 동시에 도축 관련업의 모든 수취권을 확고히 장악하였다. 1909년 8월에는 「도수규칙屠獸規則」을 통하여 허가에 의한 사설도장 운영을 하도록 다시 전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일제는 전국의 소규모 도장에 대하여 경영상 통일의 필요성과 위생 풍교시설 등의 문제를 강조하면서 강매를 통한 관영화를 계속 강행하였다. 『서울통계자료집(일제강점기편)』 ‘경성부 부근읍면 일반경제 재산명세표’를 보면 1933년 3월 말 현재 숭인면의 공용 및 공공용 재산부분에서 도장屠場 항목이 빠져 있다. 또 ‘경성부 부근읍면 1933년도 세입 세출 결산표’ 위생비 세출에서도 숭인면의 도장비屠場費 항목은 공란으로 남아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숭인면에 공설 도장이 없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2018년 민속조사에서 장위동, 월곡동, 석계동 토박이들은 해방 전까지 장위동에서 미아사거리로 가는 길에 큰 도살장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도살장은 사설 도장일 가능성이 크다. 해방 후에도 도살장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9년 한국산업은행에서 출간한 『광업 및 제조업 사업체명부』에는 하월곡동 79번지에 사장 현종玄種 씨가 운영하는 미아리도살장이 등록되어있다. 장위동 토박이 우덕수 씨는 어려서 도살장에 많이 갔었다고 한다. 그 위치가 대략 예전 중외제약 근처, 즉 창문여고 맞은편이라고 하고, 근처에는 다른 도살장이 없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동일한 도살장일 가능성이 크다. 1961년에 마장동에 ‘동양 최대 규모’의 도축장이 개장하였는데, 그 후 이 미아리도살장은 마장동으로 이전해 갔고, 소고기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으로 바뀌게 되면서 이 도살장을 기반으로 한 아교공장, 피혁공장 등도 점차 근처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공설이나 사설과는 별개로 장위동 · 석관동 지역에는 무허가 도살장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81-184쪽
  • 마을사람들은 그 당시 농사도 했고 또 암암리에 소도 잡아 팔았어요. 당시 단속이 심해서 한 곳에서 오래 하지를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했는데, 혹시라도 갑자기 형사들이 들이닥쳐 들키면 잡혀 가서 벌금을 내곤 했었죠. 한번 소를 잡으려면 다섯 명에서 여섯 명 정도 투입되었어요. 그렇게 소를 잡아 파는 사람이 무려 7~8명 정도 되었어요. 소는 주로 경기도 우시장에 가서 암소를 사요. 그러면 소를 끌어다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어요. 잡은 소는 주로 뼈째로 각을 떠서 바로 시내로 들어갔죠. 큰 시장에 들어갔어요. 여기서 나온 가죽은 가죽공장에 팔았죠. 종암동에 가죽공장이 있었어요. (석관동 강명복 씨 구술. (2018년 조사, 면담자: 류영희)) 미아리도살장 및 무허가 도살장이 있음으로 하여 장위동 근처에 마방을 운영하는 집도 있었고, 마방에서 야윈 소를 데려다가 먹여 살을 찌워 되파는 사람도 있었다. 또 도살장에서 나오는 가죽으로 생가죽장사를 하던 사람도 있었고, 가죽을 가공하는 피혁공장을 운영하는 집도 있었다고 한다. 소뼈를 끓여 접착제를 만드는 아교공장은 주로 타동 사람들이 했었는데 상월곡동 정보센터 쪽으로 한 집 있었다. 아교공장은 맥주공장이 들어오기 전에 주로 종암동에 많았다고 한다. △△△씨는 생가죽장사로 돈을 번 유명한 장사꾼 중의 한명이다. 장위동, 월곡동, 석관동 일대에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 이 지역에서는 아주 유명하고, 그 자손들이 아직도 장위동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갖바치라고 하면 자손들이 듣기 거북해 한다고 하면서 그의 이름을 알리기를 꺼려한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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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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